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다 마사하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토다 마사하루는 1914년 도쿠시마현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내무성 관료로 시작하여 경찰청 장관을 역임했으며, 1972년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을,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자치상, 내각관방장관, 총무청 장관 등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과 위기 관리에 기여했다.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법무상을 지냈으며, 1996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200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총무청 장관 - 가노 미치히코
가노 미치히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자유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운수성 정무차관, 농림수산대신 등을 지냈고, 여러 정당을 거쳐 간 나오토 내각과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장관을 세 차례 역임했으며, 농림수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일본의 총무청 장관 -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는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자치성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참의원 의원, 총무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여러 정당을 거쳐 오사카 유신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2023년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 록히드 사건 관련자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 록히드 사건 관련자 - 나카소네 야스히로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 출생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등을 추진하다가 2019년 사망했다.
고토다 마사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고토다 마사하루 |
원어 이름 | 後藤田 正晴 |
로마자 표기 | Gotōda Masaharu |
출생일 | 1914년 8월 9일 |
출생지 | 일본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시 |
사망일 | 2005년 9월 19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순천당대학 의학부 부속 순천당 병원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 |
경력 | |
이전 직업 | 경찰청 장관 |
군사 경력 | |
계급 | 육군 주계대위 |
칭호 및 훈장 | |
칭호 | 정3위 |
훈장 | 훈1등 욱일대수장 |
학위 | 법학사 |
가족 관계 | |
친족 (정치가) | 아버지: 고토다 마스자부로 형: 고토다 고헤이 조카: 이노우에 아쓰카타 대조카: 고토다 마사즈미 |
정치 경력 | |
직책 | 부총리 |
내각 | 미야자와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 1993년 4월 8일 |
임기 종료 | 1993년 8월 9일 |
직책2 | 제55대 법무대신 |
내각2 | 미야자와 개조 내각 |
임기 시작2 | 1992년 12월 12일 |
임기 종료2 | 1993년 8월 9일 |
직책3 | 제45・47-48대 내각관방장관 |
내각3 | 제1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나카소네 내각 |
임기 시작3 | 1982년 11월 27일 |
임기 종료3 | 1983년 12월 27일 1985년 12월 28일 - 1987년 11월 6일 |
직책4 | 초대 총무청 장관 |
내각4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4 | 1984년 7월 1일 |
임기 종료4 | 1985년 12월 28일 |
직책5 | 제47대 행정관리청 장관 |
내각5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
임기 시작5 | 1983년 12월 27일 |
임기 종료5 | 1984년 7월 1일 |
기타 직책1 | 제28대 자치대신 제37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제42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2차 오히라 내각) |
임기 시작6 | 1979년 11월 9일 |
임기 종료6 | 1980년 7월 17일 |
기타 직책3 | 중의원 의원 도쿠시마현 전현구 당선 횟수 7회 |
임기 시작8 | 1976년 12월 10일 |
임기 종료8 | 1996년 9월 27일 |
기타 직책4 | 제6대 경찰청 장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아라키 마스오, 나카무라 도라타) |
임기 시작9 | 1969년 8월 12일 |
임기 종료9 | 1972년 6월 24일 |
기타 직책5 | 제6대 경찰청 차장 |
임기 시작10 | 1965년 5월 19일 |
임기 종료10 | 1969년 8월 12일 |
기타 직책6 | 제3대 자치청 장관관방장 |
임기 시작11 | 1959년 3월 6일 |
임기 종료11 | 1959년 10월 13일 |
2. 생애
고토다 마사하루는 1914년 8월 9일 도쿠시마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38년 내무성에 입성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주로 대만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 포로 생활을 거쳐 귀국, 내무성 폐지 후에는 경찰 관료로 자리를 옮겨 경찰청 창설에 기여했다. 여러 요직을 거쳐 1969년 8월 제6대 경찰청장관에 올랐다.[3] 재임 기간 동안 요도호 납치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등 좌익 테러 사건이 빈발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4][5]
1972년 6월 경찰청에서 퇴임한 직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발탁되어 행정 담당 내각관방 부장관으로 정권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1974년 참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후보로 고향인 도쿠시마현에서 출마했으나, 미키 다케오 파벌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낙선했다. 이 선거는 금권 선거 논란과 함께 '아와 전쟁'으로 불리며 고토다에게 큰 정치적 시련을 안겼다. 그는 이 선거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절치부심하여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다나카파에 합류했다.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는 파벌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각관방장관과 총무청 장관 등 핵심 요직을 역임하며 5년 내내 각료직을 유지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의 위기관리 능력과 관료 장악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고토다는 행정 개혁 추진과 각종 사건 처리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정보력과 냉철함으로 "면도날 고토다", "일본의 조제프 푸셰", "일본의 유리 안드로포프" 등의 별명을 얻었다. 1987년 다나카파가 분열될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무파벌 노선을 선택했다.
이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법무대신과 부총리를 지냈다. 법무대신 재임 중이던 1993년 3월, 3년 이상 중단되었던 사형 집행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6] 1996년 총선거에 불출마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증손자인 고토다 마사즈미는 2000년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가문의 대를 이었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2005년 9월 19일, 91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14년 8월 9일에 도쿠시마현 오에군 히가시야마촌(현 요시노가와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대 조정에서 제사를 담당한 이무베 씨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 시대에는 지방 행정을 담당한 촌의 수장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역임했다. 생업으로는 쪽 염색과 오노미치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고토다는 9남매 중 막내였으나, 성인이 된 형제자매는 본인을 포함해 6명뿐이었다.정치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는 양조장 수익을 자유당의 정치 자금으로 기부하거나 지역 교육 보급에 사용했으며, 직접 도쿠시마현의회 의원과 오에군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2년 5월 11일, 아버지가 간장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도쿠시마 시내 병원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운구해 돌아오던 어머니는 고개에서 기다리던 어린 고토다에게 "결국 너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구나"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마저 1924년 8월 26일에 세상을 떠나자, 고토다는 이듬해 도쿠시마의 유력 자산가였던 누나의 시댁 이노우에가에 맡겨졌다. 이노우에가는 고토다를 장남처럼 대했으며, 큰형 고토다 코헤이가 유산을 정리해 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주어 경제적으로는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은 경험은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히가시야마 소학교와 토미오카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구제 미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토다는 미토 고등학교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훗날 도쿄대 투쟁 당시 "도쿄대는 아무리 폐쇄되어도 상관없다. 모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의 관청 같은 곳이니 내버려 둬도 좋다. 하지만 미토 고등학교의 유리창 하나라도 깨뜨려 봐라. 본부장에게 지시해서 전원 검거하겠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1935년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정치학과로 전과했다. 당시 일본 사회 분위기와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하거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관료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37년 남만주철도 입사 시험에서는 시험 일정을 착각하여 면접 기회를 겨우 얻었으나 불합격했고, 같은 해 처음 응시한 고등문관시험에서도 낙방했다.
이듬해인 1938년 10월, 두 번째 도전 끝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8등으로 합격했으며, 1939년 3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2. 2. 내무성 및 군 복무
1938년 4월 10일 당대의 1류 관청으로 통하던 내무성에 들어갔다. 당시 동기로 훗날 방위관료의 톱으로 군림하게 되는 가이하라 오사무와 훗날 건설성 관방장이 되는 히라이 마나부가 있으며 고토다와 함께 장래를 촉망받는 관료로 꼽혀 도쿠시마의 세 까마귀로 불렸다.고토다는 토목국 도로과 겸 항만과 견습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직속 과장이 나다오 히로키치였으며 고토다의 교육 담당은 호소다 도쿠지였다. 1940년 1월 31일 호소다의 추천으로 도야마현 경찰부 노정과장으로 발령받아 산업 재해의 인정 등을 담당했다.
같은 해 3월 징병되어 4월 8일 일본 제국 육군 대만 보병 제2연대에 배속됐다. 원래 고토다는 단기현역제도가 있는 해군에 지원했지만 불합격돼 육군으로 가게 됐는데 해군과 달리 육군은 고등관에 대한 특례가 없어 이등병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첫 해에는 고참 병사들로부터 계집애처럼 운다는 등 부조리를 당해야 했다.
이후 갑종간부후보생에 합격해 육군경리학교에서 보급을 교육받았다.고토다는 경리학교에서 군량은 적으로부터 빼앗는 것이며 물자는 전장에서 조달한다는 게 군의 방침임을 배웠다. 훗날 군이 중국에서 대량의 군표를 남발한 것을 두고 중국이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경리부 장교 후보생으로서 육군 군조를 거쳐 1941년 10월 1일 육군 주계소위로 임관하고 12월 8일 개전을 맞이했다.
