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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모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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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모치요는 오우치 요시히로의 아들로, 1431년 숙부 오우치 모리하루 사후 오우치 가문을 이끌었다. 그는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오토모 씨, 쇼니 씨 등과 항쟁했고, 1435년 기타큐슈를 평정하여 쇼니 씨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1440년에는 쇼니 씨와의 화목을 주선하고 상경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쓰시마 할양을 조건으로 군사 동맹을 제의했으나, 가키쓰의 난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1441년 가키쓰의 난 당시 아카마쓰 미쓰스케에게 암살당할 뻔했으나, 중상을 입고 한 달 뒤 사망했다. 그는 당주로서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와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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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모치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리하라 노부미쓰가 그린 오우치 모치요의 초상화
구리하라 노부미쓰가 그린 오우치 모치요의 초상화(『肖像集』에서), 에도 시대 후기 작
씨족다타라 성 오우치 씨
이름오우치 모치요
로마자 표기Ōuchi Mochiyo
어릴 적 이름구로
별명오우치노스케
출생1394년 3월 23일
사망1441년 8월 14일
묘소야마구치현 야마구치 시 스미센지
계명스미센지 혹은 장천사전도엄정홍대선정문
관직 정보
관위형부소보, 수리대부, 정5위상, 종4위하, 종4위상
막부무로마치 막부
슈고주방국, 장문국, 풍전국, 축전국
주군아시카가 요시모치아시카가 요시노리
가계
아버지오우치 요시히로(오우치 히로요라고도)
어머니알 수 없음
형제모치요, 오우치 모치모리, 오우치 노리스케
자녀양자: 오우치 노리히로

2. 생애

오우치 요시히로의 아들이며, 모치모리, 노리스케의 형이다. 제9대 당주 오우치 히로요(할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양자로 노리히로가 있었다. 관위는 형부소보, 슈리다이후, 정5위상, 종4위하, 종4위상이다. 통칭 오우치노스케(大内介)로 어렸을 때의 이름은 구로(九郎)이며, 원복을 행할 때 제4대 쇼군 · 아시카가 요시모치로부터 이름자 한 자를 받아 '''모치요'''('''持世''')라고 하였다('요'는 할아버지 히로요에게서 따왔다).

에이쿄 3년(1431년) 숙부인 제11대 당주 오우치 모리하루오토모쇼니와의 전투에서 지쿠젠에서 패사하자, 오우치 집안 내부에서는 후계자를 둘러싼 항쟁이 벌어졌다. 고쿠진들의 지지를 받은 모치요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지지와 분고지쿠고의 슈고(守護)로 임명된 오토모 지카쓰나와 기쿠치 가네토모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대했다.

에이쿄 5년(1433년) 모치모리와 미쓰요가 피살된 후, 모치요는 규슈로 내려가 쇼니 미쓰사다 ・ 스케쓰구 부자를 죽이고, 쇼니 요시요리 ・ 오토모 모치나오와 싸워 승리했다. 에이쿄 11년(1439년) 규슈 원정을 마친 모치요는 야마구치로 귀환했지만,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모치요가 상경 명령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아키 국의 오우치 영지를 몰수했고, 에이쿄 12년(1440년)에 모치요는 상경하였다.

가키쓰 원년(1441년) 3월, 모치요는 사쓰마의 시마즈 다다쿠니를 설득하여 요시노리에 반항하던 요시아키의 목을 바치게 하여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그해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유키 합전 승전 축하연에서 요시노리를 암살하고, 모치요도 중상을 입고 한 달 뒤인 7월 28일에 사망했다(가키쓰의 난). 향년 48세였다. 그의 뒤는 종제(조카라고도 함)이자 양자인 노리히로가 이었다.

모치요는 임종 시 "아카마쓰를 정벌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최고의 공양"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1] 법명은 스미센지(澄泉寺) 혹은 장천사전도엄정홍대선정문(長泉寺殿道 আকৃষ্ট弘大禅定門)이며, 묘소는 야마구치현 야마구치 시의 스미센지이다. 오우치 모치요는 와카에도 뛰어난 교양인이었으며, 『신속고금화가집』(新続古今和歌集)에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2. 1. 가독 상속과 내분

오우치 요시히로의 아들이자 모치모리, 노리스케의 형이다. 제9대 당주 오우치 히로요(할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모치요'''('''持世''')라고 하였다.

