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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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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의부는 1924년 11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통해 결성된 단체이다.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노력의 결과로, 자치 활동과 무장 투쟁을 병행하며 일제에 대항했다. 1929년 국민부 결성을 위해 해산되었다.

2. 결성 배경

1924년 11월 양기탁,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 등 남만주 지역 일대를 거점으로 정의부가 창설되었다. 정의부는 헌장(憲章) 및 선언(宣言)을 발표하고, 부령(府令)으로서 명칭공포식, 창립기념일, 기원연호, 행정위원회규칙, 공농제도, 임원의 임면, 소득세징수규정 등을 의결 공포하였다.

2. 1.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와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독립운동은 흩어지고 침체되었다.[4] 만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했고, 1922년 2월, 대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통합 회의를 열었다. 통일 군정부 결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1922년 8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협회 등 더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여 대한통의부로 확대 통합되었다. 그러나 통의부 창설 초기부터 입헌군주제공화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지속되었다.[4][3] 통의부가 분열되고 약화되자, 양기탁은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 이장녕, 지청천, 손일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내부 분열과 갈등에 회의감을 느낀 통의부 의용군의 일부가 1924년 5월 통의부를 탈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부대인 참의부를 결성했다.[4][3]

2. 2. 독립운동 단체 통합 노력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 1923년 1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과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회의는 결렬되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과 9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다. 그 결과, 1924년 11월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가 조직되었다.[3]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와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독립운동은 흩어지고 침체되었다.[4] 만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 잔존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했고, 1922년 2월, 대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통합 회의를 열었다. 통일 군정부 결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922년 8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협회 등 더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여 대한통의부로 확대 통합되었다. 그러나 통의부 창설 초기부터 입헌군주제공화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지속되었다.[4][3] 통의부가 분열되고 약화되자, 양기탁은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 이장녕, 지청천, 손일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내부 분열과 갈등에 회의감을 느낀 통의부 의용군의 일부가 1924년 5월 통의부를 탈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부대인 참의부를 결성했다.[4][3] 1924년 7월 10일,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의 창립총회가 열렸고, 10월 18일 전체회의가 개최되어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3]

2. 3. 대한통의부의 분열과 참의부 결성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와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독립운동은 흩어지고 침체되었다.[4] 만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했고, 1922년 2월, 대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통합 회의를 열었다. 통일 군정부 결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922년 8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협회 등 더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여 대한통의부로 확대 통합되었다. 그러나 통의부 창설 초기부터 입헌군주제공화주의 간의 이념 갈등이 계속되었다.[4][3] 통의부가 분열되고 약화되자, 양기탁은 서간도 독립운동 지도자 이장녕, 지청천, 손일민 등과 함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내부 분열과 갈등에 회의감을 느낀 통의부 의용군의 일부가 1924년 5월 통의부를 탈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 부대인 참의부를 결성했다.[4][3] 1924년 7월 10일,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의 창립총회가 열렸고, 10월 18일 전체회의가 개최되어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3]

2. 4. 전만통일회의 개최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과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에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만이라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과 9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다.[3] 1924년 7월 10일, 길림에서 전만통일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고, 10월 18일 전체회의에서 김동삼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결과, 1924년 11월 남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가 조직되었다.

3. 정의부 결성

1924년 11월, 양기탁김동삼 등은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 등 남만주 지역 일대를 거점으로 정의부를 창설하였다. 자유시 참변 이후 분열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고, 1923년 1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불신을 받는 가운데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다 회의가 결렬되었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만이라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개조파에 속하는 양기탁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7월과 9월 길림에서 전만주통일회의주비회(全滿洲統會議壽備會)가 열렸다. 그 결과 1924년 11월 남만지역을 통괄하는 통일체로서 정의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4]

1924년 11월, 유하현에서 열린 통일 회의 결과, 정의부(正義府)는 독립 운동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다. 당시 한국통일정부, 군정서, 광정단, 의우단, 길림 거류민회, 노동친목회, 변호사협회, 고봉계 등 대표들이 참여했다.[4] 회의 중 일부 단체가 탈퇴했지만, 1924년 12월 25일, 8개 단체에서 온 25명의 대표들이 독립 운동 단체 연합체로서 정의부 결성에 합의했다. 중앙 행정 위원으로는 이탁, 오동진, 현정경, 김이대, 윤덕보, 김용대, 이진산, 김형식(김형석), 지청천 등이 선출되었다. 정의부는 경제, 산업, 교육에 집중하여 독립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3]