이 무렵 혼마 마사하루의 부하로 배속돼 대만군사령부와 대만총독부 사이의 연락장교로 활동했다. 1943년 9월 10일 중위로 승진한 뒤 다카사고 의용대나 대만특설노무보국대의 편성에 관여했다. 1945년 3월 도쿄에 있다가 도쿄 대공습을 경험했으며 20일엔 도쿠시마상공회의소 회장 요시노 세이노스케의 양녀 마쓰코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고토다는 다시 대만에 있었다. 이때 비탄에 잠긴 일본인과 달리 폭죽을 쏘며 기뻐하는 대만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토다는 훗날 마지막으로 중국을 찾았을 때 칭화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이 무렵을 회상하며 "부하 중에는 대만인이 많이 있었는데 사이가 좋았고 나는 일본인과 대만인 사이의 어떠한 거리감도 느끼지 못했다. 대만 통치는 조선과는 다르다고 일본인은 생각했다. 통치는 온화했고 대만인도 제법 협력적이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한 날이었다. 일본인이 운명에 곤혹해 하며 슬픔에 빠져 있을 때 타이베이의 마을에선 폭죽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뛰면서 '이겼다!'고 환희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력으로 이민족을 통치하는 것은 결국 무리였다고 완전히 깨달았다. 왜냐면 그들의 마음까지는 정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나 같은 대만인에 대해 차별적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대만인을 믿었던 일본인을 전율케 하는 현실이었다"라고 말했다. 패전 당일 평소 사이가 좋았던 한 대위가 고토다를 찾아와서 일본의 장래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것이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고토다가 알게 된 건 그가 자살한 다음의 일이었다. 20일 포츠담 진급의 혜택을 받아 주계대위가 되었다. 이등병에서 시작했으니 최종적으로 9계급을 진급한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이 중장이 이끄는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이 대만에 진주했다. 국민혁명군에 의해 일본군은 무장해제됐고 군인 신분이었던 고토다는 다음 해 4월까지 포로 생활을 보냈다. 다만 강제 노동도 구속도 당하지 않았고 번화가에 술을 마시러 갈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자유로웠다. 대만일치시기가 비교적 양호했고 현지인들이 일본인에 대한 보복 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오히려 현지인들이 식량을 강탈하러 오자 국민혁명군은 현지인을 향해 발포하는 등 충돌이 잦았다. 고토다는 이런 행위들이 2·28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강탈하는 건 나쁜 행위다", "그 식량은 일본군으로부터 국민혁명군이 접수한 것이니 대만 주민들의 것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지룽항에서 대만을 떠날 때 대만인 부하들이 평소 대만인을 차별하지 않았던 고토다를 배웅해 주었다.
미국의 수송함 리버티선을 타고 와카야마현의 다나베항에 도착하자 미국의 공업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상륙하자마자 대만군사령부에서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아목이 들끓었던 병졸들과 같은 취급을 당해 DDT를 살포당했을 땐 일본이 패전했음을 실감했다. 그럼에도 목숨을 부지한 채 조국에 돌아올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고토다는 대만에 배속된 직후 발진티푸스 의심을 받아 '저 병동에서 살아서 나온 사람은 없다'라는 소문이 있는 대만육군병원의 병동에서 티푸스 환자와 함께 격리되었다. 하지만 고토다가 우연히 티푸스의 증상을 알고 있었고 병원장과 아는 사이였기에 오진 인정을 받고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대만과 필리핀을 배로 왕래할 때에도 어뢰 공격을 받았고 기차로 이동할 때에는 미군 전투기의 사격을 받기도 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갈 때는 오키나와를 거치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해 중국 대륙으로 경유해 갔다. 실제로 오키나와를 경유한 비행기는 격추되었고 고토다가 무사히 육군성에 도착하자 어떻게 살아서 왔냐며 놀라기까지 했다. 도쿄에서 공습을 당했을 땐 방공호로 대피하는 게 귀찮아서 같이 하숙하던 중좌의 권유를 받아 집에 머물렀는데 오히려 방공호가 직격탄을 받아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2. 3. 관료 시절
복원 후 고향에서 잠시 요양한 뒤 내무성에 복귀했다. 군 복무 경력 때문에 공직 추방 대상이 될 수도 있었으나, 스즈키 슌이치가 GHQ에 "주계장교로서 통상 업무만 했을 뿐 첩보 활동과는 무관하며, 6년간 병역을 이행해 내무성 물도 들지 않았다"고 변호해 준 덕분에 추방을 면할 수 있었다. 1946년 5월 7일, 가나가와현 경제부 상정과장으로 발령받아 의류품, 석탄 등 물자 배급을 담당했다. 당시 전임자는 특별 배급을 요구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요구를 수용했으나, 고토다는 공평성을 내세워 일본인과 동등하게 분배했다. 이로 인해 전임자는 재일 조선인을 편애했다는 비판 속에 사직해야 했다. 이후 현지사 우치야마 이와타로의 눈에 들어, 우치야마가 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나 해군사령관 벤튼 위버 데커를 방문할 때 동행하기도 했다.1946년 10월 24일 내무성 본부로 돌아와 지방국 직원과 사무관이 되었고, 다카하시 미키오의 후임으로 내무성 직원 조합 위원장을 겸했다.[84] 국장 고리 유이치와 과장 고바야시 요소지 밑에서 「지방공무원법」 제정, 노조와의 교섭, 공직 추방 관련 업무 등을 담당했다. 하지만 공직 추방 해제와 관련된 진정 처리[80]에 염증을 느낀 고토다는 해당 업무를 내각 직속 공직적격심사위원회로 이관시키는 데 관여했다.
입법 업무에 어려움을 느끼던 고토다는 가이하라 오사무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찰로 이직을 결정했다. 당시 경찰은 업무량 폭증으로 증원을 원하고 있었고, 가이하라는 "상식만 있으면 경찰 업무를 볼 수 있다"고 고토다를 설득했다. 내무성 인사과장 이시이 에이조의 추천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1947년 8월 12일, 경시청 보안부 경제2과장으로 발령받아 물자 통제를 담당했다. 같은 해 12월 내무성이 폐지되면서 국가 지방 경찰 본부 소속 경찰 관료가 되었다. 1948년 3월 6일에는 경시청 경무부 경무과장이 되어 경찰 인사의 쇄신에 힘썼고, 1949년 3월 7일에는 도쿄 경찰 관구 본부 형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8월 30일, 이시이 에이조의 추천으로 경찰예비대 본부 경무국 경비과장 겸 조사과장이 되어 경찰예비대 창설 및 자위대의 전신이 되는 보안대의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52년 8월 20일, 국가 지방 경찰 본부 경비부 경라교통과장이 되었다. 재직 중 니주바시 사건이 발생하여 국회에서 추궁을 받기도 했다.[76] 1954년 경찰청이 창설되자 경찰청 소속이 되었다. 1955년 7월 1일에는 경찰청 장관관방 회계과장이 되어 순찰차 정비, 통신 및 감식 능력 강화 등 경찰의 과학화를 추진했다.[73] 또한 인사과장 아라이 히로시와 협력하여 자치청과 교섭, 경찰 정원을 늘려 당시 '혁명의 전야'로 불리던 사회 불안에 대비한 경찰력 강화를 도모했다.
1959년 3월 6일, 옛 내무성의 후신인 자치청의 장관관방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세무국장이 되어 지방 자치 단체의 재원 문제와 관련하여 대장성과 협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정 자산세의 과세 표준을 수익환원가격에서 매매가격으로 변경하는 데 관여했다. 또한 요식세(현 특별지방소비세) 도입 과정에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 마에오 시게사부로, 정무조사회장 다나카 가쿠에이, 총무회장 아카기 무네노리 등 당 3역이 제시한 수정안을 거부하고 원안을 관철시켰다. 이 일로 해임될 각오까지 했으나 실제 해임되지는 않았다.
