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이에 도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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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게이에 도시노리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1945년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났다. 히토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하여, 북미국 안전보장과장, 주미 대사관 공사, 주한 대사 등을 역임했다. 주일 미군 재편 문제와 독도 관련 한일 외교 갈등에 관여했으며, 2010년 서울 강연 중 김기종에게 시멘트 조각을 던져지는 테러를 당했다. 퇴임 후에는 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2020년 서보 중광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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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이에 도시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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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시게이에 도시노리 |
원어명 | 重家俊範 |
로마자 표기 | Sigeie Tonobeom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45년 6월 3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히가시히로시마시 |
국적 | 일본 |
학력 | |
출신 학교 | 히토쓰바시 대학 경제학부 졸업 |
경력 | |
직업 | 외교관 |
주요 경력 | 중동 아프리카 국장 대한민국 주재 특명 전권 대사 |
2. 인물
1945년 히로시마현 히가시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 슈도 고등학교를 거쳐, 1969년 히토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에서는 국제부에서 영어극을 했으며, 이타가키 요이치 세미나 출신이다. 세미나 동기로는 쓰지모토 하지메 (주아랍에미리트 대사), 오노 마사아키 (주 멕시코 대사)가 있으며, 1년 선배로는 오카모토 유키오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1년 후배로는 오카모토 타케시 (도쿄 가스 사장, 일본 경제 단체 연합회 부회장) 등이 있었다.
1969년 외무성에 입성했다. 동기 입성에는 타니우치 쇼타로 (외무사무차관), 다나카 히토시 (외무심의관),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 대사), 이이무라 유타카 (주 프랑스 대사), 미야모토 유지 (주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아마키 나오토 (주 레바논 대사 등) 등이 있다. 온화하고 신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소위 아메리칸 스쿨 출신으로, 북미국 안전보장과장,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펠로우, 국제 연합 일본 대표부 공사, 주 미국 대사관 특명전권공사 등을 역임하며, 미국 행정부 내 인물들과의 관계를 구축했다. 그 후 2006년에는 오키나와 담당 특명전권대사에 취임하여, 주일 미군 재편 문제에 매달렸고, 주일 미군 후텐마 비행장의 헬리콥터 비행 경로 재검토에 대한 일미 합의 등을 실현했다. 2007년 주한 대사에 취임하기 전 아시아 근무는 서기관으로서 말레이시아에서의 것이 유일했다.
2001년 이스라엘 정부의 예루살렘에서의 테러에 대한 보복 조치에 대해, 중동 아프리카 국장으로서 리오르 재경 이스라엘 대사에게, "이러한 조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 당사자 간의 증오의 악순환을 끊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나라로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치가 조속히 해제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요청했다.
2002년 3월, 아프가니스탄 부흥 지원 회의에 대한 비정부 기구 (NGO) 참가 거부 문제 등을 이유로 고마치 교시 (외무성 대신 관방장)와 함께 중동 아프리카 국장에서 물러나 관방 부속이 되었다.
관방 부속 기간 동안에는 다른 직원들과 책상을 나란히 할 수도 없어 심의관실이 사용되었으며, 해당 실은 "시게이에 씨의 방"이라고 불렸다. 같은 시기에 해임되어 관방 부속이 된 노가미 요지 (전 사무차관)도 북미국의 창고를 개조한 개별실, 고마치 교시 (전 관방장)는 관방 회의실을 개조한 개별실을 각각 사용했다.
그 후, 2002년 5월 13일 일본 국제 문제 연구소에 주임 연구원으로 파견되었다. 국장 이상의 경험자가 이 직책을 맡는 것은 처음이었고, 사실상의 강등 인사로 여겨졌지만, 이듬해 2003년부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특명전권대사였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로 취임했다.
2007년 12월 20일에 새로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과 한나라당 본부에서 회담하여, 후쿠다 야스오 (내각총리대신), 고무라 마사히코 (외무대신)로부터의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새로운 양국 관계 구축과 북한 문제에서의 협력 강화를 언급했다.
2008년, 일본이 중학교 사회과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에 "우리나라와 한국 사이에 다케시마를 둘러싸고 주장에 차이가 있다는 것 등에도 언급"과 같이, 처음으로 독도에 관한 문구를 도입한 것을 받아,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외교부 청사로 불려 항의를 받았다.
2010년 7월 7일, 주 대한민국 대사 퇴임 직전에 서울시에서 열린 강연 중, 갑자기 달려온 "독도 탈환"을 주장하는 50세 한국인 남성 김기종으로부터, 직경 10cm 크기의 시멘트 조각 2개를 던져졌다. 시게에는 재빨리 연단에 몸을 숨기는 등으로 피했지만, 동석했던 일등 서기관의 여성이 직격탄을 맞아, 손을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사건 후에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사과의 전화를 받았다. 당국에 구속된 후에도 "저 놈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폭력을 행사한 남성은, 같은 해 8월 3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구형에 대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남성은 2015년 3월에도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칼로 습격하여, 얼굴과 왼쪽 손목을 베는 테러 사건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을 일으켰다.
2. 1. 출생 및 학창 시절
1945년 히로시마현 히가시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10] 1965년 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17회),[10] 1969년 히토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10] 히토쓰바시 대학에서는 국제부에서 영어극 활동을 했으며, 이타가키 요이치 세미나 출신이다.2. 2. 외무성 경력
시게이에 도시노리는 1969년 히토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했다.[10] 미국에서 2년간 영어 연수를 받은 후, 본성에서 미국국 북미 제2과, 조약국 국제 협정과에서 근무했다. 재외에서는 미국, 말레이시아, 영국의 대사관에서 근무했다.[10]1984년 외무성 구주아국 대양주과 과장, 1986년 고토다 마사하루 내각관방장관 비서관, 1987년 오부치 게이조 내각관방장관 비서관을 역임했다. 1988년에는 외무성 북미국 안전보장과장이 되었다. 1990년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CFIA) 펠로우(재미국일본 대사관참사관)를 거쳐, 1991년 국제 연합 일본 정부 대표부 참사관, 1992년 국제 연합 일본 정부 대표부 공사를 역임했다.
