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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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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의부는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초기에는 군사 활동에 집중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고 친일파를 처단했으나, 이후 자치 정부의 성격을 갖추며 민정 활동도 수행했다. 1928년 정의부, 신민부와의 3부 통합 운동에 참여하여 혁신의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국민부에 합류하면서 해체되었다. 참의부는 500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며 활발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만주 지역의 한국인 공동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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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지도
기본 정보
명칭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한자 표기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
로마자 표기Daehanminkuk Imsijeongbu yukgunjumanchamuibu
다른 명칭육군주만참의부
다른 명칭 (한자)陸軍駐滿參議府
다른 명칭 (로마자 표기)Yukgunjamuibu
다른 명칭참의부
다른 명칭 (한자)參議府
다른 명칭 (로마자 표기)Jamuibu
조직
소속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기간1924년 6월 26일 – 1929년 10월 19일
본부지안, 만주
이념한국 독립 운동
규모600명
전신대한통의부
후신국민부
지도부
의장백광운 (1924)
의장최석순 (1924–1925)
의장윤성화 (1925–1926)
의장김승학 (1926–1928)
의장 대행이영희 (1928–1929)
적대 세력
적대 세력일본 제국

2. 결성 배경

1922년 10월, 일본은 독립군 진압을 명분으로 간도에 대규모 정규군을 파병하여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남만주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한통일정부로 통합되었으며, 독립군 재편성과 효과적인 항일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1]

2. 1.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 통합 운동

1922년 8월, 남만주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일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이념 대립, 정책, 간부 간 권력 분배, 군사력 지휘권 문제 등으로 분열되었다.[1] 1923년 1월, 군주파는 의군부를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로 개편하였고, 대한통일정부와 대한의군부는 분리된 후에도 대립과 내분이 계속되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은 한국 독립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로 편성하여 재통합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1]

1923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군사 조직을 편성하기로 결정하고 백광운, 조능도, 박응백 등 5명의 대표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되어 승인을 요청하였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은 후, 1924년 5월 통의부에서 탈퇴하고 독립운동 세력 간의 분열과 대립을 비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결집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임시정부 직속 기관으로 총참모부가 조직되었고, 의용군 제5대대도 이에 합류하였다.[1]

이에 앞서 대한통의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대립 속에서도 중립을 지키며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통의부 의용군의 1, 2, 3, 5중대는 양측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자 임시정부 직할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만주에 있는 모든 항일독립군사단체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파견되어 임시정부와 교섭을 벌였고,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하여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군 조직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임정으로부터 김승학이유필이 파견되어 1924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무장항일단체로서 관전현(寬甸縣) 대우구(大牛溝)를 본부로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었다.

2. 2. 대한통의부 내분과 임시정부 직할 부대 창설

대한통의부 출범 이후,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통의부 의용군 제1, 2, 3, 5중대는 중립을 지키며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직할 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주의 모든 항일독립군사단체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1]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잇는 군사 조직을 승인했다.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로부터 파견된 김승학이유필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무장항일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를 관전현(寬甸縣) 대우구(大牛溝)에 본부를 두고 결성하였다.[4]

3. 결성

대한통의부 내분 속에서 통의부와 의군부 간 대립이 격화되자, 중립을 지키던 통의부 의용군 1, 2, 3, 5중대는 임시정부 직할부대 창설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들은 만주 내 모든 항일독립군사단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 상하이에 독립운동가들을 파견해 임시정부와 교섭했다.[1]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수락, 광복군사령부 전통을 계승한 군 조직을 승인했다. 1924년 6월 26일, 임정 파견 김승학, 이유필과 함께 관전현(寬甸縣) 대우구(大牛溝)를 본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무장항일단체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었다.

