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치쿠 로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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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치쿠 로빈스는 1949년 센트럴 리그에 가입하여 1953년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될 때까지 존재했던 일본 프로 야구팀이다. 1936년 다이도쿄군으로 창단하여, 라이온군, 아사히군, 퍼시픽, 타이요 로빈스, 다이요 로빈스로 이름을 변경했다.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에서 우승했으며, 고즈루 마코토, 사나다 시게오 등의 선수들이 활약했다. 1953년 다이요 웨일스와의 합병으로 소멸되었으며, 현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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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치쿠 로빈스 - 1950년 일본 시리즈
1950년 일본 시리즈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시리즈로, 마이니치 오리온스가 쇼치쿠 로빈스를 꺾고 초대 챔피언이 되었으며, 벳토 가오루가 MVP를 수상했다. - 쇼치쿠 로빈스 - 아카미네 선풍
아카미네 선풍은 주니치 드래곤스 구단 운영, 선수 권익 보호, 일본 야구계 제도 개선에 기여했으나, 선수단 불화, 구단 운영의 어려움, 다이에이 구단 창립 실패 및 영구 추방 등 긍정적 측면과 혼란을 야기한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쇼치쿠 로빈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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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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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36년 |
해체 | 1952년 |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
이전 리그 | 일본 야구 리그(1936–1949) |
연고지 | 교토부(1952년) |
이전 구단명 | 다이 도쿄군 (1936년) 라이온 야구 클럽 (1937–1940) 아사히 야구 클럽 (1941–1944) 퍼시픽 야구 클럽 (1946) 다이요 로빈스 (1947–1949) |
별칭 | 해당 없음 |
구단 색상 | 짙은 올리브 녹색 빨간색 |
홈구장 | 기누가사 구장 |
이전 홈구장 | 시모노세키 야구장(1950–1952) |
구단 역사 | |
리그 우승 횟수 | 1회 (1950년) |
일본 시리즈 우승 횟수 | 0회 |
구단 운영 | |
모기업 | 고쿠민 신문(1936년) |
구단주 | 다무라 고마지로(1937–1952) |
감독 | 고니시 도쿠로(1936–1938, 1950, 1952) 닛타 교이치(1951–1952) |
2. 구단의 역사
쇼치쿠 로빈스는 1936년 창단된 일본 프로 야구 팀이다.
1936년 신아이치 신문(현 주니치 신문) 산하의 고쿠민 신문을 모회사로 하여 '''대도쿄군'''(大東京軍)으로 창단되었다.[2] 이후 경영난을 겪으며 여러 차례 팀명이 바뀌고, 스폰서도 변경되었다. 1937년에는 라이온(고바야시 상점)을 스폰서로 맞아 '''라이온군'''으로, 1941년에는 '''아사히군'''(朝日軍)으로 팀명을 변경했다.[4][5]
전쟁 이후 1946년에는 '''퍼시픽'''으로 리그에 복귀했고,[7] 1947년에는 '''타이요 로빈스''', 1948년에는 '''다이요 로빈스'''로 팀명을 변경했다.[7] 1949년에는 교토 신문과의 제휴를 통해 교토로 진출하여 '''다이요 교토 로빈스'''라고 칭하기도 했다.[8]
1949년 시즌 후, 일본 야구 기구가 출범하면서 센트럴 리그에 합류했고, 팀의 지분 일부가 쇼치쿠에 매각되어 '''쇼치쿠 로빈스'''가 되었다. 1950년에는 센트럴 리그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에게 패했다.[7]
1952년 시즌 승률이 3할을 넘지 못해, 리그의 결정에 따라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하게 되었다.[7] 1953년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하여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가 되었고, 이는 현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 중 하나이다.[12]
