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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스 찬드라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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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1897년 벵골에서 태어난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영국 유학 후 인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인도 국민 회의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보스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에 반대하여 무력 투쟁을 주장했으며, 파시즘에 매료되어 권위주의적 통치를 옹호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및 일본과 협력하여 인도 독립을 시도했으나, 1945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보스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그를 기리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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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스 찬드라 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치 경력
개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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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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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1897년 영국령 인도 컷탁에서 태어나 영국식 교육과 인도 전통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캘커타 대학교 프레지덴시 칼리지 재학 중 영국인 교수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했으나, 이후 스코틀랜드 처치 칼리지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으로 건너가 인도 공무원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영국 식민 지배에 봉사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자격을 포기하고 1921년 인도로 돌아와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귀국 후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에 참여했으나, 간디의 비폭력주의 노선에 비판적이었고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 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24년 캘커타 시 행정부 간부로 활동하다 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미얀마로 유배되기도 했다. 석방 후 1930년 캘커타 시장에 선출되었으나 급진적인 성향 때문에 곧 해임되었다. 이 시기 파시즘권위주의적 근대화 모델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건강 문제로 유럽에 체류하던 중 오스트리아 여성 Emilie Schenkl|에밀리 쉔클eng과 비밀리에 결혼하여 딸 Anita Bose Pfaff|아니타 보스 프파프eng를 두었다.[57]

1938년 마하트마 간디의 추천으로 인도 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즉각적인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 노선으로 인해 간디 및 당내 온건파와 갈등을 겪었다. 1939년 간디가 지지한 후보를 누르고 의장에 재선되었으나, 당내 갈등 심화로 결국 사임하고 전인도 전진동맹을 결성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가택 연금했다.

2. 1. 초기 생애 (1897-1921)

1757년~1803년 영국령 벵골의 확장. 컷탁은 콜카타 남서쪽 약 지점이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1897년 1월 23일 당시 영국령 인도 벵골 주에 속했던 컷탁(현재 오디샤 주)에서 벵골 출신 부모 프라바티 보스와 자키나트 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자키나트 보스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정부 플리더였으며, 영국 정부에 충성하면서도 언어와 법률 문제에 꼼꼼했다. 그는 캘커타 외곽 출신으로 자수성가했지만, 매년 두르가 푸자 기간에는 고향 마을을 찾는 등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영국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도 했다. 어머니 프라바티는 가정의 중심으로, 14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수바스는 그중 아홉 번째 아이이자 여섯 번째 아들이었다. 그녀는 힌두교 여신 두르가칼리를 숭배하고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이야기를 들려주며 벵골 종교 노래를 부르는 등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다.

1905년경 보스 가족. 서 있는 사람 중 중앙이 형 사랏 찬드라 보스, 맨 오른쪽이 8세의 수바스 보스이다.


보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섯 살 위 형들을 따라 1902년 1월 컷탁의 침례교 선교부가 운영하는 프로테스탄트 유럽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대부분 유럽인이나 앵글로 인디언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교육과정은 영어, 라틴어, 성경, 영국 지리 및 역사 등 영국 중심이었으며 인도 언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이는 아들들이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여 영국인 사회에 쉽게 접근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의도였다. 집에서는 벵골어만 사용하고 어머니로부터 힌두교 문화를 접했던 보스에게 학교 환경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다른 소년들과 어울리기보다 정원을 가꾸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선호했다. 바쁜 아버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느꼈지만, 아버지의 영문학에 대한 열정은 여러 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09년, 12세의 보스는 형들을 따라 컷탁의 래번쇼 컬리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는 벵골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고, 베다우파니샤드 같은 힌두 경전 사상도 접할 수 있었다. 서구식 교육을 받으면서도 인도 전통 의복을 입고 종교적 사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벵골 신비주의자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와 그의 제자 스와미 비베카난다, 그리고 뱅킴 찬드라 차터지의 소설 ''아난다 마트''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학업에도 충실하여 1912년 캘커타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1851년의 캘커타 프레지덴시 칼리지. 보스는 1913년 입학했으나 1916년 퇴학당했다.


1913년, 보스는 다시 형들을 따라 벵골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던 캘커타 프레지덴시 칼리지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칸트, 헤겔, 베르그송 등 서양 철학에 심취했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 헤만타 쿠마르 사르카르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종교적 탐구를 이어갔다. 1914년 여름방학에는 영적 스승(구루)을 찾아 함께 북인도를 몇 달간 여행하기도 했으나, 가족에게 알리지 않아 가출로 오해받았다. 여행 중 장티푸스에 걸려 돌아왔을 때 부모는 크게 상심했고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형 사랏 찬드라 보스의 중재로 갈등은 봉합되었고, 보스는 다시 학업과 토론, 학생 언론 활동에 몰두했다.