1923년 8월, 백광운, 조능식, 박응백, 김원상, 조태빈은 상하이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상했다. 임시정부는 제안을 수락, 기존 독립군 사령부 전통을 계승한 임시정부 직할 남만군정부(南滿軍政府)를 승인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주군사령부(만주군사령부)로 명명하였다.[1] 채찬, 김원상, 박응백 등은 독립군 세력 통합 구심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주목, 1923년 말부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했다.[1]

1924년 4월, 통의부 의용군 1, 2, 3대대 대표, 게릴라 부대, 독립 소대 등 남만주 지역 군인 대표 78명은 ‘선언서’를 발표했다.[1]

#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임을 적극 인정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치 아래 대동단결 선봉에 섰음을 국내외에 알리고, 적극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 국내외 모든 무장 단체를 대한민국 국군에 합류할 것을 초청, 규합한다.

‘선언서’ 발표 한 달 후인 1924년 5월, ‘선언서’ 참여 독립군 중심으로 만주군사령부(군사고문부)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6월, 통의부 의용군 제5대대도 통의부에서 이탈, 군사고문부에 합류했다.[1]

4. 조직 및 활동

참의부는 군사 조직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지만, 민정 활동도 함께 수행했다. 민정부는 13개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1924년 백광운 의장이 암살되자, 제2중대장 최석순이 군사고문처 의장을 겸임했다.[1]

창설 이후 참의부는 국내 진입을 적극 시도했다. 통신원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변에 도착한 게릴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넌 후, 국내 통신원의 집으로 이동하여 상황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1]

군사고문처 소속 독립군의 주요 활동 지역은 평안북도 의원, 자성, 구성, 강계, 창성, 후성 등 압록강변 지역이었다. 1924년 중반부터 1925년 말까지 군사고문처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대표적인 대일 무장 투쟁은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 마시탄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공격한 사건이다. 사이토 마코토가 압록강변 국경 초소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제2중대 제1소대원 8명으로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평안북도 의원군 마시탄 계곡에 매복, 사이토의 경비정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국경 순찰선을 도주하게 만들었다.[1]

1925년, 참의부의 중앙 조직은 크게 개편되었다. 1925년 2월 27일, 총참모부장 최석순을 비롯한 간부들은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열었으나, 첩자를 통해 이 소식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았다. 1925년 3월, 5개 중대 간부들은 가재현 고마령에서 국내 침투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으나, 일본은 이를 탐지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참의부는 저항하여 기본 전력을 유지했지만, 최석순을 비롯하여 전창희(田昌禧) 중대장 등 39명이 사망하거나 고문을 받았다. 홍주 등은 체포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1] 이때 최석순을 포함한 42명이 국내에서 사망했다. 고마령에서 큰 피해를 입은 참의부원들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했다.[1]

참의부는 다른 단체들보다 활발하게 대일전을 수행했으며, 1924년에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한국의 자치와 안정보다는 무력 활동에 더욱 중점을 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한국 독립군 활동의 3분의 2 이상이 참의부에 의해 수행되었다. 일본군과 경찰 기습, 일본 식민 기관 파괴, 친일파 색출, 군자금 모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24년 5월 19일, 사이토 총독이 국경 지역 치안 점검을 위해 순시선에 승선하자, 압록강을 내려오는 그를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린 것은 군사고문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중 하나였다.[1]

참의부의 주요 활동은 항일 무장 투쟁이었다. 각 중대는 국경 진입이 용이한 압록강변에 집중 배치되었다. 북평안도의 초산(楚山), 위원(渭原), 만포진(滿浦鎭), 가재현이 참의부 활동의 주요 군사 기지이자 거점이었다. 군사고문부 설립 초기에는 5개 중대 중 3개 중대가 가재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환인현과 동화현에 위치했다. 특히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파를 처단하며 일본 지배 기구를 공격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5년에는 압록강변 초산산 부근의 경찰서를 공격하고 일본 국경 수비대와 교전하기도 했다. 각 지역의 흩어진 지역들 사이의 한국 마을에는 연락원들이 파견되어 일정 기간 머물렀다. 그 목적은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본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일본군의 동정 등을 보고하며, 주민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어떤 중대나 소대가 마을에 진입하면 연락원들은 다음 연락원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연락원의 안내는 게릴라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1]

1926년 7월, 중국 국민정부북벌로 중국 내에서 일당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1927년 1월 안창호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일당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방향과 내용을 놓고 의견 차이와 분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최로 3개 지부 통합 회의가 열렸으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1월에 중단되었다.[1]

