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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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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로(후한)는 후한 말, 오두미도를 계승하여 한중을 지배한 인물이다. 조부 장도릉이 창시한 오두미도를 물려받아 한중을 '한녕'으로 개칭하고 '사군'을 칭하며 종교 왕국을 건설했다. 유언 사후 유장과 대립, 조조의 침공에 항복하여 진남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녕왕을 탐하며 익주를 노리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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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로
원어 이름張魯
로마자 표기Jang Nu
공기
출생생년 미상
출생지예주패국풍현
사망건안 21년 (216년)
사망지미상
묘지한단, 허베이 성
작위낭중후 (閬中侯)
시호원후 (原侯)
가족 관계
아버지장형
어머니노부인
형제장위
장괴
장정
자매장옥란
자녀장부
장광
장용
장승
장이
장거
장몽덕
장기영
조우의 부인
최소 3명 이상의 아들, 8명 이상의 딸
관직 및 직위
한녕태수? ~ 215년
주군유언 → 독립 세력 → 조조
진남장군215년 ~ 216년
섬긴 군주헌제
승상조조
기타
직업정치인, 종교 지도자, 군벌

2. 생애

장로는 후한 말의 인물로, 할아버지 장릉과 아버지 장형에 이어 오두미도 교단을 이끌었다.

익주(益州)의 유언 밑에서 督義司馬|독의사마zho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장수의 세력을 흡수하고 한중 태수 소고를 격파하여 한중을 장악했다.

유언 사후 그의 아들 유장과는 대립 관계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등 가족들이 유장에게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장로는 유장이 보낸 방희의 공격을 막아내고 한중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한중의 이름을 漢寧|한녕zho으로 바꾸고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하며 오두미도 교리에 기반한 제정일치 통치를 실시했다. 의사(義舍) 설치와 같은 정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후한 조정으로부터 鎮民中郎將|진민중랑장zho 겸 漢寧太守|한녕태수zho로 인정받기도 했다.

서량의 군벌 마초조조에게 패배한 후 망명해 오자 그를 받아들였으나, 마초는 이후 장로를 떠나 유비에게 귀순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양평관에서 저항했으나 패배했다.[8] 염포의 조언에 따라 巴中|파중zho으로 후퇴하여 항거하다가, 창고와 재물을 보존한 채 조조에게 항복했다.[9]

조조는 장로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鎭南將軍|진남장군zho에 임명하고 閬中侯|낭중후zho로 봉하는 등 후하게 대우했다.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 또한 열후에 봉해졌으며, 딸은 조조의 아들 조우와 혼인했다.

건안 21년(21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原侯|원후zho라는 시호를 받았다.[11] 그의 사후에도 아들 장부(張富) 등을 통해 오두미도는 정일도로 이어지며 발전했다.

2. 1. 오두미도 계승과 한중 지배

중국 후한(後漢) 말, 장로의 할아버지인 장릉(張陵)이 파촉(巴蜀, 현재의 쓰촨성충칭시 일대) 지방에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창시했다. 장릉 사후에는 아들 장형(張衡)이, 장형 사후에는 손자 장로가 오두미도 교단을 이끌었다. 장로가 교단을 물려받을 당시, 파촉 지역에서는 장수(張脩)가 이끄는 샤머니즘적 성격의 귀도(鬼道) 교단 또한 세력을 얻고 있었다.

익주(益州)의 유언(劉焉)은 장로를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임명하고, 별부사마(別部司馬) 장수와 함께 한중(漢中) 태수 소고(蘇固)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장로는 장수를 살해하고 그의 군대와 무리를 흡수한 뒤, 소고를 격파하고 한중을 점령했다. 이후 장로는 유언의 명을 받아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후한 조정의 사자를 살해했다.

190년대 한나라 주요 군벌을 보여주는 지도, 장로 포함


유언이 죽고 아들 유장(劉璋)이 뒤를 잇자, 장로는 유장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유장은 격노하여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장위(張衛) 등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유장은 방희(龐羲) 등을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했으나, 장로는 이들을 모두 격퇴했다.

