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모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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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에모리성은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오와리국 아이치군에 축성한 성이다. 미카와, 스루가 가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으며, 오다 노부카츠가 이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농성하다가 어머니의 중재로 사면받았으나, 반역 혐의로 암살된 후 폐성되었다.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오다 노부오가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성터에는 시로야마하치만 궁 신사가 있으며, 인근에 스에모리 거리와 가쿠오잔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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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모리성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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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에모리 성 |
별칭 | 스에모리조 |
종류 | 평산성 |
축성자 | 오다 노부히데 |
축성 연도 | 덴분 17년 ( 1548년 ) |
폐성 연도 | 불명 |
성주 | 오다 씨 |
유적 | 해자, 석비 |
문화재 지정 | 미지정 |
위치 | 35 |
위치 정보 | |
소재지 | 아이치현나고야시지쿠사구 시로야마초 |
역사 | |
축성 배경 | 오다 노부히데가 거점 방어를 위해 축성 |
주요 전투 |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의 전초전인 스에모리 성 전투 발생 |
구조 | |
성곽 구조 | 단곽식 평산성 |
주요 시설 | 해자, 토루, 성문, 망루 등 |
교통 정보 | |
대중교통 | 나고야 시영 지하철 히가시야마선 각 역에서 나고야 시영 버스 이용, "양로원 입구" 정류장 하차 후 도보 |
자가용 | 도메이 고속도로 나고야 IC에서 국도 153호 경유 |
참고 정보 | |
관련 문화재 | 성터는 시로야마하치만구 경내에 위치 |
2. 역사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오와리 국 아이치군 나루미 장원 스에모리 촌에 성을 축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1]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가문과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 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동생 오다 노부미쓰가 지키는 모리야마 성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2] 노부히데는 그 동안의 거성이었던 고와타 성을 포기하고 스에모리 성을 거성으로 삼았다.
1552년 노부히데는 사망했다. 노부히데의 거성인 스에모리 성을 물려받은 것은 오다 노부카츠(오다 노부나가의 친동생)이었다.
1556년, 노부카츠는 하야시 히데사다,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이노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때 노부카츠는 스에모리 성에 농성했으며, 노부나가는 스에모리 성 아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때, 스에모리 성 안에 있던 어머니 도다 고젠의 개입으로 노부카츠는 사면을 받았고, 스에모리 성은 함락을 면했다.
하지만 1558년 다시 모반을 꾀한 것을 시바타 가쓰이에가 노부나가에게 밀고했고, 노부카츠는 키요스 성에서 암살되었다. 이로 인해 스에모리 성은 폐성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후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때 오다 노부오가 다시 스에모리 성을 사용했다.
1553년, 성주인 노부카츠가 가가의 하쿠산히메 신사에서 분령을 맞아 성 안에 하쿠산사를 모셨는데, 폐성 후에도 인근 사람들의 신앙을 받아 유지되었고, 메이지 시대에 인근 신사와 합사되어 성산 하치만궁이 되었다.[3][4] 또한, 성의 서북쪽 산기슭에 노부히데의 영묘가 있었지만, 현재는 나고야시 지쿠사구 요츠야도리에 있는 도간지 내에서 노부카츠와 함께 공양되고 있다.
2. 1. 센고쿠 시대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오와리 국 아이치군 나루미 장원 스에모리 촌에 성을 축성한 것이 스에모리성의 시작이다.[1]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가문과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 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동생 오다 노부미쓰가 지키는 모리야마 성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2] 노부히데는 후루와타리 성에서 기거했고, 성은 아들 오다 노부카쓰(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에게 주었다. 1551년 오다 노부히데는 스에모리 성에서 죽었다고 한다.1556년 오다 노부카쓰는 하야시 히데사다,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어 이노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노부나가와 화친하게 된다. 이때 노부카츠는 스에모리 성에 농성했으며, 노부나가는 스에모리 성 아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 도다 고젠의 개입으로 노부카츠는 사면을 받았고, 스에모리 성은 함락을 면했다. 1557년 노부카쓰는 다시금 반기를 획책하지만,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밀고로, 노부카쓰는 기요스성에서 모살된다.
이후, 스에모리 성은 방치되어 폐성되었고, 성의 북서쪽 산기슭에는 오다 노부히데의 영묘가 있었지만, 현재는 같은 지구사 구에 있는 도간지(桃巌寺)에 아들 오다 노부카쓰와 함께 공양되고 있다.[3][4]
2. 2.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오와리 국 아이치군 나루미 장원 스에모리 촌에 성을 축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1]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가문과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 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동생 오다 노부미쓰가 지키는 모리야마 성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2] 노부히데는 그 동안의 거성이었던 고와타 성을 포기하고 스에모리 성을 거성으로 삼았다.1551년 오다 노부히데는 스에모리 성에서 죽었다고 한다. 노부히데의 거성인 스에모리 성을 물려받은 것은 오다 노부카츠(오다 노부나가의 친동생)이었다.
