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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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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시아 레논은 1939년 영국 블랙풀에서 태어나 2015년 사망한 인물로, 존 레논의 첫 번째 아내이다. 1957년 리버풀 예술 대학에서 존 레논을 만나 결혼하여 아들 줄리언 레논을 낳았으나, 1968년 이혼했다. 이후 두 번의 결혼을 더 했으며, 자서전 《A Twist of Lennon》과 《John》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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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레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4년의 신시아 레논
1964년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레논
출생명신시아 파월
출생일1939년 9월 10일
출생지블랙풀, 잉글랜드
사망일2015년 4월 1일
사망지팔마 노바, 마요르카 섬, 스페인
배우자존 레논 (1962년 결혼, 1968년 이혼)
로베르토 바사니니 (1970년 결혼, 1976년 이혼)
존 트위스트 (1978년 결혼, 1982년 이혼)
노엘 찰스 (2002년 결혼, 2013년 사별)
자녀줄리언 레논
결혼 전 성파월

2. 초기 생애

신시아 파월은 1939년 9월 10일 영국 블랙풀에서 태어났다. 1957년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미래의 남편이 될 존 레논을 만났다.

2. 1. 출생과 가족

신시아 파웰은 1939년 9월 10일 영국 블랙풀에서 아일랜드계 파월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 직원인 찰스 파웰이었고, 어머니는 릴리안 파웰(결혼 전 성은 로비)이었다. 신시아는 세 자녀 중 막내였으며, 위로는 찰스와 앤서니라는 두 오빠가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리버풀 출신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 릴리안은 다른 임산부들과 함께 블랙풀로 보내져 해안가의 작은 방에서 신시아를 낳았다. 출산 후, 리버풀이 독일군의 공습 목표가 되자 파웰 가족은 위럴 반도에 있는 중산층 지역인 호이레이크로 이사했다. 당시 호이레이크는 리버풀 사람들 사이에서 "호화로운" 곳으로 여겨졌다. 11세 때, 파웰은 ''리버풀 에코''가 주최한 대회에서 미술상을 받았다.[35] 1년 후, 그녀는 리버풀의 주니어 아트 스쿨에 입학했는데, 이곳에는 나중에 리버풀의 신문 ''머지 비트''의 편집자가 된 빌 해리도 다녔다.

2. 2. 학창 시절

16세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사망했지만, 어머니의 지원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신시아의 교육을 위해 견습 전기 기술자 네 명에게 방을 세주었다. 1957년 9월, 신시아는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하여 그래픽을 전공했고, 존 레논과 마찬가지로 글자 디자인 수업도 들었다. 당시 레논은 그림 도구를 전혀 가지고 다니지 않아 신시아에게 펜과 연필을 끊임없이 빌렸는데, 신시아는 레논이 다른 교수들이 가르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수업에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시아는 품위 있는 태도를 보였고 레논과는 다른 부류의 학생들과 어울렸다. 레논과 그의 친구 제프 모하메드는 신시아가 방에 들어오면 "조용히 해 주세요! 지저분한 농담은 안 돼요. 신시아가 왔어요."라고 말하며 그녀를 놀리곤 했다.

어느 날 신시아는 레논이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닮은 금발 여학생을 칭찬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다음 토요일, 신시아는 머리를 여러 톤 더 밝게 염색하고 학교에 나타났다. 레논은 즉시 알아차리고 "미스 호이레이크, 어서!"라고 외쳤다(이는 레논이 신시아에게 붙인 별명으로, "미스 파월" 또는 "미스 프림"과 함께 사용했다). 테디 보이처럼 옷을 입던 레논은 때때로 수업에 기타를 가지고 와서 신시아에게 직접 "Ain't She Sweet"를 불러주기도 했다.

3. 존 레논과의 만남과 결혼

1957년 리버풀 예술대학에서 존 레논을 만났다.[50] 비틀즈가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1962년 존 레논과 결혼했으나, 당시 10대 우상이었던 비틀즈의 이미지를 위해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 했다.[50] 1963년 아들 줄리언 레논을 낳았다.[50]

결혼 생활 동안 신시아는 비틀즈의 성장을 지켜보며 스윙잉 시티(Swinging City)라고 불린 화려한 시대를 런던과 인근 서리주에서 보냈다. 그러나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관계를 시작하면서 1968년 결국 이혼하게 되었고, 신시아는 아들 줄리언의 친권을 얻었다.[50]

비틀즈의 유일한 공식 전기 작가 헌터 데이비스는 신시아를 유명한 남편에게 가려진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했으며, 존 레논과 달리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데다 결코 히피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음악 학교 동료들 역시 두 사람의 매우 다른 스타일 때문에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고 덧붙였다.[50] 신시아 레논 자신도 자서전을 통해 존 레논의 질투심 많고 불안정한 면모를 언급한 바 있다.[50]

3. 1. 예술 대학 시절

16세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사망하자, 어머니는 신시아의 교육을 위해 견습 전기 기술자들에게 방을 세주며 생계를 꾸렸다. 1957년 9월, 신시아는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하여 그래픽을 전공했다. 존 레논과 함께 글자 디자인 수업도 들었다.