2. 1. 전쟁 이전 (1936년 ~ 1945년)
1936년 2월 15일 신아이치 신문(현 주니치 신문) 산하의 고쿠민 신문을 모회사로 하여 '''대도쿄군'''(大東京軍)이 창단되었다. 신아이치 신문의 주필 다나카 히토시는 나고야군과 함께 '대일본 야구 연맹'이라는 프로 리그를 결성하려 했으나, 이 구상은 좌절되고 쇼리키 마쓰타로가 구상한 일본 직업 야구 연맹에 나고야군과 함께 가입했다. 구단 회장으로는 전 경시총감 미야타 미쓰오가 취임했고, 미야타의 지명으로 전 국민신문 기자 스즈키 류지가 구단 상무(대표)가 되었다.[2]신아이치 신문사가 실질적으로 두 개의 구단을 보유하게 되면서 자금난을 겪게 되자, 1936년 중 고니시 도쿠로의 중개로 교도 인쇄 전무 다하시 마쓰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하시는 재벌의 아들이었고, 인쇄업 외에 돈을 쓰는 것에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래서 아내와 자매였던 오사카시에서 섬유 상사 다무라 고마 상점(1943년에 다무라 고마로 개칭)을 경영하는 다무라 고마지로를 경영에 참여시켰다. 다하시는 '대도쿄군'이라는 이름으로는 스폰서와의 타이업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37년 8월에 고바야시 상점(현 라이온)을 스폰서로 맞이해 팀명을 '''라이온군'''으로 변경했다.[4] 다하시는 신문 광고를 적극적으로 내는 회사를 스폰서 후보로 고려했고, 아지노모토, 와카모토 제약, 오미 형제사도 후보에 올랐으나, 라이온 치약 본점만이 유니폼에 'LION'을 표기하는 조건으로 스폰서를 수락했기 때문에 최종 결정되었다.
1937년 가을 시즌 종료 후, 다하시는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다무라는 자유롭게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팀을 다무라에게 양도하고 오사카로 이전했다. 다무라는 오사카 타이거스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라이온군'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1940년 시즌 도중, 구단명을 일본어로 변경하라는 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졌다. 라이온군은 스폰서인 고바야시 상점으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당시 선수 연봉의 절반이 고바야시 상점의 지원으로 충당) 팀명 변경은 스폰서 계약 해지로 이어져 구단 경영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4] 다른 구단들이 시즌 도중 구단명을 변경하는 가운데, 라이온군은 '라이온은 일본어'라고 주장하며 1940년 시즌을 마쳤다. 결국 1941년부터 팀명을 '''아사히군'''(朝日軍)으로 변경하고,[5] 고바야시 상점과의 스폰서 계약은 종료되었다.[4] 1941년 시즌 중, 스즈키 류지는 일본 야구 연맹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아사히군에서 물러났다.
다무라가 팀을 맡은 후 팬이 늘고 경영 상태도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손실을 기록했다.
2. 2. 전쟁 이후 (1946년 ~ 1952년)
1945년 종전 후, 하시모토는 다무라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이유로 독단으로 팀을 '골드 스타'로 바꾸어 일본 야구 연맹에 가입을 신청했다.[7] 다무라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스즈키 류지의 설득으로 새로운 팀을 만들게 되었다.1946년 구단 이름을 '''퍼시픽'''(パシフィック)으로 바꾸어 리그에 복귀했다(당시 회사 이름은 '''아사히 야구 클럽'''(朝日野球倶楽部)).[7] 애칭은 '다이헤이'(太平)로 이 때문에 '''다이헤이 퍼시픽'''(太平パシフィック)이라고도 했다. 이 해, 팀은 빅터 스타핀과 같은 유명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여 4경기를 몰수당하기도 했다.
1947년 닉네임 도입으로 구단명을 다시 '''타이요 로빈스'''(太陽ロビンス)로 바꾸었다. '타이요'는 다무라 고마가 설립한 자회사 '타이요 레이온'에서, '로빈스'는 오너인 다무라의 이름 중 '고마'에서 '고마도리(되새) = 로빈스'를 연상해 나오게 된 것이다.[7]
1948년에는 '야구는 점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야구 선수는 살찌면 안 된다'와 같은 다무라의 생각에서 '타이요'에서 점을 하나 뺀 '''다이요 로빈스'''(大陽ロビンス)로 구단 이름을 바꾸었다.[7] 그 때 다무라는 오사카 구장 건설을 계획했으나, 오사카 타이거스, 한큐 브레이브스, 난카이 호크스의 반발과 일본 야구 연맹의 결정으로 무산되었다.
