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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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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괴월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처음에는 하진을 섬기며 환관 제거를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유표 휘하에서 형주 통일에 기여했다. 그는 모략과 변설로 유표를 도왔으며, 장릉 태수와 번정후에 봉해졌다. 관도 전투 당시 조조를 돕는 것을 유표에게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자 유종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조조에게 항복, 광록훈이 되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주를 얻은 것보다 괴월을 얻은 것이 기쁘다"고 칭찬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괴량의 동생으로 등장하며, 유표를 섬기며 여러 사건에 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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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월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괴월
본명蒯越
이도
출생지형주남군중려후국
사망일214년
사망 원인병사
국적후한
관직 및 작위
작위번정후
주요 경력대장군 동조연
여양현령
장릉태수
광록훈
광록훈 임기 시작208년
군주헌제
재상조조
인간 관계
형제괴량
소속
주요 섬긴 인물하진
유표
유종
조조

2. 생애

하진이 괴월의 명성을 듣고 동조연(東曹掾)으로 등용했다. 괴월은 환관들을 제거하라고 진언했으나 하진이 머뭇거리자, 앞날을 예견하고 여양현령(汝陽―)으로 내려갔다.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여 후장군 원술남양의 병력을 이끌고 떠났다. 장사군에서는 소대(蘇代)가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도 저마다 할거하였다. 형주자사 왕예는 이미 손견에게 살해당했다.[3] 그 후임 유표는 군대가 없어 장강 이남에 있는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가 괴량, 괴월, 채모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유표는 토호들이 원술과 손잡을 것을 우려해 병사들을 모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괴량은 인의(仁義)를 행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돌아올 것이라 했지만, 괴월은 난세에는 권모(權謨)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괴월은 부하를 시켜 이익으로 우두머리들을 꼬드겨 무리를 이끌고 오게 한 뒤, 무도한 자는 처단하고 나머지는 등용하면 형주를 평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유표는 괴월의 계책을 좇아 토호의 우두머리들을 유인해 모두 죽이고[4] 그 무리를 흡수했다.[2]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양양에서 버텼으나, 괴월과 방계(龐季)가 설득하여 항복했다. 괴월은 강남 일대를 평정한 공으로 번정후(樊亭侯)에 봉해지고 장릉태수(章陵―)가 되었다.

초평 연간, 괴월은 모략과 변설로 유표와 대립하던 지방 관리와 호족들을 제거하거나 항복시켜 형주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헌제의 조칙으로 장릉태수를 맡았고, 번정후에 봉해졌다.

원소조조격돌할 때, 괴월은 유선, 한숭과 함께 유표에게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208년(건안 13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 때 유표가 병사하고 유종이 뒤를 이었다.[1] 괴월은 한숭, 부손 등과 함께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1] 조조에게 항복한 후, 괴월은 광록훈을 받았다.[1]

2. 1. 하진의 부름과 형주에서의 초기 활동

하진이 명성을 듣고 괴월을 등용하여 동조연(東曹掾)으로 삼았다. 괴월은 환관들을 제거하라는 진언을 올렸으나 하진이 머뭇거리자 그의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고 여양현령(汝陽―)으로 내려갔다.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여 후장군 원술남양의 병력을 끌어갔다. 장사군에서는 소대(蘇代)가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도 저마다 할거하였다. 형주자사 왕예는 이미 손견에게 살해당했다.[3] 그 후임 유표는 군대가 없어서 장강 이남에 있는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가 괴량, 괴월, 채모를 청한 후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2. 2. 형주 평정과 유표의 책사

190년(초평 원년),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여 후장군 원술남양의 병력을 끌어갔다. 장사군에서는 소대(蘇代)가 일어나 패우(貝羽)를 화용현장(華容―)으로 삼는 등 장강 이남의 토호들도 저마다 할거하였다. 형주자사 왕예는 이미 손견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임 유표는 군대가 없어서 장강 이남에 있는 형주의 주도(州都) 무릉군 한수현(漢壽縣)[3]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홀로 남군 의성현(宜城縣)으로 들어가 괴량, 괴월, 채모를 청한 후 그 대책을 토의하였다.