존 레논은 그림 도구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 신시아에게 펜과 연필을 자주 빌렸으며, 다른 교수들이 가르치기를 꺼려 글자 디자인 수업에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시아는 비교적 조용하고 품위 있는 학생이었고, 레논과는 다른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레논과 그의 친구 제프 모하메드는 신시아가 나타나면 "조용히! 신시아 왔으니 지저분한 농담은 그만."이라고 말하며 놀리기도 했다.

신시아는 레논이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닮은 금발 여학생을 칭찬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 다음 토요일 머리를 더 밝은 금발로 염색하고 나타났다. 레논은 이를 즉시 알아보고 "이봐, 미스 호이레이크!"라고 외쳤다. 이는 레논이 신시아에게 붙인 별명 중 하나였다. 당시 테디 보이 스타일로 옷을 입었던 레논은 때때로 수업에 기타를 가져와 신시아를 향해 직접 "Ain't She Sweet"를 불러주기도 했다.

3. 2. 연애와 갈등

학기 말 파티 후 레논은 신시아 파월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으나, 당시 다른 사람과 약혼 중(비록 관계는 끝난 상태였지만)이었던 파월은 이를 거절했다. 레논은 무례하게 반응했지만[1], 나중에 다시 다가가 예 크라케 펍에 가자고 제안했다. 파월은 레논이 저녁 내내 자신을 무시하자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레논은 농담과 함께 그녀를 일행에 끼워주었다.

크라케 펍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했고, 레논은 파월을 "신(Cyn)"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1958년 가을, 파월은 레논과 사귀기 위해 약혼을 파기했고, 레논 역시 다른 미술 학생 델마 픽클스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나 레논의 심한 질투심은 때때로 폭력으로 이어졌다. 한번은 파월이 레논의 친구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녀의 뺨을 때렸고, 파월은 벽에 머리를 부딪히기까지 했다.[2] 이 사건 후 파월은 3개월간 레논과 헤어졌으나, 레논의 간절한 사과를 받고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파월의 미술 학교 성적은 레논과의 관계 때문에 점차 나빠졌고, 담당 교사들은 레논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레논 자신도 파월에게 무심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훗날 "나는 2년 동안 일종의 맹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술에 취해 있거나 싸움을 했다. 다른 여자 친구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레논의 오랜 친구 토니 브램웰은 신시아에 대해 "육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아름다웠다"며, "그녀는 레논이 다른 곳에서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성공에 전적으로 헌신했고... 매우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불안했고, 신시아는 그를 격려하고 그의 약점을 지지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비틀즈1960년 첫 함부르크 공연을 떠났을 때, 레논은 파월에게 자주 열정적인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레논의 이모이자 보호자였던 미미 스미스는 파월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레논이 파월에게 비싼 스웨이드 코트를 사준 것에 대해 손거울을 던지며 화를 냈고, 파월을 "갱스터의 여자"라고 부르며 불쾌하게 대했다. 1961년 비틀즈가 두 번째 함부르크 공연을 갔을 때, 파월은 당시 폴 매카트니의 여자친구였던 도트 론과 함께 부활절 연휴에 함부르크를 방문했다. 그들은 비틀즈 멤버들이 긴 공연 시간을 버티기 위해 복용하던 프렐루딘을 함께 복용하며 밤을 새웠고, 레논과 파월은 서트클리프의 여자친구 아스트리드 키르허와 그녀의 어머니 집에서 함께 지냈다.

함부르크 여행 후, 파월의 어머니가 캐나다로 이민 갈 계획을 밝히자 파월은 레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미미 스미스에게 방을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스미스는 251 멘로브 애비뉴에 있는 자신의 집 작은 방(원래 레논의 침실)을 내주었지만, 집안 허드렛일을 도울 것을 요구했다. 학생 보조금이 끊긴 파월은 집세를 내기 위해 리버풀의 울워스 매장에서 일해야 했다.

1962년 4월 레논이 다시 함부르크로 떠나자 파월은 리버풀 가모일 로드에 있는 침실 겸 거실에서 방을 구했다. 그해 8월, 미술 교사 자격증 시험에 떨어진 직후 파월은 자신이 레논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과 레논이 피임을 한 적이 없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으며, 당시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녀가 레논에게 말했을 때, 그는 "신, 할 일은 하나뿐이야. 우리 결혼해야 해."라고 말했다.[50]

3. 3. 결혼과 줄리언 레논의 탄생

1962년 8월, 미술 교사 자격증 시험에 실패한 직후 신시아 파월은 존 레논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두 사람은 피임을 하지 않았고, 임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레논은 소식을 듣고 "신, 할 일은 하나뿐이야. 결혼해야 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62년 8월 23일 리버풀의 마운트 플레전트 등기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50] 동료 비틀즈 멤버인 폴 매카트니조지 해리슨이 참석했으며,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신랑 들러리를 섰다. 신시아와 존의 부모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 도중 근처 공사장의 소음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결혼 피로연은 엡스타인의 초대로 클레이턴 스퀘어의 리스 레스토랑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1938년 레논의 부모 앨프레드 레논과 줄리아 레논이 결혼식을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존 레논은 21세, 신시아 파월은 22세였다.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레논이 결혼식 당일 밤 체스터의 리버파크 볼룸에서 공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9월 16일, 프랑스 파리의 조지 5세 호텔로 늦은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엡스타인이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동행했다.

