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티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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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티 무어는 미국의 기타리스트로, 1931년에 태어나 2016년에 사망했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기 밴드인 '블루 문 보이즈'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로큰롤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4년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녹음한 "That's All Right"는 로큰롤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무어는 프레슬리의 여러 히트곡에 참여했다. 2000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깁슨 슈퍼 400, 텔레캐스터 등 다양한 기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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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티 무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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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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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윈필드 스콧 무어 3세 |
출생 | 1931년 12월 27일 |
출생지 | 테네시주 가즈덴 |
사망 | 2016년 6월 28일 |
사망지 | 테네시주 내슈빌 |
직업 | 음악가 |
악기 | 기타 |
활동 기간 | 1950년대–2009년 |
레이블 | 선, RCA 빅터 |
웹사이트 | scottymoore.net |
음악 스타일 | |
장르 | 로큰롤 로커빌리 컨트리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윈필드 스콧 무어 3세는 테네시주 개즈던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4형제 중 막내였다. 그는 8살 때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기타를 배웠다. 1948년부터 1952년 1월까지 미국 해군에서 한국과 중국에서 복무했다.[7][8]
무어는 재즈와 컨트리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기타리스트 체트 앳킨스의 팬이었던 무어는 선 레코드의 샘 필립스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하기 전까지 스타라이트 랭글러라는 그룹을 이끌었다. 이 트리오는 더블 베이스 연주자 빌 블랙과 함께 "리듬 추진력"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9] 1954년 무어와 블랙은 엘비스와 함께 프레슬리의 첫 번째 히트곡이 될 "That's All Right"의 선 스튜디오 세션 컷에 참여했는데, 이 곡은 로큰롤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10]
1954년 7월 5일 저녁, 샘 필립스는 엘비스, 무어, 블랙을 스튜디오로 불러 녹음을 진행했다. 밤늦게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자,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중 엘비스가 아서 크루덥의 "That's All Right"을 부르기 시작했다. 무어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갑자기 엘비스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춤을 추고 바보처럼 행동했고, 빌은 베이스를 집어 들고 그도 바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샘은 통제실 문을 열어 놓았던 것 같아요...그는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음, 다시 시작해서 다시 해보세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필립스는 그가 찾고 있던 사운드였기 때문에 빠르게 녹음을 시작했습니다.[11]
이후 며칠 동안, 이 트리오는 빌 먼로의 "Blue Moon of Kentucky"를 독특한 스타일로 녹음했으며, 샘 필립스가 "슬랩백"이라고 부르는 에코 효과를 사용했다. "That's All Right"을 A면에, "Blue Moon of Kentucky"를 B면에 담아 싱글이 발매되었다.[12]
필립스는 무어가 체트 앳킨스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메를 트래비스의 핑거 피킹 스타일인 "트래비스 피킹"을 연주하기를 원했다. 필립스는 이 스타일이 팝이나 컨트리에는 좋지만, 자신이 목표로 하는 단순하고 거친 사운드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13] ''단순화''가 핵심이었다.[9]
1954년 10월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에서의 공연으로, 프레슬리, 블랙, 무어는 블루 문 보이즈로 불리게 되었다.[14] 한동안 무어는 프레슬리의 개인 매니저로 활동했다.[15] 이후 이들은 드러머 D.J. 폰타나와 합류했다.
