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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 (경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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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릉 (경순왕후)은 경순왕후의 능이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으며, 특히 1398년 순릉의 사치 논란으로 인해 관련자들이 처벌받았다. 잦은 자연재해로 능이 훼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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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 (경순왕후)
기본 정보
순릉 위치
순릉 위치
위치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 29-1
인물 정보
능호순릉(順陵)
능주조선 도조 경순왕후
본관동주 최씨
휘호안려경순(安麗敬順)
기타 정보
지정번호대한민국 사적 제205호
관리문화재청

2. 연혁

함경남도 함주군 서호면 능전리에 위치한 순릉은 조선 도조의 비 경순왕후 박씨의 능으로, 태조 이성계의 할머니이다.[1] 1392년(태조 원년) 조선 건국 직후 태조의 명으로 능호를 받고 능지기와 재궁 등이 설치되어 관리되기 시작했다.[2][3] 이후 조선 시대 동안 봉분을 다시 쌓는 등[4][5] 지속적으로 관리되었으며, 종8품 봉사와 종9품 참봉 각 1명이 배치되었다.[1] 그러나 2009년 6월 27일 대한민국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순릉은 포함되지 않았다.[6]

2. 1. 조선 건국 초기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음력 8월 8일, 태조는 자신의 4대 조상을 추존하였다. 이때 아들 이방원을 보내 각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능호를 올렸는데,[2] 경순왕후 박씨의 무덤에는 '''순릉'''(純陵)이라는 능호가 붙여졌다.[2]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에는 순릉을 관리하기 위해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두었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궁도 세웠다.[3]

2. 2. 조선 시대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원년) 음력 8월 8일 태조가 자신의 4대조를 추존하고, 아들 이방원을 보내 각 무덤에 치제를 하고 능호를 올렸다. 이때 박씨의 무덤에는 '''순릉'''(純陵)이라는 능호가 올려졌다.[2] 같은 해 음력 10월 28일에는 능지기 권무 2명과 수릉호를 몇 호 두고, 재궁(齋宮,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머무는 건물)도 세웠다.[3] 이후 1670년(현종 11년)[4]과 1701년(숙종 27년)에 봉분을 다시 세웠다.[5] 순릉에는 종8품 봉사 1명과 종9품 참봉 1명을 두어 능을 관리하게 하였다.[1]

3. 관련 사건 및 논란

순릉 조성 및 관리 과정에서 몇몇 사건과 논란이 발생하였다. 1398년(태조 7년)에는 능의 석물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받는 일이 있었다.[7][8] 또한 1400년(정종 2년)에는 비로 인해 능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으며,[9] 1723년(경종 3년)에는 화재가 발생하여 경종이 직접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10]

3. 1. 순릉의 사치 논란 (1398년)

1398년(태조 7년) 음력 7월, 동북면에 다녀오던 공조 전서 유한우가 전시의 집에 들렀다. 유한우는 전시에게 "순릉을 옮겨 장사하는데 석물들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하다"고 전했다. 이에 전시는 "나라 임금의 능이라면 괜찮지만, 순릉이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비판적인 의견을 표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전시는 결국 국문을 받고 갑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국문 과정에서 이 논의에 10명 이상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중 언관이었던 황희, 박수기 등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폄직 처분을 받았으나, 개국공신이자 전시의 장인이었던 유원정 등은 처벌을 면제받았다.[7][8]

3. 2. 잦은 자연재해

1398년(태조 7년) 음력 7월, 공조전서 유한우가 동북면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시의 집에 들러 "순릉을 옮겨 장사하는데 석물들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하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전시는 "국군의 능이라면 괜찮지만, 순릉이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했는데, 이 발언이 문제가 되어 국문을 받고 갑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황희, 박수기 등 10명 이상이 함께 논의한 사실이 드러나 언관이었던 이들은 폄직되었고, 개국공신이자 전시의 장인이었던 유원정 등은 면죄되었다.[7][8]

1400년(정종 2년) 음력 7월 25일에는 비가 많이 내려 능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9]

1723년(경종 3년) 음력 2월 23일에는 능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에 경종은 직접 변복을 하고 사태를 수습했으며, 화재 발생 3일째 되는 날에는 위안제를 지내고 예조 관원들을 보내 능의 상태를 살피게 하였다.[10]

4. 세계유산 등재 제외

2009년 6월 27일 대한민국에 있는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순릉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6]

참조

[1] 백과사전 순릉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8일 정사 1번째기사
[3] 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28일 병자 1번째기사
[4] 실록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3월 26일 계미 1번째기사
[5] 실록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3월 15일 임인 1번째기사
[6] 뉴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https://news.naver.c[...] 2009-06-27
[7] 실록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7월 5일 무인 1번째기사
[8] 백과사전 유원정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9] 실록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5일 무자 1번째기사
[10] 실록 경종실록 11권, 경종 3년 2월 23일 계유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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