당시 비틀즈는 리버풀 내에서는 이미 소녀 팬들의 열광적인 추종을 받고 있었다. 엡스타인은 레논 부부에게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결혼 사실과 신시아의 임신 사실을 비밀로 할 것을 요구했다.[50] 이 때문에 결혼 사실이 알려질 뻔했을 때 비틀즈 측은 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신시아는 임신 기간 동안 엡스타인이 리버풀 포크너 스트리트(Falkner Street) 36번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했고, 이후 임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개인 병실 비용을 지불했다.

1963년 4월 8일 오전 7시 45분, 리버풀 세프턴 종합병원에서 아들 줄리언 레논이 태어났다.[50][3] 당시 투어 중이던 존 레논은 사흘 뒤에야 병원을 찾아 아들을 처음 보았다. 그는 아들을 보고 "정말 훌륭하군, 신! ... 누구지? 아빠처럼 유명한 로커가 될 사람은?"이라고 말한 뒤, 엡스타인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4일간 휴가를 떠날 것이라고 신시아에게 알렸다. 레논은 훗날 줄리언을 "주말 특별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오는 방식"이라고 언급하거나, 아들이 "위스키 병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줄리언에 대한 형편없는 육아를 둘째 아들인 숀 레논과 비교하며 설명했다. "숀은 계획된 아이이고, 거기에 차이가 있다. 나는 줄리언을 아이로서 덜 사랑하지 않는다."[4]

4. 비틀마니아와 결혼 생활의 위기

아들 줄리안이 태어날 무렵, 비틀즈비틀마니아로 불리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존 레논이 기혼자이며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철저히 숨겨졌다. 심지어 1963년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의 멤버 소개 기사에서도 레논의 결혼 사실은 누락된 채 '여자'가 그의 취미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결혼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신시아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1963년 말부터 기자들이 호일레이크의 어머니 집까지 몰려들었고, 사생활 보호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줄리안의 세례를 레논 몰래 진행해야 했을 정도로 언론의 관심은 부담스러웠으며, 이 일로 레논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결혼 사실이 알려진 상황을 관리하려 했지만, 팬들의 광적인 관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런던으로 이사한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크롬웰 로드 인근 아파트에는 팬들이 몰려들었고, 신시아는 외출할 때마다 이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팬들은 아파트 자물쇠에 껌을 붙이거나 옷을 잡아 찢는 등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1964년 비틀즈의 첫 미국 투어에 동행했지만, 그곳에서도 레논과 다른 멤버들에게 소외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고, 이는 신시아가 비틀즈 투어에 함께한 마지막 경험이 되었다. 팬들의 위협은 계속되어, "존을 내버려 두라"며 신시아를 공격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사생활 침해, 레논과의 관계 변화는 결혼 생활에 깊은 위기를 가져왔다.[2]

4. 1. 비틀마니아 속의 삶

줄리안이 태어날 무렵, 비틀즈는 영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비틀마니아 현상을 일으켰다. 당시 비틀즈 멤버 중 한 명(존 레논)이 결혼했고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대중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63년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에 실린 "비틀즈의 생애" 기사에는 멤버 각자의 신상 정보가 상세히 실렸지만, 레논의 결혼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단지 "여자"가 그의 취미 중 하나라고만 소개되었다.

1963년 말, 비틀마니아가 영국과 유럽을 휩쓴 후, 언론은 레논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11월과 12월에 신시아가 머물던 호일레이크의 어머니 집으로 몰려들었다. 친구들과 이웃들이 신시아 모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려 애썼지만, 그녀는 기자들에게 자주 시달려야 했다. 11월, 신시아는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우려하여 당시 투어 중이던 레논에게 알리지 않고 호일레이크 교구 교회에서 줄리안의 세례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이틀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레논은 아들의 세례를 원치 않았기에 화를 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줄리안의 대부가 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례 직후, 신문들은 레논의 숨겨진 아내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다른 비틀즈 멤버들에게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라고 조언하며, 언론이 신시아가 결혼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기를 바랐다. 레논의 이모 집에서 몇 달간 지낸 후, 부부는 런던으로 이사하여 크롬웰 로드 인근 13 엠퍼러스 게이트에 침실 3개짜리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 아파트는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6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신시아는 먼저 줄리안을 안고 올라간 뒤, 다시 내려와 장 본 물건들을 가져가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곧 비틀즈 팬들이 이들의 거처를 알아냈고, 신시아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복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팬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1964년 레논 부부