창설 이후,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자치, 군사, 교육, 재정, 생업 분과 위원을 임명했으며, 중앙 행정 위원으로는 이탁, 오동진, 현정경, 김이대가 임명되었다. 김대대, 윤덕보, 지청천을 선출하여 조직을 완성했다.[4]

1925년 3월, 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중앙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중앙 행정 위원장이탁
민정현정경
선전이종건
재무김이대
군사지청천
법무이진산
학무김용대
위원장김영대
교통윤덕보
생업오동진
외교김동삼

[4]

같은 해 7월, 법무국 및 군정부의 관료였던 이상룡이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어, 만주 지역의 반일 독립 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한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만주 독립 운동 세력은, 이들의 취임 거부로 인해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상룡은 이듬해 2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4]

1926년 1월 중앙 협의회 상무위원장 이해룡은 비상 조치로 정의부 군 및 인민 대표회를 조직하여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헌장을 공포하고 제정했다.[4]

같은 해 10월, 정의부는 제3차 중앙 협의회를 개최하여 군 및 인민 대표회로부터 민정을 회복하고 헌장을 개정했다. 이때부터 정의부는 독립 운동 단체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식량 생산과 산업 진흥에 주력했다.[4]

정의부에 참여하고 있던 정의형, 양기탁, 현정경, 오동진 등은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 핵심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령의 이규풍과 주진수,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과 이동락, 한국의 천도교 개혁파, 형평사의 이동구를 접촉했다. 그리하여 1926년 4월, 한국혁명당이 길림성에서 조직되었다.[4]

그러나 한국혁명당은 당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민족주의 진영의 당원들이 계속 탈당했고, 주진수와 이규풍은 소련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1926년 12월, 이동락이 체포되었을 때 한국혁명당의 문서와 간부들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대규모 체포 작전을 시작했다. 이듬해 12월까지 정의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오동진, 정의형, 이동구 등 핵심 간부 15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산되었다.[4]

1926년 말부터 중국 내에서 단일 민족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단일 민족 정당 운동의 일환으로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도로 3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11월에 중단되었다. 이후 1928년 12월, 김동삼, 지청천, 김원식 등은 정의부를 탈퇴하고 만주 국민회 군사파와 참의부 분파와 통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했다. 한편, 정의부의 잔여 세력과 만주 국민회 민정파 및 잔여 세력은 1929년 4월 1일 국민부를 조직했다.[4]

1924년 11월 24일, 군정서, 길림한족회, 대한광정단, 대한독립군, 대한통의부, 노동친목회, 의성단, 자율연합회, 고봉계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의거정부를 창설하고 헌장과 선언문을 발표했다.

새 헌장의 특징은 근대적인 삼권 분립, 내각 책임제, 지방 자치 제도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군민대표회의가 수립된 이후 의거정부의 군사 세력이 증강되었고, 무장 항쟁이 중요해졌다.[4] 법무부가 발표한 선언문은 경제, 산업, 교육에 힘쓰고 독립을 위한 해방 대업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만주의 불안정한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전선을 통합 조직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전만통일협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결의했다.[1]


  • 단체의 명칭은 의거정부로 한다.
  • 연호는 건국 기원으로 정한다.
  • 의회 기구로서 구역 의회, 지방 의회, 중앙 의회를 둔다.
  • 헌장은 제6장 제88조로 통과된다.
  • 각 단체는 명칭 폐지 선언문을 작성하고 각 단체 대표의 서명을 받아 공포한다.
  • 각 단체의 사무는 단체 해산일로부터 두 달 이내에 법무부에 이관한다.
  • 임시 행정 집행 위원회를 설치하여 정식 중앙 행정 위원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정부 사무를 임시로 수행한다.

4. 조직

정의부 청사


정의부는 중앙 조직, 지방 조직, 군사 조직으로 구성되어 자치 활동과 군사 활동을 함께 수행했다. 초기에는 관할 지역 주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 활동에 집중했고, 군사 조직은 기존의 통의부 의용군을 기반으로 조직을 유지했다.[3][1]

정의부는 1924년 11월 김동삼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중앙행정위원장으로 이탁을, 중앙행정위원으로 오동진, 현정경, 지용기, 김이대, 윤덕보, 김용대, 이진산, 김형식, 이청천, 윤병용, 김동삼 등을 선임했다.[4] 자치, 군사, 교육, 재정, 생계 분과 위원을 임명하고 각 지방위원 등 역원(役員)을 선정 발표했다. 분과별 위원은 다음과 같다.[4]

