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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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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드니 홀런드는 1893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하키 선수로 활동했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야당 대표를 지냈다. 1949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뉴질랜드 총리가 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경제 개혁과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1957년 은퇴 후 건강 문제로 고통받다 196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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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홀런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3년의 홀런드
홀런드 (1953년)
출생일1893년 10월 18일
출생지그린데일, 캔터베리, 뉴질랜드
사망일1961년 8월 5일
사망지웰링턴, 뉴질랜드
배우자플로렌스 베아트리스 드레이턴
자녀4명, 에릭 포함
아버지헨리 홀런드
소속 정당개혁 (1935–1938)
국민 (1938–1957)
정치 경력
직위뉴질랜드 총리
임기 시작1949년 12월 13일
임기 종료1957년 9월 20일
군주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
총독버나드 프레이버그
찰스 노리
찰스 리틀턴
부총리키스 홀리오크
이전피터 프레이저
이후키스 홀리오크
직위 2야당 대표
임기 시작 21940년 11월 26일
임기 종료 21949년 12월 13일
이전 2애덤 해밀턴
이후 2피터 프레이저
부대표 2윌리엄 폴슨 (1940–46)
키스 홀리오크 (1946–49)
군사 경력
소속뉴질랜드
군종뉴질랜드 군대
복무 기간1915–1917
계급[[File:British Army (1902-1920) OF-1a.svg|10px]] 중위
소속 부대제13 포병대, 뉴질랜드 야전 포병대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메시네 전투

2. 유년 시절

시드니 홀랜드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방 사우스 섬의 그린데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8명의 자녀 중 막내이자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헨리 홀랜드는 농부이자 상인이었으며, 1912년부터 1919년까지 크라이스트처치 시장을 지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뉴질랜드 개혁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지역구를 대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홀랜드는 1915년 뉴질랜드 군대에 입대하여 최종적으로 소위로 진급했다. 그는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에서 복무하며 메시네 전투에도 참전했으나, 심각한 질병에 걸려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홀랜드는 6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했으며 폐 하나를 잃었다.[2][3]

홀랜드는 유망한 스포츠 선수이자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는 하키 선수로서 캔터베리를 대표하여 지역 및 섬 간 경기에 출전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는 1932년 호주 무패 투어 당시 뉴질랜드 하키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며, 유명한 하키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전쟁 후, 홀랜드는 형제와 함께 크라이스트처치에 미들랜드 엔지니어링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원예용 오일 펌프를 제조했으며, 직원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제도를 운영했다.

홀랜드는 1920년에 플로렌스 드레이턴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전기 작가 배리 구스타프슨에 따르면, 홀랜드는 감리교 신자로 자랐으나 나중에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4][5]

3. 정치 경력

시드니 홀랜드는 아버지 헨리 홀랜드가 뉴질랜드 국회 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의 비공식 비서 겸 선거 운동 매니저로 일하며 정치에 입문했다.[6] 1935년,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1935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는 상황 속에서도 의석을 지켜냈다.[6] 이후 노동당 집권에 대응하여 개혁당과 연합당이 합당해 국민당이 창당되자 홀랜드도 국민당에 합류했다.[7][8]

1940년, 홀랜드는 애덤 해밀턴의 뒤를 이어 국민당 대표로 선출되었고,[9] 이후 약 10년간 야당 대표로서 활동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과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비판하며 당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자 노력했고, 1949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마침내 국민당의 승리를 이끌었다.[13][14]

총리로서 홀랜드는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뉴질랜드를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홀랜드는 뉴질랜드 의회의 상원인 뉴질랜드 입법 위원회를 폐지하여 단원제를 도입하고, 1951년 뉴질랜드 해안 분쟁 당시 강경한 대응으로 노조를 진압했으며, 냉전 시기 ANZUS 조약 체결 등 서방 진영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했다.[15][16][19][20][4] 그러나 임기 말에는 건강이 악화되었고,[13] 결국 1957년 9월 키스 홀리오크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정계를 은퇴했다.[4][34] 그는 1935년부터 1946년까지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를, 1946년부터 1957년까지 펜달턴 선거구를 대표했다.[10]

3. 1. 초기 정치 경력

1935년의 홀랜드


1925년 그의 아버지 헨리 홀랜드가 뉴질랜드 국회에 당선된 후, 시드니 홀랜드는 1925년부터 1935년까지 아버지의 비공식 개인 비서이자 선거 운동 매니저로 활동했다. 이 경험을 통해 홀랜드는 의회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 대공황 시기에는 캔터베리 고용주 협회와 크라이스트처치 사업가 클럽의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보수적인 뉴질랜드 군단 및 포브스–고든 코츠 연합-개혁 연립 정부에 반대했던 단명 정당인 민주당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을 거치며 홀랜드는 공산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6]