신시아는 비틀즈의 첫 미국 투어에 레논과 동행했고, 이때 레논은 언론이 두 사람의 사진을 함께 찍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하려 했던 엡스타인을 화나게 만들었다. 투어 중 신시아는 뉴욕에서 다른 멤버들이 급히 차를 타고 떠나는 바람에 홀로 남겨지기도 했고, 마이애미에서는 경호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느라 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레논의 반응은 "다음부턴 꾸물대지 마. 너 죽을 뻔했어."였다. 이 투어는 신시아가 비틀즈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투어가 되었다. 엠퍼러스 게이트 주소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2] 팬들은 아파트 자물쇠에 껌을 붙여놓거나, 신시아나 레논이 드나들 때 옷을 잡아찢기도 했다. 미국 소녀들은 레논에게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고, 다른 비틀즈 멤버들의 여자친구들이나 아내들도 비슷한 편지를 받았다. 1967년에도 비틀즈 멤버의 아내들은 가끔씩 여성 비틀즈 팬들로부터 신체적인 위험에 직면했는데, 신시아는 "존을 내버려 둬!"라고 요구하는 여성에게 다리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레논이 투어나 녹음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1966년의 가족 휴가는 조지 마틴 프로듀서와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생 모리츠에서 스키를 타거나, 조지 해리슨과 그의 아내 패티 보이드와 함께 아일랜드의 성에 머무는 것으로 보내졌다. 심지어 이러한 휴가도 팬들에게 발각되었고, 신시아와 보이드 부인은 하녀 복장을 하고 아일랜드에서 도망쳐야 했다. 긴 녹음 세션과 투어의 결과로, 레논은 보통 며칠 동안 잠을 잤다. 레논이 스페인 알메리아에서 영화 ''내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겼는가'' 촬영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촬영 2주 후에 그곳에서 합류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배정받은 작은 아파트는 링고 스타와 그의 아내가 합류하면서 별장으로 즉시 바뀌었다.

4. 2. 런던 생활과 소외

존 레논의 이모 집에서 몇 달간 머물던 레논 부부는 런던으로 이사하여 크롬웰 로드에서 떨어진 13 엠퍼러스 게이트에 침실 3개짜리 아파트를 구했다.[50] 이 아파트는 건물의 최상층인 3층에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 실제로는 6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신시아는 아들 줄리안을 먼저 아파트까지 데려다 놓고, 다시 내려와 장 본 물건들을 들고 올라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틀즈 팬들은 그들의 거처를 알아냈고, 아파트 복도에서 밤새 기다리는 팬들 때문에 신시아는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마다 이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팬들은 아파트 자물쇠에 껌을 붙이거나, 레논 부부가 드나들 때 옷을 잡아 찢는 등 점차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1964년, 신시아는 비틀즈의 첫 미국 투어에 레논과 동행했다. 레논은 언론이 자신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는데,[50] 이는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하려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투어 중 신시아는 종종 소외감을 느꼈다. 뉴욕에서는 레논과 다른 멤버들이 재빨리 차에 타는 바람에 홀로 뒤처졌고, 마이애미에서는 호텔 경비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레논은 "Don't be so bloody slow next time—they could have killed you|돈트 비 소 블러디 슬로 넥스트 타임—데이 쿠드 해브 킬드 유eng"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을 뿐이었다. 이 투어는 신시아가 비틀즈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투어가 되었다.

엠퍼러스 게이트 주소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2] 팬들은 껌을 아파트의 자물쇠에 붙이고 그녀나 레논이 떠나거나 도착할 때 옷가지를 찢었다. 미국 소녀들은 레논에게 필사적인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고, 다른 비틀즈 멤버들의 여자들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1967년에도 비틀즈의 아내들은 가끔씩 여성 비틀즈 팬들로부터 신체적인 위험에 직면했는데, 신시아는 "존을 내버려 둬!"라고 요구하는 여성에게 다리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레논은 투어나 녹음 일정이 없을 때 집에 돌아오면 며칠씩 잠만 자는 경우가 많았다. 간헐적인 가족 휴가는 1966년 프로듀서 조지 마틴 및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한 생 모리츠 스키 여행, 조지 해리슨과 그의 아내 패티 보이드와 함께한 아일랜드 성에서의 휴가 등이었으나, 이마저도 팬들에게 알려져 편히 쉬기 어려웠다.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팬들을 피해 신시아와 패티 보이드는 하녀 복장으로 변장하고 도망쳐야 했다. 레논이 스페인 알메리아에서 영화 ''내가 어떻게 전쟁에서 이겼는가'' 촬영을 시작했을 때, 신시아와 줄리안은 2주 후에 합류했지만,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작은 아파트는 곧 링고 스타와 그의 아내가 합류하면서 별장으로 즉시 바뀌는 등 불편을 겪었다.