1916년 2월, 프레지덴시 칼리지에서 영국인 역사 교수 E. F. 오이튼(E. F. Oaten)이 학생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이튼 교수가 평소 인도 문화에 대해 무례한 발언을 하고 학생들을 거칠게 다뤘다는 주장과, 학생들이 수업 중 소란을 피웠다는 교수의 주장이 엇갈렸다. 일부 학생들이 계단에서 오이튼 교수를 둘러싸고 샌들로 때린 후 달아났는데, 보스는 이 사건의 주모자 혹은 가담자로 지목되었다. 오이튼 교수는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했지만, 다른 교직원이 보스를 목격했다는 증언과 학생들 사이의 소문이 증거로 채택되었다. 결국 보스는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캘커타 대학교에서도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캘커타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가족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퇴학 처분은 유지되다가 1917년 7월 20일, 캘커타 대학교 심의회에서 다른 대학으로의 복학을 허가했다. 보스는 캘커타 스코틀랜드 처치 칼리지에 입학하여 1918년 철학과를 1등으로 졸업했다 (캘커타 대학교 전체 철학과 학생 중 2위).

1920년 영국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보스(서 있는 사람 중 오른쪽).


대학 졸업 후, 아버지의 권유로 1919년 10월 20일 영국으로 건너가 인도 공무원 시험(ICS)을 준비했다. 동시에 캠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에 입학하여 정신 및 도덕 과학 트리포스를 공부했다. 대학원에서는 근대 유럽 국제 관계에서의 군사력 역할 등을 연구하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타협 없는 이상주의에 감명받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1920년 8월, 6명을 뽑는 ICS 예비시험에서 4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1921년 최종 시험을 앞두고 보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식민지배 체제 하의 공무원으로서 영국 정부에 봉사하는 삶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형 사랏 찬드라 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음속에 세속적인 야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삶의 불확실성이 두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공무원에 얽매여 있다면 자신의 나라를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없습니다."라고 쓰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마침 어머니가 마하트마 간디가 추구하는 이상에 더 공감한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보스는 큰 힘을 얻었다.

결국 1921년 4월 22일, 보스는 인도 차관 에드윈 몬태규에게 편지를 보내 ICS 후보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며 공무원의 길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이 결정은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을 알면서도 내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는 벵골의 민족주의 지도자 C. R. 다스와 연락하며 인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ICS를 포기한 후 캠브리지 B.A. 최종 시험을 치러 합격했으나 3등급을 받았다. 1921년 6월, 그는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2. 2. 인도 국민 회의 활동과 투옥 (1921-1932)

1920년 인도 고등문관 시험에 응시했다. 보스 자신은 시험에 합격했으나 영국 식민 지배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자격을 반납했다고 회상했지만, 2차 승마 시험에서 불합격했다는 다른 설도 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보스는 인도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21년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반영 비협력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보스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현실 국제 정치에서는 통하기 어렵다고 보았으며, 영국의 무력 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는 인도의 독립 역시 무력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간디의 비폭력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924년 캘커타 시 행정부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미얀마의 만달레이로 유배되었다.

1926년에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부상하던 파시즘에 주목하며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새로운 종합을 인도는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 당국은 그를 파시스트로 간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국민회의당 내 반파시스트들의 비판에 직면하자 자신의 견해를 다소 완화하여,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가 보여준 권위주의적 근대화 방식에 관심을 돌렸다.

석방 후 1930년 캘커타 시장에 선출되었으나, 보스의 급진적인 독립 지향과 커져가는 영향력을 우려한 영국령 인도 식민지 정부에 의해 곧 해임되었다.

2. 3. 질병, 오스트리아, 에밀리 쉔클 (1933-1937)

1937년 11월,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유럽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의 바트 가스타인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11월 22일부터 다음 해인 1938년 1월 8일까지 약 한 달 반 동안 그의 비서였던 오스트리아 여성 Emilie Schenkl|에밀리 쉔클영어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57] 이 기간 중인 1937년 12월 26일, 보스는 에밀리 쉔클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이 관계와 결혼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며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딸 Anita Bose Pfaff|아니타 보스 프파프영어가 태어났다.

2. 4. 인도 국민 회의 의장 선출과 갈등 (1938-1940)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 국민회의당 내 좌파, 급진파로서 활약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보스는 조직의 분열을 우려한 마하트마 간디의 추천으로 1938년 국민회의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보스는 인도 독자적인 사회주의인 "사르미야바다"를 제창하며 청년층과 농민, 빈곤층의 지지를 얻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보스는 1년간의 의장직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인 1939년에도 국민회의당 의장직에 도전했다. 이는 간디의 지명으로 의장을 결정하던 관례를 깨고 당내 최초의 의장 선거를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선거에서 보스는 간디가 추천한 보가라주 파타비 시타라마야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하며 당내 급진파의 영향력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보스의 이러한 독자적인 행보는 마하트마 간디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간디를 지지하는 국민회의당 내 다수파의 지지도 잃게 만들었다. 보스의 급진적인 노선을 경계한 당 간부들은 그에게 불신임을 제기하며 의장직 사임을 압박했다. 결국 보스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3년간 당내 직책에 취임할 수 없는 처분까지 받았다.