2. 1. 출생 및 가족
윈필드 스콧 무어 3세는 1931년 테네시주 개즈던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4형제 중 막내였으며, 맏이와는 14살 터울이었다.[56][57] 8살 때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기타를 배웠다.[58][59]2. 2. 군 복무
징집 당시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948년부터 1952년 1월까지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다.[7][8] 중국과 한국에서 복무했다.[7][8]2. 3. 초기 음악 활동
1931년 테네시주 가즈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컨트리 음악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음악과 친숙한 가정에서 자란 무어는 8세에 사서 받은 기타의 연주법을 익혔다.[56][57]1948년 징병되어 미국 해군에 입대, 워싱턴주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나오는 밴드에 참여하면서 중국과 한국에서 임무를 수행했다.[7][8] 제대 후 형제가 경영하는 세탁소에서 근무하면서 '스타라이트 랭글러스'라는 밴드를 결성, 빌 블랙(베이스)도 합류하여 활동했다.[60] 그의 초기 음악적 뿌리는 재즈와 컨트리 음악이었다.[9] 쳇 앳킨스의 팬이었다.[60]
3. 엘비스 프레슬리와의 협업
무어는 초기에는 재즈와 컨트리 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기타리스트 체트 앳킨스의 팬이었던 무어는 선 레코드의 샘 필립스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하기 전까지 스타라이트 랭글러라는 그룹을 이끌었다. 이 트리오는 더블 베이스 연주자 빌 블랙이 합류하면서 완성되었다.[9] 1954년 무어와 블랙은 엘비스와 함께 로큰롤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는 That's All Right"의 선 스튜디오 세션 컷에 참여했다.[10]
1954년 7월 5일 저녁, 이 세션은 밤늦게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들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프레슬리는 기타를 들고 아서 크루덥의 "That's All Right"을 연주했다. 무어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갑자기 엘비스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춤을 추고 바보처럼 행동했고, 빌은 베이스를 집어 들고 그도 바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샘은 통제실 문을 열어 놓았던 것 같아요...그는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음, 다시 시작해서 다시 해보세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필립스는 그가 찾고 있던 사운드였기 때문에 빠르게 녹음을 시작했습니다.[11]
이후, 트리오는 빌 먼로의 블루그래스 음악 넘버 "Blue Moon of Kentucky"를 독특한 스타일로 녹음했으며, 샘 필립스가 "슬랩백"이라고 부르는 에코 효과를 사용했다. "That's All Right"을 A면에, "Blue Moon of Kentucky"를 B면에 담아 싱글이 발매되었다.[12]
필립스의 리듬 중심적인 비전은 무어가 체트 앳킨스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이 스타일은 멀 트래비스의 핑거 피킹 스타일인 "트래비스 피킹"으로 불렸는데, 필립스는 이 스타일이 팝이나 컨트리에는 좋지만, 자신이 목표로 하는 단순하고 거친 사운드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13] ''단순화''가 핵심이었다.[9]
1954년 10월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 공연을 통해 프레슬리, 블랙, 무어는 블루 문 보이즈로 불리게 되었다.[14] 한동안 무어는 프레슬리의 개인 매니저로 활동했다.[15] 이후 드러머 D.J. 폰타나가 합류했다.
1954년 7월부터 블루 문 보이즈는 미국 남부 전역을 순회하며 녹음했다. 이후 십 대 소녀들 사이에서 엘비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국 투어를 시작했고, ''에드 설리번 쇼''와 같은 유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 1956년 4월 3일, 밀턴 벌 쇼에서 "Shake, Rattle and Roll", "Heartbreak Hotel", "Blue Suede Shoes"를 공연했다.
- 스티브 앨런 쇼에서 실제 사냥개에게 "Hound Dog"를 공연하는 코미디 스케치를 선보였다.
프레슬리는 관객들의 비명을 자아내는 몸짓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엘비스와 밴드가 직면하게 될 스캔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6] 엘비스는 왜 소녀들이 노래할 때 통제할 수 없이 비명을 지르는지 몰랐는데, 그 이유를 그에게 말해준 사람은 무어였다. "그건 네 다리 때문이야, 임마. 네 왼쪽 다리를 흔드는 방식 말이야."[17]
무어는 "That's All Right", "Good Rockin' Tonight", "Milkcow Blues Boogie", "Baby Let's Play House", "Heartbreak Hotel", "Mystery Train", "Blue Suede Shoes", "Hound Dog", "Too Much", "Jailhouse Rock"","Hard Headed Woman" 등 프레슬리의 가장 유명한 많은 녹음에 참여했다. 그는 "Hound Dog"에서 자신의 솔로 연주를 "고대 사이키델리아"라고 불렀다.[18]
무어와 블루 문 보이즈는 1957년, 1958년, 1960년에 촬영된 프레슬리의 영화(''Loving You'', ''Jailhouse Rock'', ''King Creole'', ''G.I. Blues'')에서 공연했고, 추가적으로 작은 단역과 대사 역할을 맡았다.
