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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기계화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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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실험 기계화 부대는 1927년 영국 육군이 창설한 부대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참호전을 극복하고 기동전을 발전시키기 위한 실험의 일환이었다. 장갑전 이론의 발전에 따라 전차, 자주포, 공군 지원을 통합하여 운용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1920년대 훈련을 통해 기계화 부대의 역할과 전술을 실험했으며, 특히 영국 공군과의 협력을 통해 공중 지원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1934년 베레스포드 다리 전투 훈련을 통해 기갑 부대의 한계와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1935년 영국 육군의 미래 재편성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1927년 실험 기계화 부대는 다양한 전차, 기계화 보병, 포병, 공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공군 부대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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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기계화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1930년대 영국 비커스 중형전차가 이동 중이다.
1930년대 영국 비커스 중형전차가 이동 중이다.
명칭실험 기계화부대/기갑부대
영문 명칭Experimental Mechanized Force/Armoured Force
활동 기간1927년 – 1929년
국가영국
소속영국 육군
종류기갑
역할연구
규모여단
해체1929년
지휘관
주요 지휘관로버트 콜린스 (1927년–1928년)
찰스 브로드 (1931년)
조지 린지 (1934년)
퍼시 호바트 (제1전차여단, 1934년–1937년)

2. 장갑전 이론의 발전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참호전의 한계를 드러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기동전 개념이 부상했다. 대규모 포격의 엄호 아래 제한된 목표 공격은 성공할 수 있었지만, 무제한의 기간을 필요로 했다. 1918년에는 전투 폭격기가 전차 군단에 배속되어 전진을 막는 진지를 폭격하고 기관총으로 공격했지만, 공습의 위력만으로는 독일군의 저항을 극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전차 군단은 포병이 전진을 따라잡을 때까지 여전히 잠시 멈춰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의 여러 이론가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동전 개념을 발전시켰다. 조지 린지는 이라크에서 장갑차 부대를 지휘하면서 공중 지원의 효과를 보았고, 장갑 작전에 관심을 가졌다. 육군 협동 학교의 사령관이었던 트래포드 레이-맬러리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장려했다.

2. 1. 초기 이론가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이론가들은 참호전의 재발을 피하고자 했다. 1914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기동전은 프랑스군에게 의 사상자를, 독일군에게 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후의 참호전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J. F. C. 풀러는 적의 사령부와 통신선을 상대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차 부대를 제안했다. B. H. 리델 하트는 전면적인 공세보다는 기동을 통한 전략적 목표 달성을 옹호하는, 모든 병과가 기계화된 부대를 주장했다. 퍼시 호바트는 더 빠른 전차, 자주포, 그리고 영국 공군(RAF) 폭격기의 더 많은 지원을 통해 포병 사정거리 밖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며 장갑전 이론가가 되었다.

조지 린지는 이라크에서 장갑차 부대를 지휘하며 공중 지원의 효과를 보고 장갑 작전에 관심을 가졌다. 린지는 미래 전쟁이 "지상 기계화 부대가 공중 기계화 부대와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기파드 르케스네 마텔은 전차가 보병 부대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많은 기병 장교들은 서부 전선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현대 전장에서 말이 여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2. 영국군의 실험과 훈련

1920년대 초, 일본은 대영 제국에 가장 큰 군사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영국은 1925년 로카르노 조약에 서명했지만, 제국의 규모 때문에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기에 장비와 훈련을 계획하기 어려웠다. 1925년 9월, 육군은 1914년 이후 최대 규모의 훈련을 실시했으며, 그 일환으로 기계화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시험했다. 1927년, 솔즈베리 평원에서 실험 기계화 부대(EMF)가 창설되어 훈련을 실시했다. 1928년, 기계화 부대는 기갑 부대(AF)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29년, 찰스 브로드는 장갑차전에 관한 최초의 육군성 매뉴얼인 '기계화 및 장갑 부대: (그들의 작전을 고려할 때 지침), 1929 (잠정)' (퍼플 프라이머)를 작성했다. 이 매뉴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장갑 작전의 많은 특징을 예견했다. 1933년, 퍼시 호바트의 지휘 하에 전차 여단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1934년, 베레스포드 다리 전투를 포함한 대규모 훈련이 실시되었다.

