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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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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건은 후한 말기 농서군 부한현에서 하수평한왕을 자칭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군벌이다. 그는 184년 양주의 난 당시 하수평한왕을 칭하며 연호를 정하고 승상 등 백관을 두었으며, 관중 군벌 중 한 명으로 포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0여 년간 세력을 유지했으나, 214년 하후연과 장합에게 토벌당해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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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 - [인물]에 관한 문서
송건
이름송건(宋建)
출생지농서군 부한현
사망일214년 10월(음력)
사망지농서군 부한현
사망 원인사형
국적후한
칭호하수평한왕 (자칭)
적수하후연

2. 생애

송건은 관중 군벌 중 한 명으로, 후한 말 포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30여 년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으나, 214년(건안 19년) 10월(음력) 하후연장합에게 토벌당하고 참수되었다.[4]

후한서』에 따르면, 중평 원년(184년)에 송건과 왕국은 한수(한약) 등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금성 태수 진의를 살해했다. 이후 한수는 금성군의 유력자들에 의해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아졌으며, 이름을 한수로 고쳤다고 한다.[2]

사마표의 『속한서』에서는 212년(건안 17년) 10월 익주의 주군혜성이 오제후의 성수에 나타난 것을 보고 서방의 군웅들이 모두 땅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몰락한 군웅으로 익주의 유장, 한중장로, 황중의 북궁옥, 양주의 한수, 포한의 송건을 언급하며 예언이 적중했다고 주장한다.[5]

부현은 송건, 문흠, 제갈탄미신숭배하여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고 언급하였다.[5]

2. 1. 초기 활동과 할거

양주의 난 와중에 농서군 부한현에서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여 연호를 정하고[2] 승상 등 백관을 두었다. 부한현이 황하의 상류이기 때문에 머리란 하수(河首)를 붙였다.[3]

송건은 관중 군벌 중 한 명이었다. 후한 말기에 포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송건과 왕국은 한수(한약) 등 수십 명을 인질로 잡고 금성 태수 진의를 살해했다. 한수는 금성군의 유력자들에 의해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아지면서 이름을 한수로 고쳤다고 한다. 『후한서』에 따르면, 중평 원년(184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송건은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칭하며 후한 조정에서 자립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고, 승상 이하 백관을 두었다.

2. 2. 독자 세력 구축

양주의 난 와중에 농서군 부한현에서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여 연호를 정하고[2] 승상 등 백관을 두었다. 부한현이 황하의 상류이기 때문에 머리란 하수(河首)를 붙였다.[3] 214년(건안 19년) 10월(음력) 하후연과 장합[4]에게 1달 간의 농성전 끝에 토벌당하고 참수되었다.

216년, 헌제는 조조를 위왕으로 봉하는 조칙에서 송건이 한수와 함께 익주유비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2. 3. 최후

양주의 난 와중에 농서군 부한현에서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여 연호를 정하고[2] 승상 등 백관을 두었다. 부한현이 황하의 상류이기 때문에 머리란 뜻의 하수(河首)를 붙였다.[3] 30여 년 동안 잘 다스리다가 214년(건안 19년) 10월(음력) 1달 간의 농성전 끝에 하후연장합[4]에게 토벌당하고 참수되었다. 부현(傅玄)은 송건, 문흠, 제갈탄미신숭배하여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고 언급하였다.[5]

3. 일화

주군기후를 관찰하여 점을 잘 쳤는데, 212년 12월(음력) 혜성이 오제후(五諸侯) 별자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서방에서 땅을 점거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그 땅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6]

3. 1. 주군의 예언

주군기후를 관찰하여 점을 잘 쳤는데, 212년 12월(음력) 혜성이 오제후(五諸侯) 별자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서방에서 을 점거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그 땅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때 익주는 유장이, 한중은 장로가, 양주는 한수가, 부한현은 송건이 다스리고 있었다. 다음 해 조조가 장수를 보내 양주를 치기 시작했다. 송건은 붙잡히고, 한수는 에게로 달아났다가 피살당하고, 유장은 익주를 잃고, 장로는 항복하였다.[6]

참조

[1] 서적 후한서 87권 열전 제77 서강 무익원검(無弋爰劒)
[2] 서적 삼국지 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3] 서적 후한서 72권 열전 제62 동탁
[4] 서적 삼국지 17권 위서 제17 장합
[5] 서적 부자(傅子)
[6] 서적 속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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