아버지 헨리가 심각한 사고로 인해 활동이 어려워지자, 홀랜드는 1935년 총선에서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의 개혁당 후보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을 권유받았다. 당시 선거에서 노동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는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의석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새롭게 집권한 마이클 조셉 새비지–피터 프레이저 노동당 정부는 케인즈주의에 기반한 복지 국가 정책, 주요 경제 자원의 국유화, 공공 사업 및 국가 주택 프로젝트 확대 등 일련의 사회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동당의 성공에 대응하여, 개혁당과 연합당은 1936년 합당하여 뉴질랜드의 농업 및 성장하는 제조업 부문을 대변하는 국민당을 창당했다.[7][8]

홀랜드는 1935년부터 1957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의정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임기 시작임기 종료대수선거구소속 정당
1935년1936년25대크라이스트처치 노스개혁당
1936년1938년25대크라이스트처치 노스국민당
1938년1943년26대크라이스트처치 노스국민당
1943년1946년27대크라이스트처치 노스국민당
1946년1949년28대펜달턴국민당
1949년1951년29대펜달턴국민당
1951년1954년30대펜달턴국민당
1954년1957년31대펜달턴국민당


3. 2. 야당 대표: 1940-1949

1940년, 홀랜드는 국민당의 초대 비임시 지도자였던 애덤 해밀턴을 대신하여 국민당 대표가 되었다. 그는 당 대표가 되기 전 해밀턴의 의회 비서관으로 일했다.[9] 국민당 대표로서 홀랜드는 노스캔터베리 지역에 농장을 세우고 로머니 종 양과 아버딘 앵거스 소를 사육하며 당의 농업 기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는 1941년 자유당, 군인 운동, 그리고 국민운동과 같은 다른 경쟁 보수 정당들을 국민당에 흡수 통합함으로써 노동당에 대한 반대 세력을 통합하고 국민당의 지지 기반을 강화했다. 홀랜드는 국민당이 1949년 총선에서 승리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야당 대표로 재직했다. 그는 1935년부터 1946년까지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를, 1946년부터 1957년까지 펜달턴 선거구를 대표했다.[10]

일본이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노동당 정부는 마지못해 1942년 7월 7명의 노동당 장관과 6명의 국민당 장관으로 구성된 초당적 전쟁 행정부 설립에 동의했다. 시드니 홀랜드는 이 단명했던 전쟁 내각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그해 9월 와이카토 지역에서 발생한 비공식 광부 파업에 대한 노동당의 대응에 반대하며 탈퇴했고, 이로 인해 전쟁 내각은 1942년 9월에 붕괴되었다. 홀랜드의 이러한 결정은 노동당 정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든 코츠, 애덤 해밀턴을 포함한 일부 국민당 국회의원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국민당 의원 총회에서 탈퇴하여 무소속으로 전쟁 내각에 재합류했다. 이 두 전직 개혁당 의원들의 사임은 결과적으로 홀랜드가 당 의원 총회와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1][12]

1943년과 1946년 총선에서 국민당은 노동당의 의회 과반수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노동당은 여전히 정권을 유지했지만, 더욱 활발해진 야당인 국민당과의 경쟁에 직면해야 했다. 홀랜드의 지도 아래 국민당은 노동당의 사회주의, 큰 정부 관료주의, 집산주의, 그리고 노동조합의 권력을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국민당이 내세운 주요 정책 기조는 개인의 자유, 자유 시장, 최소한의 관료적 개입, 규제 완화 등이었다. 동시에 홀랜드는 당의 집권을 위해 필요한 정책 변화로 판단하여, 국민당이 노동당의 복지 국가 주요 요소들을 (마지못해) 수용하도록 당을 재편성했다.[13] 1949년 성공적인 총선에서 홀랜드는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 팽창 위협, 정부가 호전적인 해안 노동조합에 대응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인식, 지속적인 전시 제한, 그리고 인플레이션 상승과 같은 쟁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승리했다. 이 전략은 1949년 11월 30일 국민당의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14]

3. 3. 총리: 1949-1957

1951년의 홀랜드


시드니 홀랜드가 이끈 국민당 정부는 1949년 집권 이후 1957년까지 뉴질랜드를 통치했다. 이 시기 홀랜드 정부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버터, 휘발유 배급제를 폐지하는 등 국가 통제를 완화하고 개인주의와 사기업 활동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15][16]

