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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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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숭덕사는 조선 후기 문신 임헌회와 그의 제자 전우를 포함한 7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885년 함경도 홍원에서 임헌회에 대한 제사가 시작되었으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1978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임헌회가 살았던 곳에 사당을 건립했다. 1990년 '덕성서원'을 건립하고 사당은 숭덕사로 명명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임헌회, 전우 등 7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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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숭덕사/덕성서원
한자 표기崇德祠/德星書院
숭덕사
숭덕사
국가세종특별자치시
유형향토문화유산
지정 번호40
지정일2014년 9월 30일
해지일2014년 9월 30일
주소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
시대1885년 창건, 1978년 복원
추가 정보
구 명칭연기군 향토유적 40호 (2001년 5월 31일 지정)

2. 건립 배경 및 역사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임헌회(1811~1876)와 그의 제자 전우(1841~1922)를 포함하여 모두 7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임헌회는 이이(1536~1584)와 송시열(1607~1689)의 학문적 계보를 이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학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모두 거절하다가 1865년(고종 2)에 호조참의를 지내고 1874년(고종 11)에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으며, 그 후 대사헌, 사성 등을 역임한 후 낙향하여 후학들을 키웠다. 1876년(고종 13)에 죽은 뒤 내부대신 관직과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우는 1862년(철종 13) 21살에 아산에 있던 임헌회를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은 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하였으며, 전통유학사상을 실현시키려 했던 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1885년(고종 22) 관북 지역의 유림들이 함경도 홍원에서 임헌회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었는데, 남북 분단에 따라 1978년 전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그가 살았던 곳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 1990년 '덕성서원'을 만들고 사당은 숭덕사라 하였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에 ‘崇德寺(숭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임헌회와 전우, 이재구, 김준영, 이유흥, 조홍순, 임헌찬 일곱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변은 삼문과 낮은 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삼문은 솟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 1. 조선 후기 유학의 흐름과 임헌회

2. 2. 함경도 홍원에서의 제향

2. 3. 남북 분단과 숭덕사 건립

조선 말 충청지역에서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학자로 꼽히는 임헌회는 이이송시열의 학문적 계보를 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모두 거절하다가 1865년(고종 2)에 호조참의를 지내고 1874년(고종 11)에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으며, 그 후 대사헌, 사성 등을 역임한 후 낙향하여 후학들을 키웠다. 1876년(고종 13)에 죽은 뒤 내부대신 관직과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885년(고종 22) 관북(關北)지역의 유림들이 함경도 홍원에서 임헌회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었는데,[2] 남북 분단으로 인해 제향이 어려워지자 1978년 전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그가 살았던 곳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다.[2] 1990년 '덕성서원'을 만들고 사당은 숭덕사라 하였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에 ‘崇德寺(숭덕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에는 임헌회와 전우, 이재구, 김준영, 이유흥, 조홍순, 임헌찬 일곱 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변은 삼문(三門)과 낮은 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삼문은 솟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 4. 덕성서원 건립

숭덕사는 임헌회를 비롯한 전우, 이재구, 김준영, 이유흥, 조홍순, 임헌찬 등 일곱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사우이다.[2] 1885년(고종 22) 관북 지방 유림들이 함경도 홍원에서 임헌회를 제향해 오다 남북 분단 후 1978년 전국 유림의 발기로 그의 유허지가 있는 이곳에 사우를 세우게 되었다.[2]

우리나라의 서원은 교육의 공간과 제향의 공간인 사우가 결합된 형태이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제향의 기능만 있다면 사우라 한다.[2] 1990년 가을에 서원을 건립하고 임헌회의 유허지명을 따라 '덕성서원'이라 이름을 붙이며 사우는 숭덕사(崇德祠)라 하였다.[2]

3. 숭덕사에 모셔진 인물들

3. 1. 임헌회(任憲晦)

3. 2. 전우(田禹)

3. 3. 기타 인물들

4. 건축 양식 및 구조

4. 1. 건물 구조

4. 2. 주변 시설

5. 숭덕사의 현재와 의의

참조

[1] 간행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2014-09-30
[2] 문서 숭덕사(덕성서원) 안내문 세종특별자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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