1960년 7월 1일 자치청이 자치성으로 승격한 후, 자치사무차관이 된 코바야시 요시쓰구는 고토다에게 자치성에 남아달라고 권유했다. 코바야시는 고토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장차 정계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전 경찰청 장관 이시이 에이조의 강력한 반대와 경찰 복귀를 희망했던 고토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1962년 5월 8일 경찰청으로 복귀하여 장관관방장이 되었다. 1963년 8월 2일 경시감으로 승진하여 경비국장이 되었고, 주일 미국 대사 에드윈 라이샤워 암살 미수 사건(라이샤워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다. 1965년 3월 12일 경무국장을 거쳐 같은 해 5월 19일 경찰청 차장으로 임명되어 학원 분쟁과 70년 안보 투쟁 등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3]
1969년 8월 12일, 제6대 경찰청 장관에 취임했다. 장관 재임 시기는 극좌 폭력 집단에 의한 테러와 폭동이 빈발했던 시기로, 요도호 납치 사건, 세토 내해 해상 납치 사건, 미시마 사건, 산리즈카 투쟁, 아사마 산장 사건, 산악 베이스 사건, 니시야마 사건,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등 중대 사건 처리에 매달렸다.[4][5] 1971년 9월 제1차 사카시타문 난입 사건 발생 전, 사토 에이사쿠 총리대신으로부터 "황거에 폭도가 침입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는 직접 지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핵파 계열 청년들의 황거 난입을 막지 못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나카무라 도라타의 만류로 유임되었다.
당시 부하였던 삿사 아쓰유키(훗날 초대 내각안전보장실장)는 요인 테러를 우려하여 고토다에게 경호원 배치를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고토다는 "나를 지킬 여유가 있다면 범인을 체포하라"며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9][10] 실제로 고토다는 1971년 10월 쓰치다・닛세키・피스 캔 폭탄 사건 당시 테러 표적 중 한 명이었으며, 자신에게 보내진 편지 폭탄이 우체국에서 폭발하여 직접적인 피해는 면했지만, 우체국 직원 1명이 전치 3주의 화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1]
고토다는 1972년 6월 경찰청 장관직에서 퇴임했다.[4][5]
2. 4. 정치 입문과 아와 전쟁
1972년 6월 24일 경찰청 장관직을 사임한 고토다는[80] 같은 해 7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발탁되어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사무)으로 취임했다.[80] 당시 관례상 내각관방 부장관은 경찰청 장관보다 격이 낮은 자리였으나, 이후 고토다는 다나카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하게 된다.다나카 내각이 국토청 설립을 구상할 때, 다나카는 고토다에게 초대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고토다는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이 각료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거절했다.[80] 이후 야마시타 간리의 권유로 1972년 12월 총선 출마를 고려했으나, 다나카 총리가 "이 내각은 자네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 선거 때문에 관저가 비면 내각이 무너진다"며 만류했고, 선거 준비 부족 문제도 있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80]
1973년 4월, 다나카 총리가 소선거구제 도입 구상을 발표하자, 5월 12일 고토다는 선거구획정위원회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에서도 사전 협의 부족과 게리맨더링 우려로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철회되었다.[80]
1973년 11월 25일, 고토다는 내각관방 부장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도쿠시마현에서 1974년 참의원 선거 출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80] 하지만 도쿠시마현은 당시 부총리이자 미키파를 이끌던 미키 다케오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더욱이 도쿠시마현 선거구는 정원이 1명인 선거구였고, 현역 의원은 미키파의 원로인 구지메 겐타로였다.[80] 고토다는 당시 경찰 간부 출신은 고향에서 출마하는 관례와 전국구 출마 시 전국 경찰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도쿠시마현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80]
고토다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자민당 공천을 신청했고, 도쿠시마현 지부 당원 투표를 통해 구지메를 누르고 공천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키파의 격렬한 반발을 샀고, 구지메는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도쿠시마현 내 보수 세력이 양분되면서 선거전은 극도로 치열해졌고, 이는 훗날 아와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81]
선거 초반에는 재계와 당 주류파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고토다가 유리하다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지역 기반이 탄탄했던 구지메 진영의 맹렬한 추격 끝에, 1974년 7월 7일 선거 결과 구지메가 196,210표를 얻어 153,388표에 그친 고토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고토다 선거 캠프에서는 268명이나 선거법 위반 혐의로 도쿠시마현 경찰에 체포되면서 "금권 부패 선거"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고토다는 지역구를 돌며 사죄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체포된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를 선임해주어야 했다.[80] 훗날 고토다는 이 선거를 "내 인생 최대의 오점"이라고 회고하며, 당시 자신이 세상을 너무 안일하게 보았고 이 실패가 자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80] 또한, 이 선거 패배와 더불어 정치적 후원자였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다나카 금맥 문제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선거 과정에서 대립했던 미키 다케오가 후임 총재가 되면서 고토다는 한동안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절치부심한 고토다는 1976년 중의원 선거에 도쿠시마현 전현구에서 다시 출마하여, 당시 현직 총리대신이었던 미키 다케오와 직접 맞붙었다. 선거 과정에서 록히드 사건과 관련하여 미키 진영과 일본공산당 등으로부터 네거티브 공세를 받기도 했다.[80] 하지만 고토다는 "철저하게 (갈 길을) 가라"는 다나카의 조언에 따라 네거티브 공세에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지역 활동에 전념했고, 그 결과 68,990표를 얻어 미키에 이어 2위로 당선에 성공했다. 한편, 이 선거에서는 지난 참의원 선거에서 고토다를 도왔던 아키타 다이스케(자민당)와 고토다의 조카인 이노우에 히로노리(사회당)가 마지막 5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져 고토다에게는 다소 불편한 선거이기도 했다 (결과는 이노우에가 당선되고 아키타는 낙선했다).[80]
중의원 당선 후 고토다는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인 목요 클럽에 가입했다. 이후 선거 경험을 쌓기 위해 당 총무국 차장을 맡아 도쿄도의회 선거 지도를 담당하기도 했다.[80]
2. 5. 오히라 내각과 나카소네 내각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미키 다케오의 제안으로 당원·당우가 참여하는 예비선거가 처음 도입되었다. 다나카파는 현직 총재인 후쿠다 다케오에 맞서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했다. 오히라의 파벌인 굉지회는 표가 많은 도쿄도에서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다나카파의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고토다에게 도쿄에서 오히라 지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겼다. 고토다는 사사키 요시타케, 하마노 세이고와 협력하여 구의회 의원을 동원해 만든 당원 명단을 바탕으로 호별 방문과 전화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당초 후쿠다가 압도적 1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2위로 예상되었던 도쿄에서 오히라가 약 40%를 득표하며 2위로 뛰어올랐다. 고토다의 지역구인 도쿠시마현에서도 미키파가 지지하는 고모토 도시오 대신 오히라가 1위를 차지했다.[6][6] 예비선거 결과, 오히라가 748점, 후쿠다가 638점을 얻어 예상을 뒤엎었다. 후쿠다는 "하늘의 목소리에도 이상한 목소리가 가끔 있다"는 말을 남기고 본선거에서 사퇴했고, 오히라가 총재로 선출되었다.1979년 11월, 제2차 오히라 내각이 출범하면서 고토다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했다.[6][6] 이는 제1차 오히라 내각 출범 당시에도 제안받았던 자리였으나, 당시에는 다나카파 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6][6] 당시 고토다는 중의원 당선 2회에 불과했는데, 통상 5~6선 의원이 되어야 입각할 수 있었던 자민당의 연공서열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고토다는 오히라 내각에서 1980년 7월까지 해당 직책을 수행했다.