의장 퇴임 후 보스는 전인도 전진동맹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통일 인도로서의 완전한 독립을 강력히 희망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가능성을 우려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식민 정부는 보스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캘커타의 자택에 감금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추축국 협력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이를 인도의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그는 영국의 적대국들과 협력하는 것이 독립 달성에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반영 국가들의 이념보다는 독립이라는 목표를 우선시했다. 영국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보스는 나치 독일로 망명하여 지원을 모색했다.

독일에서 그는 자유 인도 센터 설립, 아자드 힌드 라디오 방송, 북아프리카 전역의 인도인 포로를 모은 인도 레기온 창설 등 활동을 벌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지도부는 보스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에 비해 인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12] 인도의 완전한 독립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군사적 지원보다는 선전 효과에 더 관심을 보였다.[13][14] 독일의 지원에 한계를 느낀 보스는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 제국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1943년 2월, 보스는 독일 잠수함과 일본 잠수함을 이용해 동남아시아로 이동했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라스 비하리 보스의 뒤를 이어 인도 독립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고,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인도 국민군(INA)을 재편성하고 자유 인도 임시정부(아자드 힌드)를 수립하여 수반이 되었다. 그는 일본이 주최한 대동아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인도 국민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임팔 작전에 참여하여 인도 국경 진공을 시도했으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3. 1. 나치 독일 망명 (1941)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보스는 이를 인도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는 반영(反英) 국가들의 이념보다는 독립 달성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보스는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가 광범위한 저항 운동을 촉구했으나, 간디는 시기상조라며 거절했다.

같은 해 7월, 보스는 대중 시위 선동 혐의로 영국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반영 국가의 지원을 받아 해외에서 인도인 부대를 조직하고 국내 봉기와 연계하여 독립을 달성할 계획을 세웠다. 옥중 단식 투쟁으로 쇠약해져 가석방된 1940년 12월, 보스는 인도를 탈출하여 육로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하려 시도했다. 당시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아돌프 히틀러와의 연계도 모색하고 있었다. 보스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친근감과 인도를 해방시킬 유일한 국가라는 생각에 소련 망명을 우선 고려했지만, 카불 주재 소련 대사는 그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보스는 카불 주재 이탈리아 대사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독일로 향했고, 1941년 4월 2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독일에서 보스는 아담 폰 트로트 추 졸츠가 이끄는 인도 특별국에 배속되어 독일이 후원하는 아자드 힌드 라디오 방송을 담당했다. 그는 베를린에 자유 인도 센터를 설립하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국에 포로로 잡힌 영국군 소속 인도인 약 4,500명으로 구성된 인도 레기온(Indische Legion)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처음에는 독일 국방군에 속했다가 나중에 무장친위대(Waffen-SS)로 이관되었다. 부대원들은 히틀러와 보스에게 다음과 같은 충성 맹세를 했다: "나는 신 앞에 이 신성한 맹세를 맹세합니다. 인도의 지도자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위해 싸우는 독일군의 사령관인 독일 인종 및 국가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이 맹세는 부대에 대한 독일군의 통제권을 명확히 하면서도 인도 독립에 대한 보스의 전반적인 지도력을 인정하는 형태였다. 보스는 아자드 힌드 레기온을 선봉으로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거쳐 인도를 침공할 것을 기대했으나, 이는 당시 독일의 전략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구상이었다.

독일 외무부는 보스에게 집사, 요리사, 정원사, SS 운전사가 딸린 호화 주택을 제공했다. 그는 이곳에서 에밀리 쉔클과 공개적으로 동거했으며, 독일 당국은 이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 특별국의 직원 대부분은 에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아담 폰 트로트, 알렉산더 베르트, 프레다 크레트슈메르 등은 그녀가 보스와의 관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린다고 생각하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1942년 11월, 에밀리 쉔클은 보스와의 사이에서 딸 아니타 보스 파프를 낳았다.

나치 독일은 보스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에 비해 인도 내에서의 지지 기반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그와의 동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12] 1942년 봄,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고전하면서 보스는 독일에 대한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던 일본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되었다. 1942년 5월 말, 보스는 아돌프 히틀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이 만남에서 히틀러는 보스의 군사적 지원 요청을 사실상 거절하고 대신 동아시아로 갈 수 있도록 잠수함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13][14] 보스는 히틀러가 인도 레기온을 군사적 목적보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판단하고 크게 실망했다.