1949년 교토 신문과의 제휴를 통해 교토로 진출하여 '''다이요 교토 로빈스'''라고 칭하기도 했다.[8]
1949년 시즌 후, 일본 야구 기구가 출범하면서 로빈스는 센트럴 리그에 합류하게 되었고, 팀의 지분 일부가 쇼치쿠에 매각되어 '''쇼치쿠 로빈스'''가 되었다.
1950년 쇼치쿠 로빈스는 개명 첫 해에 센트럴 리그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에이스 사나다 시게오(시게조)는 39승을 거두었고, 주포 고즈루 마코토는 당시 일본 신기록인 시즌 51홈런을 기록했다. 팀은 수폭 타선이라고 불린 강력한 타선을 자랑했다.[7]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1951년 다무라 고마의 경영 악화가 표면화되면서, 오프 시즌에 사나다 시게오 등 주축 선수들을 방출하게 되었다.[7]
1952년 시즌에는 팀 운영비 삭감으로 전력이 더욱 약화되었다.[7] 게다가 시즌 승률이 3할을 넘지 못해, 리그의 결정에 따라 다이요 호에루즈와 합병하게 되었다.
2. 3. 다이요 웨일스와의 합병 (1953년)
1952년에 쇼치쿠 로빈스는 84경기를 패하며 승률 .300 미만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 센트럴 리그 규정에 따라 승률이 낮은 팀은 해체되거나 다른 팀과 합병해야 했다. 이에 따라 쇼치쿠 로빈스는 1953년 1월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하여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가 되었다. 이 구단은 현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 중 하나이다.[12]합병은 대등한 조건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이요 웨일스가 쇼치쿠 로빈스를 흡수 합병하는 형태였다. 다이요 어업이 단독으로 구단 경영을 지속했고, 순위, 개인 성적 등의 기록도 다이요 측의 것을 승계했기 때문이다.[12] 따라서 다이도쿄군 - 쇼치쿠 로빈스의 계통은 "소멸 구단"으로 취급되었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구단 역사에서 쇼치쿠 로빈스의 기록은 방계로 취급되어 일반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1953년 2월 신오사카 호텔에서 열린 합병 회견에서, 교토 신문은 "이번 합병은 전면적으로 쇼치쿠 측의 패배"라고 기술하며, 쇼치쿠 측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이유로 다음 사항들을 언급했다.[8]
- 본거지를 오사카 구장으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3]
- 고즈루 마코토 등 쇼치쿠의 주력 선수가 신 구단에 잔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3. 팀의 특징
쇼치쿠 로빈스는 전쟁 이전과 중간에 쓰보우치 미치노리, 기도 가즈오, 곤도 히사시 등이 분투했지만 선수층이 얇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야시 야스오의 혹사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고즈루 마코토, 이와모토 요시유키, 오오카 도라오, 가나야마 지로 등으로 구성된 '수소 폭탄 타선'은 득점력이 뛰어났고, 사나다 주조나 오시마 노부오 같은 좋은 투수들을 보유했던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다른 해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36년에는 춘계, 하계, 추계 3시즌 제였는데, 다이도쿄군은 5승 34패 3무의 성적을 기록하며 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연중 연승이 없었던 것은 쇼치쿠가 유일했으며 승률은 .126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해에는 지역마다 열린 리그와 토너먼트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1시즌 승률로 계산하지 않는다.[1] 1936년 9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는 16연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1리그 시대 최다 연패 기록이다. 이 기록은 1970년 야쿠르트 아톰스가 타이를 기록했지만, 1998년 퍼시픽 리그의 지바 롯데 마린스가 18연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62년간 깨지지 않았다.[1]
1946년에는 몰수 경기를 4차례나 당하기도 했다.