스즈키 젠코 내각 출범 후 잠시 내각에서 물러났다가, 1981년 11월 스즈키 젠코 개조 내각에서 선거제도조사회장에 임명되었다.[6][6]
1982년 1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고토다는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으로 발탁되었다.[6] 당시 내각관방장관은 총리와 같은 파벌 출신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에, 최대 파벌인 다나카파 소속의 고토다가 임명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나카소네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다나카파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는 의미에서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6] 그러나 나카소네 총리 자신은 행정 개혁 추진과 위기 상황 대처를 위해 관료 조직 장악력과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고토다가 필요했다고 임명 이유를 밝혔다.[6][6]
내각관방장관으로서 고토다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1982년 12월 소련의 대일 첩보 활동이 드러난 레프첸코 사건, 1983년 1월 나카가와 이치로 자살 사건, 같은 해 9월 소련군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미하라 산 분화[27] 등 각종 사건과 위기 상황에서 능숙하게 대처했다.[6] 특히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 때는 자위대가 감청한 소련군 교신 기록이라는 기밀 정보의 공개를 결단하기도 했다.[6] 그의 정보력과 냉철한 일 처리 방식 때문에 "일본의 조제프 푸셰", "일본의 유리 안드로포프"와 같은 별명을 얻었다.[6]
1983년 12월 개각에서는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고,[6] 1984년 7월 행정관리청과 총리부 일부가 통합되어 총무청이 신설되자 초대 총무청 장관을 맡아[6] 전신전화공사, 전매공사, 국철의 3공사 민영화 등 나카소네 내각의 핵심 과제인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1985년 8월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발생 당시에는 총무청 장관으로서 나카소네 총리를 보좌하며 위기 관리에 힘썼다.[6]
1985년 12월, 제2차 나카소네 제2차 개조 내각 출범과 함께 다시 내각관방장관으로 복귀하여 제3차 나카소네 내각까지 유임되었다.[6] 이 시기 고토다는 단순한 관방장관을 넘어 사실상 "부총리급"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6] 이란-이라크 전쟁 종결을 앞두고 해상보안청 순시선이나 해상자위대 소해정의 페르시아만 파견이 논의되었을 때, 고토다는 "나는 각의에서 서명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반대하여 나카소네 총리가 파견 계획을 단념하도록 만들었다.[14][6] 이는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일화였다.[6] 1987년 도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 당시에는 통상산업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고토다가 외사과·생활 안전과에 압력을 넣어 외환법 위반으로 사건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나카소네 정권 5년 동안 고토다는 유일하게 내각 출범부터 퇴진까지 계속 각료직을 유지한 인물이었다.[6]
그러나 고토다의 중용은 자민당 내, 특히 그가 속했던 다나카파 내부에서조차 상당한 질시를 받았다. 이 때문에 "해바라기"(항상 권력의 중심인 총리만 바라본다는 의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15][6] 다나카파 내에서는 고토다와 같은 외부 영입 인사들이 득세하는 상황과, 당내 최대 파벌임에도 불구하고 미키 다케오 이후 총재를 배출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자와 이치로,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타 쓰토무 등 중진·소장파 의원들이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을 중심으로 1984년 창정회를 결성하며 파벌 내 파벌을 만드는 움직임을 보였다.[6] 1987년 7월, 다나카파가 결국 다케시타파와 니카이도 그룹으로 분열되었을 때, 고토다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무파벌 노선을 선택했다.[6] 고토다는 1987년 11월 나카소네 총리가 퇴임하면서 내각관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 6. 총재 취임 고사와 미야자와 내각
1992년 12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3월에는 사형수 3명에 대한 사형 집행을 명령하여, 1989년 11월부터 이어져 온 사형 집행 유예를 사실상 끝냈다. 같은 해 4월, 와타나베 미치오 부총리가 건강 문제로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7월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패배하자 내각에서 물러났다.[6]2. 7. 정계 은퇴와 사망
나카소네의 후임으로 다케시타가 집권하자 고토다는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리크루트 사건이 터져 다케시타가 총리대신 사임을 표명하고, 같은 스캔들 의혹이 있는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등 다른 파벌 영수도 총리대신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리크루트 사건과 연관이 없던 이토 마사요시, 다무라 하지메, 가이후 도시키, 사카타 미치타 등의 원로와 함께 고토다가 후임 총재 물망에 올랐다.하지만 고토다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총재 취임을 고사했다.
고토다는 "나는 총대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총리직을 거절했다. 결국 다케시타의 후임은 외무상 우노 소스케로 결정되었으나, 우노 내각은 리크루트 사건, 소비세 도입, 그리고 우노 자신의 게이샤 스캔들 문제로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하면서 2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고토다는 1992년 12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93년 3월, 사형수 3명에 대한 사형 집행을 명령하여 1989년 11월부터 사실상 중단되었던 사형 집행을 재개했다.[6] 1993년 4월에는 와타나베 미치오 부총리가 질병으로 사임하자 후임 부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93년 7월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패배하자 내각 총사퇴와 함께 물러났다. 고토다는 1996년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6]
그의 증손자인 고토다 마사즈미는 2000년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가문의 대를 이었다.
고토다 마사하루는 2005년 9월 19일, 91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3. 정책 및 사상
내무성을 거쳐 경찰 관료로서 치안 유지에 힘썼으며, 제6대 경찰청장관까지 올랐다. 퇴임 후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발탁되어 내각관방 부장관으로서 다나카 정권을 지원했다.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7선 연임하며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행정관리청 장관, 총무청 장관, 법무대신, 부총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만년까지 자유민주당의 원로로서 국정에 영향을 미쳤다. 날카로운 일 처리 방식으로 "면도날 고토다", "일본의 안드로포프", "일본의 조제프 푸셰" 등의 별명을 얻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퇴진 의사를 밝히고 유력 후계자들이 의혹으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서, 사건과 무관했던 고토다도 후임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는 경찰 출신, 다나카 가쿠에이와의 관계, 과거 선거법 위반 전력, 나카소네 정권 보좌 경력,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들며 총리직을 고사했다.
경찰 관료로서의 경험은 그의 정책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학생 운동[23], 나리타 공항 문제[24], 경비업[25][26], 경찰 특수부대[27][28] 등 치안 관련 사안에 대한 그의 입장은 실무 경험에 바탕을 두었다. 법무대신 시절 법질서 유지를 위해 사형 집행을 재개했지만[29], 사형 폐지론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은퇴 시 경찰 시절 부하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점, 특히 안보 투쟁 경비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 "생애의 후회"라고 술회했다.[35]
나카소네 내각 관방장관 시절, 내각 관방 6실(내정·외정·안보·정보·홍보·총무) 발족 시 실장들에게 내린 훈시는 '고토다 5훈'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출신 성청의 이익을 잊고 국익을 생각하라
# 잘못된 정보가 아닌 진짜 사실을 보고하라
# 용기를 가지고 의견을 진언하라
#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 결정이 내려지면 따르고 명령은 실행하라
이 훈시는 관료주의를 경계하고 국익 우선의 자세를 강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방청 경험은 그에게 일본 지도층의 책임감 부재를 통감하게 했다.[42]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일본 국내 문제라는 입장이었으나, 1986년 내각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총리의 공식 참배가 주변국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참배 보류를 발표했다.[33]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에는 반대 입장을 취했다.[34]
안보 및 헌법 문제에 대해서는 문민 통제 원칙을 중시했으며, 후일 비둘기파적인 입장을 보였다. 헌법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며[14] 시대 변화에 맞춰 개정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졌다. 특히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대해서는 자위대의 현실적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23], 해외에서의 무력 행사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냉전 종결 후에는 미일 안보 조약의 성격 변화와 미군 기지 문제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일본의 정보 기관 강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활동 범위를 정보 수집 및 방위에 한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리크루트 사건 이후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55년 체제 하의 정치적 경직성을 타파하기 위해 정권 교체가 가능한 정치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소선거구제 도입 등 정치 개혁을 주도했다.[41]
경제 정책에서는 토지 사유 재산권과 공공의 복지의 조화를 강조하며[23] 부동산 가격 급등을 경계했다. 격차 사회 심화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강조했고, 경제 불안이 정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42]
외교적으로는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일중 평화 우호 조약 교섭에 참여했으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는 등 우호 관계 증진에 노력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과는 일단락되었다고 보면서도 상대방 입장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소련의 첩보 활동 실태가 드러난 레프첸코 사건을 계기로 정보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기밀 보호법 제정에는 신중론을 폈다. PLO 의장 아라파트를 만나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3. 1. 치안
경찰청 장관 시절 고토다는 격화되던 일본의 학생 운동과 극좌과격파에 의한 테러 및 폭동에 대처해야 했다. 당시 경비 등에 동원된 경찰관 중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고토다는 경찰청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71년 9월, 산리츠카 투쟁 중 발생한 도호 교차로 사건을 겪었다. 나리타 공항 예정지의 대집행(제2차 대집행) 과정에서 후방 경비를 맡았던 특별 기동대가 공항 반대파의 습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화염병, 쇠파이프, 죽창 등으로 공격받은 기동대원 3명이 사망하고 약 10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에는 턱뼈가 부서지고 치아 전체를 잃거나 전신을 100바늘 이상 꿰맨 대원도 있었다.[36] 당시 치바현 경찰 본부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려 하자, 고토다는 "이런 종이 한 장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보다 부하를 죽인 범인을 이 장관실로 데려와"라며 사표를 반려하고 범인 검거를 우선시했다. 또한 "신문은 경찰관이 과격파의 화염병을 맞아 순직하면 '사망'이라고 쓴다. 왜 '살인'이라고 쓰지 않는가. 그건 오보이다"라며 언론 보도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건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우리의 임무는 이 야스다 강당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치안이란 장기적으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적대심만 주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그들도 선량한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므로, 그런 앙금을 남기면 장기적으로 불리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들의 행동을 국민으로부터 부각시키는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해야 한다. 대응이 조금 늦어져서 경찰은 뭘 하고 있느냐고 비난받아도 괜찮다. 우리는 군대와는 다르니까…[23]
고토다는 과격파보다 공산당을 더 경계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과격파의 테러로, 최전선의 젊은 경찰관이 순직하는 것은 안타깝고, 대책을 서둘러야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과격파가 아니라, 불법적인 수단으로 정권 탈취를 노리는 공산당이다"[23].