결국 1943년 2월, 보스는 독일이 인도의 독립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에밀리 쉔클과 어린 딸을 독일에 남겨둔 채 독일 잠수함 U-180에 탑승했다. 잠수함은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 남동쪽 해상까지 이동했고, 그곳에서 보스는 일본 잠수함 I-29로 옮겨 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적대 관계에 있던 두 나라 해군의 잠수함 간에 이루어진 유일한 민간인 이동 사례였다. 보스가 떠나자 독일의 인도 레기온 병사들은 지도자를 잃고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3. 2. 나치 독일과의 협력 (1941-1943)



독일에 도착한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아담 폰 트로트 추 졸츠가 이끄는 인도 특별국에 배속되어 독일의 지원을 받는 아자드 힌드 라디오 방송을 담당했다. 그는 베를린에 자유 인도 센터를 설립했으며, 이전에 영국군 소속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싸우다 추축국에 포로로 잡힌 인도인들을 모아 인도 레기온(초기 약 4,500명 규모)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처음에는 독일 국방군에 속했다가 나중에 무장친위대로 이관되었다. 부대원들은 히틀러와 보스에게 다음과 같은 충성 맹세를 했다: "나는 신 앞에 이 신성한 맹세를 맹세합니다. 인도의 지도자인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위해 싸우는 독일군의 사령관인 독일 인종 및 국가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이 맹세는 인도 레기온의 지휘권을 명목상 독일에 넘기면서도, 보스를 인도의 전반적인 지도자로 인정하는 형태였다. 보스는 아자드 힌드 레기온을 선봉으로 하여 나치 독일군이 소련을 거쳐 인도를 침공할 것을 구상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침공 후 쉽게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전쟁에서 추축국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그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독일 정부는 보스에게 베를린 중심부에 집사, 요리사, 정원사, SS 운전사가 딸린 호화로운 저택을 제공하고 자동차와 생활 자금도 지원했다. 에밀리 쉔클은 그와 공개적으로 동거했으며, 독일 당국은 이 관계를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스를 돕기 위해 설립된 인도 특별국의 직원 대부분, 특히 아담 폰 트로트 추 졸츠, 알렉산더 베르트, 프레다 크레트슈메르 등은 에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에밀리가 보스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어려운 시기에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여겼고, 계층 문제도 갈등을 심화시켰다. 1942년 11월, 쉔클은 보스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카불에서 보스를 돌보았던 우탐 찬드의 회고에 따르면, 보스는 독일을 "영국과 마찬가지로" 싫어했으며 독일에 머무는 동안에도 소련으로 가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1941년 4월 9일, 그는 독일 외무성에 추축국 군대에 의한 인도 공격을 포함한 인도 독립 구상 각서를 제출했다. 직접적인 답변은 없었으나, 4월 29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과 면담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리벤트로프는 "인도에서의 봉기와 추축국군에 의한 인도 공격 계획을 독일이 받아들이려면 2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독일은 보스가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에 비해 인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그와의 동맹을 주저했다.[12] 특히 친영국 성향이 강했던 히틀러는 인도 독립 운동가들을 "유럽을 배회하는 아시아의 허풍쟁이"라고 부르며, 『나의 투쟁』에 "인도는 다른 나라에 지배받는 것보다 영국에 지배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적었다. 1941년 9월 식탁 담화에서도 "영국이 인도에서 쫓겨난다면 인도는 붕괴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인종차별적 시각과 영국과의 평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영국의 인도 지배 유지를 선호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 정부는 보스에게 물질적 지원은 제공했지만, 독립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협력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1941년 6월, 보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를 통해 독일에 영향을 주려 했으나,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와 면담하는 데 그쳤고 무솔리니는 만나지 못했다. 로마 체류 중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독소전쟁), 보스는 크게 분노하며 "인도 민중은 독일이 침략자이며 인도에게 또 다른 위험한 제국주의 국가임을 이해할 것이다. 소련과의 전쟁은 비참한 실패로 끝날 것이다"라는 항의 서한을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에게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도 보스는 독일 외무성과의 협상을 계속했고, 그 결과 외무성 정보국 내에 특별 인도반이 설치되어 인도 문제 전문가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11월에는 외무성에 의해 "자유 인도 센터"가 설립되어 외국 공관으로 인정받았다. 이 센터는 인도에 대한 선전 활동과 함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가 된 인도 병사들 중 지원자를 모집하여 자유 인도 군단(이후 제950연대로 불리며, 병력 3개 대대, 약 2,000명 규모)을 결성하는 역할을 했다. 보스 자신도 아자드 힌드 라디오를 통해 반영 선전 방송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평화 가능성을 모색하던 히틀러는 인도 독립 지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협상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보스가 독일 정부와 히틀러에게 요구했던 『나의 투쟁』의 인도 폄하 내용에 대한 해명과 인도 독립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모두 거절되었다.