1993년 외무성 대신 관방 외무 참사관(중근동 아프리카국 담당), 1995년 외무성 대신 관방 심의관(중근동 아프리카국 담당 및 경제국 담당)을 거쳤다. 1997년 재미국 일본국 대사관 공사, 2000년 재미국 특명 전권 공사로 승진했다. 2001년 외무성 중동 아프리카국 국장을 거쳐, 2002년 일본 국제 문제 연구소 주임 연구원(소장 대리)을 맡았다.
20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겸 보츠와나 겸 레소토 겸 나미비아 겸 에스와티니 특명 전권 대사, 2006년 특명 전권 대사(오키나와 담당)를 역임했다.[11]
2. 3. 주한 일본 대사 시절 (2007-2010)
2007년 9월 대한민국 주재 특명 전권 대사로 취임했다.[10] 2007년 1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회담을 갖고, 후쿠다 야스오 당시 일본 총리와 고무라 마사히코 외무대신의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2008년 일본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 문제와 관련하여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2010년 7월에는 서울에서 강연하던 중 김기종에게 시멘트 조각 투척 공격을 받았다.
2. 4. 퇴임 후
2010년 8월 외무성에서 퇴관하였다.[11] 2011년 4월 도지샤 대학 법학부 객원 교수로 취임하였고, 2012년에는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일중 산학관 교류 기구 부이사장 및 도레이 고문에 취임하였다.[11] 2015년 5월에는 일반 사단 법인 가스미가세키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1] 2020년 4월 서보 중광장을 수훈받았다.[11]3. 평가
시게이에 도시노리는 온화하고 신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소위 '아메리칸 스쿨' 출신으로, 미국 행정부 내 인맥을 구축했다. 주일 미군 재편 문제에 매달렸고, 주일 미군 후텐마 비행장의 헬리콥터 비행 경로 재검토에 대한 일미 합의 등을 실현했다.
2001년 이스라엘 정부의 예루살렘에서의 테러에 대한 보복 조치에 대해, 중동 아프리카 국장으로서 "이러한 조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 당사자 간의 증오의 악순환을 끊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나라로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치가 조속히 해제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요청했다.
2008년, 일본이 중학교 사회과의 학습지도요령 해설에 독도에 관한 문구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을 받아, 외교통상부 장관 유명환으로부터 외교부 청사로 불려 항의를 받았다.
2010년 7월 7일, 주 대한민국 대사 퇴임 직전 서울시에서 열린 강연 중, 독도 탈환을 주장하는 한국인 남성 김기종으로부터 시멘트 조각 2개를 던져지는 공격을 받았다.
4. 저술
- "대사의 추천 일본에서도 살 수 있는 '남아공 와인'" (외교. 21(2), 2006년 겨울)
- "현재 중동 정세와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세계 경제 평론. 45(12), 2001년 12월)
- "APEC 필리핀 회의의 성과와 일본 [질의응답 포함]" (세계 경제 평론. 41(2), 1997년 2월)
- "<좌담회> 자유화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APEC (특집 APEC 필리핀 회합의 성과)" (히구라시 카즈마사, 콘도 타케시 등과 공저) 당시의 흐름. 41(1), 1997년 1월)
- "논문집 - 최근 일본을 둘러싼 외교·경제 문제 - 세계 무역 기구(WTO)의 동향" (일본무역회 월보 (통권 519), 1996년 10월)
4. 1. 논문
- "대사의 추천 일본에서도 살 수 있는 '남아공 와인'" (외교. 21(2), 2006년 겨울)
- "현재 중동 정세와 미국 동시 다발 테러" (세계 경제 평론. 45(12), 2001년 12월)
- "APEC 필리핀 회의의 성과와 일본 [질의응답 포함]" (세계 경제 평론. 41(2), 1997년 2월)
- "<좌담회> 자유화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APEC (특집 APEC 필리핀 회합의 성과)" (히구라시 카즈마사, 콘도 타케시 등과 공저) 당시의 흐름. 41(1), 1997년 1월)
- "논문집 - 최근 일본을 둘러싼 외교·경제 문제 - 세계 무역 기구(WTO)의 동향" (일본무역회 월보 (통권 519), 1996년 10월)
참조
[1]
뉴스
中央日報
2007-06-20
[2]
웹사이트
板垣與一先生に師事して
https://hermes-ir.li[...]
[3]
뉴스
琉球新報
2007-08-23
[4]
웹사이트
「イスラエルによる東エルサレムにおけるパレスチナ関連施設差し押さえに対する重家中東アフリカ局長よりのリオール在京イスラエル大使への申し入れについて」
https://www.mofa.go.[...]
外務省
2001-08-14
[5]
뉴스
朝日新聞
[6]
뉴스
産経新聞
2002-12-20
[7]
뉴스
中央日報
2008-07-15
[8]
뉴스
<駐韓米大使被襲>容疑者逮捕…2010年日本大使に石投げたキム氏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15-03-05
[9]
뉴스
日本大使へ投石で有罪判決=韓国
http://www.jiji.com/[...]
2010-08-30
[10]
서적
現代日本人名録2002
[11]
웹사이트
令和2年春の叙勲受章者名簿
https://www8.cao.go.[...]
[12]
뉴스
중앙일보
2007-06-20
[13]
뉴스
중앙일보
2007-06-20
[14]
뉴스
환구신보
2007-08-23
[15]
뉴스
중앙일보
200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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