4. 1. 조직 구조

참의부의 조직은 시기별로 변화를 겪었으며, 크게 중앙 조직과 지방 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 조직은 전체 조직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고, 지방 조직은 압록강 연안의 한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1]

초기에는 무장 투쟁 중심의 조직이었으나, 1925년 미쓰야 협정 이후 자치 중심의 체제로 변화하였다. 이는 독립군의 활동을 감시하고 봉쇄하려는 일본과 중국의 압력 때문이었다.[1]

1925년, 고려령(庫裏嶺)에서 간부 회의 중 일본군과 경찰의 매복 공격으로 29명의 간부가 사망하는 사건(고려령 학살)이 발생하여 조직과 활동이 축소되었다.[1]

1928년 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선임된 이종혁은 수백 명의 군사들을 지휘했다. 일본 육군 중위 출신으로 시베리아 출병으로 훈공까지 받은 경력이 있어 체포 당시 일본을 놀라게 했다.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늑막염으로 1934년 출옥, 1935년에 순국했다.[1]

총참모부의 군사 조직은 5개 중대와 1개 독립 소대로 구성되었다. 창설 초기 병력은 500명이 넘었으며, 1928년 7월까지 600명 이상을 유지했다. 각 중대는 약 14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고, 소대는 주변 지역에 배치되었다. 병력 보충을 위해 관할 지역 내에 의무 병역 제도가 시행되었고, 참전용사단은 농촌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했다. 총참모본부는 주로 국내 진격 작전을 수행했으며, 평안도 지역의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공격했다.[1]

백씨 가문의 지휘 아래 통신중대가 설립되어 통신과 독립군 활동 자금 징수 임무를 맡았다.[1] 1925년 3월, 전체 부대가 3개 부대로 나뉘어 북평안도 정산으로 이동, 벽동군의 추동파출소, 하단동파출소, 여해파출소를 공격하고 국경 수비대와 교전했다.[1]

총참모부는 중앙 조직과 지방 조직을 통해 한국인 보호 및 관리를 수행했다. 초기에는 13개 지방 행정 위원회를 설치하고, 이후 인구 조사 후 천호마다 백호장, 백호장 아래 십호장을 임명했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는 행정 구역을 설치, 약 50명의 경비대원으로 치안 유지와 재산 보호를 담당하게 했다.[1]

1925년 8월부터 위원회 제도를 채택, 부서별 업무 분담으로 자치 행정을 담당하게 했으며, 각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50명 이상의 보호원을 양성했다. 주민들은 매년 10원의 의무 부담금을 납부, 조성된 자금으로 무기 구비, 산업 진흥, 교육 행정을 실시했다.[1]

1928년 참의부 조직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비고
참의장김승학
군사마덕창
외교김소하
조직김강
선전박대호
재무김진(金眞)본명 김영진
민사이광명
교통최천주
법무맹성록후임 목포(木浦)
비서장김선풍
중앙의회 의장양하산(梁荷(瑕)山)
상의회원계추강, 김윤석, 백시관, 박종수, 배학세
제1중대장김광명병원 50, 환인현 횡도천(橫道川)
제2중대장김현병원 50, 집안현 임전자(荏甸子)
제3중대장한세진, 최동경, 최현구병원 30, 통화현 강산이도구(崗山二道溝)
제4중대장김상옥병원 20, 집안현 고마령(古馬嶺)
제5중대장박대호병원 30, 집안현 유수임자대상(楡樹林子臺上)
중앙호위대장차천리병원 20, 주둔지 환인현 이책전자(二柵甸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부 참모본부 요원들


지안(적색)과 통화(백색)

4. 1. 1. 1기 (1924년 6월)

1924년 6월 26일, 관전현(寬甸縣) 대우구(大牛溝)에서 참의부가 창설될 당시의 조직(1기)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참의장 겸 제1중대장백광운
제2중대장최석순
제3중대장최지풍
제4중대장김창빈
제5중대장김창천(김창대(金昌大))
독립소대장허운기
훈련대장박응백
중앙의회의장백시관
민사부장김소하