2. 3. 영국 공군(RAF)과의 협력

1920년대 RAF의 표준 육군 협력 항공기였던 브리스톨 F2B (''D8096'')의 예시


휴 트렌차드 영국 공군 원수는 영국 공군(RAF) 비행대가 전술 및 전략 작전을 위해 훈련받았다고 언급하며 육군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대영 제국 방공(ADGB) 비행대 중 10개가 즉시 원정군과 함께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지 밀른은 RAF 지원이 불확실하여 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트렌차드는 다른 비행대도 2~3주 안에 준비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육군 협력 비행대만이 지상군 지원에 관심을 보였다.

1926년 제국 회의에서는 항공기가 전차 위로 급강하하는 시범을 보였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 영국 육군 항공대(RFC), 영국 해군 항공대(RNAS) 간의 협력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1918년 RAF로 통합되었다.) 1927년 훈련에서 RAF는 도로에 갇힌 기계화 부대와 적 공격에 취약한 보병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저고도 지상 공격의 가치를 입증했다.

3. 1934년 베레스포드 다리 전투

1934년 가을, 사령관(GOC)이 된 버넷-스튜어트는 기동 부대가 보급에 소홀했다는 점을 시험하기 위해 훈련을 고안했다. 이 훈련은 에임즈베리 근처 적 후방의 여러 목표를 급습하고, 습격 후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집결지에서부터 먼 거리의 접근 행군과 방어 장애물인 케네트-에이번 운하를 건너야 했다. 9월 19일 제1 보병 사단(존 케네디 소장)을 상대로 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어둠이 4시간밖에 남지 않아 해가 뜨기 전에 이동을 완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린제이는 지휘 참모가 없었고, 전차 여단과 제7 보병 여단(7th Infantry Brigade (United Kingdom)) 참모들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당초 계획은 장갑차, 경전차, 기동 보병, 비커스 중형 Mark II 전차를 혼합한 부대로 넓은 전선을 진격하는 것이었다. 더 빠른 차량이 운하에 도착하여 중형 전차가 도착할 때 건널 수 있도록 교차점을 확보하고, 다음 날 새벽에 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호바트는 전차 여단을 혼합 부대로 분할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 계획을 거부했다.

기동 부대는 밤에 적을 뚫고 지나가는 대신, 적의 측면을 광범위하게 우회하여 낮에 정비를 하고 3일째에 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버넷-스튜어트는 보급 문제를 이유로 이 계획에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제7 보병 여단이 첫날 운하 교차점을 점령하고, 전차 여단이 그날 밤에 건너며, 습격 계획은 나중에 결정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기동 부대는 서버른 강 서쪽 글루스터에서 진격을 시작하여 헝거퍼드에서 방어자들의 위치를 돌파하려 했다. 보병 여단은 약 80.47km를 밤에 이동하여 방어자들의 전선을 가로질러 교차점을 쉽게 점령했으나, 전차 여단이 밤중에 이동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폭격을 받았다. 전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습 요소가 사라졌고, 기동 부대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9월 20일 오후, 심판들은 기동 부대가 공습으로 인해 후퇴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케네디는 장갑차를 내보내고 기병대를 북쪽으로 출격시켜 지뢰를 설치하고 도로를 막아 기동 부대의 후퇴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판의 편파성에도 불구하고, 기동 부대는 분열되어 많은 장애물을 우회하며 후퇴에 성공했다.

3. 1. 훈련의 의의와 논란

베레스포드 다리 전투는 기갑 부대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훈련이었다. 리델 하트는 저서 《전차: 왕립 전차 연대와 그 전신인 중기관총 군단 전차 군단 및 왕립 전차 군단의 역사 1914–1945》에서 훈련 규칙이 기동 부대에 불리하게 적용되었다고 비판하며, 이 패배가 장갑 부대 발전과 린제이의 경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J. P. 해리스는 1995년 저술에서 훈련 조작이 비기계화 부대의 사기 회복에 필요했다며 심판들의 판정을 옹호했다.