에이쿄 3년(1431년) 숙부인 제11대 당주 오우치 모리하루오토모, 쇼니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죽은 뒤, 오우치 집안 내부에서는 후계자를 둘러싼 항쟁이 벌어졌다. 생전 모리하루는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독과 나가토를 제외한 소유 영지를, 모치요의 동생 모치모리에게 나가토를 이어받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당초에 모치모리가 오우치 집안의 가독과 스오(周防), 아키(安芸)의 일부 영지를 잇게 하고, 모치요에게 나가토(長門) ・ 지쿠젠(筑前) ・ 부젠(豊前)을 잇게 하였으며, 일족인 오우치 미쓰요(大内満世)에게 이와미(石見) 니마 군(迩摩郡)과 나가토 일부를 주기로 예정했지만, 오우치 집안의 중신 内藤智得가 모리하루의 유지를 들고 나와서 모치요에게 오우치 집안의 가독을 잇게 하고 모치모리에게 나가토와 니마 군, 아키 일부를 잇게 한다는 방침으로 바꾸게 하도록 막부에 제의하여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2] 이에 불만을 품은 모치모리는 에이쿄 4년 2월 10일에 규슈에 출진해 있는 와중에 모치요의 진을 습격함으로써 반란을 일으켰고, 미쓰요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오우치 집안이 지배하던 영지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 모치요는 이와미의 미스미씨(三隅氏)를 의지하여 도망쳐 왔다. 그러나 모치요는 고쿠진(国人衆)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그 다음달에 야마구치로 돌아왔고, 모치모리, 미쓰요는 오토모 모치나오(大友持直)에게 맡겼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모치요를 지지하여 그에게 슈리다이후(修理大夫) 관직을 주었다. 한편 모치요도 막부에 권하여 오토모 지카쓰나(大友親綱)와 기쿠치 가네토모를 각기 분고지쿠고의 슈고(守護)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이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

에이쿄 5년(1433년) 4월에 모치모리는 부젠 국에서, 미쓰요는 도망쳐 있던 곳 교토(京都)에서 피살되었다.

2. 2. 규슈 평정과 쇼군과의 갈등

에이쿄 3년(1431년) 숙부이자 오우치 가문 제11대 당주 오우치 모리하루오토모 씨쇼니 씨와의 전투에서 지쿠젠에서 패배하여 사망하자, 오우치 가문 내부에서는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다. 모리하루는 생전에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독과 나가토를 제외한 영지를, 모치요의 동생 모치모리에게 나가토를 상속하도록 유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모치모리가 오우치 가문의 가독과 스오, 아키의 일부 영지를 잇고, 모치요에게 나가토 ・ 지쿠젠 ・ 부젠을 잇게 하였으며, 일족인 오우치 미쓰요에게 이와미 니마 군과 나가토 일부를 주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우치 가문의 중신이자 막부와의 교섭을 담당했던 나이토 도모에가 모리하루의 유지를 명분으로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독을 잇게 하고 모치모리에게 나가토와 니마 군 ・ 아키 일부를 잇게 하는 방침으로 변경하도록 막부에 제의하여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2]

이에 불만을 품은 모치모리는 에이쿄 4년(1432년) 2월 10일에 규슈 출진 중이던 모치요의 진영을 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미쓰요를 끌어들여 오우치 가문의 영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모치요는 이와미의 미스미 씨에게 의지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모치요는 고쿠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음 달에 야마구치로 복귀하였고, 모치모리 ・ 미쓰요는 오토모 모치나오에게 의탁하였다. 제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모치요를 지지하여 그에게 슈리다이후(修理大夫) 관직을 수여하였다. 한편, 모치요도 막부에 요청하여 오토모 지카쓰나와 기쿠치 가네토모를 각각 분고지쿠고의 슈고로 임명하도록 하여 이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에이쿄 5년(1433년) 4월에 모치모리는 부젠 국에서, 미쓰요는 도망쳐 있던 교토에서 살해되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3월에 막부로부터 오토모 모치나오 ・ 쇼니 미쓰사다 추토령이 내려지자 규슈로 내려가, 아키이와미이요의 고쿠진슈나 고노 미치히사 ・ 오토모 지카쓰나 등과 협력하여 쇼니 미쓰사다 ・ 스케쓰구 부자를 살해하고, 오토모 모치나오와 싸워 승리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듬해 쇼니 요시요리 ・ 오토모 모치나오가 다시 거병하자 에이쿄 7년(1435년)에 다시금 규슈로 향했고, 기타큐슈를 평정하고 쇼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며, 나아가 규슈 지바 씨의 내분에도 관여하였다.

에이쿄 11년(1439년) 규슈 원정을 마친 모치요는 야마구치로 귀환했지만, 오우치 가문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것에 불안을 느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6월 모치요가 상경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키 국의 오우치 영지를 몰수한다. 모치요는 에이쿄 12년(1440년)에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 쇼니 요시요리 · 노리요리 형제와의 화목을 주선해 주는 것으로 쇼니 씨를 존속시키고, 자신도 상경하였다. 이는 쇼니 씨와 전통적인 동맹 관계에 있던 쓰시마 소 씨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치요가 조선에 대해 쓰시마의 조선 할양을 대가로 군사 동맹을 맺고 쇼니 ・ 소 두 집안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했으나, 갑작스러운 피살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다.