- (공산당의 "가짜 '좌익'" 방임론에 대해) "이봐 농담만 하고 있잖아. 경찰은 과격파를 잡을 수 없어서 약해져 있어. 지금 경찰은 과격파를 놔둘 정도의 힘은 없어. 그런 시대가 아니야. 공산당도 경찰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어"[23].
또한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 "하니 고로처럼 젊은 과격파를 부추겨 원고료를 버는 놈만큼 이 세상에서 나쁜 놈은 없다. 돈이 된다고 하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 건가"
산악 베이스 사건 당시 연합 적군 멤버 12명이 동료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자네, 그런 바보 같은…"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56]
훗날 고토다는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경찰 관료 시절 부하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점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특히 제2차 안보 경비 당시 '죽이지 말라', '극력 자제하라'는 지시로 인해 경찰 측에서 1만 2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언급하며 "지금도 나는, 그 유족들과 평생 낫지 않는 핸디캡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께 정말 마음이 무겁다. 이것이 나의 생애의 후회이다"라고 말했다.[35] 경찰청 시절 부하였던 사사 아츠유키는 이러한 경험이 고토다의 은퇴 연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7]
3. 2. 야스쿠니 신사 문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을 방청한 경험이 있다. 당시 피고들은 대부분 국가 지도자들이었고 재판 중에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고토다가 방청했을 때는 소련 측 증인이 관동군의 특수 훈련이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음을 증언하는 날이었다. 이때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스즈키 테이이치가 분함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토다는 기획원 총재 시절의 스즈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고토다는 이 재판을 통해 "일본인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책임감이 없다"고 통감했다고 술회했다.[42]나카소네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한 다음 해인 1986년 8월 14일,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고토다는 다음 날 종전 기념일의 총리 참배 여부에 대해 담화를 발표했다.[33] 담화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해 실시한 공식 참배는 과거 우리나라의 행위로 인해 막대한 고통과 손해를 입은 인접 제국의 국민들 사이에, 그러한 행위에 책임이 있는 A급 전범에 대해 예배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낳았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여러 기회에 표명해 온 지난 전쟁에 대한 반성과 그 위에 선 평화 우호에 대한 결의에 대해 오해와 불신마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내일 8월 15일에는 내각 총리대신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삼가기로 했다."
또한 담화는 "공식 참배는 제도화된 것이 아니며, 그때마다 실시 여부를 판단해야 하므로 이번 조치가 공식 참배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계속해서 양호한 국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태 개선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각 국무대신의 공식 참배에 대해서는 각 국무대신이 이상 언급한 여러 사항을 충분히 고려하여 적절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토다 개인은 야스쿠니 문제를 일본인의 정서와 관련된 내정 문제로 보았으며, 원칙적으로 외국이 간섭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사 구별 없이 국무대신으로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봉찬회의 오오츠키 분페이를 통해 A급 전범의 분사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타진했으나, 헌법 제20조(정교분리 원칙)와 관련된 문제로 더 이상 개입하지는 않았다.
훗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논란이 되었을 때, 참배에 반대하는 자민당 의원들의 공부 모임에 강사로 초빙된 고토다는 "쓸데없는 넋두리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역사 교과서(후소샤 발행)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34]
3. 3. 헌법과 안보
1990년 걸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자위대의 다국적군 참가를 압박했지만, 고토다는 이란-이라크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이후 이라크 전쟁 때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도 반대했다.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 대해서는 "지나친 포퓰리즘이 눈에 띄고 위험하다"고 비판했으며, 고이즈미 내각의 슬로건이었던 "관에서 민으로"에 대해 "이윤을 미덕으로 하는 민간 기업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를 명시하지 않고 관에서 민으로 하는 것은 난폭하다"고 발언했다.[19] 고이즈미 정권에 대한 견제 역할을 기대했던 노나카 히로무가 정계 은퇴를 표명했을 때, 직접 찾아가 만류하기도 했다.[30] 은퇴 후에도 고토다는 현직 총리를 비롯한 정권 중추에 안전 보장과 관련된 문제와 재해 대응에 대해 조언을 했으며, 사사 아쓰유키 등 과거 부하들을 총리대신 관저로 보내 처리 보조를 하게 했다.[20][9]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을 방청한 경험이 있는데, 피고였던 국가 지도자들의 모습, 특히 스즈키 테이이치가 소련 측 증인 앞에서 분해하는 모습을 보며 "일본인은 꼭대기에 있을수록 책임감이 없다"고 통감했다고 한다.[42]
나카소네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한 다음 해인 1986년 8월 14일, 고토다는 내각 관방 장관 담화를 통해 다음 날 총리의 공식 참배를 보류한다고 발표했다.[33] 담화에서는 "과거 우리나라의 행위로 인해 막대한 고통과 손해를 입은 인접 제국의 국민들 사이에 A급 전범에 대해 예배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낳았고", 나아가 "우리나라가 다양한 기회에 표명해 온 지난 전쟁에 대한 반성과 그 위에 선 평화 우호에 대한 결의에 대한 오해와 불신마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신중하고 자율적으로 검토한 결과" 참배를 보류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 조치가 공식 참배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고토다의 생각으로는 야스쿠니 문제는 일본인의 마음에 관련된 내정 문제이며 원래 외국에서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고토다 자신도 참배에 공사 구별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하에 단독으로 국무대신으로서 야스쿠니 참배를 하고 있다. 봉찬회의 오오츠키 분페이를 통해 A급 전범의 분사를 야스쿠니 측에 타진하기도 했지만, 일본국 헌법 제20조와 관련되어 그 이상의 개입은 자제했다. 한편, 내각 총리대신 재임 중인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되었을 때, 참배에 반대하는 자민당 의원들의 공부회에 강사로 불린 고토다는 "쓸데없는 넋두리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라고 발언했다. 만드는 모임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후소샤 발행)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취했다.[34]
경찰예비대 본부 과장 시절, 후쿠치야마시에서 수해가 발생했을 때 주둔지 사령관이 절차를 밟지 않고 독단으로 부대를 출동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때 고토다는 "실력을 가진 부대의 독단적인 행동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야말로 장래를 위해 현재 엄격한 교육을 해야 한다"며 문민 통제의 관점에서 엄격한 자세를 보였다.
후년에는 안전 보장과 헌법 문제에 관해서는 비둘기파적인 발언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헌법에 대해서는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지, 헌법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야당이나 진보적 문화인과 다른 견해를 보였다.[14] 또한, 일본국 헌법 제9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지금과 같은 국회 답변으로는 자위대가 인지된 듯, 안 된 듯, 그런 불쌍한 상태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장래, 국민이 바꾸면 된다고 하면, 바꾸면 된다"며 자위대에 대한 이해와 헌법 개정을 용인했다.[23] 제2차 세계 대전의 당사자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개정이 시기상조라는 인식을 보이면서도 "너무 많이 쓴 느낌이 있다", "유통 기한이 다 된 것이 아닌가"라고도 말했다. 고토다 자신은 1항에 대해서는 유지하고, 2항에 대해서는 교전권을 인정한 후에 "영역 외에서의 무력 행사는 하지 않는다"라고 명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독립·자존을 위한 자위권은 헌법 이전의 자연권으로서 어떤 나라에서도 인정되는 것이며, 최소한의 무력 장치를 갖춰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해외 파병에 관한 모든 편의를 배제하기 위해 해외에서의 무력 행사 금지를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 고토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통합막료장이었던 구리스 히로오미에 의한 "초법규 발언"에 대해서도 "부득이한 구리스 군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만년에는 사회의 우경화를 더욱 우려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자제했다.