유표는 토호들이 원술과 손잡을 것을 우려했는데 병사들마저 잘 모이지 않았다. 이에 괴량은 인의지도를 행한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저절로 백성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 반면, 괴월은 치세에는 인의, 난세에는 권모를 앞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제게 똑똑한 부하가 있어서 이로 하여금 이익을 보여 꼬신다면 각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올 것입니다. 그중에 무도한 자는 처단하고 나머지는 위무하고 등용한다면 그 위엄과 덕망이 에 퍼져 반드시 사람들이 몰려와 귀부할 것입니다. 그 병사로 남쪽으로는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을 점거하고 북쪽으로는 양양을 지킨다면 가히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형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술은 오더라도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유표는 괴량의 발언은 옹계(雍季)의 구상이고 괴월의 계책은 구범(臼犯)의 꾀, 즉 괴량은 장기 대책, 괴월은 단기 대책이라 평하며 괴월로 하여금 각 토호의 우두머리들을 유인하게 한 후 모두 참하고[4] 그 휘하 무리를 흡수하였다.[2] 오직 장호(張虎)와 진생(陳生)만이 양양을 끼고 버텼는데 괴월과 방계(龐季)가 타이르니 항복하였다. 강남 일대를 평정한 공으로 번정후(樊亭侯)에 봉해지고 장릉태수(章陵―)가 되었다.

초평 연간에 괴월은 모략과 변설을 구사하여 형주에서 유표와 대립하던 지방 관리와 호족들을 차례로 멸망시키거나 항복시켜 유표의 형주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헌제의 조칙에 의해 장릉태수를 맡았고, 번정후에 봉해졌다.

2. 3. 조조에게 항복

원소조조격돌할 무렵, 괴월은 별가(別駕) 유선,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과 함께 유표에게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유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208년(건안 13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시작했을 때, 마침 유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유종이 뒤를 이었다.[1] 괴월은 한숭, 동조연 부손 등과 함께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하게 하였다.[1] 결국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였고, 괴월은 광록훈을 받았다.[1]

관도 전투가 일어나자 괴월은 한숭, 유선과 함께 조조를 도울 것을 주장했지만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로 진공하는 중에 유표가 사망하고 유종이 뒤를 이었다.[1] 쾌월은 한숭, 부손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유종에게 권했고, 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1] 항복 후 쾌월은 조조로부터 열후에 봉해졌고 광록훈이 되었다.[1] 조조는 순욱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주를 얻은 것은 기쁘지 않지만, 쾌이도를 얻은 것은 기쁘다"고 적었다.[1]

3. 평가

으뜸가는 호걸로서 지략이 충만하고 위풍당당하였다. 조조순욱에게 형주를 얻은 것보다 괴월을 얻은 것이 더 기쁘다고 하였다.[1]

삼국지 위서 유표전 주에 인용된 『부자』에 따르면, 괴월은 깊은 지모를 지녔으며,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고 한다.[1] 사마표의 『전략』에 따르면, 유표가 형주의 적대자를 진압하는 방법을 질문했을 때, 괴량이 "인의의 도를 베풀어야 한다"고 대답한 데 반해, 괴월은 "이익으로 유인한 후 무도한 자를 처벌하고, 나머지는 안무해야 한다"고 대답했다.[1] 유표는 괴월의 진언을 "(진나라의 인물) 구범의 계책이다"라고 칭찬하며, 이 계책을 사용하여 형주 통일에 성공했다고 전해진다.[1]

4. 삼국지연의에서의 괴월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괴량의 동생으로 나온다. 손견이 전국새와 야망을 품에 숨기고 반동탁 연합군에서 나와 강동으로 돌아갈 때 유표의 명령을 받고 채모와 함께 손견을 막아 공격한다. 유비가 장무(張武)와 진손(陳孫)을 토벌하고 취한 적로를 유표에게 바치자, 괴월은 주인을 해칠 말이라면서 유표에게 타지 말라고 한다. 유비가 훗날 화가 될 것이라 여긴 채모는 유비 암살을 준비하고 유표의 명령이라 속여 괴월을 동참시킨다. 괴월은 문빙왕위로 하여금 다른 자리를 마련해 조운을 유비로부터 떼어놓으라 제안한다. 유비는 이적의 귀띔으로 무사히 빠져나와 적로를 타고 단계(檀溪)를 뛰어넘는다.[5]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부손, 왕찬과 함께 유종에게 권하고, 이후 강릉태수와 번성후(樊城侯)를 받는다.

5. 가계

괴월

참조

[1] 문서 大守は郡の長官であり、江陵は南郡の一県である。そのため「江陵太守」という地位は存在せず、南郡太守か[[江陵県|江陵]]県令のいずれかが正しい。
[2] 서적 전략
[3] 서적 속한지
[4] 문서
[5] 문서 채모와 괴월의 유비 암살 미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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