다이요와 합병 이후인 1953년 시즌은 운영 회사 통합이 늦어져 쇼치쿠 로빈스를 운영하는 시모노세키시의 다이요 구단과 본 팀의 운영 회사인 쇼치쿠 구단(교토)이 한 팀을 운영하는 변칙적인 방식을 이용했으며, 선수 연봉도 구 다이요 측, 구 쇼치쿠 측으로 별도로 지급되었다. 시즌 이후 간신히 합병이 완료되었다(대등 합병 형식으로 다이요 쇼치쿠 구단이 설립되었다).
4. 역대 감독
연도 | 감독 | 비고 |
---|---|---|
1936년 춘계 | 나가이 다케오[17] | 도중 해임 |
1936년 춘계 ~ 1936년 추계 | 이토 가쓰조[18] | 춘계 도중 ~ 추계 도중 |
1936년 추계 ~ 1938년 춘계 | 고니시 도쿠로[19] | (제1차) |
1938년 추계 ~ 1940년 | 다카다 가쓰오 | |
1941년 ~ 1943년 | 다케우치 요시카즈[20] | |
1944년 | 쓰보우치 미치노리 | |
1946년 ~ 1947년 | 후지모토 사다요시[21][22] | |
1948년 | 하세가와 노부요시[23] | |
1949년 | 이시모토 슈이치 | |
1950년 | 고니시 도쿠로[24] | (제2차), 우승 |
1951년 ~ 1952년 | 닛타 교이치 |
5. 역대 홈구장
- 스자키 구장 (1936년 ~ 1947년)
-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1948년 ~ 1949년) ※당시 보호 지역은 교토
- 기누가사 구장 (1949년 ~ 1952년) ※1951년부터는 실질적으로 오사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 스자키 구장 1936년 ~ 1937년
- 특정 본거지 없음 1938년 ~ 1947년 (주로 고라쿠엔 구장, 한신 고시엔 구장,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1948년 (보호 지역은 교토)
- 기누가사 구장 1949년 ~ 1951년 (1951년부터 오사카 스타디움이 사실상 본거지, 기누가사 구장에서의 경기는 1949년 41경기, 1950년 4경기, 1951년 1경기[25])
- 교토시 니시쿄고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 1952년 (오사카 구장이 사실상 본거지, 니시쿄고쿠 구장에서의 경기는 6경기)[25]
6. 팀 성적·기록
1936년 춘계, 하계, 추계 3시즌 동안 대도쿄군은 5승 34패 3무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연승을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다. 연중 연승이 없었던 것은 쇼치쿠가 유일했으며, 승률은 .126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해는 지역별 리그와 토너먼트가 불규칙하게 진행되어 1시즌 승률로 계산하지 않는다.
1936년 9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 16연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1리그 시대 최다 연패 기록이다. 이 기록은 1970년 야쿠르트 아톰스가 타이를 기록했고, 1998년 퍼시픽 리그의 지바 롯데 마린스가 18연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62년간 깨지지 않았다.
전쟁 이전과 중간에는 쓰보우치 미치노리, 기도 가즈오, 곤도 히사시 등이 분투했으나 선수층이 얇아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야시 야스오의 혹사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고즈루 마코토, 이와모토 요시유키, 오오카 도라오, 가나야마 지로 등은 '수소 폭탄 타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사나다 주조나 오시마 노부오와 같은 좋은 투수를 보유했던 1950년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외에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1946년에는 몰수 경기를 4차례나 당하기도 했다.
다이요와 합병 이후인 1953년 시즌은 운영 회사 통합이 늦어져 쇼치쿠 로빈스를 운영하는 시모노세키시의 다이요 구단과 본 팀의 운영 회사인 쇼치쿠 구단(교토)이 한 팀을 운영하는 변칙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선수 연봉도 구 다이요 측과 구 쇼치쿠 측으로 별도로 지급되었다. 시즌 이후 간신히 합병이 완료되었다(대등 합병 형식으로 다이요 쇼치쿠 구단이 설립되었다).