1960년 무어는 RCA 빅터에서 프레슬리와 함께 녹음 세션을 시작했으며, 샘 필립스 레코딩 서비스의 프로덕션 매니저로도 활동하며 스튜디오 운영의 모든 측면을 감독했다. 무어는 "Fame and Fortune", "Such a Night", "Frankfort Special", "Surrender", "I Feel So Bad", "Rock-A-Hula Baby", "Kiss Me Quick", "Good Luck Charm", "She's Not You", "(You're the) Devil in Disguise", "Bossa Nova Baby"와 같은 곡에 참여했다. 프레슬리의 작업이 할리우드 세션에 의해 지배된 후 녹음된 대부분의 곡에서 기타리스트로 남았다. 주로 리듬 기타를 연주했지만, 마지막 리드 기타 작업은 1962년 "(You're the) Devil in Disguise"에서였다. 로이 오비슨의 세션에도 참여했다(특히 "Crying").[26]
1964년, Epic Records에서 깁슨 슈퍼 400을 사용하여 연주한 솔로 앨범 ''The Guitar That Changed the World''를 발매했다. 필립스는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몰랐고, 소식을 듣고 무어를 해고했다. NBC 텔레비전 특별 프로그램 '''68 컴백 스페셜''을 위해 폰타나 및 프레슬리와 재회했는데, 다시 깁슨 슈퍼 400을 사용했고, 이 기타는 프레슬리도 연주했다. 이 특별 프로그램은 이들이 프레슬리와 함께 연주한 마지막 시간이었고, 무어에게는 그를 마지막으로 본 시간이었다.[27]
3. 1. 선 레코드 시절
샘 필립스의 주선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짝이 되었다. 빌 블랙의 합류로 3인조가 완성되었다.[60] 1954년, 엘비스, 빌 블랙과 함께 선 스튜디오에서 〈That's All Right〉를 녹음했다.[61]1954년 7월 5일 저녁부터 시작된 이날의 녹음 세션은 그날 야밤까지는 완전 헛된 것으로 여겨졌었다. 마침 포기하고 귀가하려던 차, 프레슬리가 기타를 들고 아서 크루덥의 1946년 블루스 곡 〈That's All Right〉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느닷없이 엘비스 군이 예의 곡을 노래하지 뭡니까. 오두방정을 떨고 천치 흉내를 내고. 그러더니 빌도 베이스를 집더니 역시 천치 흉내를 내던 게 아닙니까. 그래 나도 그들과 연주를 합디다. 아마 샘은, 제어실을 벙긋하고 있었던 듯한데 ... 머리만 빼꼼 내밀어 이리 물어왔죠. "너희 뭐해?" 우리가 답합니다. "우리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럼, 다시 해보렴", "시작할 지점을 찾으면, 그때 다시 연주하자고." 필립스는 재빠르게 녹음을 개시했습니다. 바로, 그가 좇던 음향인 거지요."[61]
그로부터 며칠 뒤, 3인조가 다시 모여 이번에는 빌 먼로의 블루그래스 가요 〈Blue Moon of Kentucky〉를 취입한다. 여기에 샘 필립스가 "슬랩백"으로 이름한, 가에코 효과를 적용했다. 이렇게 A면에 〈That's All Right〉, 이면에 〈Blue Moon of Kentucky〉인 싱글이 완성되었다.[62]
무어는, 필립스의 리듬 중시란 지론으로 하여 쳇 앳킨스의 깜찍한 핑커피킹 주법에 멀어지게 된다. 필립스가 댄 것은 단순하고, 강렬한 음향이었다.[63] 다시 말해 핵심은 단순성(Simplify)으로 요약된다.[60]

1954년 10월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 공연 이후부터, 블랙과 무어는 블루 문 보이스로 불리게 되었다.[64]
이 당시 무어는 프레슬리의 개인 매니저로 활동했다.[65] 그 후에 D. J. 폰타나가 합류한다. 1954년 7월 초, 블루 문 보이스는 미국 남부 전반에 걸쳐 순연과 녹음을 병행한다. 프레슬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국 투어를 시작했고, 에드 설리번 등 유명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3. 2. 엘비스와의 갈등 및 결별
