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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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도군은 조선 제2대 정종의 7남으로, 숙의 윤씨를 어머니로 두었다. 1430년 원윤에 책봉되었으며, 1444년 명선대부 수도정에 이르렀다. 1449년 박만 등이 연루된 사건으로 전라도 담양군으로 유배를 가던 중 용인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에 있었으며, 순조 때 포천시 소흘읍으로 이장되었다.
조선 제 2대 정종의 7남으로 생모는 숙의 윤씨(淑儀尹氏)인 해평 윤씨이다. 정부인으로는 군부인 여산 송씨(郡夫人 礪山宋氏)이다. 자녀로는 정부인 송씨가 낳은 장남 어산부정 검(語山副正 儉)과 차남 동림부정 암(東林副正 巖), 3남 풍산부정 외(豊山副正 畏)와 딸이 있다.[1]
부왕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이며, 모친은 숙의 윤씨이다. 정비는 여성군부인 여산 송씨로 부사(府使) 증이판(贈吏判) 송계성(宋繼性)의 딸이다. 슬하에 어산부정 이검(語山副正 李儉), 동림부정 이암(東林副正 李巖), 풍산부정 이외(豊山副正 李畏) 3남과 안동 김씨 김선손(金善孫)에게 출가한 1녀를 두었다.
[1]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수도군
http://people.aks.ac[...]
2012-01-29
2. 생애
오랫동안 작위가 없다가 1430년 원윤(元尹)에 책봉되었다.[2] 1431년 이녹생(李祿生) 등과 함께 연고가 있다는 이유를 대고 종학(宗學)에 나아가지 않아 종부시가 세종에게 이를 보고하였다.[3]
1433년에는 허리 아래가 아프고 저리다는 이유로 반열에 참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부시의 탄핵을 받았다.[4] 1444년 명선대부 수도정에 책봉되었다.[5]
1449년 2월 박만(朴萬)·원생(元生) 등이 수도정(守道正) 이덕생(李德生)의 집에 숨어 살며 또 소뼈를 그의 집 뒷편 뜰에 묻어두고 감추었다가 적발되었다.[6] 이 일로 그해 7월 4일 전라도 담양군으로 유배되었다.[7] 7월 10일 유배지로 가던 길에 용인(龍仁)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8]
2. 1. 초기 생애 및 왕족으로서의 삶
정종의 7남으로 생모는 숙의 윤씨(淑儀尹氏)인 해평 윤씨이다. 정부인으로는 군부인 여산 송씨(郡夫人 礪山宋氏)이다. 자녀로는 정부인 송씨가 낳은 장남 어산부정 검(語山副正 儉)과 차남 동림부정 암(東林副正 巖), 3남 풍산부정 외(豊山副正 畏)와 딸이 있다.[1]
오랫동안 작위가 없다가 1430년 원윤(元尹)에 책봉되었다.[2] 1431년 이녹생(李祿生) 등과 함께 연고가 있다는 이유를 대고 종학(宗學)에 나아가지 않아 종부시가 세종에게 이를 보고하였다.[3]
1433년에는 허리 아래가 아프고 저리다는 이유로 반열에 참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부시의 탄핵을 받았다.[4] 1444년 명선대부 수도정에 책봉되었다.[5]
1449년 2월 박만(朴萬)·원생(元生) 등이 수도정(守道正) 이덕생(李德生)의 집에 숨어 살며 또 소뼈를 그의 집 뒷편 뜰에 묻어두고 감추었다가 적발되었다.[6] 이 일로 그해 7월 4일 전라도 담양군으로 유배되었다.[7] 7월 10일 유배지로 가던 길에 용인(龍仁)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8]
2. 2. 불미스러운 사건 연루 및 유배
정종의 7남으로 생모는 숙의 윤씨(淑儀尹氏)인 해평 윤씨(海平尹氏)이다. 정부인으로는 군부인 여산 송씨(郡夫人 礪山宋氏)이다. 자녀로는 정부인 송씨가 낳은 장남 어산부정 검(語山副正 儉)와 차남 동림부정 암(東林副正 巖), 3남 풍산부정 외(豊山副正 畏)와 딸이 있다.[1]
오랫동안 작위가 없다가 1430년(세종 13) 원윤(元尹)에 책봉되었다.[2] 1431년 이녹생(李祿生) 등과 함께 연고가 있다는 이유를 대고 종학(宗學)에 나아가지 않는다 하여 종부시가 세종에게 이를 보고하였다.[3]
1433년에는 허리 아래가 아프고 저리다는 이유로 반열에 참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부시의 탄핵을 받았다.[4] 1444년(세종 26) 명선대부 수도정에 책봉되었다.[5]
1449년(세종 31년) 2월 박만(朴萬)·원생(元生) 등이 수도정(守道正) 이덕생(李德生)의 집에 숨어 살며 또 소뼈를 그의 집 뒷편 뜰에 묻어두고 감추었다가 적발되었다.[6] 이 일로 그해 7월 4일 전라도 담양군으로 유배되었다.[7] 7월 10일 유배지로 가던 길에 용인(龍仁)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8]
2. 3. 사망과 묘소
수도군은 1449년 7월 10일 유배지로 가던 길에 용인에서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미아리에 있었다. 고종 때 가서 군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순조 때 후손들이 묘소를 포천군 소흘면 무림리(후일의 포천시 소흘읍 무림2리 258-12번지 산)로 이장하였다. 묘소 아래에는 재실 묵은사와 백색 대리석으로 된 신도비가 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참조
[2]
세종실록
세종 12년 4월 3일 계유 2번째기사
1430-04-03
[3]
세종실록
세종 13년 4월 8일 임인 1번째기사
1431-04-08
[4]
세종실록
세종 15년 8월 16일 병신 5번째기사
1433-08-16
[5]
세종실록
세종 26년 7월 1일 무신 2번째기사
1444-07-01
[6]
세종실록
세종 31년 2월 27일 무인 1번째기사
1449-02-27
[7]
세종실록
세종 3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1449-07-04
[8]
세종실록
세종 31년 7월 10일 무자 3번째기사
1449-07-10
[9]
고종실록
고종 9년 3월 23일 정미 3번째기사
187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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