1942년 봄까지 독일군이 소련 전선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서 독일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한 보스는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동남아시아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전히 나치 독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기대했지만, 1942년 5월 말 히틀러와의 유일한 만남에서 히틀러는 보스의 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동아시아로 갈 잠수함 이동을 제안했다.[13][14] 히틀러와의 만남 이후, 보스는 나치 지도자가 군사적 지원보다는 선전적 효과에 더 관심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결국 1943년 2월, 보스는 에밀리 쉔클과 어린 딸을 독일에 남겨두고 독일 U보트에 탑승하여 일본 잠수함으로 갈아탄 뒤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로 향했다. 약 3,000명의 인도 포로가 자유 인도 레기온에 합류했지만, 보스의 부재로 인해 독일에서 모집된 병사들은 지도자를 잃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3. 3. 일본 점령기 아시아에서의 활동 (1943-1945)

1943년 2월, 나치 독일의 지원에 한계를 느낀 보스는 독일을 떠나 U보트와 일본 잠수함을 이용해 일본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동남아시아로 향했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가 인도 침공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독일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이 희박해졌기 때문이었다.[13][14]

도쿄에 도착한 보스는 이미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라슈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와 A.M. 나일(A.M. Nambiar) 등 인도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했다. 처음 일본 제국도조 히데키 총리는 보스와의 면담을 주저했으나, 라슈 비하리 보스와 나일의 중재로 성사된 만남 이후 보스의 인품과 비전에 감명받아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토조는 보스의 영향을 받아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독립 후 인도를 대동아공영권에 편입시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45]

보스는 라슈 비하리 보스의 뒤를 이어 인도독립연맹 총재와 인도국민군(INA)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1943년 10월 21일, 보스는 쇼난(昭南)(당시 일본 점령하 싱가포르)에서 자유인도임시정부(아자드 힌드)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수반이 되었다. 그는 동남아시아의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모병 활동을 펼쳤으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국에 대한 항전을 촉구했다.

같은 해 11월, 보스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는 독립 후 인도를 대동아공영권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회의와 함께 열린 대동아결집국민대회에서 연설하며 일본 국민들에게 인도 독립 지원을 호소했다.

1944년 1월, 인도 국민군은 군사적 해방을 목표로 본거지를 버마양곤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보스는 버마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 쇼조 중장과 만났다. 가와베는 보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감명받아 그를 높이 평가했다.

보스는 일본군이 계획한 임팔 작전에 인도 국민군이 참여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 측은 연합군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서 작전 수행에 부담을 느꼈으나, 가와베 중장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은 보스와의 관계 및 인도 독립 지원이라는 명분 때문에 전략적 판단에 영향을 받아 작전을 강행한 측면이 있었다. 가와베는 작전 실패가 명확해진 후에도 "찬드라 보스와 함께 죽자"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임팔 작전은 일본군의 물자 부족과 연합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인도 국민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인도 국민군은 주로 버마 전역에서 연합군과 교전을 이어갔다.

4. 사망 (1945)

1945년 8월 15일 일본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자, 영국에 맞서 인도의 독립을 이루려던 보스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는 소련과의 접촉을 위해 소련군 점령 하의 만주국으로 가려 했다.[46]

1945년 8월 18일, 보스는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만주국 다롄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이륙 직후 비행기가 추락하여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같은 날 밤, 보스는 병원에서 치료 중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8월 20일 현지에서 화장되었으며, 8월 23일 그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다.[47]

그러나 보스의 사망 경위와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이후 여러 의혹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4. 1. 죽음에 대한 논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자, 영국과 싸워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던 보스의 계획은 일본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보스는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던 옌안에 임시 인도 독립 정부를 세우려 했으며[46], 이를 위해 먼저 소련과 접촉하고자 소련군이 점령한 만주국으로 향하려 했다. 그는 이전부터 폭력 혁명 성향이 강했고, 신념 면에서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모스크바 망명을 시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보스는 만주국에서 소련군에게 항복한 뒤 협상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8월 9일 소련의 대일 참전 이전에 일본군의 협력을 얻었기에, 즉시 만주국행 항공편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8월 18일 오후 2시, 보스는 타이완 타이베이의 쑹산 공항에서 다롄으로 가는 97식 중폭격기에 탑승했다. 탑승 직전, 한 인도인으로부터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는 300만 인도인의 선물"이라며 보석과 귀금속이 담긴 여행 가방 두 개를 받았다. 그러나 비행기는 이륙 직후 왼쪽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면서 균형을 잃고 제방에 충돌하여 폭발했다.

조종사 타키자와 소좌, 동승했던 요테이 쓰나마사 중장 등은 즉사했고, 보스는 불타는 비행기에서 탈출했지만 전신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그는 타이베이 시내의 일본 육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죽음을 예감한 보스는 함께 탑승했지만 경상을 입은 하비불 라만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도 독립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유감이지만, 인도의 독립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므로 나는 안심하고 죽는다. 평생을 인도의 독립에 바친 것에 대해 조금도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잘한 일이라고 만족하며 죽는다."

"하비브,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나는 평생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 왔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죽으려 한다. 조국에 가서 조국 국민들에게 인도의 자유를 위해 계속 싸우라고 전해다오. 인도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자유로울 것이다."[47]

밤에 당번 병사가 먹고 싶은 것을 묻자, 보스는 "카레"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번 병사가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이자 "굿(Good)"이라고 말했지만, 두세 입 먹고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시간은 오후 11시 41분이었다.