주요 입법 조치로는 1950년 뉴질랜드 의회상원인 뉴질랜드 입법 위원회를 폐지하여 단원제를 도입한 것이 있다.[15][16] 또한 이전 노동당 정부가 폐지했던 사형 제도를 살인죄에 한해 부활시켰으며, 홀랜드 행정부 하에서 8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18] 노동 정책에서는 강제 노조 가입 제도를 폐지하려 했으나 노조의 반발로 완전히 실행하지는 못했다.[17]

1951년에는 1951년 뉴질랜드 해안 분쟁이 발생하자, 홀랜드 정부는 비상 규정을 발동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시민적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하고 노조를 해산시키는 등 강력한 대응으로 파업을 종결시켰으며,[19][20] 이 사건은 이후 국민당의 노동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정부의 강경 대응은 당시 여론과 언론의 지지를 얻었고, 이어진 1951년 조기 총선에서 국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20][21]

외교적으로는 냉전 시기 서방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ANZUS 방위 조약을 체결하고,[4] 한국 전쟁과 말라야 비상 사태에 군대를 파병했으며,[5][7]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에도 가입했다.[6]

그러나 1954년 뉴질랜드 총선에서는 생활비 상승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했고,[10] 임기 말에는 국제 수지 위기와 홀랜드 자신의 건강 악화 문제가 겹쳤다.[13] 특히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당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13] 결국 1957년 9월 키스 홀리오크에게 총리직을 이양하고 정계를 은퇴했다.[4][34]

3. 3. 1. 제1기: 1949-1951

시드니 홀랜드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집권 후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버터와 휘발유 배급제를 폐지하는 등 국가 통제를 상당 부분 완화했다. 1949년 총선 공약에 따라 개인주의, 개인의 자유, 사기업 활동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홀랜드 총리가 취한 첫 조치 중 하나는 1950년 12월 1일 뉴질랜드 입법 위원회, 즉 의회의 상원을 폐지한 것이다. 이로써 뉴질랜드 의회는 하원만 남는 단원제로 바뀌었다. 홀랜드는 총리직과 함께 뉴질랜드 재무부 장관직도 겸임했다.[15][16] 그러나 홀랜드 정부는 노동당이 1936년에 도입한 강제 노조 가입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당의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지는 못했다. 여러 노동조합의 반대에 부딪혀, 정부는 노조가 전통적으로 노동당에 정치 자금을 기부하기 전에 조합원 투표에서 과반수 동의를 얻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선에서 타협했다.[17]

1950년, 국민당 정부는 이전 노동당 정부가 단계적으로 폐지했던 사형 제도를 살인죄에 한해 부활시켰다. 홀랜드 행정부 시기에 8건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총 36건의 살인 유죄 판결 중 22건에 사형 선고). 홀랜드는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홀랜드의 후임자인 키스 홀요크 정부에서는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1961년 의회 표결을 통해 살인죄에 대한 사형 제도가 다시 폐지되었다.[18]

1951년, 홀랜드 정부는 강경 노선의 뉴질랜드 해안 노동자 연합과 대규모 해안 분쟁(1951년 2월 13일 – 7월 11일)을 겪었다. 분쟁은 선주들이 해안 노동자들의 15% 임금 인상 요구를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초과 근무를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선주들은 직장 폐쇄로 맞섰다. 해안 노동자들이 중재를 거부하자, 홀랜드 정부는 1932년 제정된 공공 안전 유지법에 근거하여 비상 규정을 발동했다. 이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자유를 크게 제약하는 조치였다. 이 규정은 해안 노동자에 대한 지지(가족에 대한 식량 지원, 관련 출판물 배포 등)를 금지하고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홀랜드는 군대를 동원해 항만 하역 작업을 강행하고, 해안 노조의 등록을 취소했으며 자금을 압수했다. 151일간의 격렬한 대립 끝에 해안 노동자들은 결국 굴복했다.[19][20]

정부의 강경 대응은 당시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야당인 노동당과 전국 단위 노총인 뉴질랜드 노동 연맹 역시 해안 노조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강경 노선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당이 정부 정책을 비판하자 홀랜드는 1951년 7월 11일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보수 언론과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국민당은 이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더욱 늘리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전직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레드머 예스카에 따르면, 홀랜드 총리와 정부는 해안 분쟁 당시 냉전 분위기를 이용해 반공주의 정서를 부추겼다. 홀랜드는 해안 노동자들을 서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색 위협' 세력으로 규정하며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역사가 배리 구스타프슨은 1949년과 1951년 총선 승리가 시드니 홀랜드 정치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평가한다.[20][21] 이 사건 이후 국민당은 수십 년간 노동조합에 대해 매우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13]