일본국 헌법 자체에 대해서는 "태생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본래는 점령 종료 직후에 일본인의 손으로 고쳐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면서도 "인류가 장래 지향해야 할 이상을 내걸고 있다"고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2005년 5월 14일에 류큐 신보사의 류큐 포럼에 고르바초프와 함께 초청된 고토다는 "헌법과 안전 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했고, "이 헌법의 이상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지켜나가면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게 된 면을 바꾸면 헌법 개정은 좋다고, 이것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한다"고 말하며 현 헌법의 이상 견지와 현실에 입각한 개정을 양립할 것을 주장했다.[40]
냉전 종결 후에는 미군에 대한 기지 제공에는 소극적이었고, 미일 안보 조약을 평화 우호 조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에 관해서 오카모토 유키오로부터 헤노코 이전 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편, 앞서 언급한 류큐 포럼에서는 "전승국의 군대가 언제까지나 패전국 안에 있어서, 기존의 기지를 다른 기지로 새롭게 만드는 일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측의 주민이 찬성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일본의 입장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야말로 미국에 대해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60년간 일본은 독립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반 보호국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40]
또한, 일본의 정보 기관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빈약하고 강화해야 하지만, 정보의 수집·방위에 특화시키고 모략은 행해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은퇴 후의 고토다는 종종 우파 세력으로부터 "비둘기파", "친중파"로 여겨져 주변에서 위협이나 괴롭힘을 받았다. 고토다는 병약한 아내를 걱정했지만, 마쓰코 부인은 오히려 "이제 더 이상 사양할 것도 잃을 것도 없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세요"라고 고토다에게 권했다.[40]
3. 4. 정치 개혁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자유민주당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당내에 "정치개혁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고토다 마사하루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41] 고토다는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해 "정치가 사라진다, 정치가 사라질 우려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정치의 폐색 상태. 더 이상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한계에 도달했다. 속죄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라고 진단하며 강한 위기 의식을 드러냈다.[41]그는 냉전 종결 이후에도 지속된 55년 체제 하에서 나타난 "정권 정당의 오만, 방심, 부패, 야당의 무기력, 정권 담당 능력의 결여, 그 기력의 상실, 더 나아가 상처를 핥는 행위" 등을 문제로 지적했다.[41]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권 교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어 정치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의회 정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소선거구제 도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41]
하지만 소선거구제 도입을 골자로 한 정치 개혁 법안은 자유민주당 정권인 가이후 내각과 미야자와 내각에서는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 자유민주당이 실각하고 들어선 비자민 연립 정권인 호소카와 내각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치개혁 4법이 마침내 성립되었다. 법안 통과 당일 고토다는 자신의 메모에 "감개무량, 다만 아직 3합목. 정치 개혁의 목적에서 보면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번 개혁은 다만 변혁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라고 소회를 남겼다.[41]
3. 5. 경제 정책
고토다는 토지 정책과 관련하여 "토지의 사유권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위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생활과 국민 경제에 플러스가 되도록 토지의 사유권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유권만 중시하면 국민 생활은 어떻게 될까요"[23]라고 말하며 공공의 복지와 재산권의 균형을 강조했다. 또한, "정부의 경제 정책의 기본 원칙은 국민이 자신의 집을 갖고 가족이 화목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그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라고 당시의 지가 상승과 이를 부추기는 은행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관방장관으로서 은행국장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 계기가 되어 주택 금융 전문 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다.그는 "경쟁 사회로 만들지 않으면 세계적인 경쟁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알겠지만, 경쟁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꼭 생각해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격차 사회 심화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냈다. 더불어 전후 공황이나 쇼와 공황 시기 경제난으로 인해 재계 및 정부 요인이 암살되고 대중이 이에 환호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경제가 나빠지면 정치가 탓이라는 풍조가 된다. 경기에 매우 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42].
3. 6. 외교 및 외국과의 관계
=== 미국과의 관계 ===냉전 종식 후에도 미국의 주둔 미군을 위한 기지 공여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미일 안보조약」을 평화조약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2005년 5월 14일 류큐 신보사가 개최한 류큐 포럼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초대되었을 때, 고토다는 "전승국의 군대가 언제까지고 패전국 안에 남아서 종래의 기지를 다른 기지로 옮겨간다면 옮겨오는 쪽의 주민들이 찬성할 리가 없지 않나", "나는 일본의 입장을 이번 기회에야말로 미국에게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60년간 일본은 독립했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반보호국 상태가 아니었나"라고 발언하며 미국의 기지 이전 문제와 일본의 자주적 외교 자세를 강조했다.[105]
=== 중국과의 관계 ===
과거 군 경력으로 인해 대만과의 접점이 더 많았지만, 1977년 일중 우호 국회의원 연맹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견문을 넓혔다. 같은 해 10월에는 니카이도 신, 오무라 조지와 함께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패권 조항 등을 둘러싸고 일중 평화 우호 조약 체결을 위한 실무 교섭을 진행했다.
나카소네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임하던 시기, 나카소네 총리의 참배로 촉발된 야스쿠니 신사 문제나 광화료 소송과 관련된 마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비교적 친일적인 성향을 보여 일중 관계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다.
1994년 일중 우호 회관 회장직을 맡는 등[43], 고토다는 중국과의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는 등 중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융화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장쩌민 주석 하에서 중국의 대일 정책이 엄격해지던 1999년에는 중국의 요인을 만나 "양국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쌍방의 국민 감정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 보도 기관 등이 항상 우호를 키우는 방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한편, 리덩후이 중화민국 총통의 보도 규제(报禁|보금중국어) 해제로 대만에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생했을 때, 사사 아쓰유키에게 대만 시위대에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리덩후이 총통을 도우라고 지시하며, 전후 민주 경찰의 경험과 장비를 전수하되 비밀리에 신중하게 진행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리덩후이를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자신의 지시를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 지시에 따라 전 경시감인 우다가와 신이치가 비공식적으로 대만에 파견되어 현지 지도를 수행했다.
=== 대한민국과의 관계 ===
스즈키 젠코 내각 시절, 대한민국이 요구한 60억 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44]"(일본 측은 40억 달러 제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방한했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소노다 나오의 발언으로 인해 한국 측 사절단이 격노하는 등 외교적 마찰을 경험하기도 했다. 고토다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대해 "(과거 역사에 대한) 사과는 이미 끝났으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역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부분에서 이상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언급하며 상대방 입장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소련과의 관계 ===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스타니슬라프 레프첸코가 일본 내에서 소련의 치밀한 첩보 활동 및 간접 침략 (샤프 파워) 실태를 폭로한 레프첸코 사건이 발생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일본 독자적인 검증을 지시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소련의 정보 제공자가 된 인물들을 배려하면서도, 기밀 보호법 제정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사건은 이후 바실리 미트로힌이 구소련에서 반출한 미트로힌 문서를 통해 뒷받침되었으며, 스파이 방지법안 심의 및 특정 비밀 보호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 팔레스타인과의 관계 ===
1981년 12월, 일본 팔레스타인 우호 의원 연맹의 일원으로서 PLO 의장 아라파트와 면담했다. 당시 PLO는 일본 적군과 공투 관계에 있던 PFLP를 산하에 두고 있었는데, 고토다는 아라파트에게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를 취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 기타 안보 및 외교 관련 입장 ===
경찰예비대 과장 시절 후쿠치야마시 수해 당시, 주둔지 사령관이 절차 없이 독단으로 부대를 출동시킨 사건에 대해 "무력을 보유한 부대의 독단 전행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철저한 문민통제 원칙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안보나 헌법 문제에 관해 비둘기파적 관점에서 자주 발언했지만, "국가를 위해 헌법이 존재하지 헌법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라며 당시 야당이나 혁신 세력의 견해와는 선을 그었다.[83] 헌법 제9조에 대해서는 개정 가능성을 시사하며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발언하기도 했으나, 제9조 제1항(전쟁 포기)은 유지하되 제2항(전력 불보유 및 교전권 부인)을 개정하여 교전권을 인정하고 영토 바깥에서의 무력 행사를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독립과 자존을 위한 자위권은 헌법 이전의 자연권이므로 최저한의 무력 장치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지만 해외 파병은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우려하며 의도적으로 헌법 개정에 대한 발언을 삼갔다.
일본국 헌법 자체에 대해서는 "탄생 과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본래는 점령 종료 직후에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인류가 장래를 향해 나아가는 이상을 담고 있다"며 그 의의는 인정했다.
또한 일본의 정보기관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며 강화를 주장했지만, 정보 수집 및 방위에 특화해야 하며 모략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4. 평가
내무성과 경찰 관료를 거치며 치안 유지에 힘썼고, 제6대 경찰청장관까지 올랐다. 퇴임 후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발탁되어 내각관방 부장관으로서 다나카 정권을 지원했으나, 참의원 진출 과정에서 발생한 '아와 전쟁'은 다나카의 권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도쿠시마현 전현구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7선 연임하며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행정관리청 장관, 초대 총무청 장관, 법무대신, 부총리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이후 만년까지 자유민주당의 중진 및 고문으로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날카로운 일 처리 방식으로 인해 "면도날 고토다", "일본의 안드로포프", "일본의 조제프 푸셰" 등의 별명을 얻었다.
나카소네 내각 시절 내각관방장관으로서 새로 설치된 내각관방 6실의 실장들에게 내린 훈시는 '고토다 오훈(五訓)'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초대 내각안전보장실장이었던 사사 아츠유키가 자신의 저서에 기록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출신 성청(省廳)의 이익을 잊고 국익을 생각하라.
