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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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덕기는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택견 수련가이다. 12세에 스승 임호에게 택견을 배우며 실력을 연마했고, 일제강점기에도 택견 수련을 지속했다. 그는 궁도 심판으로 활동하며,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택견 시범을 보이며 택견 부흥에 기여했다. 한국 전쟁 이후 사실상 유일하게 택견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1983년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택견 명인'으로 불렸으며, 1987년 사망했다. 저서로 《한국고유무술 택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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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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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송덕기 |
한글 | 송덕기 |
한자 | 宋德基 |
아호 (한글) | 현암 |
아호 (한자) | 玄庵 |
로마자 표기 | Song Deokgi |
출생일 | 1893년 1월 19일 |
출생지 | 사직동, 한성, 대한제국 |
사망일 | 1987년 7월 23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직업 | 택견 예능보유자, 선비 |
무술 정보 | |
무술 | 택견, 국궁 |
스승 | 임호 |
2. 생애
송덕기는 1893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택견 명인 임호에게 택견을 배웠다. 일제강점기에도 비밀리에 택견 수련을 계속했으며, 궁도에도 능하여 최초의 공식 심판이 되기도 했다.[1][2]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행사에서 김성환과 함께 택견 시범을 보인 것을 계기로 택견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3]
송덕기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한국 육군과 왕실 근위대의 체육 교관으로 일했으며, 프로 축구 선수로도 활동하여 1922년 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4]
2. 1. 유년 시절 및 수련
송덕기는 1893년 서울 사직동에서 택견 수련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의 소개로 택견의 유명한 스승인 임호에게 배우기 시작하여 약 10년 동안 그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택견은 서울 근교 사람들에게 무술이자 민속 놀이로 행해졌다.[1] 송덕기는 황학정이라는 사격장 근처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숲에서 수련했다. 당시, 높은마을 또는 위대패는 서울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을, 아랫마을 또는 아래대패는 성곽 밖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했다. 송덕기는 위대패 출신으로 아래대패와 많은 시합을 벌였다. 두 마을은 각자 고유의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의 문화 동화 정책에 따라 토착 무술이 금지되었으나, 송덕기는 비밀리에 택견 실력을 연마하며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2] 그는 또한 한국 전통 활쏘기인 궁도를 수련했으며 이 종목의 최초 공식 심판이 되었다.2. 2. 일제강점기 활동
송덕기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한국 육군과 왕실 근위대의 체육 교관으로 일했다. 이후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1922년 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4]2. 3. 광복 이후 활동
송덕기는 일본에 의해 해산되기 전까지 한국 육군과 왕실 근위대의 체육 교관으로 일했다. 이후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1922년 조선 축구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4]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사실상 유일하게 택견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새로운 세대의 명인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여 무술의 부활을 위한 씨앗을 뿌렸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택견 명인"으로 알려졌다.1983년 6월 1일, 문화재청에 의해 택견이 제76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송덕기는 국보가 되었다.[5] 현재까지, 택견은 이러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의 무술 중 하나로 남아있다(다른 하나는 씨름이다). 이러한 인정은 더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고 무술 전승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현재 택견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 당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송덕기는 같은 해 제자인 이준서와 함께 위대택견보존회를 설립했다. 그는 1987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4. 택견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한국 전쟁 이후, 송덕기는 사실상 택견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세대의 명인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여 무술 부활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택견 명인"으로 알려졌다.[4]1983년 6월 1일, 문화재청에 의해 택견이 제76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송덕기는 국보가 되었다.[5] 현재까지 택견은 이러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의 무술 중 하나로 남아있다(다른 하나는 씨름이다). 이러한 인정은 더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였고 무술 전승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현재 택견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 당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송덕기는 같은 해 제자인 이준서와 함께 위대택견보존회를 설립했다.
2. 5. 사망
송덕기는 1987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는 한국 전쟁 이후, 사실상 택견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송덕기는 사망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택견 명인"으로 알려졌다.[5]3. 수상
송덕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기예능 보유자였다.[2] 인간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었으나, 사후에 지정 해제되었다.[6][7]
4. 저서
- 《한국고유무술 택견》 (1988년)
참조
[1]
웹사이트
Sajik-Dan, Hwanghakjeong and the Last Taekkyon Master of Joseon Grandpa Song Deok-Gi
http://www.egn.kr/ne[...]
[2]
웹사이트
Life of Song Deok-Gi: Recognized as Holder of the Skill for having transmitted the Intangible Cultural Property No.76 Taekkyon after the Liberation (해방 이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태껸 전승자로 지정된 기능보유자.)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The importance of Song Deok-Gi for Taekkyon
https://mookas.com/n[...]
[4]
웹사이트
Song Deok-Gi Soccer track on DongA Ilbo 1922-02-15
http://blog.naver.co[...]
[5]
웹사이트
Song Deok-Gi on Naver Dictionnary
https://terms.naver.[...]
[6]
웹사이트
Cultural assets of the Hwanghakjeong: Living National Treasure No.283 (Song Deok-Gi)
http://www.hwanghakj[...]
[7]
서적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Tae Kyon"
Journal of Asian Marti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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