일본 대본영은 보스의 시신을 도쿄로 옮기라고 명령했으나, 여름철이었고 화상으로 인한 손상이 심해 현지에서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8월 20일 타이베이 시영 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타이베이 시내의 니시혼간지 타이완 별원에서 법요를 거친 후 (도쿄도 스기나미구의 렌코지에 안치되었다), 8월 23일 보스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도 총독 아치볼드 웨이벌과 연합군 동남아시아 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 심지어 마하트마 간디조차 일본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보스가 독립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의 협력 하에 탈출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실제로 전후 한동안 전 세계에서 보스를 목격했다는 정보가 잇따랐다.

보스와 가까웠던 A.M. 나이르 역시 그의 저서에서 보스의 비행기 사고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패전국 일본을 경유하여 적국이었던 소련으로 망명하는 것의 비현실성, 영국의 동맹국인 소련과 협력하려는 계획의 모순, 사고 당시 사망했다고 알려진 일본인 동승자 중 일부가 생존했다는 점, 보스가 가지고 있던 임시 정부 자산(보석류 등)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특히 인도에서는 보스의 사고사를 믿지 않고 생존설을 지지하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다.[48]

이러한 의혹에 대해 인도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 샤 나와즈 위원회 (1956년): 인도 국민군 최고 간부 출신인 샤 나와즈 칸이 이끈 위원회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으며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집권당: 인도 국민회의) 이 위원회의 샤 나와즈는 전후 인도 국민군 재판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
  • 코슬라 위원회 (1970년): 역시 비행기 사고사를 재확인했다. (당시 집권당: 인도 국민회의)
  • 무케르지 위원회 (1999년 구성, 2006년 보고): 인도 인민당 집권 시기인 1999년에 구성된 이 위원회는 앞선 두 위원회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비행기 사고는 연합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일본군의 조작이며, 렌코지에 안치된 유골은 보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보스가 사망한 것은 확실하지만 사인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으며, 소련으로 망명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위원회는 시베리아에서 보스를 목격했다는 증언,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보스를 45일 안에 인도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는 통역의 증언 등을 수집했다.[50] 위원회는 렌코지 유골의 DNA 감식도 검토했지만 기술적 어려움으로 포기했다고 위원장은 밝혔다.[49]


무케르지 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된 2006년에는 다시 인도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통합 진보 연합(UPA)이 집권하고 있었다. 인도 정부는 무케르지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으나, 그 이유는 "여러 우방과의 관계"를 들어 공개하지 않았다. 한편, 보스의 조카 며느리는 "정부의 생각에 동의한다. 추락사에는 많은 증거가 있고, 유골은 찬드라 보스의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51]

이 외에도 1985년 우타르프라데시주 파이자바드에서 사망한 '바그완지'(en) 또는 '구무나미 바바'(en)라는 은둔 수행자가 실제로는 보스였다는 주장이 인도 내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52]

2012년에는 아누즈 다르(en)가 쓴 『''en''』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당시 인도 대통령이었던 프라납 무케르지가 사건 은폐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 등 주요 언론들이 이를 보도했고[53], 2013년 1월에는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이 바그완지가 보스였는지 여부에 대한 재조사를 명령하기도 했다.[54]

그러나 2017년 5월 30일, 인도 정부는 시민 단체의 정보 공개 요청에 대해 보스가 "1945년 8월 18일, 비행기 사고로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고 답변하며 생존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했다.[55]

5. 사상

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사상은 인도의 완전한 독립 달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한 방법론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 노선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 그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력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신념은 그의 정치 활동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초기에는 이탈리아파시즘과 같은 강력한 국가 모델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후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가 보여준 권위주의적 근대화 방식에 더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인도 고유의 사회주의인 "사르미야바다"를 표방하며 대중, 특히 청년과 빈곤층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경향은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과 손을 잡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는 권위주의적 측면과 더불어 반유대주의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어[23][24][25][26],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평가와 논쟁을 낳고 있다.

5. 1. 권위주의

1921년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반영 비협력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보스는 간디의 무력에 의하지 않는 반영 불복종 운동에 대해, 세계 각국이 비무장 정책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현실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는 고결한 철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국이 무력으로 인도를 지배하는 이상, 독립 역시 무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 시기 보스는 이탈리아에서 등장하여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파시즘에 매료되었다. 1926년에는 "인도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새로운 종합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영국 당국은 그를 명백한 파시스트로 간주했다. 하지만 의회 내 반파시스트 세력의 압력을 받자 보스는 자신의 견해를 다소 누그러뜨려, 파시즘 대신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가 보여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24년 캘커타 시 행정부에 선출되었으나, 영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미얀마의 만달레이로 유배되었다. 석방 후 1930년에는 캘커타 시장에 선출되었지만, 그의 독립 지향과 영향력을 우려한 영국령 인도 식민지 정부에 의해 다시 해임되었다.