분과위원
자치분과위원이진산, 맹철호, 최명수
군사분과위원이장녕, 조욱, 김철
교육분과위원이창범, 고할신, 김동삼
재정분과위원김호, 윤덕보, 승진
생계분과위원박정조, 김정제, 백남준



1926년 4월, 정의형, 양기탁, 현정경, 오동진 등은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 핵심 조직으로 한국혁명당을 길림성에서 조직했다. 그러나 한국혁명당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1927년 12월 핵심 간부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4]

1926년 말부터 중국 내에서 단일 민족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통합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도로 3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11월에 중단되었다. 이후 1928년 12월, 김동삼, 지청천, 김원식 등은 정의부를 탈퇴하고 만주 국민회 군사파와 참의부 분파와 통합하여 혁신의회를 결성했다. 한편, 정의부의 잔여 세력과 만주 국민회 민정파 및 잔여 세력은 1929년 4월 1일 국민부를 조직했다.[4]

4. 1. 중앙 조직

1924년 11월, 유하현에서 열린 통일 회의 결과, 정의부는 독립 운동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다. 1925년 3월, 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중앙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중앙 행정 위원장 이탁, 민정 현정경, 선전 이종건, 재무 김이대, 군사 지청천, 법무 이진산, 학무 김용대, 위원장 김영대, 교통 윤덕보, 생업 오동진, 외교 김동삼이 임명되었다.[4]

정의부의 중앙 조직은 삼권분립(입법, 사법, 행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2][3] 중앙행정위원회, 중앙재판위원회, 그리고 무장 활동을 수행하는 중앙 의회와 의용군이 있었다.[3]

구체적인 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중앙행정위원장이탁
민정위원현정경
선전위원이종건
재무위원김이대
군사위원지청천
법무위원이진산
학무위원김용대
위원장김영대
교통위원윤덕보
생업위원오동진
외교위원김동삼



1925년 7월, 이상룡이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무령에 임명되었으나, 만주 독립 운동 세력은 임시 정부를 높게 평가하지 않아 취임을 거부했고, 이듬해 2월 이상룡은 국무령직에서 사임했다.[4]

1926년 1월, 중앙 협의회 상무위원장 이해룡은 비상 조치로 정의부 군 및 인민 대표회를 조직하여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헌장을 공포했다.[4] 같은 해 10월, 정의부는 제3차 중앙 협의회를 개최하여 군 및 인민 대표회로부터 민정을 회복하고 헌장을 개정했다. 이때부터 정의부는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식량 생산과 산업 진흥에 주력했다.[4]

4. 2. 중앙 조직의 변화

1924년 11월, 유하현에서 열린 통일 회의를 통해 정의부가 독립운동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다. 12월 25일에는 8개 단체에서 25명의 대표들이 정의부 결성에 합의했다.[4] 중앙 행정 위원으로는 이탁, 오동진, 현정경, 김이대, 윤덕보, 김용대, 이진산, 김형식(김형석), 지청천 등이 선출되었다.[3][4]

1925년 3월, 정의부는 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중앙 위원회를 조직했다. 중앙 행정 위원장은 이탁, 민정은 현정경, 선전은 이종건, 재무는 김이대, 군사는 지청천, 법무는 이진산, 학무는 김용대, 위원장은 김영대, 교통은 윤덕보, 생업은 오동진, 외교는 김동삼이 임명되었다.[4]

같은 해 7월, 이상룡이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면서 만주 독립 운동 단체 중심의 연립 내각 수립이 추진되었으나, 임시 정부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만주 독립 운동 세력의 취임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 이상룡은 이듬해 2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4]

1926년 1월, 중앙 행정 위원회와 중앙 협의회 간의 갈등이 발생한 가운데, 중앙 협의회 상무위원장 이해룡은 비상 조치로 정의부 군 및 인민 대표회를 조직하여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헌장을 공포했다.[4]

같은 해 10월, 정의부는 제3차 중앙 협의회를 개최하여 군 및 인민 대표회로부터 민정을 회복하고 헌장을 개정했다. 이때부터 정의부는 독립 운동 단체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식량 생산과 산업 진흥에 주력했다.[4]