4. 3. 켄우드에서의 생활

비틀즈의 회계사는 멤버들이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가까운 에셔에 집을 사도록 권유했고, 이에 존 레논은 1964년 7월 켄우드라는 집을 구입했다. 이 집은 클리프 리처드가 이미 살고 있던 웨브리지의 3acre 부지에 위치한 모의 튜더 양식 주택이었다. 레논은 원래 구입 가격인 2만파운드의 두 배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켄우드를 개조하여 22개의 방을 17개로 줄였다. 새 주방은 매우 현대적이고 복잡해서 사용법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할 정도였으며, 광범위한 개조 공사 때문에 부부는 9개월 동안 다락방 침실에서 생활해야 했다.

신시아는 넓은 공간에서 파티를 여는 것을 즐겼지만, 레논은 주로 리버풀에 있는 고모 미미의 온실과 비슷한 분위기의, 수영장이 내려다보이는 집 뒤편 작은 햇볕이 잘 드는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부부는 레논의 고모 이름을 딴 "미미"라는 고양이를 키웠다. 신시아는 유모 없이 직접 아들 줄리안을 돌보았지만, 베이비시터는 자주 고용했다. 그녀는 직접 요리했지만, 외부에서 통근하는 가정부, 정원사,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신시아가 운전 면허 시험에 합격하자 레논은 그녀에게 흰색 미니, 금색 포르쉐, 빨간색 페라리, 녹색 폭스바겐 비틀을 차례로 사주었는데, 종종 상의 없이 깜짝 선물로 주었다. 신시아는 근처에 살던 패티 보이드모린 스타키 티그렛(링고 스타의 아내)과 친하게 지내며 함께 휴가를 가거나 쇼핑을 즐겼다. 그녀는 비틀즈 영화 시사회나 특별한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레논, 줄리안과 함께 집에서 사진을 찍히며 비틀즈 멤버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레논 부부는 종종 새벽까지 런던 시내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낸 후, 신시아는 줄리안을 학교에 데려다주곤 했다. 켄우드에는 다른 비틀즈 멤버들, 다양한 미국 음악가들, 그리고 레논이 전날 밤 런던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까지 방문하곤 했다.

1965년, 신시아는 켄우드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편의 얼굴을 한 "부랑자처럼 보이는" 남자를 마주쳤다. 그는 자신이 레논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 알프레드 레논이라고 밝혔다. 레논은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냈는데, 그는 이미 몇 주 전 엡스타인의 NEMS 사무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신시아에게 처음 털어놓았다. 이 만남 3년 후, 당시 56세였던 알프레드 레논은 19세의 약혼녀 폴린 존스와 함께 켄우드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레논 부부에게 폴린의 일자리를 부탁했고, 그녀는 줄리안을 돌보고 팬 메일을 처리하는 일을 돕기 위해 고용되었다. 레논의 아버지와 그의 약혼녀는 몇 달 동안 켄우드의 다락방 침실에서 지냈다. 이브닝 스탠다드 기자 모린 클리브와의 켄우드 인터뷰에서 레논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여기 나는 유명하고 돈이 많은, 한셀과 그레텔의 집에 있는데, 어디에도 갈 수 없어. 내가 할 다른 일이 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5]

신시아는 남편이 프렐루딘과 같은 약물을 복용하고 정기적으로 대마초를 피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5년 3월 27일, 치과의사 존 라일리가 주최한 저녁 파티에서 레논 부부, 해리슨, 보이드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LSD를 접하게 되었다.[6] 파티 주최자는 집에 머물라고 했지만, 해리슨은 그들을 여러 나이트클럽으로 데려갔고 라일리는 택시로 그들을 따라다녔다. Ad Lib 클럽에서는 엘리베이터에 불이 난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기어 나오기도 했는데, 그곳에는 믹 재거, 마리앤 페이스풀, 스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약물에 취한 해리슨은 보이드의 미니 쿠퍼를 타고 시속 10마일 이하의 느린 속도로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들은 켄우드에서 밤새도록 첫 LSD 경험의 강렬한 효과를 겪었다.

이후 레논은 매일 대마초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정기적으로 LSD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속된 권유에 신시아도 LSD를 한 번 더 시도했지만 역시 부정적인 경험을 했다. 그녀는 다시는 약을 복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몇 주 후 엡스타인의 시골집이 있는 워블턴, 이스트 서섹스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LSD를 복용했다. 신시아는 LSD의 정신적 효과를 혐오했지만, 이 시점부터 남편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마치 종교를 막 발견한 사람과 사는 것 같았다... 긴장, 편견, 그리고 고약한 성질은 이해와 사랑으로 대체되었다"고 회상했다. 1970년 레논은 1965년 이후 LSD를 약 1,000번 복용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수십 년 후 신시아는 존의 약물 사용이 부부 관계 종말의 시작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20]

