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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후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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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니 후유스케는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무장으로, 쇼니 씨의 당주였다. 그는 아버지 쇼니 요리히사의 사위인 아시카가 다다후유에게서 이름을 받았으며, 형의 죽음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규슈에서 남조 세력과 대립하며 무로마치 막부에 규슈 단다이 파견을 요청했고, 이마가와 료슌을 지지하며 남조 세력과 전투를 벌여 다자이후를 탈환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후 료슌과의 갈등으로 1375년 미즈시마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사후 가독은 동생 쇼니 요리스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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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후유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쇼니씨
이름쇼니 후유스케(少弐冬資)
통칭마고지로(孫二郎)
계명덴안손가쿠(天岸存覚)
시대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출생엔겐(延元) 2년/겐무(建武) 4년(1337년)
사망덴주(天授) 원년/에이와(永和) 원년 8월 26일(1375년 9월 22일)
가계
아버지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형제다다스케(直資)
후유스케
요리즈미(頼澄)
요리미쓰(頼光)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의 아내
관직 및 역할
주군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2. 생애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사생아이자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양자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로부터 이름 한 자를 받아 후유스케(冬資)라고 불리게 되었다(형 다다스케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다다후유에게서 한 자를 받은 것이다).[5]

이 무렵 규슈에서는 기쿠치 씨(菊池氏)나 정서대장군 가네요시 친왕 등 남조 세력이 대두해 북조 세력(막부측)은 그에 밀리고 있었다. 후유스케의 아버지 요리히사는 쇼군 다카우지의 사생아이자 쇼군의 동생 다다요시의 양자였던 다다후유를 사위로 삼고 옹립하는 등 한때는 남조와 동조하였으나 다다후유가 몰락하자 남조와 공통의 적이었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를 격파하는 등 남조와 적대하였다.

쇼헤이(正平) 14년/엔분(延文) 4년(1359년) 지쿠고강 전투에서 기쿠치 다케미쓰 등 남조에 패해 형 다다스케가 전사하고 후유스케가 대신 요리히사의 적자가 되었다. 쇼헤이 16년/고안(康安) 원년(1361년)에 다자이후(大宰府) 우치 산성(有智山城)으로 밀려난 아버지 요리히사가 그대로 은거하면서, 가독을 이어받게 된다.[6]

당주가 된 후유스케는 오토모 씨(大友氏)나 시마즈 씨(島津氏)와 협력해 남조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으로 막부에 새로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파견을 요청하였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이를 수락하고 겐토쿠(建徳) 2년/오안(応安) 4년(1371년)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료슌)을 단다이로 파견하였다. 후유스케도 사다요를 지지해 오안 5년/분추(文中) 원년(1372년) 2월에 오우치 히로요(大内弘世)와 함께 대장을 맡게 되어 지쿠젠국(筑前国)의 다라쿠라 성(多良倉城)과 다카미 성(鷹見城)을 공격하였다.[7] 이때 후유스케는 패했으나 아키국(安芸国)의 모리 씨(毛利氏) ・ 깃카와 씨(吉川氏), 히고국(備後国)의 나가이 씨(長井氏) ・ 야마노우치 씨(山内氏), 이와미국(石見国)의 스오 씨(周布氏) 등의 협력을 얻어 두 성을 함락시키고,[7] 나아가 8월에는 남조 정서부(征西府)의 정청(政庁)으로 쓰이던 다자이후도 북조측이 점령하게 된다.[7]

덴주(天授) 원년/에이와(永和) 원년(1375년), 료슌은 기쿠치 씨의 본거지였던 히고국(肥後国) 제압을 위해 히고 미즈시마(水島)[8]로 진군하였다. 이때 료슌은 규슈의 유력한 3대 무가였던 시마즈 우지히사 ・ 오토모 지카요와 쇼니 후유스케를 소집하였으나, 우지히사와 지카요는 료슌의 소환에 응한 반면 후유스케는 응하지 않았다. 이 무렵 후유스케는 무나카타 오오구지 가문(宗像大宮司家) 소유의 사령(社領)에 대한 침탈이나 소란을 저지르며 료슌으로부터 이를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9] 료슌에게서 후유스케를 자신의 군진에 출두시키라는 명을 받은 우지히사는 양자간 대립을 우려해 후유스케를 설득했고, 후유스케는 이에 미즈시마로 와서 료슌의 군진에 출두했으나, 환영 연회 도중에 료슌의 밀명을 받은 이마가와 나카아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미즈시마의 변).