한중에서 독립한 장로는 지역 이름을 한녕(漢寧중국어)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사군(師君)이라 칭했다. 그는 오두미도 교리를 바탕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독특한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신도들은 초학(初學) 단계의 '귀졸'(鬼卒)과, 간령(姦令), 좨주(祭酒) 등으로 조직되었으며, 교세가 확장되자 '치두대제주'(治頭大祭酒)라는 직책을 두어 좨주들을 관리했다. 좨주들은 백성들을 교화하고, 병이 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다.

장로는 당시로서는 매우 인도적이고 선진적인 정책을 펼쳤다. 각지에 길을 닦고 '의사'(義舍)라는 일종의 무료 숙식 제공 시설을 설치하여, 쌀과 고기를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죄를 지은 자에게는 세 번까지 용서해주고 그 이후에 처벌했으며, 성실함을 중시하고 거짓말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로는 별도의 관리를 두지 않고 좨주들을 통해 한녕을 효과적으로 다스렸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당시 후한 조정은 이각이나 조조 같은 실력자들도 장로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자, 그의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장로를 진민중랑장() 겸 영(領) 한녕태수(漢寧太守중국어)로 임명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백성이 땅에서 옥으로 만든 인장을 발견하자, 부하들은 이를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장로에게 한녕왕(漢寧王)으로 즉위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로는 모사 염포(閻圃)가 "왕을 칭하면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2. 2. 유장과의 갈등

유언이 죽고 아들 유장이 익주목의 자리를 계승하자, 장로는 유장을 따르지 않았다. 장로는 한중군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군의 이름을 한녕군으로 바꾸었다(『원화군현도지』). 이에 격분한 유장은 건안 5년(200년)에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장징 등 남아있던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가족을 잃은 장로는 유장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키웠다. 그는 파(巴) 지역의 이민족 지도자인 두호(杜濩), 박호(朴胡), 원약(袁約) 등을 설득하여 유장에게 반기를 들도록 했다. 유장은 방희파서군 태수로 삼아 장로를 공격하게 했지만, 번번이 장로에게 패배했다. 오히려 익주 내부는 혼란스러워졌고, 유장은 장로를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한 채 냉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촉지 「유이목전」).

2. 3. 마초와의 관계

서량(西涼)의 군벌 마초(馬超)는 건안 16년(211년) 동관 전투에서 조조(曹操)에게 패한 후, 양주(涼州)에서 재기를 시도했다. 이때 장로는 원군으로 양앙(楊昻)을 파견하기도 했으나(「양부전」), 마초는 결국 실패하고 한중(漢中)의 장로에게 망명했다. 장로는 마초를 받아들여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임명하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한 측근이 "자신(의 가족)을 아끼지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사람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라고 간언하여 혼사는 무산되었다.

마초는 장로에게 여러 차례 병사를 빌려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로의 부하인 양백(楊白) 등이 마초를 비판하자 마초는 무도(武都)의 저족(氐族)이 사는 곳으로 달아나기도 했다(「마초전」이 인용하는 『전략』). 마초는 장로가 함께 큰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 근심하던 중, 익주에서 유장(劉璋)과 싸우고 있던 유비(劉備)의 제안을 받고 장로를 떠나 유비에게 귀순했다.

훗날 건안 20년(215년)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마초가 남기고 간 아내를 염포(閻圃)에게 주었고, 아들 마추(馬秋)는 조조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다(「방덕전」, 「마초전」). (다른 기록에서는 장로가 직접 마추를 참수하여 조조에게 바쳤다고도 한다.) 염포는 마초의 아내를 첩으로 삼았다.

2. 4. 조조의 침공과 항복

건안 20년(215년), 조조는 한중을 공격하였다. 장로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그의 아우인 장위가 따르지 않아 장위와 장수 양앙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에서 저항했다. 그러나 양평관이 함락되자[8] 장로는 다시 항복하려 하였으나, 염포의 "궁지에 몰려 항복하면 가볍게 여겨진다"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파중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9] 떠날 때 측근에서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기를 원했으나, 장로는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봉인해 두고 떠났다.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장로의 본의가 저항이 아니었고 창고를 태우지 않은 것을 듣고 그를 매우 칭찬하였다. 11월, 조조는 사자를 보내 파중에 있는 장로를 설득했고, 장로는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이때 마초의 부하였던 방덕 등도 장로와 함께 투항했다.