1967년경, 레논의 어린 시절 공격적인 성향은 사라졌지만, 그는 햇볕이 잘 드는 방이나 정원에 앉아 몇 시간씩 멍하니 공상에 잠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신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소 무뚝뚝해졌고, 서로를 암묵적으로 이해하는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는 달랐다. 한번은 신시아가 "우리만의 휴가를 원해요... 존, 줄리안, 그리고 나"라고 불평하자, 레논은 "알아, 우리 모두 콘월의 절벽 위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은퇴하는 건 어때?"라고 대답했다가 "아니, 나는 써야 할 이 빌어먹을 노래들이 있어. 나는 살기 위해 일해야 해."라고 덧붙였다. 신시아는 그의 기질을 이해하려 했지만, 자신의 미술 대학 배경을 살려 경력을 쌓지 못하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5. 인도 여행과 이혼

1968년,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인도로 떠난 초월 명상 수련 여행은 신시아 레논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 존 레논과의 관계는 변화를 맞았고, 오노 요코의 등장은 결혼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국 같은 해 존 레논과 이혼하게 되었으며, 신시아는 아들 줄리언 레논의 양육권을 얻었다.

5. 1. 초월 명상과 오노 요코의 등장

비틀즈는 초월 명상을 배우기 위해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를 방문하고자 두세 달 동안 인도에 머물 예정이었다. 인도 여행을 떠나기 전, 신시아는 존 레논 앞으로 온 오노 요코의 편지들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존이 얼마간 오노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존 레논은 오노와의 관계를 부인하며 그녀가 단지 후원을 받고 싶어하는 "미친 예술가"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50], 오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거나 존의 집이 있는 케네우드를 방문했다.

1968년 2월 15일, 레논 부부는 인도로 떠났고, 4일 후 조지 해리슨패티 보이드, 폴 매카트니제인 애셔, 링고 스타와 모린 스타키 등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그들의 파트너들이 뒤따랐다. 아쉬람에서는 밤이 되면 남성 음악가들은 밖에 모여 노래를 만들고, 그들의 파트너들은 한 방에 모여 비틀즈 멤버의 아내나 연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남녀 간의 생활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레논 부부는 처음에는 아쉬람에서 기둥 네 개가 달린 침대를 함께 사용했고, 존은 기타를 연주했으며 신시아는 명상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애플 일렉트로닉스를 관리하던 그리스 출신 기술자 알렉스 마르다스(일명 "매직 알렉스")는 나중에 도착하여, 아쉬람 내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술을 몰래 들여왔다. 인도에 머문 지 2주 후, 존 레논은 혼자 있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며 별도의 방에서 자겠다고 요구했다. 매일 아침, 존은 오노 요코에게서 온 전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역 우체국으로 걸어갔고, 오노는 거의 매일 전보를 보냈다. 신시아는 이러한 비밀스러운 연락에 대해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마하리쉬와의 마법 같은 시간이 우리 결혼을 더욱 굳건히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끝을 예고하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사진가 폴 솔츠먼은 나중에 ''리시케시의 비틀즈''라는 사진집을 출판했는데, 이 사진들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존 레논과 혼란스러워 보이는 신시아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존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시아는 나중에 인도에서의 시간에 대해 "팬들, 수많은 사람들, 마감일, 요구 사항, 번쩍이는 카메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5. 2. 이혼 과정

1968년 5월,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신시아는 예정보다 일찍 영국 케네우드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5월 22일, 그녀는 집에서 남편 존 레논오노 요코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흰색 가운을 입고 바닥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으며, 침실 문 앞에는 오노의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9][10] 충격을 받은 신시아는 친구 제니 보이드와 알렉시스 마르다스(매직 알렉스)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냈다.[9]

다음 날 집에 돌아오자 레논은 평소처럼 행동하며 신시아와 아들 줄리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이야기했다.[10] 얼마 후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뉴욕으로 떠났지만, 신시아는 동행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페사로로 여행을 갔다.[10]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마르다스가 찾아와 레논이 간통을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줄리언의 단독 양육권을 요구하며 신시아를 내쫓을 계획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9] 신시아는 후에 마르다스가 자신의 소재를 알 리 없는데 갑자기 나타난 점을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하며, 레논과 오노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민 일일 수 있다고 회고했다.[9] 레논의 소송 소식에 신시아는 "나에게 이혼 소송을 건다고? 무슨 근거로?"라며 반문했다.[10]

오노 요코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 후, 신시아는 1968년 8월 22일 레논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10] 이혼은 1968년 11월 8일 최종 확정되었다(nisi 판결).[10] 이혼 합의 과정에서 레논은 처음에는 7.5만파운드 이상의 금액을 주기를 거부하며, 전화 통화에서 신시아에게 그 돈이 "풋볼 풀 당첨금과 같으며 그 이상 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0] 최종적으로 합의된 금액은 10만파운드과 줄리언의 양육비 명목으로 연간 2.4천파운드를 지급하고, 줄리언의 양육권은 신시아가 갖는 것이었다.[10] 또한 줄리언이 21세가 되면 받을 수 있는 10만파운드 규모의 신탁 기금이 설정되었고, 그 이자는 신시아가 받기로 했다. 하지만 1975년 숀 레논이 태어나면서 신탁 증서의 부칙 조항에 따라 줄리언의 상속분은 절반인 5만파운드으로 줄어들었다.[10]