- 리그 우승: 1회(1950년)
- A클래스: 3회(1942년 ~ 1943년, 1950년)※
- B클래스: 14회(1937년 춘계 ~ 1941년, 1944년 ~ 1949년, 1951년 ~ 1952년)
- 최다 승리: 98승(1950년)
- 최다 패배: 84패(1952년)
- 최다 무승부: 7무(1943년)
- 최고 승률: .737(1950년)
- 최저 승률: .192(1936년 추계)
- 통산 성적: 647승 896패 57무
※ 본래 A클래스는 4팀이지만, 1942년에는 쇼치쿠가 한큐군과 동률 4위를 차지해 A클래스가 5팀이 되었다.
연도 | 팀명 | 승 | 패 | 무 | 승률 | 순위 | 게임차 |
---|---|---|---|---|---|---|---|
1936년 (춘계) | 다이도쿄 | 0 | 13 | 1 | .000 | 7 | N.A. |
1936년 (추계) | 5 | 21 | 2 | .192 | 7 | 17 | |
1937년 (춘계) | 21 | 31 | 4 | .404 | 6 | 19 | |
1937년 (추계) | 라이온 | 19 | 29 | 1 | .396 | 6 | 20 |
1938년 (춘계) | 9 | 26 | 0 | .257 | 8 | 20 | |
1938년 (추계) | 19 | 20 | 1 | .487 | 6 | 11 | |
1939년 | 33 | 58 | 5 | .363 | 8 | 32.5 | |
1940년 | 24 | 76 | 4 | .240 | 9 | 50 | |
1941년 | 아사히 | 29 | 59 | 1 | .298 | 8 | 37 |
1942년 | 49 | 50 | 4 | .495 | 4 | 23.5 | |
1943년 | 41 | 36 | 7 | .532 | 3 | 11 | |
1944년 | 12 | 22 | 1 | .353 | 5 | 15.5 | |
1946년 | 퍼시픽 | 42 | 60 | 3 | .412 | 8 | 21.5 |
1947년 | 타이요 로빈스 | 50 | 64 | 5 | .439 | 8 | 28 |
1948년 | 61 | 74 | 5 | .452 | 6 | 25.5 | |
1949년 | 52 | 81 | 0 | .391 | 8 | 33 | |
7. 기타 기록
- 1936년 춘계, 하계, 추계 3시즌 동안 쇼치쿠 로빈스는 연승을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다. 이는 유일한 사례이며, 당시 승률은 .126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해는 지역별 리그와 토너먼트가 혼재되어 1시즌 승률로 계산하지 않는다.
- 1936년 9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 쇼치쿠 로빈스는 16연패를 기록했다. 이는 1리그 시대 최다 연패 기록으로, 1970년 야쿠르트 아톰스가 타이를 기록했고, 1998년 지바 롯데 마린스가 18연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62년간 유지되었다.
- 1946년에는 몰수 경기를 4차례나 당했다.
- 최소 경기 차: 11경기 (1938년 추계, 1943년)
- 최대 경기 차: 50경기 (1940년)
구분 | 기록 | 연도 |
---|---|---|
최다 홈런 | 179개 | 1950년 |
최소 홈런 | 0개 | 1936년 가을 |
최고 타율 | .287 | 1950년 |
최저 타율 | .187 | 1940년 |
최고 평균자책점 | 1.41 | 1942년 |
최저 평균자책점 | 4.59 | 1949년 |
8. 주요 선수
포지션 | 선수명 | 비고 |
---|---|---|
투수 | 쓰보우치 미치노리 | 1941년, 1942년 도루왕 |
투수 | 기도 가즈오 | 1940년 수위 타자,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
투수 | 곤도 히사시 | |
투수 | 하야시 야스오 | 1942년 최우수 평균자책점 |
투수 | 사나다 시게오 | 1946년 최다 탈삼진, 1948년, 1950년 베스트 나인, 1950년 최다승, 최우수 승률 |
투수 | 오시마 노부오 | 1950년 최우수 신인,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우수 승률 |
포수 | 아라카와 쇼지 | 1950년 베스트 나인 |
타자 | 고즈루 마코토 | 1950년 최우수 선수, 홈런왕, 타점왕, 베스트 나인 |
타자 | 이와모토 요시유키 | 1950년, 1951년 베스트 나인 |
타자 | 오오카 도라오 | |
타자 | 가나야마 지로 | 1950년, 1952년 도루왕 |
9. 구단가
쇼치쿠 로빈스 시절에는 구단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다이요 로빈스 시절에 만들어진 사에키 타카오 작사, 하이타 하루히코 작곡의 노래인 "빛나라 로빈스"가 있었다.[14] 가사 중 "다이요"를 "쇼치쿠"로 바꾸면 쇼치쿠 로빈스 시절에도 부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 얼마나 불렸는지는 불분명하다. 타무라코마의 사사에는 "레코드도 현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10. 구단 깃발 변천
기간 | 깃발 |
---|---|
1947년 ~ 1948년 | 빨간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Robins" |
1949년 | 빨간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Robins" |
1950년 ~ 1951년(올스타전 전) | 빨간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Robins". 그 위에 쇼치쿠 영화의 사장. |
1951년(올스타전 후) ~ 1953년 | 흰색 바탕에 빨간색 글씨로 "Robins". 그 위에 쇼치쿠 영화의 사장. |
11. 유니폼 변천
- '다이도쿄군' 시대에는 필기체 'D'를 왼쪽 가슴에 부착한 유니폼을 사용했다.