1957년 할리우드에서 《러빙 유》 촬영 및 녹음 당시, 스코티 무어와 빌 블랙은 엘비스와 즉흥 연주를 하며 지루함을 달랬다. 그러나 엘비스와의 만남은 몇 번에 그쳤고, 엘비스는 이들과 2층 정도 떨어진 곳에 투숙했다. 이러한 배척에 분개한 그들은 의도적인 획책이 있었다고 판단했다.[19]엘비스의 첫 장편영화 《러브 미 텐더》 사운드트랙 녹음에는 엘비스와 함께하지 못했다. 20세기 폭스가 컨트리를 연주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엘비스의 전속 밴드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20] 1956년 8월부터 공연 출연 감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8월에는 200USD였던 수익이 12월에는 100USD로 줄었다. 무어 내외는 부인의 인척인 세 자매 및 형제와 함께 이사해야 했다. 《멤피스 프레스-시미터》 인터뷰에서 그들은 이러한 상황과 엘비스와의 교류 부족을 언급했다. 인터뷰의 목적은 RCA 빅터가 발매하는 본인들의 기악곡 음반 녹음을 경영진이 허가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허가는 그룹이 엘비스를 배제해야만 가능했다.[21]
1957년 캐나다 순회공연 때 콘서트 홍보업자 오스카 데이비스가 매니저를 제안했고, 이들은 기꺼이 일을 받아들였다. 당시 주당 200USD를 받는 무어와 블랙에게 엘비스는 백만장자였다. 백 보컬리스트 조더네이어스는 데이비스를 신용하지 않아 불참했다.[22] 1957년 9월 엘비스의 첫 크리스마스 음반 세션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무어와 블랙은 해당 세션 이후에도 엘비스의 트랙에 참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세션이 끝나자 짐을 싸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2년 동안 단 한 번 봉급 인상을 받았으며, 출연 감소로 주당 100USD로 연명해야 했다. 또한 파커 대령이 자신들을 적대한다고 생각했다. 엘비스와 모든 접촉을 잃었고, "그와 대화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까지 느꼈다.[23] 파커 대령의 관여는 없었지만, RCA 빅터 회장 스티븐 숄스는 엘비스의 밴드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해산이 영속적이기를 바랐다. 멤피스로 돌아왔을 때, 한 기자가 이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취재했다. 엘비스는 언론 진술에서 그들에게 행운을 빈다고 했으며, 기자에게 알리기보다 자기에게 찾아와 하소연했으면 일이 더 잘 풀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엘비스는 지난 2년간 밴드를 해체하라는 말이 많았지만, 자신은 퍽 충실하게 그들을 대했다고 밝혔다.[24]
엘비스는 투펄로에서 2주간 공연 계약을 맺고 새로운 음악가들을 물색했다. 기타에는 행크 갤런드, 베이스에는 D.J. 폰타나의 친구 척 위긴턴이 내정되었지만, 엘비스는 그들의 연주 실력이 전과 같지 않다고 느꼈다. 투펄로 공연 1주 뒤, 엘비스는 그들을 일일 베이스 연주자로 다시 고용했다. 그동안 두 사람은 "댈러스 스테이트 페어에서 끔찍한 2주간의 출연 계약"을 수행 중이었다. 무어는 악감정이 없다고 공언했지만, 전기 작가 구랄닉은 엘비스가 우울했다고 기술했다. 구랄닉에 따르면, 어느 날 엘비스는 라디오에서 〈Jailhouse Rock〉을 듣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1인 밴드'라고 중얼거리며 맥없이 머리를 흔들었다.[25]
3. 3. 엘비스 징집 이후
1958년 초, 엘비스가 군에 징집된 후, 무어는 펀우드 레코드에서 일하며 토마스 웨인 퍼킨스의 히트 레코드 〈Tragedy〉를 제작했다.[73]1960년부터 무어는 RCA 빅터에서 엘비스와 녹음 세션을 재개했고, 샘 필립스 녹음 서비스에서 제작 고문을 수행했다. 무어는 〈Fame and Fortune〉, 〈Such a Night〉, 〈Frankfort Special〉, 〈Surrender〉, 〈I Feel So Bad〉, 〈Rock-A-Hula Baby〉, 〈Kiss Me Quick〉, 〈Good Luck Charm〉, 〈She's Not You〉, 〈(You're the) Devil in Disguise〉, 〈Bossa Nova Baby〉 등 엘비스의 여러 곡에 참여했다.[73]
1964년, 에픽 레코드에서 깁슨 슈퍼 400을 사용한 《The Guitar That Changed the World》라는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73]
1968년, NBC 텔레비전 스페셜 《'68 컴백 스페셜》에서 다시 깁슨 슈퍼 400을 들고 D.J. 폰타나, 엘비스와 재결합하여 연주했다. 이 특별 프로그램은 이들이 엘비스와 함께 연주한 마지막 시간이었고, 무어에게는 엘비스를 마지막으로 본 시간이었다.[27]
4. 엘비스 이후의 활동 및 사망