이혼 후 폴 매카트니는 신시아와 줄리언을 위로하기 위해 케네우드를 방문했고, 이때 차를 타고 가면서 줄리언을 생각하며 비틀즈의 명곡 "헤이 주드"를 구상하게 되었다.[10] 매카트니는 오랜 친구였던 신시아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말했으며, 신시아는 매카트니의 방문과 위로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상했다.[11]

6. 이혼 후의 삶

존 레논과 이혼한 후, 신시아 레논은 여러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이탈리아 호텔리어, 영국인 기술자 등과 결혼했으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레스토랑 운영 등 사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는 존 레논 관련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그녀는 존 레논과의 관계를 다룬 두 권의 자서전을 출간했으며, 그림 전시회를 여는 등 예술 활동도 이어갔다. 때로는 비틀즈 관련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과거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거주하다 2015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6. 1. 재혼과 사업

1970년 7월 31일, 신시아는 이탈리아인 호텔 경영자 로베르토 바사니니와 결혼했으나[12] 1973년에 이혼했다. 이후 웨일스 루틴에서 '올리버 비스트로'라는 레스토랑과 B&B를 운영했다. 그녀는 아들 줄리안을 루틴 스쿨에 입학시켰다.[13]

1976년 5월 1일, 랭커셔 출신의 텔레비전 기술자 존 트위스트와 결혼했다.[14] 결혼 생활 중인 1978년, 존 레논과의 삶을 다룬 자서전 『A Twist of Lennon』을 자신의 삽화와 시를 담아 출판했다.[15][16] 이 책은 존 레논 사후 다시 주목받으며 20만 부가 추가 인쇄되기도 했다.[17] 신시아는 트위스트와 1981년 별거 후 1982년에 이혼했다.[18] 이후 비스트로를 매각하고 법적으로 성을 다시 '레논'으로 변경했는데, 그녀는 재정적인 이유였음을 밝혔다. "생계를 유지해야 할 때는, 총알을 물고 비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35]

1981년부터는 리버풀 출신 운전기사 짐 크리스티와 17년간 동거하며 사업 매니저로서 함께했다.[22][21] 당시 신시아는 "짐은 결코 존 레논의 그림자 속에 산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그는 저보다 4살 어리고, 그 비틀즈 시대에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19] 이들은 맨 섬과 노르망디 등에서 거주했으나 1998년 결별했다.[20][21]

신시아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존 레논 관련 기념품들을 경매에 내놓기 시작했다.[21][22] 198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레논이 직접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가 8800GBP에 팔렸고,[21] 1991년에는 켄우드 시절 골동품 등을,[22] 1995년에는 레논의 마약 관련 물품 등을 경매에 부쳐 각각 6만달러 이상을 벌었다.[23] 그녀는 "제 생각에 우리는 삶에서 너무 많은 짐을 모으고, 정리할 때 차 트렁크 세일 등에 보냅니다. 제 짐은 수요가 많았고 크리스티에서 팔렸습니다. 청구서를 지불해야 할 때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고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35]

1980년대 후반에는 향수 'Woman'(존 레논의 1980년 노래 제목)과[21] 1989년 코벤트 가든에 레스토랑 '레논스'(Lennon's)를 여는 등 사업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은 'Rubber Sole'(비틀즈의 Rubber Soul 앨범을 이용한 말장난), 'Sgt. Pepper's Steak', 'Penny Lane Pâté' 같은 메뉴를 선보였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평가 속에 오래가지 못했다.[21]

1995년에는 메리 홉킨의 히트곡이자 폴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했던 'Those Were the Days'를 녹음하며 음반을 내기도 했으나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35] 또한 노르망디 거주 시절 그린 그림과 회화 작품으로 1999년 포토벨로 로드의 KDK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21] 간혹 비틀즈 관련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과거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35][20][22][21]

6. 2. 예술 활동과 회고록 출간

존 트위스트와 결혼 생활을 하던 1978년, 존 레논과의 이전 삶에 대한 자서전인 ''A Twist of Lennon''을 출판했으며, 자신의 삽화를 담았다.[15][16] 존 레논은 신문에 발췌본이 실리자 출판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이 자서전은 레논이 사망한 후 다시 주목받으며 20만 부가 추가로 인쇄되기도 했다.[17]

1995년에는 음반 데뷔를 했는데, 1968년 메리 홉킨이 불러 폴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했던 히트곡 그 시절(Those Were the Days)을 리메이크했다.[35] 하지만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1999년 노르망디에 거주할 당시에는 런던 포토벨로 로드의 KDK 갤러리에서 자신의 그림과 회화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21]

2005년에는 두 번째 회고록인 ''John''을 출간했다.