3. 3. 2. 제2기: 1951-1954

1951년 재선 이후, 시드니 홀런드 총리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경제 규제 완화 정책을 이어갔다. 주요 식량 배급제를 폐지하고, 수입 규제를 완화했으며, 공공 주택을 세입자에게 판매하여 주택 소유를 장려했다.[1] 재선 직후에는 미래의 산업 분쟁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경찰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경찰 범죄 법안을 통과시켰다.[2] 또한, 퇴직 공무원이 연금의 일부를 일시불로 받을 수 있도록 연금 제도를 개편하고, 생산자 통제 농업 위원회를 설립했다.[1] 국민당 정부는 중도 우파 성향이었지만, 이전 노동당 정부가 추진했던 완전 고용 정책과 복지 국가의 기본 틀은 유지했다.[3] 1950년대는 뉴질랜드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게 경제 호황기였으나, 물가 상승(인플레이션) 문제는 계속해서 정부의 과제로 남았다.[1]

외교적으로는 냉전 시대 서방 진영의 안보 동맹에 적극 참여했다. 1951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함께 ANZUS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4] 또한 한국 전쟁에 뉴질랜드 군대를 파병했는데,[5] 이 전쟁 기간 동안 양모 의류 수요가 급증하면서 뉴질랜드 양 사육 농가들은 짧은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1] 1954년 9월에는 마닐라 조약을 비준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 주도의 집단 방위 기구인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에 가입했다.[6] 이듬해인 1955년 1월에는 영국과의 전통적인 관계 및 공산주의 도미노 효과에 대한 우려로 말라야 비상 사태에도 군대를 파견했다.[7] 역사가 데이비드 맥킨타이어에 따르면, 홀랜드 총리 본인은 외교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다른 장관에게 외교 업무를 맡긴 최초의 총리였다.[8] 이 시기 뉴질랜드 외무 장관은 프레데릭 도이치, 클리프턴 웹, 톰 맥도널드가 차례로 맡았다.[9]

1954년 뉴질랜드 총선에서 국민당은 생활비와 주택 가격 상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했다. 1951년 선거 때보다 거의 10만 표 가까이 득표수가 줄었다.[10] 특히, 이전 선거에는 없었던 제3당인 사회 신용 정치 연맹이 등장하여 12만 표 이상을 얻으며 국민당과 경쟁해야 했다.[10] 노동당은 국민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뉴질랜드의 단순 다수 투표 제도 덕분에 국민당은 의석수 우위를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10석 차이).[10] 일부 분석가들은 사회 신용당의 등장이 야당 표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기도 한다.[10]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홀랜드 총리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는데, 이는 이후 1956-57년에 겪게 될 건강 문제의 전조였다. 목소리가 계속 잠겨 연설 시간을 30분으로 제한해야 할 정도였다.[11] 1954년 선거 이후, 국민당 정부는 국가 통화 시스템을 조사하기 위한 왕립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사회 신용당이 주장하는 이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12]

3. 3. 3. 제3기: 1954-1957

1954년 11월 27일 정부 청사에서 홀랜드(앞줄 가운데)와 내각 장관들이 총독 윌러비 노리 경(홀랜드 왼쪽)과 함께


국민당 정부가 세 번째 연임에 성공한 후, 홀랜드는 산업통상부 장관이었던 잭 와츠에게 재무 장관직을 넘겨주었다. 국민당 의원 한 명(W.F. 포춘)이 의석을 잃고 몇몇 고령 장관들이 은퇴하면서, 홀랜드는 딘 에어, 시드 스미스, 존 맥알파인, 톰 섄드, 제프 제라드, 에릭 할스테드를 포함한 젊은 인물들을 내각에 기용하여 활력을 불어넣었다. 1955년에는 연간 말세 소득세 부과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폐지되고 급여 공제(PAYE)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또한, 홀랜드의 강력한 지지와 키스 홀리오크(당시 부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광 호텔 공사가 설립되었는데, 홀리오크는 관광 산업이 농업 부문의 투자를 잠식할 것을 우려했다. 딘 에어가 1956년 개인적인 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 홀랜드는 장관의 공적 의무와 사적 업무 간의 이해 상충을 금지하는 윤리 강령을 도입했다.[4][30]

홀랜드 임기 말년, 뉴질랜드는 버터, 양모, 치즈 수출에 대한 해외 수요 급감으로 심각한 국제 수지 위기에 직면했다. 게다가 홀랜드의 건강은 점점 더 직무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워졌고, 기억력 감퇴 증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13] 1956년 10월 수에즈 운하 위기 중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가벼운 심장 마비 또는 뇌졸중을 겪었다(상황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휴식을 취하는 대신 위기가 해결될 때까지 다음 48시간 동안 사무실에 머물렀다. 그의 전기 작가 구스타프손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홀랜드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수에즈 위기 동안 뉴질랜드와 호주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침공을 지지한 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다.