1969년, 엘비스가 네바다주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 활동을 시작했을 때, 무어와 D.J. 폰타나에게 출연 의뢰를 했다. 하지만 당시 스튜디오에서 다른 아티스트와 녹음을 진행하고 있던 무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세션에 참여하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엘비스의 공연 개최 예정은 미정이었기 때문에, 무어는 출연을 고사하고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을 계속했다.[51]
체트 앳킨스는 장식품과 교환하여 깁슨의 컨트리 제너럴맨 기타를 무어에게 건네주었다. 이후 무어는 컨트리 제너럴맨을 주로 사용했다.[51] 록계에서는 조지 해리슨(비틀즈), 키스 리처즈(롤링 스톤즈), 제프 벡 등이 무어의 영향을 받았다.[51]
200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사이드맨 부문).[51]
2016년 6월 28일, 테네시주내슈빌 자택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8][51]
5. 연주 스타일 및 영향
무어는 선 레코드와 초창기 RCA 레코드에서처럼, 검지 손가락에 핑거 피크를 사용하여 핑거 피킹 스타일로 기타를 연주했다. 이는 쳇 앳킨스 스타일을 로커빌리적인 방식으로 변형한 것이었다.[48]
평론가 데이브 마쉬는 프레슬리의 첫 싱글 "That's All Right"에 대해 "무어의 기타, 특히 솔로는 곡을 더 강하게 만들고 록 음악으로 이끈다"라고 썼다.[28] 마쉬는 프레슬리가 "Baby Let's Play House"에서 "발성 웅얼거림"을 도입했다고 평가했지만, 그 외에는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의 쇼이며 그는 자신의 몇 가지 선례를 세운다고 언급했다.[29] 선 레코드의 다른 곡에 대해 마쉬는 "Mystery Train"의 두드러진 요소로 "긴박한 스코티 무어의 기타 리프"를 인용했고,[30] "Good Rockin' Tonight"은 그의 "날카로운 기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31]
마쉬에 따르면, 무어와 다른 뮤지션들의 팀워크는 1957년 싱글이자 영화 주제가인 "Jailhouse Rock"을 "최소한 세 가지 이유로 지속적인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훌륭한 워킹 베이스, 스코티 무어의 파워 코드 발명, 그리고 스트립 댄스 룸 룸바와 완벽한 뉴올리언스 셔플의 중간 지점에 있는 D.J. 폰타나의 드럼 연주"이다.[32]
1961년, 군 복무 이후의 프레슬리 싱글 "Little Sister"에서, "스코티 무어는 그의 가장 훌륭한 선(Sun) 이후 기타 리프를 선보였다."[33] 그러나 프레슬리 음반 해설가 어네스트 요겐센에 따르면, 이 곡의 리드 기타리스트는 행크 갈랜드였고, 무어는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했다.[34]
무어는 로큰롤 리드 기타리스트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혁신적인 역할을 과소평가했다. 무어는 "그것은 꽤 오랫동안 존재해 왔어요. 칼 퍼킨스는 잭슨 근처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일을 하고 있었고, 제리 리 루이스는 열 살 때부터 그런 종류의 음악을 연주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다.[35] 폴 프리드랜더는 로커빌리의 특징적인 요소를 "날것이고, 감성적이며, 흐느끼는 보컬 스타일과 리듬감에 대한 강조[의] 블루스, 그리고 스트링 밴드와 스트럼된 리듬 기타[의] 컨트리."라고 설명했다.[36] 프레슬리 트리오의 첫 음반 "That's All Right"에서 무어의 기타 솔로는 "멀 트래비스 스타일의 컨트리 핑거 피킹, 어쿠스틱 부기에서 온 더블 스톱 슬라이드, 블루스 기반의 벤드 노트, 싱글 스트링 작업의 조합으로, 이 융합의 축소판이다."[37]
척 베리와 블루스 전설 B. B. 킹과 같은 일부 리드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가 1950년대에 인기를 얻었지만, 프레슬리는 공연 시 자신의 리드를 거의 연주하지 않고, 대신 리듬 기타를 제공하고 리드 연주는 무어에게 맡겼다. 기타리스트로서 무어는 내성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프레슬리의 공연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조지 해리슨, 제프 벡, 롤링 스톤스의 키스 리처즈를 포함한 많은 후대 인기 기타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48] 무어가 공동 저자 제임스 L. 디커슨과 함께 자서전을 작업하는 동안, 리처즈는 디커슨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엘비스가 되고 싶어했지만, 나는 스코티가 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15]