4. 3. 지방 조직

정의부는 처음에 중앙본부를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 두고 참의부(參義府)의 관할권(관전, 집안, 환인, 통화 등 4현)을 제외한 지역에 12개 지방총관소(地方總管所)를 설치하였다.[4] 이후 본부를 유하현 삼원포에서 화전, 길림의 대차(大岔), 신안둔(新安屯), 대강자(大崗子), 반석 등으로 옮기면서 1926년 말 경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奉天省)과 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87,000여 명을 관할하였다.[4]

정의부의 지방 조직은 남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를 관할하였다.[3] 하얼빈 이남 약 40개 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관할하며, 그들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민정 활동을 수행했다.[3] 한인 사회 내에 총관구, 구역, 백호, 십호 등의 지방 조직을 설치하여 이주 한인 사회를 관리했다.[2]

하위 조직으로 구역과 지구가 편성되었다. 각 구역에는 총사무소가 설치되었고, 한인이 밀집된 마을에는 한인 1,000호를 묶어 총관구를 설치했으며, 그 아래에는 500호를 지방장, 100호를 백호장, 50호를 면, 10호를 십호장으로 임명하는 지방 조직을 두었다.[2] 통화, 환인, 관전, 집안, 임강, 장백, 유하 현 등에 지방 조직을 설치했다.[3] 사법부와 군정부 관할 지역은 1926년에 더욱 확대되어 15,300호에 76,800명의 한인이 거주했다.[3] 이러한 지방 조직을 기반으로, 정의부는 만주 한인 사회의 지방 정부 역할을 수행했으며, 준국가적 자치 기구의 성격을 지녔다.[1]

4. 4. 군사 조직

정의부는 중앙 조직, 지방 조직, 군사 조직으로 구성되어 자치 활동과 군사 활동을 함께 수행했다. 초기에는 경제적 기반 마련을 위해 민정 활동에 힘썼으며, 군사 조직은 기존의 통의부 의용군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3][1]

1926년 1월 군민대표회의 결성 이후, 만주에서 국내 침투 및 일본 통치 기관 파괴를 위한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통의부 의용군을 기반으로 서로군정서, 의성단, 광정단의 무장 세력을 통합하여 5개 중대와 헌병대를 편성했다. 민족대회 이후에는 무장 투쟁이 강화되어 군사 조직이 6개 중대로 재편성되었다.[2]

정의부 의용군은 국내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고, 만주에서는 군자금 모집, 친일파 암살, 한국인 보호 활동을 수행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함경도평안도의 일본 군경 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2]

정의부 군정서 의용군은 각 지역에 파견되어 모험대, 암살대, 경호대, 친위연대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대 후반까지 남만주를 무대로 활동했다. 1927년 초부터는 민족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으며, 대부분의 구성원은 남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했다.[2]

5. 주요 활동



정의부는 1924년 11월 만주 유하현에서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의 연합체로 창설되었다. 한국통일정부, 군정서, 광정단, 의우단, 길림 거류민회, 노동친목회, 변호사협회, 고봉계 등 대표들이 참여했으며,[4] 1924년 12월 25일, 8개 단체에서 온 25명의 대표들이 정의부 결성에 최종 합의했다. 중앙 행정 위원으로는 이탁, 오동진, 현정경, 김이대, 윤덕보, 김용대, 이진산, 김형식(김형석), 지청천 등이 선출되었다. 정의부는 경제, 산업, 교육에 집중하여 독립을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3]

창설 이후, 헌장과 선언을 발표하고 자치, 군사, 교육, 재정, 생업 분과 위원을 임명했다. [4] 1925년 3월, 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중앙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중앙 행정 위원장이탁
민정현정경
선전이종건
재무김이대
군사지청천
법무이진산
학무김용대
위원장김영대
교통윤덕보
생업오동진
외교김동삼

[4]

같은 해 7월, 이상룡이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 독립 운동 세력은 임시 정부를 높게 평가하지 않아 취임이 무산되었고, 결국 이상룡은 이듬해 2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4]

정의부는 중앙, 지방, 군사 조직으로 나뉘어 자치 및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관할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 활동에 집중했으며, 군사 조직은 기존 통의부 의용군을 기반으로 유지했다.[3][1]

설립 초기부터 공영제를 실시하고 가족 경작제를 통해 공영 이익을 높여 만주 거주 한인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농업 자금을 대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남녀공학 초등학교를 의무 교육 기관으로 설립하고, 화흥중학, 동명중학교를 설립했으며, 혁명 간부 양성을 위해 화성의숙을 설립했다.[3]

1926년 말부터 중국 내에서 단일 민족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통합 과정에서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도로 3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로 11월에 중단되었다. 이후 1928년 12월, 김동삼, 지청천, 김원식 등은 정의부를 탈퇴하고 혁신의회를 결성했고, 정의부 잔여 세력은 1929년 4월 1일 국민부를 조직했다.[4]

5. 1. 자치 활동

1925년 정의부 학무국은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하고,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거나 새로 설립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포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중학(化興)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의숙(華成), 부흥학교(復興), 삼흥학교(三興) 등도 정의부에서 운영했다.[5]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정의부는 만주 여러 곳에 수전(水田)농업을 하는 ‘이상적 농촌 건설 계획’ 등을 계획했지만 토지 구입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했다.