조조는 장로를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고 낭중후(閬中侯)로 봉했으며, 식읍 만 호를 주고 빈객의 예로써 후하게 대우했다. 또한 장로의 다섯 아들과 염포 역시 열후에 봉해졌다. 장로의 딸은 조조의 아들인 조우와 혼인하게 되었다. 한편, 마초가 버리고 간 아들 마추는 조조의 명령에 따라 장로가 직접 처형했으며, 마초의 아내는 염포에게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유비 또한 황권을 파견하여 장로를 영입하려 했으나,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겨 뜻을 이루지 못했다.

2. 5. 죽음과 평가

건안 21년(216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원후(原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신은 (鄴)의 동쪽에 매장되었는데, 위나라 감로(甘露) 4년(259년)에 물난리로 관이 열렸을 때, 시신이 썩지 않아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11]

장로는 오두미도를 이끈 종교 지도자이자 한중군을 다스린 정치 지도자였다. 아버지 장형에게서 천사도의 교권을 물려받아 세 번째 지도자가 되었으며(첫 번째는 할아버지 장도릉), 한중군을 점령한 후 그 이름을 한녕(漢寧)으로 바꾸고 제정일치의 종교 왕국을 세웠다. 그의 통치는 종교적 원칙에 기반하면서도 매우 인도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초학(初學)의 제자를 귀졸(鬼卒), 신자를 간령(姦令)·좨주(祭酒) 등으로 불렀다. 좨주를 통해 백성을 다스렸는데, 병자로 하여금 자기 과실을 털어놓게 하였으며, 의사(義舍)를 설치하여 쌀과 고기를 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료로 먹게 했다. 범법자는 세 번 용서한 후에 처벌했으며, 관리를 두지 않고 좨주들로써 지역을 잘 통치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한중을 공격하였다. 장로는 항복하고자 했으나, 그의 아우인 장위가 따르지 않아 장위와 장수 양앙이 양평관에서 저항했다. 양평관이 함락되자 투항하려 하였으나, 염포의 의견에 따라 파중(巴中)으로 후퇴하여 항거하였다. 떠날 때 측근에서 창고와 재화를 불태우자고 했으나, 장로는 “보화와 창고는 국가의 소유다.”라고 하고 봉해 놓고 떠났다. 11월, 장로는 드디어 조조에게 항복했다. 장로의 본의가 저항이 아니었고, 창고를 태우지 않은 것을 들은 조조는 장로를 매우 칭찬하였다. 이에 조조는 사람을 보내 장로를 위로하고 진남장군(鎭南將軍)에 임명하고 빈객의 예로 대우했으며, 낭중후(閬中侯)로 삼아 식읍 만 호를 주었다. 또 다섯 아들과 염포를 열후에 봉하고, 딸은 조우(曹宇)의 아내로 삼았다. 항복 후 장로는 마초가 버리고 간 처자식 중 마초의 아내를 염포에게 시녀로 내주었고 마초의 아들 마추를 참수해서 조조에게 바쳤다.

아들 장부(張富)가 뒤를 이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오두미도를 계속 이끌어 훗날 정일도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장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장로는 익주를 빼앗아 스스로 한녕왕(漢寧王)이 되려는 야심을 가진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유장유비의 공격을 받고 장로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장로는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초를 파견한다. 그러나 유비에게 매수된 부하 양송(楊松)이 장로의 야심을 이용해 마초와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결국 마초는 장로가 감시역으로 보낸 양백을 죽이고 유비에게 귀순하게 된다.

이후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장로는 동생 장위(張衛)와 양앙, 양임(楊任) 등을 보내 양평관에서 맞서 싸우게 하지만 하후연 등의 활약으로 패배한다. 이때 마초를 따라가지 않고 한중에 남아 있던 방덕(龐德)이 분전하여 조조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인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조는 다시 양송을 매수하고, 양송의 이간질에 넘어간 장로는 방덕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방덕은 조조에게 투항한다.

주요 장수들을 잃고 저항할 힘이 없어진 장로는 성 안의 창고 등을 봉인하고 파중으로 퇴각했다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는 장로의 행동에 감탄하여 그를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임명한다. 한편, 두 차례나 주군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넘긴 양송조조에게 간신으로 지목되어 처형당한다.