- '라이언군' 시대에는 가슴에 'LION' 로고가 들어가고, 왼쪽 소매에는 사자 일러스트가 부착되었다.
- 타무라코마가 섬유 상사였기 때문에, 이 회사가 오너였던 시대에는 물자 부족 시대에도 다른 구단보다 질 좋은 유니폼을 사용했다.[1]
- 1940년까지는 '라이언군'이었지만, 적성어 배제가 리그의 방침이 되었기 때문에, 그 해 가을의 대항전에서는 'LION'이라는 로고타입을 삭제하고 팀명이 없는 유니폼을 사용했다.
- '아사히군' 시대에는 '朝'를 가슴 문자로 사용했으며, 획에 '빨간 원'을 넣은 디자인으로 했다.
- '퍼시픽' 시대에는 'PACIFIC' 로고를 사용했다.
- 1950년, 쇼치쿠가 된 이 해에는, 전년도에 일본에 온 샌프란시스코 실스의 유니폼을 모델로 하여 왼쪽 가슴에 'Robins' 로고가 작게 들어간 것을 사용했다. 이와는 별도로 일반적인 가슴 전체에 로빈스 로고가 들어간 것도 사용하고 있다. 모자 마크는 쇼치쿠 영화의 사장을 그대로 사용, 왼쪽 어깨에는 곤줄박이 일러스트가 들어갔다. 또한 당시로서는 드물게 바지 허리 부분에 작게 등번호가 들어가 있었다.
- 1951년에는 전년도 센트럴 리그를 제패한 것을 기념하는 엠블럼이 왼쪽 어깨의 곤줄박이 마크 아래에 들어갔다.
12. 소멸 구단으로서의 취급
쇼치쿠 로빈스가 구단 경영에서 철수한 후, 다이요가 그대로 단독으로 구단 경영을 지속했고, 합병 시 순위, 개인 성적 등의 각종 기록도 다이요 측의 것을 승계했다.[12] 따라서 쇼치쿠 로빈스와 다이요 웨일스의 합병은 완전한 대등 형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다이요 웨일스에 흡수 합병된 형태가 되어, 다이도쿄군 - 쇼치쿠 로빈스의 계통은 "소멸 구단"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 및 신 다이요 웨일스의 후신에 해당하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구단사에서 쇼치쿠 로빈스의 결성 연도나 우승 횟수 및 기타 기록은 방계 취급을 받아 통상 포함되지 않으며, 요코하마 DeNA 구단은 초대 센트럴 리그 우승 구단의 후신이면서 "초대 센트럴 리그 우승팀"이라고 칭할 수 없게 되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에서는 쇼치쿠 로빈스를 (전신 구단인 다이도쿄군, 라이온군, 아사히군, 퍼시픽, 타이요 로빈스, 다이요 로빈스의 모든 시대를 포함하여) "현재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전신"이라고 표기·소개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쇼치쿠 로빈스는 현재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구성하는 합병 구단 중 하나이며, 게다가 1953년 합병 당시에는 진정한 대등 합병이었으므로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다이요 웨일스는 1950년에 쇼치쿠와 무관하게 창립되었고, 그로부터 3년간 센트럴 리그에서 쇼치쿠와 다이요는 병립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및 전신인 신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공식 구단사에서는 방계 전신이라는 위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전신"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53년 2월에 신오사카 호텔에서 열린 쇼치쿠·다이요 어업 합동 합병 회견에 대해, 2월 8일의 교토 신문은 "이번 합병은 전면적으로 쇼치쿠 측의 패배로, 프로 야구계의 혜성이라고 