2. 3. 가키쓰의 난과 죽음

에이쿄 3년(1431년) 숙부인 제11대 당주 오우치 모리미가 오토모씨쇼니씨와의 전투에서 지쿠젠에서 전사한 뒤, 오우치 집안 내부에서는 후계자를 둘러싼 항쟁이 벌어졌다. 모리미는 생전에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독과 나가토를 제외한 영지를, 동생 모리모리에게 나가토를 상속하도록 유언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모리모리가 오우치 가독과 스오, 아키의 일부 영지를 잇고, 모치요에게 나가토지쿠젠부젠을 상속하며, 일족인 오우치 미쓰요에게 이와미 니마 군과 나가토 일부를 주기로 예정했다. 하지만 오우치 가문의 중신이자 막부와의 교섭을 담당한 内藤智得가 모리미의 유지를 주장하며 모치요에게 오우치 가독을 잇게 하고, 모리모리에게 나가토와 니마 군 ・ 아키 일부를 잇게 하는 방침으로 변경하도록 막부에 제의하여 허락받았다.[2]

이에 불만을 품은 모리모리는 에이쿄 4년(1432년) 2월 10일 규슈 출진 중이던 모치요의 진영을 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미쓰요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오우치 영지를 장악했다. 모치요는 이와미의 三隅氏에게 의지하여 도망쳤으나, 고쿠진(国人衆)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음 달 야마구치로 돌아왔고, 모리모리 ・ 미쓰요는 大友持直에게 의탁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모치요를 지지하며 수리대부(修理大夫) 관직을 주었다. 한편 모치요도 막부에 오토모 지카쓰나와 기쿠치 가네토모를 각각 분고지쿠고슈고(守護)로 임명하도록 건의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에이쿄 5년(1433년) 4월, 모리모리는 부젠 국에서, 미쓰요는 교토에서 각각 피살되었다. 같은 해 3월, 막부로부터 오토모 모치나오 ・ 쇼니 미쓰사다 토벌령이 내려지자 규슈로 내려가 아키이와미이요의 고쿠진들과 고노 미치히사 ・ 오토모 지카쓰나 등과 협력하여 쇼니 미쓰사다 ・ 스케쓰구 부자를 죽이고, 오토모 모치나오와 싸워 승리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이듬해 쇼니 요시요리 ・ 오토모 모치나오가 다시 거병하자 에이쿄 7년(1435년) 재차 규슈로 가서 기타큐슈(北九州)를 평정하고 쇼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규슈 지바 씨의 내분에도 관여했다.

에이쿄 11년(1439년) 규슈 원정을 마친 모치요는 야마구치로 돌아왔으나, 오우치 세력의 급격한 확장에 불안을 느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6월, 모치요가 상경 명령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아키 국의 오우치 영지를 몰수했다. 에이쿄 12년(1440년) 모치요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에게 쇼니 요시요리 · 노리요리 형제와의 화해를 주선하여 쇼니 씨를 존속시키고 자신도 상경했다. 이는 쇼니 씨와 전통적인 동맹 관계였던 쓰시마 소 씨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일설에는 모치요가 조선에 쓰시마 할양을 대가로 군사 동맹을 맺고 쇼니 ・ 소 두 가문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아시카가 요시노리에 의해 잇시키 요시쓰라 · 도키 모치요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모치요의 신변도 위태로웠다. 그러나 가키쓰 원년(1441년) 3월, 모치요가 요시노리에 반항하던 이복동생 요시아키를 숨겨주던 사쓰마의 시마즈 다다쿠니를 설득하여 그 목을 바치게 한 것이 요시노리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신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해 6월 24일,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유키 합전 승전 축하연을 열었을 때 모치요도 요시노리를 따라 참석했다가 미쓰스케 세력에게 습격당했다. 요시노리는 암살당했고, 모치요도 중상을 입고 한 달 뒤인 7월 28일에 사망했다(가키쓰의 난). 향년 48세였다. 그의 뒤는 종제(조카라고도 함)이자 양자인 노리히로가 이었다.

모치요는 임종 시 "아카마쓰를 정벌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최고의 공양"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1]

3. 참고 문헌


  • 高坂好|고우사카 요시|高坂好일본어 저, 『아카마쓰 엔신・満祐』, 日本歴史学会 편집, 인물총서(155), 吉川弘文館社, 1970년 3월.
  • 佐藤和彦|사토 가즈히코|佐藤和彦일본어, 錦昭江|니시키 아키에|錦昭江일본어,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히구치 구니오(樋口州男) 공편, 松井吉昭|마쓰이 요시아키|松井吉昭일본어, 櫻井彦|사쿠라이 히코|櫻井彦일본어 저, 『일본 중세 내란사 인명사전』, 新人物往来社, 2007년 5월.
  • 須田牧子|스다 마키코|須田牧子일본어 저, 『중세 조선-일본 관계와 大内氏』, 東京大学出版会, 2011년 2월.
  • 平野邦雄|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일본어, 瀬野精一郎|세노 세이치로|瀬野精一郎일본어 저, 『일본 고대 중세 인명사전』, 同成社, 2006년 11월.
  • 藤井崇|후지이 다카시|藤井崇일본어 「모치요 시대의 大内氏 분국 지배 시스템」, 『사조』 59호, 2006년.
  • 藤井崇|후지이 다카시|藤井崇일본어 저, 『무로마치 시대 다이묘 권력론』, 同成社 중세사선서(14), 吉川弘文館, 2013년.

참조

[1] 서적 建内記
[2] 서적 建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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