조직은 군사 기능을 중시했지만, 민사부도 설치하여 13개 지방행정구로 나누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기능을 수행했다.[1] 주요 활동 무대는 지린성 지안시를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연안이었다.[1]

4. 1. 2. 2기 (1924년 겨울)

1924년 겨울, 백광운 피살 이후 참의부는 본부를 집안현 고마령(古馬嶺)으로 옮기고 조직을 재편했다.[1] 최석순이 참의장 겸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 제1중대장은 김선풍, 제3~5중대장은 각각 박응백, 김창빈, 김창천이 맡았다. 김우근은 독립소대장, 박응백은 훈련부장, 김소하는 민사부장이었다.[1]

4. 1. 3. 3기 (1925년 6월)

1925년 미쓰야 협정 이후, 윤세용이 참의장에 임명되고 조직도 대폭 개편되었다. 윤세용이 의장으로 추대되면서부터 근거지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참의부 창립 초기의 단순한 군사기구 형태에서 벗어나 중앙지도 기구를 확대하여 행정, 경무, 교통, 사법, 학무, 군법 등 행정 부서들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참의부는 자치 정부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 전환하였다.

직책이름비고
참의장윤세용[尹世茸.尹成佐]경남 밀양
제1중대장김창천[金昌天.金昌岡]
제2중대장김용택[金龍澤]
제3중대장김창빈[金昌彬]
제4중대장김상옥[金尙沃]
제5중대장김경호[金慶浩.金劍波]
중앙행정위원이관진[李寬鎭]
군법위원박응백[朴應伯]
군사위원채군선[蔡君仙]
학무위원김백찬[金佰贊]
훈련위원김선봉[金旋鳳.金虎林]
헌병위원심용준[沈龍俊.沈鶴山]


4. 1. 4. 4기 (1927년)

1927년 6월 1일부터 김희산(김승학)이 참의장에 임명되었다. 민사위원은 이광명, 군사위원(군사부장)은 최동경(최세웅), 외교위원은 장기초, 교육위원은 박희곤, 법무위원은 맹성록, 교통위원은 최천주, 선전위원은 박대호(한세진), 교관은 김강이었다. 중앙에는 박종수, 배학서, 이기술, 김병작, 양기하, 백사관 등이 상임위원이었다. 지방에는 지방공서와 구위원이 있었다. [1]

제1~7행정구위원장에 김영전, 박종수, 양기하(겸임), 배학서, 김선풍, 이기술, 최지풍을 임명하고, 각 구에 행정위원 3인을 두었다. 제1~5중대장은 김소하, 박희곤, 양봉제, 최천주, 박대호로 하였고, 중앙호위대장에 차천리를 임명하였다.[1]

1927년에 마덕창은 참의부로 이동하여 군사학교에서 군사를 양성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병서로 독립군을 교육시키고 일본군, 중국군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1]

4. 2. 군사 활동

1924년 6월 26일 참의부가 성립된 후 1929년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될 때까지 5년 동안 500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일제 군경, 밀정, 친일파들을 살해했으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재만 교민과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참의부는 5개 중대와 1개 독립소대로 편성되었는데, 초기부터 500명 이상, 1928년 7월까지도 600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했다. 전체 병력의 5분의 1 이상이 모젤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했다. 관할 지역 안에 병역의무제를 실시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재향군인단이 농촌 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중국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모스크바 국제사관학교(國際士官學校) 출신 한인 청년 장교들이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력을 높였다.[1]

참의부는 임시정부 직할 군정부로서 국경지대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 국내에 진입하여 무력항쟁을 지속하고 남만주에서도 일제를 괴롭혀 만주에 일본 정규군 몇 개 사단의 발을 묶어놓았다. 1924년 독립군 활동의 3분의 2 이상이 참의부 독립군에 의한 것일 정도로 두드러진 전과를 올렸다.