1925년 7월 중앙행정위원회가 이상룡(李相龍)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추천하면서, 같은 해 말 무장투쟁파와 자치파가 대립하여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가 갈등하는 분규가 발생했다. 1926년 1월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이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하였는데, 청년층 무장단(무장투쟁파)이 자치파를 밀어내고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1926년 11월 전만통일회에서 제정된 기존 헌장을 폐지하고 5장 58조의 새 헌장을 제정·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양기탁, 고할신(高豁信), 현정경, 오동진 등 정의부 창설 원로들은 1926년 4월 길림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고, 김동삼, 김원식(金元植), 이광민(李光民) 등 경상도 출신 인사들은 김응섭(金應燮)이 주도하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참여함으로써 정의부는 분열하였다.

1926년 10월, 정의부는 제3차 중앙 협의회를 개최하여 군 및 인민 대표회로부터 민정을 회복하고 헌장을 개정했다. 이때부터 정의부는 독립 운동 단체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군사 행동을 자제하고 식량 생산과 산업 진흥에 주력했다.[4]

정의부는 중앙 조직, 지방 조직, 군사 조직으로 구성되어 자치 활동과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관할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 활동에 집중했다.[3][1]

1924년 11월 24일, 여러 독립운동 단체 대표 25명이 의거정부를 창설하고 헌장과 선언문을 발표했다. 새 헌장은 근대적인 삼권 분립, 내각 책임제, 지방 자치 제도를 채택했다는 점이 특징이다.[4] 법무부가 발표한 선언문은 경제, 산업, 교육에 힘쓰고 독립을 위한 해방 대업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1]

5. 2. 경제 활동

정의부는 만주 지역 한인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양기탁은 만주에 수전(水田)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농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토지 구입 자금 부족으로 실패했다.[5]

정의부는 산업 부흥, 특히 농업 발전에 힘썼다. 1925년 3월부터 공영제를 실시하여, 공동 경작으로 얻은 이익으로 농기구를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대여하고, 남은 이익은 낮은 이자로 농업 자금을 빌려주었다.[2] 농촌 공동체 규칙을 제정하고 마을별 공동 기금을 마련하여 농기구 구입, 영농 자금 융자, 공동 경작을 통한 소득 창출을 지원했다.[2]

또한, 유한농업회사 설립, 농업 투자, 농업 협동조합 형태의 농민주택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흥업회사를 설립하고 농민회, 농민보호국 등 지방 행정 조직을 강화하여 산업 진흥을 꾀했다.[4]

5. 3. 교육 활동

1925년 정의부 학무국은 소학교, 중학교, 여자고등, 직업, 사범학교 등으로 구성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했다. 정의부는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기도 하고 새로 설립하기도 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포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중학(化興)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의숙(華成), 부흥학교(復興), 삼흥학교(三興) 등도 모두 정의부에서 운영했던 학교였다.[5]

정의부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국력 강화를 위해 교육 활동에 힘썼다. 보통 교육을 실시하고 남녀공학의 초등학교를 의무 교육 기관으로 설립했으며, 화흥중학교, 동명중학교, 화성중학교와 같은 초등학교, (여자)중학교, 직업학교, 교원 양성 학교 등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한인 아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제공하는 동시에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직업 교육을 제공했다.[2] 또한 혁명 간부 양성을 위해 군사 교육, 사상 및 문화 계몽에 주력했으며, 학교에서 사용할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고 교육 제도 개혁과 학교 확대를 결의했다.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언론 활동과 미디어 활동의 일환으로 "정의부 공보", "중앙통신사", "대동민보", "신화민보" 등의 신문과 잡지 "동지"를 발행했다.[3][4]

