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니 미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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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니 미쓰사다는 1394년에 태어나 1433년에 사망한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이었다. 그는 쇼니 사다요리의 아들로 태어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서 이름을 받았으며, 1404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가문을 계승했다.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미쓰요리와 여러 차례 대립했으며, 1419년 조선의 쓰시마 공격 당시 막부에 자신이 이를 막았다고 보고했다. 이후 오우치 가문과의 항쟁에서 패배하여 아키쓰키 성에서 전사했다. 그는 조선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토물을 바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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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미쓰사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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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쇼니 씨(少弐氏) |
이름 | 쇼니 미쓰사다(少弐満貞) |
초명 | 요리미쓰(頼満) |
개명 | 미쓰스케(満資) |
시대 |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
출생 | 오에이(応永) 원년(1394년) |
사망 | 에이쿄(永享) 5년 8월 16일(1433년9월 29일) |
관위 |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 |
아버지 | 쇼니 사다요리(少弐貞頼) |
형제 | 요코타케 요리후사(横岳頼房) |
자녀 | 스케쓰구(資嗣) 요시요리(嘉頼) 노리요리(教頼) 바바 요리쓰네(馬場頼経) 지쿠시 요리카도(筑紫頼門) |
2. 약력
오에이 원년(1394년), 쇼니 사다요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 이름 한 자(편휘)를 받아 초명은 요리미쓰(頼満)라 하였다.[10][1] 오에이 11년(1404년) 아버지 사다요리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13][3] 이후 그의 생애는 규슈 단다이 및 오우치 가문과의 끊임없는 항쟁으로 점철되었다.
2. 1. 가독 상속과 규슈 단다이와의 대립
오에이 원년(1394년), 쇼니 사다요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초명은 요리미쓰(頼満)라 하였다.[10][1] 오에이 11년(1404년) 아버지 사다요리가 사망하자 가독을 이었다.[13][3] 오에이 3년(1396년) 이마가와 료슌의 뒤를 이어 새로 규슈 단다이가 된 시부카와 미쓰요리와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오에이 26년(1419년), 미쓰요리가 단다이직을 사임하고 그의 아들 요시토시가 새로운 규슈 단다이가 되었다. 같은 해,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로 간주되던 쓰시마에 대한 정벌(기해동정)을 단행하였다. 이때 쇼니 미쓰사다는 자신이 조선군을 맞아 싸웠다고[14][4] 막부에 보고하였다.[15][5] 오에이 30년(1423년), 하카타에서 단다이 요시토시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16][6] 오에이 32년(1425년)에는 요시토시의 반격을 물리쳤으나, 북부 규슈에서의 항쟁을 평정하고자 스오에서 내려온 오우치 모리하루(大内盛見, 오우치 모리미)에게 패배하여[17][7] 하카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18]
쇼니 미쓰사다를 격파한 모리하루는 쇼초 원년(1428년) 사촌 형인 요시토시로부터 단다이직을 넘겨받은 시부카와 미쓰나오를 지원하며 규슈에서의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에이쿄 3년(1431년), 미쓰사다는 지쿠젠국의 영유권을 놓고 모리하루와 대립하던 오토모 모치타다(大友持直, 오토모 모치나오)와 연합하여 모리하루와 싸웠고, 이 전투에서 모리하루는 전사하였다.[19][20][8]
에이쿄 5년(1433년) 3월, 무로마치 막부는 미쓰사다에 대한 추토령을 내렸고, 이 명령을 받들어 규슈로 내려온 오우치 모치요와 전투를 벌였다. 미쓰사다는 아리토모 산성(有智山城, 우치야마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지쿠젠의 아키쓰키 성(秋月城)에서 전사하였다.[21][9]
그의 아들 스케쓰구는 히젠국 요카 장(与賀庄)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다른 아들들인 요시요리(嘉頼)와 노리요리(教頼)는 쓰시마로 달아나 소 가문에게 의탁하였다.
2. 2. 오우치 가문과의 항쟁과 최후
오에이 3년(1396년) 규슈 단다이(九州探題)가 된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10] 오에이 26년(1419년), 미쓰요리가 단다이직을 사임하고 그의 아들 요시토시(義俊)가 새로운 규슈 단다이가 되었다. 같은 해, 조선이 왜구의 본거지로 여겨지던 쓰시마(対馬)를 공격하자(기해동정), 미쓰사다는 자신이 이를 맞아 싸웠다고 막부에 보고하였다.[14][5] 오에이 30년(1423년), 하카타(博多)에서 단다이 요시토시와 싸워 패배시켰다.[16][6] 오에이 32년(1425년), 요시토시의 반격을 물리쳤으나, 북부 규슈의 항쟁을 평정하고자 스오에서 내려온 오우치 모리하루(大内盛見)에게 패배하여[17][7] 하카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18]미쓰사다를 격파한 오우치 모리하루는 쇼초(正長) 원년(1428년) 요시토시로부터 단다이직을 넘겨받은 시부카와 미쓰나오(渋川満直)를 도와 규슈에서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 에이쿄 3년(1431년), 미쓰사다는 지쿠젠국(筑前国)의 영유권을 놓고 모리하루와 대립하던 오토모 모치타다(大友持直)와 연합하여 모리하루와 싸웠고, 이 전투에서 모리하루를 전사시켰다.[19][8]
그러나 에이쿄 5년(1433년) 3월, 무로마치 막부는 미쓰사다에 대한 추토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받들어 규슈로 내려온 오우치 모치요(大内持世)와 전투를 벌였으나, 아리토모 산성(有智山城)에서 패배하고 결국 지쿠젠의 아키쓰키 성(秋月城)에서 전사하였다.[21][9]
미쓰사다 사후, 아들 스케쓰구(資嗣)는 비젠국(肥前国) 요카 장(与賀庄)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다른 아들들인 요시요리(嘉頼)와 노리요리(教頼)는 쓰시마로 달아나 소 씨(宗氏)에게 의탁하였다.