4. 장로를 섬긴 사람들

장로 휘하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염포, 양앙, 양임, 양백 등이 있다. 관중 지역의 군벌이었던 마초와 그의 부하 방덕 역시 한때 장로를 섬겼다.

아래는 장로를 섬긴 주요 인물들의 목록이다.

이름비고
강합
마초맹기(孟起)211년 동관 전투 패배 후 귀순했으나, 214년 유비에게 귀순했다.
방덕영명(令明)마초를 따라 귀순했으나, 마초가 유비에게 갈 때 장로에게 남았다.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조조를 섬겼다.
양백마초와 장로 딸의 혼인을 반대했다.
양앙
양임
염포장로의 참모. 215년 조조 침공 시 후퇴 후 항복할 것을 조언했다.
이감
이복
이서
이휴자랑(子朗)
정은
후선
신의
신탐
장위장로의 동생. 215년 조조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원약
두확
박호
유웅명劉雄鳴중국어



'''※ 양송과 창기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211년, 마초는 동관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후 한중군으로 도망쳐 장로에게 귀순했다. 장로는 자신의 딸을 마초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부하 양백이 "자신의 부모조차 사랑하지 않는 자(마초의 반란으로 인해 아버지 마등이 처형된 것을 가리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는가"라며 반대하여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초는 장로에게 군사를 빌려 조조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일로 장로와의 관계가 나빠졌다. 214년, 유비익주를 공격하자 마초는 이 기회를 틈타 장로를 떠나 유비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마초의 부하였던 방덕은 마초를 따르지 않고 장로의 휘하에 남았다.

215년, 조조가 다시 한중을 침공하자 장로는 처음에는 싸울 생각 없이 항복하려 했다. 그러나 동생 장위가 싸울 것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전사했다. 장로가 다시 항복을 고려하자, 참모 염포는 바로 항복하면 협상에서 불리하다며 파중(巴中)으로 후퇴했다가 항복할 것을 조언했다. 장로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후한 대우를 받으며 항복할 수 있었다.

5. 장로의 친족 관계

중국 후한오두미도를 창시한 장릉(張陵)은 장로의 할아버지이다. 장릉 사후 아들 장형(張衡)이, 장형 사후 장로가 교단을 이어받았다. 장로의 아버지는 장형이며, 숙부로는 장한(張漢)이 있었다.

동생으로는 장위(張衛)가 있었다. 유장은 장로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 등 많은 가족을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장위는 215년 조조가 한중을 침공했을 때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천사세가』는 장괴(張怪)라는 또 다른 동생을 언급하며, 그가 남군 태수, 부마도위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장로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으며,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조는 장로가 항복한 후 그의 다섯 아들을 제후로 봉했다.

기록 출처아들 이름 및 정보
『삼국지』장남 장부(張富): 작위를 받음.
『태평어람』 (『위지』 인용)차남 장광(張廣, 자 사종): 풍류를 즐겨 조조의 총애를 받음.
『천사세가』셋째 아들 장성(張盛, 자 원종): 용호산에 들어가 정일교의 제4대 천사가 됨.
『역세진선체도통감』
『배자어림』 (동진)열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장씨 십룡(張氏十龍)이라 불림.



딸 중 한 명(장씨(張氏))은 조조의 아들인 조우(曹宇)와 혼인했다. 산시성 한중시 면현에 있는 장로녀묘(張魯女墓) 비석에 따르면, 딸의 이름은 장기영(張琪瑛)이며, 196년에 태어나 217년에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장로는 마초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부하 양백(楊柏)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다. 이후 조조가 마초의 아들 마휴(馬秋)를 장로에게 넘겨주자, 장로는 직접 마휴를 살해했다. 이는 마초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 여겨진다.

참조

[1] 서적 渡邉義浩の三国志辞典
[2] 서적 渡邉義浩の三国志辞典
[3] 문서 劉二牧伝
[4] 문서 裴松之
[5] 문서 蜀志「劉二牧伝」
[6] 문서 諸夏侯曹伝
[7] 문서 呂岱伝
[8] 문서 武帝紀
[9] 문서 文帝紀
[10] 서적 真誥
[11] 서적 진고(眞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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