# 잘못된 정보가 아닌, 진실을 보고하라.
# 용기를 가지고 의견을 진술하라.
# 자신의 소관 업무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 일단 결정된 방침에는 따르고, 명령은 반드시 실행하라.
사사 아츠유키는 이 오훈을 뒤집으면 바로 위기 관리의 최악의 적인 '관료주의'가 된다고 평가했다. 정작 고토다 본인은 이 훈시를 잊고 있다가, 나중에 사사에게 "사람들이 와서 '고토다 오훈' 휘호를 부탁하는데, 그게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사사가 설명하자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자네가 지어낸 것 아닌가"라며 메모를 가져갔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훗날 고토다는 이 훈시에 대해 "그곳(내각관방)에 근무하는 사람이 절대 명심해야 할 사항이며, 지금도 변함없다. 회사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언급했다.
여러 인물들이 고토다 마사하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 "관료 출신이면서도 경직되지 않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평소에는 온화한 얼굴의 정치가였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굳게 지키며 시기를 선택해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의 발언은 피상적인 논설에 흔들리지 않고, 서민, 즉 일본 국민 전체의 여론과 일본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장기적 미래적 입장을 통찰한, 치밀한 사상 위에서의 유연한 발언이었다. 경찰 출신으로서 일본 대중 심리에 대한 통찰과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평화 국가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지키며 좌우로 흔들리기 쉬운 일본 정치의 궤도를 중앙선에 유지시키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한다."
- 쓰쿠시 데쓰야: "매우 뛰어난 엘리트였기에 국가를 축으로 생각했지만, 그 국가의 내용은 고토다 씨 자신과 같았다. 즉, 국가를 위해 국민이 희생되는 형태의 국가관을 매우 싫어했고, 국민이 있기에 국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구 내무성 관료들은 전쟁 전후로 악평이 높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백성을 보호한다는 '호민관(護民官)' 의식이 매우 강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제럴드 커티스: "고토다 씨의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권력자'이다. 뛰어난 정치가의 특징은 목적 달성을 위해 권력을 잘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의 무서움을 알고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긴 경험을 통해, 정치 지도자가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권력을 남용하거나 잘못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여러 발언을 보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만 정당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카시와무라 노부오: "고토다 군은 말을 툭툭 던지지만, 부하의 말도 잘 듣는다. 몰아붙여 곤란하게 만들면서도 상대의 퇴로를 마련해 준다. 손자병법에 '공격하면 반드시 틈이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식이다. 철저하게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씩 웃는다.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부하들이 따랐던 것은 그에게 그만한 인간적 매력과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모 능력도 있고 사령관 자질도 갖췄다. 기노시타 도키치로 같은 인물이다. 뉴 리더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다만 남을 밀어내면서까지 나아가려는 부분이 부족한데, 그것이 정계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5. 역대 선거 기록
wikitext
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선출 정수 | 후보자 수 | 출마 연령 | 선거 제도 | 당락 |
---|---|---|---|---|---|---|---|---|---|---|---|---|---|
1974년 | 통상선거 | 10회 | 참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선거구 | 자유민주당 | 153,388표 | 35.25% | 2위 | 1 | 5 | 59 | 중선거구제 | 낙선 |
1976년 | 총선거 | 34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8,990표 | 14.7% | 2위 | 5 | 8 | 62 | 중선거구제 | 당선 |
1979년 | 총선거 | 35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66,948표 | 14.8% | 5위 | 5 | 8 | 65 | 중선거구제 | 당선 |
1980년 | 총선거 | 36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85,710표 | 19.1% | 2위 | 5 | 8 | 65 | 중선거구제 | 당선 |
1983년 | 총선거 | 37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81,975표 | 18.2% | 1위 | 5 | 10 | 69 | 중선거구제 | 당선 |
1986년 |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109,468표 | 25.67% | 1위 | 5 | 8 | 71 | 중선거구제 | 당선 |
1990년 |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6,463표 | 20.46% | 1위 | 5 | 9 | 75 | 중선거구제 | 당선 |
1993년 | 총선거 | 40회 | 중의원 의원 | 도쿠시마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98,961표 | 22.34% | 1위 | 5 | 9 | 78 | 중선거구제 | 당선 |
참조
[1]
웹사이트
徳島県内のニュース:後藤田正晴氏が死去 91歳、元副総理「カミソリ」の異名 -徳島新聞-
http://www.topics.or[...]
徳島新聞
2020-06-23
[2]
서적
Fighting Japan's Cold War: Prime Minister Yasuhiro Nakasone and His Times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23-03-13
[3]
웹사이트
Gotoda Family
https://keibatsugaku[...]
keibatsugaku.com
2023-12-13
[4]
웹사이트
歴代官房長官ランキング 圧倒的支持で1位に輝いたのは? 〈週刊朝日〉
https://dot.asahi.co[...]
2020-06-23
[5]
웹사이트
田中角栄「怒涛の戦後史」(14)名補佐役・後藤田正晴(上)
https://npn.co.jp/ar[...]
Shukan Jitsuwa
2023-12-13
[6]
서적
Japanese Moratorium on the Death Penalty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6-10-10
[7]
뉴스
後藤田正晴氏が死去 91歳、元副総理「カミソリ」の異名
http://www.topics.or[...]
徳島新聞
2020-01-15
[8]
웹사이트
第19回国会 衆議院 地方行政委員会 第8号 昭和29年1月29日
https://kokkai.ndl.g[...]
国立国会図書館
2020-01-01
[9]
서적
軍師・佐々淳行
文藝春秋
2007-10-10
[10]
서적
東大落城安田講堂攻防七十二時間
文藝春秋
[11]
뉴스
警察庁長官らあて小包爆発 局員1人がけが
中國新聞
1971-10-18
[12]
웹사이트
田中角栄「怒涛の戦後史」(14)名補佐役・後藤田正晴(中)
https://www.excite.c[...]
2019-12-16
[13]
웹사이트
阿波戦争とは
https://kotobank.jp/[...]
2019-12-18
[14]
서적
支える動かす
日本経済新聞
[15]
웹사이트
歴代官房長官ランキング 圧倒的支持で1位に輝いたのは? 〈週刊朝日〉
https://dot.asahi.co[...]
2019-12-29
[16]
서적
自民党・ナンバー2の研究
講談社文庫
[17]
웹사이트
第15代 宮沢 喜一
https://www.jimin.jp[...]
自由民主党
2020-01-30
[18]
서적
死刑と無期懲役
https://www.chikumas[...]
筑摩書房
2010-02-10
[19]
웹사이트
第163回国会 本会議 第4号(平成17年9月28(水曜日))
https://www.shugiin.[...]
衆議院
2019-12-15
[20]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21]
웹사이트
故後藤田正晴氏が警告した“政治主導の落とし穴”にはまった民主党
https://diamond.jp/a[...]
2020-03-04
[22]
웹사이트
内閣総理大臣のコメント
https://www.kantei.g[...]
2020-03-04
[23]
서적
後藤田正晴 異色官僚政治家の軌跡
中公文庫
[24]
서적
はるかなる三里塚
講談社
[25]
서적
民警
扶桑社
[26]
웹사이트
衆議院会議録情報 第068回国会 地方行政委員会 第26号
https://kokkai.ndl.g[...]
2018-04-19
[27]
웹사이트
第179回国会 内閣委員会 第2号(平成23年10月26日(水曜日))
https://www.shugiin.[...]
衆議院
2020-02-06
[28]
서적
日本赤軍とのわが「七年戦争」
文藝春秋
[29]
뉴스
【産経抄】7月27日
https://www.sankei.c[...]
産経デジタル
2023-02-26
[30]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31]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32]
웹사이트
開戦2日前、東條はなぜ寝室で号泣したのか…「昭和の怪物 七つの謎」(週刊現代)
https://gendai.media[...]
講談社
2020-08-02
[33]
웹사이트
内閣総理大臣その他の国務大臣による靖国神社公式参拝に関する後藤田内閣官房長官談話
https://www.mofa.go.[...]
外務省
2019-12-26
[34]
웹사이트
<象徴天皇と平成 第8部>半藤、保阪氏対談 (中)社会
https://www.tokyo-np[...]
2020-02-06
[35]
서적
日本の警察
PHP新書
[36]
뉴스
読売新聞 2007年12月26日付記事
読売新聞
2007-12-26
[37]
서적
日本の警察
PHP新書
1999
[38]
웹사이트
(新聞と9条:430)平和主義の国で:30
https://www.asahi.co[...]
2017-03-14
[39]
웹사이트
特集ワイド:平和よ 2016夏・会いたい/8止 海外での武力行使認めず 「待て」と言う勇気を持て 後藤田正晴さん
https://mainichi.jp/[...]