이후에도 보스는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 국민회의당 내 좌파 및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조직 분열을 우려한 간디는 1938년 그를 국민회의당 의장으로 추천했다. 보스는 인도 고유의 사회주의인 "사르미야바다"를 내세우며 청년, 농민, 빈곤층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보스는 다음 해에도 의장직에 도전했다. 당시 의장은 간디의 지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1년간의 의장직에 만족하지 못한 보스는 이듬해 이후에도 의장직에 머무르려 생각하여 당내 최초로 의장 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보스는 간디가 추천한 보가라주 파타비 시타라마야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적인 행보는 간디의 지지를 잃는 결과를 낳았고, 간디를 따르는 국민회의당 다수파로부터도 외면받게 되었다. 보스의 급진적인 움직임을 위험하게 본 당 간부들은 그에 대한 불신임을 제기했고, 결국 의장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또한 3년간 당내 어떤 직책에도 오를 수 없는 처분을 받았다. 의장직에서 물러난 후, 보스는 전인도 전진동맹을 결성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통일 인도로서의 독립을 강하게 원했으며, 독립 진영 내에서 무슬림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파키스탄이 분리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보스를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캘커타의 자택에 감금했다.

5. 2. 반유대주의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보스는 유대인 난민들에게 인도 망명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다.[23] 1938년 11월 9일, 독일에서 '수정의 밤'으로 불리는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12월 초, 친힌두 마하사바 성향의 언론들은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당시 유럽 상황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인도 국민회의와 힌두 마하사바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는 보스만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당의 입장에 반대했다. 몇 달 뒤인 1939년 4월, 보스는 유대인들이 인도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당의 결의안 지지를 거부했다.[24][25][26]

1938년 보스는 나치의 인종 정책과 유대인 박해를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그는 독일 신문 ''Angriff''에 인도인들이 진정한 아리아인이며 독일인의 '형제 민족'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보스는 나치 독일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고대 인도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이 영국이 인도인들을 착취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인도 독립 운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고로 인해 영국의 ''유대인 연대지''는 보스를 "인도의 반유대주의적 퀴즐링"이라고 맹비난했다.

역사가 로만 헤이즈(Roman Hayes)는 유대인과 관련된 잔혹 행위에 대한 보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비판한다.

"나치 독일에서 보스의 존재에 대한 가장 불안한 측면은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다. 역사상 가장 대량 학살적인 정권과의 동맹은 그의 인기와 평생 '정의로운 대의'를 위해 싸워온 경력 때문에 심각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간디의 발치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 어떻게 히틀러, 무솔리니, 그리고 토죠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무솔리니와 토죠의 경우에도 그 딜레마의 심각성은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와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너무나도 자주 무시되는 가장 불안한 문제는 보스가 독일에서 남긴 수많은 기사, 의사록, 각서, 전보, 편지, 계획, 방송에서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한 수백만 명에 대해 최소한의 우려나 동정심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베를린 전시 동료나 동료 중 그 누구도 그가 분노를 표현했다고 인용하지 않는다. 1945년 초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아우슈비츠와 그 위성 수용소의 참상이 세계에 공개되어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적 성격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때조차 보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23]

6. 유산

보스의 영국 당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저항은 많은 인도인들에게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일본 제국과의 전시 동맹은 권위주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군사적 실패라는 비판적인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 측에서도 보스를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비현실적이며, 전쟁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9월 인도 독립군 지도자를 재판하려던 영국군의 시도가 영국-인도군을 포함한 인도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 재판이 중단되고 관련자들이 석방된 사건은 영국이 인도의 지배를 포기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처럼 인도 독립 운동에서 보스와 인도 독립군의 공헌은 현재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간디비폭력 시민 불복종 노선과 달리 무력을 사용하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점, 그리고 추축국인 일본, 독일과 협력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인도 독립 후 네루 총리는 상당 기간 보스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적으로는 그가 창설한 전진동맹이 전후 정당 전인도 전진동맹으로 재편되어 보스식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이 정당은 보스의 출신지인 서벵골 주를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유지하며 좌익 전선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말레이시아 인도인 회의와 같은 해외 인도인 단체에서도 보스의 활동을 기념하고 있다.

6. 1. 기념물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인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는 1964년, 1993년, 1997년, 2001년, 2016년, 2018년, 2021년 인도 우표에 등장했다. 또한 1996년과 1997년에는 2루피 동전, 2018년에는 75루피 동전, 2021년에는 125루피 동전에도 그의 모습이 새겨졌다.[36]

인도 전역의 많은 장소와 기관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콜카타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공항, 자르칸드주 고모흐의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고모흐 기차역, 하우라역과 칼카역을 운행하는 네타지 익스프레스, 오디샤주 컷탁의 컷탁 네타지 버스터미널, 콜카타의 네타지 바반 지하철역과 네타지 지하철역, 델리의 네타지 수바스 플레이스 지하철역,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의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섬, 오디샤주 컷탁에 있는 가장 긴 다리인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세트, 콜카타의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로드, 마니푸르주 모이랑의 INA 전쟁 박물관, 콜카타의 네타지 실내 경기장, 델리의 DDA 네타지 수바스 스포츠 단지, 포트 블레어의 네타지 경기장, 콜카타의 네타지 수바스 개방대학교, 델리의 네타지 수바스 기술대학교, 자르칸드주 잠셰드푸르의 네타지 수바스 대학교 등이 있다.