불린 다무라 고마지의 발언력도, 잠정적으로 로빈스의 닉네임을 남긴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쇼치쿠 측이 주도권을 잡지 못했던 요인으로 "본거지를 지금까지의 실적에서 오사카 구장으로 할 것[13]" "고즈루 마코토 등 쇼치쿠의 주력 선수가 신 구단 = 요쇼에 잔류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등을 들고 있으며, 사실상 다이요가 흡수 합병한 것과 같은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8]
참조
[1]
웹사이트
Japan's First Black Baseball Player: Eleven Years Before Jackie Robinson, Tokyo Signed a Black Ace Pitcher
https://medium.com/c[...]
2014-10-07
[2]
문서
鈴木の回顧録によると、東京巨人軍が財界、東京セネタースが政界(貴族院)をバックとしたため、國民新聞が「うちは官界をバックにする」という意向で宮田を選んだという。
[3]
서적
出版文化人物事典――江戸から近現代・出版人1600人
日外アソシエーツ
2013-06-25
[4]
웹사이트
プロ野球(戦前編)【ライオンの歴史・ライオンミュージアム】
https://www.lion.co.[...]
ライオン
2021-01-02
[5]
서적
プロ野球ユニフォーム物語
2021-01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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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イオン
2021-01-02
[7]
문서
サッカー日本代表選手の橋本英郎の祖父。
[8]
웹사이트
メルマガコラム_京都でのプロ野球公式戦開催略史
https://www.pref.kyo[...]
京都府
[9]
문서
「関西相撲協会」という団体は詳細不明。春秋園事件で大日本相撲協会を脱退した力士が作った大日本関西角力協会があるが、1937年に解散している。ここでは中野晴行の『球団消滅』や永井良和・橋爪紳也『南海ホークスがあったころ』(紀伊國屋書店、2003年)の記述に従う。
[10]
문서
近鉄は結果的にパシフィック・リーグ初年度から3年連続最下位となる。
[11]
뉴스
朝日新聞
朝日新聞
1952-10-18
[12]
문서
もしも合併時に大東京から松竹の記録を引き継いでいたら、松竹との共同経営解消時に「(旧)大洋ホエールズ」が消滅球団扱いとなり「(新)大洋ホエールズ」は経営者と名称が同一なだけの別の系譜となるところだった。
[13]
문서
ただし実際には大阪球場を本拠登録しており過半数は同球場で主管している
[14]
웹사이트
大陽ロビンス
http://www.ritomo.jp[...]
[15]
웹사이트
ライオン軍
http://www.ritomo.jp[...]
[16]
문서
1936年春、秋は順位を定めなかったが、勝率では最下位であった。
[17]
문서
開幕前に解任。
[18]
문서
1936年秋はシーズン途中で辞任。
[19]
문서
ここからライオン軍。
[20]
문서
ここから朝日軍。
[21]
문서
ここからパシフィック。
[22]
문서
ここから太陽ロビンス。
[23]
문서
ここから大陽ロビンス。
[24]
문서
ここから松竹ロビンス。
[25]
문서
ここでは自前の球場としての意味。現在用いられている意味で専用球場が定義され、保有が義務付けられたのは、日本プロフェッショナル野球協約が発効する1951年6月以降。
[26]
문서
一時期サンケイアトムズのオーナー企業のひとつだったフジテレビジョンの創業には松竹も関与し、大株主にも名を連ねていたが、その後大半の株式を譲渡し、持株会社のフジ・メディア・ホールディングスに対する少数株主とな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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