이 훈련으로 린제이는 기계화 정책에서 영향력을 잃고 브루넷-스튜어트에게 굴욕을 당했다. 몽고메리-매싱버드의 신뢰는 유지했으나, 린제이의 평판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린제이의 견해가 몽고메리-매싱버드가 1934년 10월 기동 사단을 결성하기로 한 이유라고 기록했다. 1937년 말 기동 사단 창설에 충분한 장비가 생산되었고, 이 사단은 이집트에 주둔하며 제7 기갑 사단으로 발전했다.

한편, 2014년 존 플랜트는 영국에서의 훈련은 솔즈베리 평원이나 도로에 묶인 비현실적인 작전이었으며, 실제 전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지뢰밭, 파괴된 교량, 강, 협곡, 능선 등 여러 장애물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4. 1935년 영국 육군의 미래

1935년 9월 9일, 아치볼드 몽고메리-매싱버드 참모총장은 기갑 부대 창설 계획인 "영국군의 미래 재편성"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분석, 독일과의 전쟁 발발 시 예상되는 상황, 그리고 대륙 전쟁을 위한 야전군 조직, 장비, 훈련 방식을 제시했다.

몽고메리-매싱버드는 1930년대 중반까지 기병 사단은 대륙 전쟁에서 쓸모없을 것이며, 전차와 기갑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야전군의 자급자족형 기갑 부대의 도입은...

이는 1918년 이후 영국 육군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다. 전차와 장갑차는

> 원래 탱크가 생산되었던 보병 근접 지원과는 크게 다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몽고메리-매싱버드는 또한 "독일과의 전쟁 개시 단계의 예측"(1935)을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독일이 베네룩스 3국을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4개 보병 사단과 1개 기계화 기동 사단으로 구성된 야전군을 파견하여 독일군이 베네룩스 3국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병력은 영국 방공에 깊이를 제공하고, 영국 폭격기가 대륙 기지에서 비행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다. 영국군은 "독일군이 서부 네덜란드와 서부 벨기에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동맹국에 충분한 도덕적, 물질적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5. 부대 구성 (1927년 실험 기계화 부대)



1927년 5월 1일 솔즈베리 평원의 티드워스에서 창설된 실험 기계화 부대(Experimental Mechanized Force)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부대지휘관구성
측면 정찰 부대제3 왕립 전차 부대프레데릭 파일 중령본부, 장갑차 2개 중대 (각 4대씩 2개 소대와 각 4대씩 3개 소대)
주 정찰 부대제3 왕립 전차 부대카든 로이드 전차 8대, 모리스-마르텔 전차 8대
제5 왕립 전차 부대C. A. 볼턴 중령비커스 중형 Mk II 전차 45대, 무선 전차 4대로 구성된 무선 전화 섹션 1개
보병 부대제2 서머싯 경보병H. I. R. 올프리 중령기관총 대대 (크로슬리-케그레스 반궤도 차량과 6륜 모리스 차량에 장착된 비커스 기관총)
포병 부대제9 야전 여단 왕립 포병대C. R. B. 캐링턴 중령QF 18 파운더 야포, QF 4.5인치 곡사포 2개 포대 (드래곤 견인차 견인), 1개 포대 (크로슬리-케그레스 반궤도 차량 견인), 자주식 버치 건 20대, 제9 경포대 (왕립 포병대) (3.7인치 산악 곡사포를 버포드-케그레스 반궤도 차량에 포르테)
공병 부대제17 야전 중대 왕립 공병대기파드 르 퀘스네 마르텔 소령6륜 차량에 탑재
부속 (간헐적)
제2 체셔 연대E. G. 해밀턴 중령기계화 보병 대대, 반궤도 차량 및 6륜차의 1차 수송, 실험 기계화 부대(EMF)와 함께 훈련을 위한 트럭의 "버스 대열" 포함
영국 공군 부대제16 (육군 협력) 비행대
제3 (전투기) 비행대
제11 (폭격) 비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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