손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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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가망은 중류층 몰락 부농의 아들로, 1643년 장헌충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645년 서나라 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1646년 장헌충 사후 서나라 황제가 되었으나, 청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이후 남명에 투항하여 장군으로 활동했으나, 모함으로 관직을 잃고, 청나라에 투항하여 장군과 관료를 지내다 1660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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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나라의 황제 - 장헌충
장헌충은 명나라 말기 반란을 일으켜 '대서왕'을 칭하며 세력을 키웠고, 쓰촨성을 점령하여 대서국을 건국했지만 공포 정치와 학살로 악명을 떨치다 청나라 군에 패해 사망했으며, 그의 통치와 죽음은 쓰촨성에 큰 피해를 남겼고 역사적 평가는 논쟁적이다. - 명 말기의 민변 관련자 - 장헌충
장헌충은 명나라 말기 반란을 일으켜 '대서왕'을 칭하며 세력을 키웠고, 쓰촨성을 점령하여 대서국을 건국했지만 공포 정치와 학살로 악명을 떨치다 청나라 군에 패해 사망했으며, 그의 통치와 죽음은 쓰촨성에 큰 피해를 남겼고 역사적 평가는 논쟁적이다. - 명 말기의 민변 관련자 - 이정국 (1620년)
이정국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군인이자 장헌충의 양아들로, 장헌충 사후 남명에 투항하여 영력제를 옹립하고 청나라에 저항했으며, 손가망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 후 영력제의 처형 소식을 듣고 절망 속에 사망했으나, 그의 숭명반청 의지는 조선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 청나라의 제독 - 혁흔
혁흔은 청나라 황족이자 정치가로, 도광제의 아들이자 함풍제의 이복 동생이며,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서 활약하고 양무운동을 주도했으나 서태후와의 갈등으로 실각과 복귀를 반복하다가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외교와 군사를 총괄하고 1898년에 사망했다. - 청나라의 제독 - 정여창 (청나라)
정여창은 태평천국의 난에 가담 후 청군에 투항하여 공을 세우고 이홍장 휘하에서 북양 함대 창설에 기여한 청나라 해군 제독으로, 청일 전쟁 황해 해전 패배 후 웨이하이웨이에서 자결했으며 사후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명예가 회복되었다.
손가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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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가망 |
원래 이름 | 손가망 |
본명 | 손가망 |
작위 | 중국 서나라 제2대 황제 |
재위 | 1646년 12월 20일 ~ 1646년 12월 27일 |
출생지 | 명나라 산시성 옌창 |
사망지 | 청나라 윈난성 린창 ((신장풍증으로 병사)) |
배우자 | 황후 1명, 후궁 1명 |
친인척 | 이복 형 3명, 이복 누나 1명, 동복 형 1명 |
자녀 | 친장자 손정호(孫征灏), 양차자 손정기(孫征淇), 양삼남 손정순(孫征淳), 양사남 손굉상(孫宏相) |
섭정 | 이정국 |
전임자 | 장헌충 |
왕조 | 서나라 |
종교 | 불교 |
2. 생애
손가망은 중류층 몰락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1643년 이자성의 난에 가담한 장헌충의 휘하에 들어갔다.[1] 장헌충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정국, 애능기, 유문수와 함께 장헌충의 제자가 되었다. 1644년 2월 9일 장헌충이 서나라를 건국하자 그의 책사로 활동하였다.[1]
1645년 3월 20일 15세의 나이로 서나라 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1] 1646년 12월 20일 장헌충이 청나라 군의 공격을 받아 서나라 황제에서 쫓겨나자, 장헌충의 선위를 받아 형식적으로 서나라 제2대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와 동시에 서나라 총리대신이자 대사형(大師兄)인 이정국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즉위 7일 후인 1646년 12월 27일, 청나라 군의 침공을 받아 사부 장헌충을 잃고, 손가망도 황제에서 쫓겨나면서 서나라는 멸망하였다.[2]
1647년 1월 8일 남명에 투항하여 장군 겸 정치관료로 활동하였다.[1] 같은 해 9월, 남명 호북장군으로서 청나라 동천장군 녹만종(祿萬鍾)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2] 그러나 남명 황족 종실 신료들의 모함으로 이정국, 애능기, 유문수와 함께 관직을 잃었다.[2] 1647년 12월, 애능기가 남명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2]
1648년 7월, 석방된 손가망은 홀로 청나라 즈리 성 베이징에 망명하여 청나라 세조 순치제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장군 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1] 1660년 12월 21일, 청나라 윈난성 린창에서 3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장헌충의 양자
손가망은 중류층 몰락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1643년 이자성의 난에 가담한 장헌충의 휘하에 들어갔다.[1] 장헌충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정국, 애능기, 유문수와 함께 장헌충의 제자가 되었다. 1644년 2월 9일 장헌충이 서나라를 건국하자 그의 책사로 활동하였다.[1]2. 2. 서나라 황제 즉위와 멸망
1645년 3월 20일 15세의 나이로 서나라 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1] 1646년 12월 20일 장헌충이 청나라 군의 공격을 받아 서나라 황제에서 쫓겨나자, 장헌충의 선위를 받아 형식적으로 서나라 제2대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와 동시에 서나라 총리대신이자 대사형(大師兄)인 이정국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즉위 7일 후인 1646년 12월 27일, 청나라 군의 침공을 받아 사부 장헌충을 잃고, 손가망도 황제에서 쫓겨나면서 서나라는 멸망하였다.[2]2. 3. 남명 투항과 좌절
1647년 1월 8일 남명에 투항하여 장군 겸 정치관료로 활동하였다.[1] 같은 해 9월, 남명 호북장군으로서 청나라 동천장군 녹만종(祿萬鍾)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2] 그러나 남명 황족 종실 신료들의 모함으로 이정국, 애능기, 유문수와 함께 관직을 잃었다.[2] 1647년 12월, 애능기가 남명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2]2. 4. 청나라 투항과 죽음
1648년 7월, 석방된 손가망은 홀로 청나라 즈리 성 베이징에 망명하여 청나라 세조 순치제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청나라의 장군 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1] 1660년 12월 21일, 청나라 윈난성 린창에서 30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1]3. 가계
(이복형의 아들)
(이복형의 아들)
(이복형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