2016-08-23
[40]
서적
癒やしの島、沖縄の真実
ソフトバンク クリエイティブ
2007-02-26
[41]
웹사이트
発掘された後藤田正晴の“遺言” 平成政治史の“劇薬”小選挙区制導入とは何だったのか?
https://bunshun.jp/a[...]
2019-01-31
[42]
웹사이트
「異論を言う勇気を持て」―後藤田正晴さんの歴史観と憲法観 {{!}} 取材ノート
https://www.jnpc.or.[...]
2017-00-00
[43]
뉴스
日中友好会館が本館落成20周年祝賀会
https://web.archive.[...]
駐日中華人民共和国大使館
2008-09-06
[44]
웹사이트
第94回国会 衆議院 外務委員会 第21号 昭和56年9月2日
https://kokkai.ndl.g[...]
国立国会図書館
1981-09-02
[45]
웹사이트
田中角栄「怒涛の戦後史」(14)名補佐役・後藤田正晴(上)
https://wjn.jp/artic[...]
2019-12-16
[46]
웹사이트
田中角栄「怒涛の戦後史」(14)名補佐役・後藤田正晴(下)
https://news.nifty.c[...]
2019-12-16
[47]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2002
[48]
웹사이트
あの田中角栄が惚れ込んだ、最強の官房長官「カミソリ後藤田」の素顔(週刊現代)
https://gendai.media[...]
2016-05-29
[49]
웹사이트
カミソリ後藤田氏、中曽根首相の国会見通し「狂ってる」: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2018-12-20
[50]
서적
秘密資金の戦後政党史: 米露公文書に刻まれた「依存」の系譜
新潮社
2019
[51]
서적
総括せよ!さらば革命的世代 {{small|40年前、キャンパスで何があったか}}
産経新聞出版
2009-11-22
[52]
웹사이트
2001 DECEMBER vol.68日本ゴルフ協会
http://www.jga.or.jp[...]
2001 DECEMBER vol.68
2001-12-00
[53]
서적
連合赤軍「あさま山荘」事件
文藝春秋(文春文庫)
1999
[54]
웹사이트
「憲法改正」後藤田正晴の警告が聞こえる――保阪正康が語る。
https://bungeishunju[...]
2019-11-24
[55]
서적
警察官僚の時代
講談社文庫
[56]
서적
浅間山荘事件の真実
河出文庫
2002
[57]
뉴스
あの田中角栄が惚れ込んだ最強の官房長官「カミソリ後藤田」の素顔(週刊現代)
https://gendai.media[...]
2016-05-29
[58]
웹사이트
時の在りか:長期政権を作ったふたり
https://mainichi.jp/[...]
2019-12-07
[59]
서적
中曽根康弘
中央公論新社
2015
[60]
뉴스
事件から30年 「フライデー事件」が問いかけるもの(てれびのスキマ) - Yahoo!ニュース
https://news.yahoo.c[...]
2018-04-05
[61]
서적
内閣官房長官秘録
https://www.worldcat[...]
Īsutopuresu
2014
[62]
서적
教誨師
講談社
2014
[63]
서적
知の格闘: 掟破りの政治学講義
筑摩書房
2014-01-07
[64]
웹사이트
【番頭の時代】第4部・永田町のキーマン(3) 「後藤田五訓」官僚の省益戒め 後藤田正晴元官房長官
https://www.sankei.c[...]
2015-08-30
[65]
웹사이트
復興へ 第18部 この国 震災3年の決算
https://www.kobe-np.[...]
1998-01-14
[66]
웹사이트
衆議院会議録情報 第132回国会 議院運営委員会 第7号
https://kokkai.ndl.g[...]
1995-02-17
[67]
웹사이트
参議院会議録情報 第132回国会 議院運営委員会 第5号
https://kokkai.ndl.g[...]
国立国会図書館
1995-02-17
[68]
웹사이트
昭和偉人伝
https://archives.bs-[...]
2019-12-16
[69]
웹사이트
阪神大震災から22年で思い出す3人
https://www.sankei.c[...]
2017-01-16
[70]
웹사이트
災の国~問われる「覚悟」~ |(3)被災地の夢 政と官の壁手も足も出ず
https://www.kobe-np.[...]
2015-01-04
[71]
웹사이트
震災20年 復興の課題と成果は 有識者に聞く
https://www.kobe-np.[...]
2019-12-16
[72]
논문
特別講演Ⅰ 「大震災の時代に生きる」
http://id.nii.ac.jp/[...]
[73]
웹사이트
【対韓 最後通牒】GSOMIA破棄までする韓国…有事の際はどうなる!? 「軍事境界線」近いソウルや仁川、日本人の滞在・旅行は減らすべき 空港や港湾のハブを奪還せよ
https://www.zakzak.c[...]
2019-12-16
[74]
웹사이트
博士論文『肝臓と過敏性現象との関係に就いての観察』
https://ndlonline.nd[...]
2023-04-06
[75]
웹사이트
博士論文『腎機能と皮膚機能との関連』
https://ndlonline.nd[...]
2023-04-06
[76]
웹인용
第19回国会 衆議院 地方行政委員会 第8号 昭和29年1月29日
https://kokkai.ndl.g[...]
国立国会図書館
2024-04-26
[77]
서적
軍師・佐々淳行
文藝春秋
2007-10-10
[78]
서적
東大落城安田講堂攻防七十二時間
文藝春秋
1996
[79]
뉴스
警察庁長官らあて小包爆発 局員1人がけが
中國新聞
1971-10-18
[80]
웹인용
田中角栄「怒涛の戦後史」(14)名補佐役・後藤田正晴(中)
https://www.excite.c[...]
2024-04-26
[81]
웹인용
阿波戦争とは
https://kotobank.jp/[...]
2024-04-26
[82]
웹인용
第179回国会 内閣委員会 第2号(平成23年10月26日(水曜日))
https://www.shugiin.[...]
衆議院
2024-04-26
[83]
서적
支える動かす
日本経済新聞
1991
[84]
웹인용
歴代官房長官ランキング 圧倒的支持で1位に輝いたのは? 〈週刊朝日〉
https://dot.asahi.co[...]
2024-04-26
[85]
서적
自民党・ナンバー2の研究
講談社文庫
[86]
웹인용
第15代 宮沢 喜一
https://www.jimin.jp[...]
自由民主党
2024-04-26
[87]
서적
死刑と無期懲役
https://www.chikumas[...]
筑摩書房
2010-02-10
[88]
서적
日本の警察
PHP新書
1999
[89]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2002
[90]
뉴스
後藤田正晴氏が死去 91歳、元副総理「カミソリ」の異名
http://www.topics.or[...]
徳島新聞
2005-09-21
[91]
웹인용
発掘された後藤田正晴の“遺言” 平成政治史の“劇薬”小選挙区制導入とは何だったのか?
https://bunshun.jp/a[...]
2024-04-26
[92]
웹인용
故後藤田正晴氏が警告した“政治主導の落とし穴”にはまった民主党
https://diamond.jp/a[...]
2024-04-26
[93]
웹인용
内閣総理大臣のコメント
https://www.kantei.g[...]
2024-04-26
[94]
서적
後藤田正晴 異色官僚政治家の軌跡
中公文庫
2009
[95]
서적
はるかなる三里塚
講談社
1978
[96]
서적
民警
扶桑社
2016
[97]
웹인용
衆議院会議録情報 第068回国会 地方行政委員会 第26号
https://kokkai.ndl.g[...]
2024-04-26
[98]
웹인용
第179回国会 内閣委員会 第2号(平成23年10月26日(水曜日))
https://www.shugiin.[...]
衆議院
2024-04-26
[99]
서적
日本赤軍とのわが「七年戦争」
文藝春秋
2013
[100]
뉴스
【産経抄】7月27日
https://www.sankei.c[...]
産経デジタル
2024-04-26
[101]
웹인용
内閣総理大臣その他の国務大臣による靖国神社公式参拝に関する後藤田内閣官房長官談話
https://www.mofa.go.[...]
外務省
2024-04-26
[102]
웹인용
<象徴天皇と平成 第8部>半藤、保阪氏対談 (中)社会
https://www.tokyo-np[...]
2024-04-26
[103]
웹인용
(新聞と9条:430)平和主義の国で:30
https://www.asahi.co[...]
2024-04-26
[104]
웹인용
特集ワイド:平和よ 2016夏・会いたい/8止 海外での武力行使認めず 「待て」と言う勇気を持て 後藤田正晴さん
https://mainichi.jp/[...]
2024-04-26
[105]
서적
癒やしの島、沖縄の真実
ソフトバンク クリエイティブ
2007-02-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