5. 4. 무장 투쟁

1926년 1월 이해룡이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개최한 이후, 청년층 무장단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장투쟁파 세력이 자치파 세력을 밀어내고 지휘권을 장악하였다.[5] 그 결과 1926년 11월 전만통일회에서 제정된 기존의 헌장을 폐지하고 5장 제58조로 된 새 헌장을 제정·선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정의부는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했는데, 특히 1926년 1월 군민대표회의 이후 만주에서 국내 침투 및 일본 통치 기구 파괴를 위한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정의부 의용군은 국내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고, 만주에서는 군자금 모집, 친일파 암살, 관내 한국인 보호 활동을 수행했다.[2]

정의부 의용군은 서군정서, 의성단, 광정단의 무장 세력을 통합하여 5개 중대와 헌병대를 편성했으며, 민족대회가 열린 후에는 무장 투쟁이 강화되어 6개 중대로 군사 조직을 재편성했다.[2]

의용군은 만주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한국으로 진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 진입 전에 유격대를 조직하여 함경도평안도의 일본 군경 주재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정의부 군정서 의용군은 국내로 진입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고, 관할 구역 내 한국인 보호 활동을 수행했으며, 각 지역에 파견되어 모험대, 암살대, 경호대, 친위연대 등의 명칭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남만주를 무대로 1920년대 후반까지 활동했으며, 1927년 초부터 시작된 민족 유일당 운동에 참여했고, 대부분 남만주를 기반으로 활동했다.[2]

6. 고려혁명당과의 관계

1925년 7월, 중앙행정위원회가 이상룡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추천하면서 정의부 내 무장투쟁파와 자치파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의 갈등 속에서, 1926년 1월 상임위원장 이해룡이 군민대표회를 개최, 무장투쟁파가 지휘권을 장악하고 전만통일회에서 제정된 기존 헌장을 폐지, 새 헌장을 선포하였다.[4]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4월, 양기탁, 고할신, 현정경, 오동진 등 정의부 원로급 인사들은 길림에서 국내 천도교 혁신파, 형평사, 노령지역 대표 등과 회합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다.[4] 한편, 경상도 출신 김동삼, 김원식, 이광민 등은 김응섭 주도의 한족노동당, 재만농민동맹 등에 참여하면서 정의부는 분열하였다.[5]

7. 3부 통합 운동과 국민부 결성

1926년 말부터 중국 내에서 단일 민족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단일 민족 정당 운동의 일환으로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4] 그러나 통합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도로 3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1월에 중단되었다.[4]

1928년 2월, 정의부, 참의부, 만주 대한국민회 간부들이 닝구타(寧古塔, 현 닝안)에 모여 민족 통일당 운동 추진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4] 그 후 5월, 만주 지역 18개 독립운동 단체 대표 39명이 판스 현, 지린 성에 모여 단일 정당 결성 문제를 논의했으나, 기성 단체를 부정하는 민족통일당 조직 추진회와 기성 단체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민족통일당 조직 협의회로 분열되었다.[4]

이후 협의회의 중심 세력인 정의부는 참의부, 만주 대한국민회와 통일 운동을 벌였으나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만주 대한국민회 민정파와 참의부 일부 세력이 결합하여 1929년 국민부를 결성하고 세 단체를 해산했다. 한편, 촉성회 측은 만주 대한국민회 군정부 계열, 정의부 일부, 육군주만참의부의 주력을 중심으로 혁신의회를 조직하면서 국민부 측과 대립했다.[4] 1928년 12월, 김동삼, 지청천, 김원식 등은 정의부를 탈퇴하고 만주 국민회 군사파와 참의부 분파와 통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했다.[4]

8. 해체

정의부는 점차 내부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1929년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 일부를 합쳐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한 후 해체되었다.[4]

1926년 말부터 중국 내에서 단일 민족 정당 결성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단일 민족 정당 운동의 일환으로 3부 통합이 추진되었다.[4] 그러나 통합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도로 3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11월에 중단되었다.[4]

이후 1928년 12월, 김동삼, 지청천, 김원식 등은 정의부를 탈퇴하고 만주 국민회 군사파와 참의부 분파와 통합하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결성했다. 한편, 정의부의 잔여 세력과 만주 국민회 민정파 및 잔여 세력은 1929년 4월 1일 국민부를 조직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남만주에서 활동한 민족 운동 단체이자 한인 자치기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30
[2] 웹사이트 정의부 (正義府)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30
[3] 웹사이트 정의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30
[4] 웹사이트 정의부 (正義府)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30
[5] 간행물 만주의 삼부(三府) 1~9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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