3. 조선과의 관계
쇼니 미쓰사다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계승하기 2년 전인 조선 태종 2년(1402년), 소 사다시게와 함께 조선에 사자를 보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쌀 10섬, 잣 2섬, 범 가죽 한 장을 하사하였다.[22] 이후 태종 12년(1412년)부터는 쓰시마의 소 사다시게와 마찬가지로 매년 조선에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23]
태종 14년(1414년), 쇼니 미쓰사다가 보낸 사신은 소 사다시게나 이키, 휴가 등지에서 온 다른 사신들과 함께 조선 조정이 그들이 요구했던 범종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24] 또한, 조선이 쓰시마 섬을 공격한 쓰시마 정벌(세종 원년/오에이 26년, 1419년) 이듬해에는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 "지난 해에 조선이 우리 쓰시마 섬을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병선(兵船) 2, 3백 척을 청하여 조선의 해안 고을 몇 곳을 쳐부셔야 우리 마음이 쾌하겠다"[25]는 적대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다시 한번 쓰시마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쇼니 미쓰사다가 오우치 모리하루에게 패배한 뒤인 세종 10년(1428년), 조선 조정은 쇼니 가문에게 지급하던 물품을 오우치 가문에게 대신 주도록 명하기도 하였다.[26]
참조
[1]
서적
新選事績通考
[2]
서적
横岳系図
[3]
서적
大日本史料 제7편지6 727쪽
[4]
서적
史料綜覧 제7편지907 452쪽
[5]
문서
실제로는 대마도에 건너가지 않았다
[6]
서적
史料綜覧 제7편지907 498쪽
[7]
서적
史料綜覧 제7편지907 520쪽
[8]
서적
史料綜覧 제7편지907 590쪽
[9]
서적
史料綜覧 제7편지907 625쪽
[10]
서적
신선사적통고
[11]
서적
요코타케 계도
[12]
문서
한국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이전 등원만정(小二殿藤原滿貞, 쇼니 도노 후지와라노 미쓰사다)라고 되어 있는데(《세종실록》 세종 5년 계묘(1423년) 9월 24일(임인)) 쇼니 씨의 혼세(本姓)가 [[후지와라씨]]이다.
[13]
서적
대일본사료 제7편지6 727쪽
[14]
서적
사료종람 제7편지907 452쪽
[15]
문서
실제로는 미쓰사다는 쓰시마로 건너간 적이 없다.
[16]
서적
사료종람 제7편지907 498쪽
[17]
서적
사료종람 제7편지907 520쪽
[18]
문서
한국의 《세종실록》 세종 10년 무신(1428년) 11월 26일(갑술)조에는 쇼니 도노를 두고 "쇼니 도노는 그 본토를 잃고 기쿠치(菊池)에 기탁해 살고 있다"(《세종실록》세종 10년 무신(1428) 11월 26일(갑술)라고 언급하고 있다.
[19]
서적
사료종람 제7편지907 590쪽
[20]
문서
한국의 《세종실록》에는 에이쿄 3년 즉 세종 13년(1431년) 일본 규슈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는데, 등차랑(藤次郞)이라는 쓰시마 왜인을 통해 전달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규슈에서 전쟁이 벌어져 오우치 도노(大內殿, 오우치 모리하루)는 군사 730명을 거느리고 파란다현(波蘭多縣)에 주둔하고, 쇼니 도노(小二殿)의 아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구사노 도노(草野殿) ㆍ 사시 도노(左志殿) ㆍ 가모우치 도노(鴨打殿) ㆍ 단슈 도노(丹州殿) ㆍ 가미마쓰우라(上松浦) 등과 합세하여 서로 싸웠는데, 오우치 도노 ㆍ 가즈미 도노(數見殿) ㆍ 마음파전(馬音波殿) 등 용사 21명이 전사하고, 다유 도노(多由殿)는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고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3년 신해(1431) 8월 11일 계묘).
[21]
서적
사료종람 제7편지907 625쪽
[22]
서적
태종실록 태종 2년(1402년) 5월 26일
1402-05-26
[23]
서적
태종실록 태종 12년 임진(1412년) 1월 19일 갑진 및 2월 19일 갑술;같은 책 태종 13년(1413년) 5월 13일 및 6월 11일;같은 책 태종 14년(1414년) 5월 27일
1412-01-19
[24]
서적
태종실록 태종 14년(1414년) 5월 27일조.
1414-05-27
[25]
서적
세종실록 세종 2년 경자(1420) 10월 8일(계묘)
1420-10-08
[26]
서적
세종실록 세종 10년 무신(1428) 11월 26일(갑술)
142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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