2007년 8월 23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콜카타의 네타지 바반(보스가 살았던 집이자 현재 기념관)을 방문했다. 2022년 네타지 상을 수상하기도 한 아베는 보스의 가족에게 "일본은 영국 통치에서 인도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보스의 강한 의지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네타지는 일본에서 매우 존경받는 이름입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 인도 정부는 보스의 탄생 기념일인 1월 23일을 '파라크람 디바스(용맹의 날)'로 지정하여 국가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리나무르 의회와 전인도 전진당과 같은 일부 정당은 이 날을 '데시프렘 디바스(조국애의 날)'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8]

보스를 기리는 기념물 건립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978년에는 인도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과 함께 보스의 초상화가 걸렸다. 델리의 붉은 성에는 과거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인도 독립군과 보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2019년에는 인도 정부 주도로 델리 붉은 성 내부에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와 그가 이끌었던 인도 국민군(INA)에 관한 박물관이 개관했다. 2022년 9월 8일에는 인도의 문 근처 천개 아래에 약 8.53m 높이의 화강암으로 제작된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동상이 세워졌으며, 공개식에는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참석했다.[56] 같은 해, 인도 정부는 재난 관리 분야에서 뛰어난 공헌을 한 개인이나 기관에 수여하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 아파다 프라반단 푸라스카르 상을 제정했다.[39][40]

한편, 보스의 유골로 추정되는 유해는 일본 도쿄도 스기나미구에 있는 렌코지에 안치되어 있다. 1945년 9월, 유골이 일본으로 옮겨져 장례식이 치러진 후 렌코지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라젠드라 프라사드 대통령, 자와할랄 네루 수상, 인디라 간디 수상 등 인도의 역대 지도자들이 일본 방문 시 렌코지를 찾아 참배했으며, 많은 인도인 관광객과 재일 인도인들도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6. 2. 대중 매체

2006년 뉴델리 공화국 기념식에서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의 전시물에 등장한 보스


군복을 입은 수브하스

  • 1947년에 보스에 관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네타지 수브하스(Netaji Subhash)''가 개봉되었으며, 쇼투바이 데사이(Chhotubhai Desai)가 감독했다.[42]
  • ''수브하스 찬드라(Subhas Chandra)''는 피주슈 바수(Pijush Basu)가 감독한 1966년 인도 벵갈어 전기 영화이다.[41]
  • ''네타지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Neta Ji Subhash Chandra Bose)''는 헤멘 굽타가 감독한 1966년 인도 전기 드라마 영화이다.[42]
  • 2004년, 샤얌 베네갈은 그의 삶을 묘사한 전기 영화 ''네타지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 잊혀진 영웅''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나치 독일(1941~1943), 일본 점령하의 아시아(1943~1945)에서의 그의 삶과 아자드 힌드군의 결성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BFI 런던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으며, 그 해 국가통합 최우수 장편영화상과 최우수 프로덕션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 마하나야크는 2005년에 출판된 마라티어 역사 소설로, 마라티 작가 비슈바스 파틸이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의 삶을 다루고 있다.
  • ''폐하의 반대자''는 수가타 보스가 집필하고 2011년에 출판된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의 전기이다.
  •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 미스터리(Subhash Chandra Bose: The Mystery)''는 이크발 말호트라(Iqbal Malhotra)가 감독한 2016년 다큐멘터리 영화로, 보스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을 다루고 있다.[43]
  • ''네타지 보스 – 잃어버린 보물(Netaji Bose – The Lost Treasure)''은 2017년 히스토리 TV18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영화로, INA 보물 논쟁을 탐구한다.[44]
  • 2017년, ALTBalaji와 BIG Synergy Media는 에크타 카푸르가 제작한 9부작 웹 시리즈 ''보스: 사망/생존''을 공개했다. 이는 아누지 다르가 집필한 책 ''인도 최대의 은폐(India's Biggest Cover-up)''를 각색한 드라마 버전이며, 볼리우드 배우 라지쿠마르 라오가 수브하스 찬드라 보스 역을, 안나 아도르(Anna Ador)가 에밀리 쉔클 역을 맡았다. 이 시리즈는 줄거리, 연기,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2019년 1월 지 뱅갈라는 일일 텔레비전 시리즈 ''네타지'' 방영을 시작했다.
  • ''구므나미''는 스리짓 무케르지가 감독한 2019년 인도 벵갈어 미스터리 영화로, 무케르지 위원회 청문회를 바탕으로 네타지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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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기타 翌年にオーストリアがドイツに併合されたこともあり、歴史書の中でしばしば「ドイツ人」と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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