6. 3. 존 레논 관련 물품 경매

존 레논 사망 후, 신시아는 수년간 보관해 온 레논 관련 기념품들을 경매에 부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존 레논이 그녀에게 직접 그려준 크리스마스 카드도 포함되었는데, 1981년 8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8800GBP에 팔렸다.[12][20]

신시아의 재정 상태는 불안정했으며, 그녀는 1999년에 "존을 제외하고, 제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들은 생계를 유지하는 데 결코 능숙하지 못했어요."라고 언급하기도 했다.[21][22] 이러한 경제적 이유로 1991년에는 켄우드 시절의 골동품을 포함한 더 많은 레논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았다.[21][22] 당시 신시아는 "저는 이 물건들을 30년 동안 즐겼어요. 하지만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22] 1995년에는 레논의 마약 관련 용품을 포함한 또 다른 품목들을 경매에 부쳐 6만달러 이상을 벌었다.[23]

신시아는 나중에 이러한 결정에 대해 "제 생각에 우리는 삶에서 너무 많은 짐을 모으고, 정리할 때 차 트렁크 세일 등에 보냅니다. 제 짐은 수요가 많았고 크리스티에서 팔렸습니다. 청구서를 지불해야 할 때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고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35]

6. 4. 노년과 사망

2002년 신시아는 바베이도스 출신의 나이트클럽 주인 노엘 찰스와 결혼했다.[36] 2005년 9월, 그녀는 레논과의 삶과 그의 사망 이후의 사건들을 재조명한 새로운 전기인 ''존''을 출판했다.[37]

2006년 신시아와 줄리언오노 요코와 함께 거의 보기 드문 공식 석상이었던 라스베이거스 밸리에서 태양의 서커스의 ''러브'' 초연에 참석했다.[39] 2009년 신시아와 줄리언은 리버풀의 비틀스 스토리 전시회에서 기념품 전시회를 열었고,[40] 그녀와 패티 보이드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카페시안 예술 센터 개관식에서 최초로 공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41] 2010년 9월 30일 줄리언은 뉴욕의 모리슨 호텔 갤러리에서 사진전 "타임리스"를 열었다. 신시아, 오노 요코, 션 레논, 메이 팡이 참석했는데, 이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42]

신시아와 줄리언 레논은 2010년 10월 9일, 존 레논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리버풀에서 존 레논 평화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존 레논 평화 기념비는 2010년 10월 9일 리버풀 차바세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신시아와 줄리언에 의해 공개되어 레논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했다.[43]

신시아는 남편 노엘과 함께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살았으며,[40] 노엘은 2013년 3월 11일 사망했다.[44]

2015년 4월 1일, 신시아는 마요르카 자택에서 으로 사망했으며, 아들 줄리언이 곁을 지켰다. 향년 75세였다.[45][46][48] 신시아의 대리인은 그녀가 짧지만 용감하게 암과 싸웠고 줄리언이 내내 그 옆을 지켰다고 전하면서 "기도에 감사하다. 어려운 시기에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고 밝혔다.[50]

아들 줄리언은 자신의 웹사이트와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면서 어머니를 위해 직접 가사를 쓰고 부른 노래를 담은 동영상을 올렸다.[50] 폴 매카트니는 블로그를 통해 "리버풀 시절부터 알았던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며 "줄리언에게 좋은 엄마였고 우리 모두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며, 함께 했던 시간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50][46] 오노 요코는 성명을 통해 "이와 관련된 뉴스를 접하고 매우 슬프다"며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자 줄리언의 완벽한 엄마였다"고 전했다.[51][47] 비틀스의 전기 작가 헌터 데이비스는 그녀를 "사랑스러운 여성... 그녀는 조용하고, 과묵하고, 침착하다는 점에서 존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라고 회상했다.[46]

7. 저서

1978년, 당시 남편 존 트위스트와 함께하는 동안 존 레논과의 이전 삶에 대한 자서전인 『A Twist of Lennon』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신시아 본인의 삽화와 시도 포함되어 있다.[15][16] 존 레논은 신문에서 발췌본이 게재된 후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A Twist of Lennon』은 존 레논 사망 후 몇 주 동안 다시 관심을 얻으며 20만 부의 세 번째 인쇄에 들어갔다.[17]

2005년에는 두 번째 자서전인 『John』을 출간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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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뉴스 The Loves Of John Lennon Uncut Legends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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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스 Paul McCartney: 40 career highlights on his birthday https://www.csmonito[...] 201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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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I want John out of my life 199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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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뉴스 "`존 레논 전처` 신시아 레논 사망...폴 매카트니 \"모두 매우 보고싶을 것\"" http://www.dt.co.kr/[...]
[50] 뉴스 "'헤이 주드의 엄마' 존 레넌 첫 부인 암으로 사망" http://www.yonhap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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