후유스케 사후 가독은 동생 요리즈미가 이었고 쇼니 일족은 다시금 남조측에 동조해 이마가와 사다요에 저항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아버지 쇼니 요리히사의 사위로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다다후유로부터 편휘를 받아 '''후유스케'''로 이름을 바꾼다.[5]

이 무렵 규슈에서는 기쿠치 씨나 정서 대장군 가네요시 친왕 등의 남조 세력이 대두하고 북조 세력(막부 측)은 밀리고 있었다. 아버지 요리히사는 한때 남조와 동조했지만, 다다후유가 몰락하자 남조와 공통의 적이었던 규슈 단다이 잇시키 노리우지를 격파하는 등 남조와 적대하게 되었다.

쇼헤이 14년/엔분 4년(1359년) 지쿠고강 전투에서 기쿠치 다케미쓰 등 남조에게 패배하고 형 다다스케가 전사하자 후유스케가 쇼니 가문의 적자가 되었다.[6] 2년 뒤인 쇼헤이 16년/고안 원년(1361년)에 다자이후 우치 산성(有智山城)으로 밀려난 아버지 요리히사가 은거하면서 가독을 상속받았다.[6]

2. 2.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과의 협력

1361년(쇼헤이 16년/고안 원년), 다자이후 우치 산성(有智山城)으로 밀려난 아버지 요리히사가 은거하면서, 후유스케는 가독을 이어받게 되었다.[6]

당주가 된 후유스케는 오토모 씨(大友氏), 시마즈 씨(島津氏)와 협력해 남조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으로, 막부에 새로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파견을 요청하였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이를 수락하고 1371년(겐토쿠 2년/오안 4년)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료슌)을 규슈 단다이로 파견하였다. 후유스케는 료슌을 지지하여, 1372년(오안 5년/분추 원년) 2월에 오우치 히로요(大内弘世)와 함께 대장을 맡아 지쿠젠국(筑前国)의 다라쿠라 성(多良倉城)과 다카미 성(鷹見城)을 공격하였다.[7] 비록 이 전투에서 후유스케는 패배했지만, 아키국(安芸国)의 모리 씨(毛利氏) ・ 깃카와 씨(吉川氏), 히고국(備後国)의 나가이 씨(長井氏) ・ 야마노우치 씨(山内氏), 이와미국(石見国)의 스오 씨(周布氏) 등의 협력을 얻어 두 성을 함락시켰다.[7] 나아가 같은 해 8월에는 남조 정서부(征西府)의 정청(政庁)이 있던 다자이후를 탈환하여 북조 측이 점령하게 되었다.[7]

2. 3. 이마가와 료슌과의 갈등 및 암살

덴주(天授) 원년/에이와(永和) 원년(1375년), 이마가와 료슌은 기쿠치 씨의 본거지였던 히고국(肥後国)을 제압하기 위해 히고 미즈시마(水島)[8]로 진군하면서, 규슈의 유력한 3대 무가였던 시마즈 우지히사, 오토모 지카요와 쇼니 후유스케를 소집하였다. 우지히사와 지카요는 료슌의 소환에 응하였으나, 후유스케는 응하지 않았다.[9]

이 무렵 후유스케는 무나카타 오오구지 가문 소유의 사령(社領)에 대한 침탈이나 소란을 저지르며 료슌으로부터 이를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기도 하였다.[9] 료슌으로부터 후유스케를 자신의 군진에 출두시키라는 명을 받은 우지히사는 양자간 대립을 우려해 후유스케를 설득했고, 후유스케는 이에 미즈시마로 와서 료슌의 군진에 출두했으나, 환영 연회 도중에 료슌의 밀명을 받은 이마가와 나카아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미즈시마의 변).

2. 4. 사후

후유스케 사후 가독은 동생 요리즈미가 이었고, 쇼니 일족은 다시금 남조 측에 동조해 료슌에게 저항하였다.[9]

참조

[1] 간행물 足利直義・直冬偏諱考 國學院大學地方史研究会
[2] 서적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3] 서적 征西将軍宮 東京宝文館
[4] 서적 今川了俊 吉川弘文館
[5] 논문 아시카가 다다요시 ・ 다다후유 헨기(偏諱) 고찰
[6] 서적 아사히 일본역사인물사전
[7] 서적 정서장군궁 도쿄호분칸
[8] 문서 지금의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치시 시치조 정
[9] 서적 이마가와 료슌 깃카와고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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