건강 문제가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는 처음에는 당 대표직을 부총리인 홀리오크에게 넘겨주는 것을 꺼렸다.[31][32] 그러나 이듬해 홀리오크 자신, 잭 마셜, 잭 와츠, 그리고 당 의장 알렉스 맥켄지를 포함한 몇몇 국민당 고위 인사들과 회의를 거친 후, 홀랜드는 마지못해 총리직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기로 동의했다.

1957년 8월 12일, 홀랜드는 웰링턴에서 열린 국민당 연례 회의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발표를 마치자 그는 병색이 완연하여 주변의 도움을 받아 호텔로 돌아가야 했고, 의사가 호출되었다. 다음 날, 홀리오크는 공식적으로 홀랜드의 후임자로 지명되었다. 홀랜드는 9월 20일에 홀리오크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그 직후인 9월 23일, 그는 바스 훈장의 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33] 그는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에 남았지만, 1957년 뉴질랜드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완전히 떠났다. 이 선거에서 홀리오크가 이끈 국민당은 패배했고, 월터 내시가 이끄는 제2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다.[4][34]

4. 퇴임 이후

의회에서 물러난 후, 홀랜드는 계속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961년 웰링턴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릭 홀랜드는 국민당 소속으로 펜달턴과 리카턴 지역구 국회의원(1967년 ~ 1981년)을 지냈으며, 로버트 멀둔의 첫 번째 행정부에서 각료(1975년 ~ 1978년)로 활동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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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35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25대개혁당45.11%5,527표1위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하원의원 당선
1938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26대뉴질랜드 국민당0%-표1위
1943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크라이스트처치 노스 선거구)27대뉴질랜드 국민당55.23%8,542표1위
1946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펜달턴 선거구)28대뉴질랜드 국민당61.44%8,065표1위
1949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펜달턴 선거구)29대뉴질랜드 국민당64.02%8,632표1위
1951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펜달턴 선거구)30대뉴질랜드 국민당67.15%8,546표1위
1954년 뉴질랜드 총선하원의원 (펜달턴 선거구)31대뉴질랜드 국민당56.17%7,852표1위


참조

[1] 서적 Reconstituting the Constitution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 & Business Media 2011
[2] 문서 A Coming Man
[3] 웹사이트 HOLLAND, Sidney George https://ndhadeliver.[...]
[4] 문서 Holland, Sidney George 2012-10-30
[5] 문서 A Coming Man
[6] 문서 A Coming Man
[7] 문서 A Coming Man
[8] 간행물 Labour Party – First Labour government, 1935 to 1949 http://www.teara.gov[...] 2015-03-25
[9] 문서 A Coming Man
[10] 문서 The First 50 Years
[11] 문서 The First 50 Years
[12] 문서 A Coming Man
[13] 웹사이트 The real power list: NZ's Prime Ministers rated https://www.nzherald[...] 2024-11-08
[14] 문서 The First 50 Years
[15] 문서 The First 50 Years
[16] 웹사이트 Legislative Council Abolished http://www.nzhistory[...]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14-03-25
[17] 문서 The First 50 Years
[18] 웹사이트 Capital punishment in New Zealand http://www.nzhistory[...] 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 2015-03-25
[19] 문서 The First 50 Years
[20] 문서 "Chapter 2: Spies, Lies and Red Herrings"
[21] 문서 The First 50 Years
[22] 문서 The First 50 Years
[23] 문서 "Chapter 2: Spies, Lies, and Red Herrings"
[24] 문서 The First 50 Years
[25] 문서 Background to the ANZUS Pact
[26] 문서 "Conference of Commonwealth Prime Ministers, Broadcast by Prime Minister" 1955-01-18
[27] 문서 Background to the ANZUS Pact
[28] 서적 New Zealand and the Vietnam War: Politics and Diplomacy Auckland University Press 2005
[29] 문서 The First 50 Years
[30] 문서 The First 50 Years
[31] 문서 The First 50 Years
[32] 서적 Ties of Blood & Empire: New Zealand's Involvement in Middle East Defence and the Suez Crisis, 1947–57 Auckland University Press 1994
[33] 간행물 London Gazette 1957-09-27
[34] 문서 The First 5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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