  • 1924년 6월 참의부 성립 전, 군사 조직(가칭: 육군군사의회)을 만들고 임시정부 인준을 기다리던 중, 제3중대장 최지풍은 소대장들에게 국내진입작전을 명령했다. 소대장 김용택은 전 소대원을 3개대로 나누어 2개대는 희천(熙川)군 북면(北面)의 문창경찰관주재소를, 1개대로는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일경을 사살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점령, 소각했다. 적의 5연발 권총 2정, 엽총 1정, 군도 8개와 수백 발의 탄약을 노획했다. 이 전투로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지만 주민들에게 긍지와 용기를 주었고, 청년들이 독립군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 1중대 이화주 참사는 대원 7명을 인솔하고 평북 강계 지방에서 활동 중 문흥(文興) 경찰 소속 왜경에게 포위되었으나 포위망을 뚫고 귀대 도중 문옥(文玉)면에서 왜경 척후대를 섬멸하였다.

  • 1중대 분대장 김종호는 분대원 6명을 인솔하고 국내진입작전 중 강계군 고산(高山) 면에서 일경 수색대를 격퇴하고 주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왜경 10여 명이 재차 공격해오자 격퇴했다. 김상옥 이하 4명을 본부로 귀대시키고 이종방, 주상일 2명만 인솔하여 춘산(春山)리로 가 주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했는데, 밀정의 밀고로 적에게 포위되어 전투 끝에 부상을 입고 귀대했으나 모두 사망했다.

  • 1924년 5월 19일,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는 소대장 장창헌(張昌憲)의 지시로 압록강변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승용선을 공격했다. 사이토 일행의 경비선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13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사이토는 물론 평북경찰부의 모리니시(森西竹次郞) 경부와 오가타(岡田忠) 순사부장이 이끄는 경비경찰도 크게 당황했다. 대응 사격에 나섰지만 방향 잃은 응사였다. 참위 한웅권(韓雄權)과 오장 이춘화(李春化), 일등병 김창균(金昌均), 현성회(玄成熙), 이명근(李明根), 김여하(金呂河), 전창식(田昌植) 등 8인으로 조직된 1대는 사이토 일행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였는데, 사이토 일행의 경비선이 전속력으로 도주하였다.[5]

  • 6월 7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보민회 회원인 친일파 최정규(崔晶奎) 일가족을 사살했다. 같은 날 봉천성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을 습격,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었고, 요정 금정관(金井館)에서 300JPY(약 4천만원)을 군자금으로 탈취했다.


참의장은 백광운이 맡았다가 1924년 겨울 통의부 유격대 문학빈(文學彬) 관하 백병준·백세우(별명 邊萬里) 등에게 피살당하여 최석순이 뒤를 이었다. 최석순 전사 후에는 윤세용이, 윤세용 사임 후에는 김승학이 참의장을 맡았다.

  • 1925년 3월 16일, 참의부 간부들이 국내 진입 작전회의를 열던 중 일경에 정보가 탐지되었다. 초산(楚山) 경찰서 연담(蓮潭)주재소 수석경부보(警部補) 미즈노 이에사부로(水野宅三郞) 지휘 하에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을 앞세워 65명의 일경과 초산주둔수비대 120명을 합하여 6개 분대로 3월 15일 밤 출동, 16일 새벽 압록강에서 60리 떨어진 고마령을 급습했다. 참의부 간부들은 4시간 동안 혈전을 벌였으나 참의장 최석순 이하 29명이 전사하고 3명만이 회생했으며, 고문 홍주(洪疇)는 각종 서류와 무기 등을 불사르다가 체포되었다. 고마령전투로 참의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는 독립군 사상 만주에서의 최대 참변이었다.


참의부는 3부 가운데 가장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했다. 만주 안에서의 활동도 적지 않았지만 한만국경지대에 가깝게 위치하여 국내진격작전에서 가장 괄목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주로 평안도 지방을 대상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국경 방면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전투 가운데 3분의 2 이상은 참의부에 의해 수행되었고, 그만큼 일본군의 공격도 심하게 받아 많은 희생이 있었다.