5. 1. 사용 장비
스코티는 초창기에 1952년형 텔레캐스터를 사용했는데, 멤피스의 하우크 피아노 회사에서 깁슨 ES-295 ("세상을 바꾼 기타"라는 별명이 붙음)와 맞바꿨다.[38][39] 그는 이 기타에 몇 가지 개조를 가했는데, 주로 레스 폴 스타일의 브릿지에 불만을 품고 각 현의 미세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조절 가능한 새들이 있는 멜리타-싱크로 소닉 모델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 브릿지는 또 다른 테일피스를 필요로 했고, 스코티는 깁슨이 ES-125에 사용한 클루슨 트라페즈 모델을 선택했다.[40] 이 기타는 엘비스와 함께 한 마지막 선(Sun) 레코딩 세션을 제외한 모든 세션에서 들을 수 있다. 1955년 7월, 스코티는 이 기타를 블론드 마감 처리된 1954년형 깁슨 L-5 CESN으로 교환했는데, 이 기타로 마지막 선 세션("Mystery Train" 포함)과 여러 RCA 컷을 녹음했으며,[38] 1957년에는 깁슨 슈퍼 400으로 전환했다.[41] 이 슈퍼 400은 ''Jailhouse Rock''과 ''King Creole'' 사운드트랙, 그리고 그 이전의 제대 후 세션에서 들을 수 있는 기타였다.[42]무어의 사운드에서 중요한 장비 중 하나는 기타 외에도, 체트 앳킨스가 처음 사용한 Ray Butts EchoSonic으로, 테이프 에코가 내장된 기타 앰프였는데, 이를 통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슬랩백 에코를 연주할 수 있었다.[41][43] 그러나 이 앰프는 1955년까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초기 선 세션(''That's All Right Mama'' 포함)은 이 앰프로 녹음되지 않았다.[44]
스코티는 깁슨사의 풀 어쿠스틱 기타를 선호했다. 펜더 텔레캐스터를 사용해 본 적도 있었지만, "여자를 껴안는 것 같아 손에 익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큰 사이즈의 기타를 선호했다.
6. 작품 목록
음반명 | 발매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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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변화를 가져온 기타(The Guitar That Changed The World!) | 1965년 |
올 더 킹스 멘(All the King's Men) | 1997년 |
트리뷰트 투 더 킹 - 트리뷰트 투 더 킹: 라이브 앳 애비 로드 스튜디오(Tribute to the King) | 2005년 |
=== 작곡 ===
더그 포인덱스터와 함께 1954년에 〈My Kind of Carrying On〉과 〈Now She Cares No More〉를 공동 작곡했으며, 이 곡들은 선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49] 1958년에는 빌 블랙과 함께 기악곡 〈Have Guitar Will Travel〉을 공동 작곡했으며, 이 곡은 Fernwood Records에서 발매되었다.[49]
6. 1. 음반
음반명 | 발매 연도 |
---|---|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 기타(The Guitar That Changed The World!) | 1965년 |
올 더 킹스 멘(All the King's Men) | 1997년 |
6. 2. 작곡
더그 포인덱스터와 함께 1954년에 〈My Kind of Carrying On〉과 〈Now She Cares No More〉를 공동 작곡했으며, 이 곡들은 선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49] 1958년에는 빌 블랙과 함께 기악곡 〈Have Guitar Will Travel〉을 공동 작곡했으며, 이 곡은 Fernwood Records에서 발매되었다.[49]7. 기타
스코티는 깁슨사의 풀 어쿠스틱 기타를 선호했다. 펜더 텔레캐스터를 사용해 본 적도 있었지만, "여자를 껴안는 것 같아 손에 익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큰 사이즈의 기타를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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