1556년 오다 노부카쓰는 하야시 히데사다,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어 전투를 벌여 보지만, 이 이노 전투에서 패배로 노부나가와 화친을 하게 된다. 이때 노부카츠는 스에모리 성에 농성했으며, 노부나가는 스에모리 성 아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때, 스에모리 성 안에 있던 어머니 도다 고젠의 개입으로 노부카츠는 사면을 받았고, 스에모리 성은 함락을 면했다.
1557년 노부카쓰는 다시금 반기를 획책하지만,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밀고로, 노부카쓰는 기요스성에서 모살된다.
이후, 스에모리 성은 방치되어 폐성되었고, 성의 북서쪽 산기슭에는 오다 노부히데의 영묘가 있었지만, 현재는 같은 지구사 구에 있는 도간지(桃巌寺)에 아들 오다 노부카쓰와 함께 공양되고 있다.
2. 3. 폐성
1548년 오다 노부히데가 오와리 국 아이치군 나루미 장원 스에모리 촌에 성을 축성한 것이 스에모리성의 시작이다.[1]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가문과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 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동생 오다 노부미쓰가 지키는 모리야마 성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2] 노부히데는 후루와타리 성에서 거주하였고,성은 아들 오다 노부카쓰에게 주었다. 1551년 오다 노부히데는 스에모리 성에서 죽었다고 한다.1556년 오다 노부카쓰는 하야시 히데사다,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어 전투를 벌였으나, 이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노부나가와 화친하였다. 이때 노부카츠는 스에모리 성에 농성했으며, 노부나가는 스에모리 성 아래 마을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 도다 고젠의 중재로 노부카츠는 사면받았고, 스에모리 성은 함락을 면했다. 1557년 노부카쓰는 다시금 반기를 획책하지만, 노부나가와 내통하고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의 밀고로, 노부카쓰는 기요스성에서 모살된다.
이후, 스에모리 성은 방치되어 폐성되었고, 성의 북서쪽 산기슭에는 오다 노부히데의 영묘가 있었지만, 현재는 같은 지쿠사구에 있는 도간지(桃巌寺)에 아들 오다 노부카쓰와 함께 공양되고 있다.[3][4]
3. 구조
스에모리 성은 히가시야마 산 구릉지 말단에 위치한 높이 43m 언덕에 축성되었던 평산성이다. 동서로는 약 200m, 남북으로는 약 160m 규모로 주위는 2중의 해자로 둘렀다. 성 안쪽에 위치한 해자는〈초승달 해자(三日月堀)〉로 불리는 반월형의 해자로 그 앞쪽에는 우마다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성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깊이 7m 정도의 빈 해자 터 정도이다.[5][6]
혼마루 터에는 시로야마하치만 궁의 신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니노마루 터에는 아이치현에서 건설했던 옛 쇼와주쿠도(昭和塾堂)가 지어져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시로야마하치만 궁에 매각되어 아이치가쿠인 대학의 대학원 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신사 경내에는 스에모리 성터 비가 세워져있다.
지형을 이용하여 사면의 중턱에 폭 10-16미터의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에도 깊이 7미터 정도의 해자터 등 유구가 잘 남아 있다. 마스다와 총구의 구조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현재 보이는 유구는 1584년 오다 노부오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대비하여 정비한 것으로 생각된다.[7]
4. 현재
스에모리 성은 히가시야마 산 구릉지 말단에 위치한 높이 43m 언덕에 축성되었던 평산성이다. 동서로는 약 200m, 남북으로는 약 160m 규모로 주위는 2중의 해자로 둘렀다. 성 안쪽에 위치한 해자는〈초승달 해자(三日月堀)〉로 불리는 반월형의 해자로 그 앞쪽에는 우마다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존해 있지는 않다. 현재 성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깊이 7m 정도의 빈 해자 터 정도이다.
성의 혼마루 터에는 시로야마하치만 궁의 신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니노마루 터에는 아이치현에서 건설했던 옛 쇼와주쿠도(昭和塾堂)가 지어져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시로야마하치만 궁에 매각되어 아이치가쿠인 대학의 대학원 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신사 경내에는 스에모리 성터 비가 세워져 있다. 2017년 4월 30일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었다. 성의 이름은 스에모리 거리로 남아있다.
5. 교통
나고야 시영 지하철 가쿠오잔 역에서 하차, 도보로 15분이면 스에모리성에 갈 수 있다.
6. 주변 시설
나고야 시영 지하철 가쿠오잔 역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성터인 시로야마 공원이 있으며, 시로야마하치만 궁, 히가시야마 급수탑, 일본 정원인 요키소 등이 있다.
참조
[1]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23愛知県の地名
平凡社
1981
[2]
서적
日本城郭大系 第9巻
新人物往来社
1980
[3]
간행물
千種区の歴史
愛知県郷土資料研究会
1981
[4]
서적
愛知県神社名鑑
愛知県神社庁
1992
[5]
서적
尾張の古城
자비출판
2008
[6]
서적
日本城郭大系
신인물왕래사
1979
[7]
간행물
愛知県中世城館跡調査報告(尾張地区)
愛知県教育委員会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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