군사 조직에 대한 강조가 민간 조직보다 더 컸다. 그럼에도 민정부 관할 구역은 13개 지역 행정구역으로 나뉘었고, 주요 기능은 군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1924년 의회 의장 백광운이 암살당했을 때, 제2중대장 최석순이 군사고문처 의장을 겸임했다.[1]

창설 이후, 총참모부는 적극적으로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 통신원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변에 도착한 게릴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넌 후 국내 통신원의 집으로 향했다. 그 후 상황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1]

군사고문처 소속 독립군의 주요 국내 활동 지역은 평안북도 의원, 자성, 구성, 강계, 창성, 후성 등 압록강변 지역이었다. 군사고문처의 활동은 1924년 중반부터 1925년 말까지 가장 활발했다. 총참모부 부대가 벌인 대일 무장 투쟁의 대표적인 예로는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 마시탄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들은 사이토 마코토가 압록강변 국경 초소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따라 제2중대 제1소대원 8명으로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평안북도 의원군 마시탄 계곡에 매복했다. 사이토의 경비정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사이토를 태운 국경 순찰선은 도주했다.[1]

1925년에 총참모부의 중앙 조직이 크게 개편되었다. 1925년 2월 27일, 총참모부장 최석순을 비롯한 총참모부 간부들은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열었다. 이 소식은 첩자를 통해 일본 경찰에 알려졌다. 일본 경찰은 회의가 열리고 있던 고마령(古마령)을 급습했다. 1925년 3월, 5개 중대 간부들은 가재현 고마령(古馬嶺)에서 국내 침투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회합을 가졌다. 일본은 이를 탐지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군대는 이에 저항하여 기본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최석순을 비롯하여 전창희(田昌禧) 중대장 등 39명이 사망하거나 고문을 받았다. 홍주 등은 체포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1] 이때 총참모부장 최석순을 포함한 42명이 국내에서 사망했다. 고마령에서 큰 피해를 입은 총참모부원들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했다.[1]

참모본부는 다른 단체들보다 더 활발하게 대일전을 수행했으며, 1924년 최고의 성과를 남겼다. 이는 한국의 자치와 안정보다는 무력 활동에 더욱 중점을 둔 조직이었다. 이 시기 한국 독립군 활동의 3분의 2 이상이 참모본부에 의해 수행되었다. 일본군과 경찰 기습, 일본 식민 기관 파괴, 친일파 색출, 군자금 모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5월 19일, 임시정부의 공식 승인 전에 사이토 총독이 국경 지역 치안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순시선에 승선하자, 압록강을 내려오는 그를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린 것은 군사고문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중 하나였다.[1]

총참모부의 주요 활동은 항일 무장투쟁이었다. 각 중대는 국경 진입이 용이한 압록강변에 집중 배치되었다. 북평안도의 楚山(초산), 渭原(위원), 滿浦鎭(만포진), 가재현이 총참모부 활동의 주요 군사기지이자 거점이었다. 군사고문부 설립 초기에는 5개 중대 중 3개 중대가 가재현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환인현과 동화현에 위치했다. 특히 군자금을 모으고 친일파를 처단하며 일본 지배 기구를 공격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5년에는 압록강변 초산산 부근의 경찰서를 공격하고 일본 국경 수비대와 교전하기도 했다. 각 지역의 흩어진 지역들 사이의 한국 마을에는 연락원들이 파견되어 일정 기간 머물렀다. 그 목적은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본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일본군의 동정 등을 보고하며, 주민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어떤 중대나 소대가 마을에 진입하면 연락원들은 다음 연락원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연락원의 안내는 게릴라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1]

총참모본부의 군사 조직은 5개 중대와 1개 독립 소대(platoon)로 구성되었다. 창설 초기 병력은 500명이 넘었으며, 1928년 7월까지 600명 이상을 유지했다. 각 중대는 약 14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고, 소대는 주변 지역에 배치되었다. 병력 보충을 위해 관할 지역 내에 의무 병역 제도가 시행되었고, 참전용사단(Veterans Corps)은 농촌 청년들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했다. 총참모본부는 주로 국내 진격 작전을 수행했다. 평안도 지역의 경찰서와 읍사무소를 공격했다.[1] 총참모본부의 중앙 조직 하에 각 중대는 군사 조직으로 배치되었다. 각 총참모본부 중대는 주로 국경 진입에 유리한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다. 5중대 부대만 압록강에서 멀리 떨어진 동화군에 위치했다.[1]

백씨 가문의 지휘 아래 통신중대라는 특수 조직이 설립되었다. 통신중대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 통신 업무였다. 각 중대와 관련 부대 간의 통신을 담당하고, 국내 진입 독립군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다. 둘째, 관할 지역 내 한국인들에게서 독립군 활동 자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1]

1925년 3월, 전체 부대가 3개 부대로 나뉘어 북평안도 정산으로 이동하여, 벽동군의 추동파출소, 하단동파출소, 여해파출소를 공격, 파괴하고 후퇴하며 국경 수비대와 교전하여 용맹을 보였다.[1]

1927년에는 마덕창이 참의부 군사학교에서 군사 양성 직임을 맡았다. 일본에서 가져온 병서로 독립군을 교육시키고 일본군, 중국군 경험을 토대로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1928년 2월 참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선임된 이종혁은 수백 명의 군사들을 지휘했다. 이종혁은 1928년 9월 체포되었다. 일제는 그가 일본육군 중위 출신이며 시베리아 출병으로 훈공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4년 출옥, 다음 해 복역 중 앓게 된 늑막염으로 평안북도 선천에서 순국했다.

4. 3. 민사 활동

참의부는 군사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민사부도 설치하여 한국인 공동체의 자치 행정을 지원했다. 1924년 6월 참의부 창설 당시에는 13개 지방행정구로 나누어 군자금을 모집하는 기능을 수행했다.[1] 주요 활동 무대는 지린성 지안시를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연안이었다.[1]

미쓰야 협정 이후 1925년 6월, 윤세용이 참의장에 임명되면서 참의부는 자치정부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 전환되었다.[1] 중앙지도 기구를 확대하여 행정, 경무, 교통, 사법, 학무, 군법 등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1]

1927년 윤세용 사임 후, 김희산(김승학)이 참의장이 되면서 지방 행정 조직도 개편되었다. 13개였던 지방 행정 위원회를 7개 행정구역으로 축소하고, 각 구에 행정위원 3인을 두었다.[1]

참의부는 학교 설립을 통해 2세대 한국인 교육에 힘썼다.[1] 대부분 산악 지대였던 관할 지역의 특성상, 한국인 마을 곳곳에 소규모 교육 시설을 설립하여 초등 교육을 제공했다.[1] 또한 중국 당국과 협상하여 중국 중학교에 한국어 학과를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1]

의료 시설 확충에도 노력하여 지린성 지자현(志字縣)에 동흥병원(東興病院), 화전현(華田縣)에 동화병원(東華病院)과 화전병원(華田病院), 대천안(大川安) 동화현(同華縣)에 통동병원(通東病院)을 설립했다.[1] 1926년 1월 기준으로 병원 4곳과 학교 3곳을 운영했다.[1]

한국인의 고용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미소를 설립하고, 이익금으로 한국인 농업 자금을 지원했다.[1] 1925년 8월부터는 위원회 제도를 채택하고 부서를 설치하여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는 자치 행정을 실시했다.[1] 각 지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 50명 이상의 보호원을 양성하고, 주민들은 매년 10원의 의무 부담금을 납부하여 무기 구비, 산업 진흥, 교육 행정에 사용했다.[1]

5. 3부 통합 운동과 해체

1928년 정의부, 신민부와의 3부 통합운동으로 혁신의회가 구성되었을 때 참의장 김승학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해체를 선언했다.[1] 1929년 3부 통합이 성사되어 국민부가 결성되었고, 심용준 계열이 빠져나가 김소하 계열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김소하마저 1929년 일본 군경에 체포되자 참의부는 해체되었다.[1]

1925년 6월, 일본 관동군과 봉천군벌 사이에 ‘미쓰야 협약’이 체결되면서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1] 1928년경부터 독립 운동 방향을 놓고 조직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1929년 일부 참의부 인사들은 국민부로 이동했고, 김승학이 이끄는 인물들은 혁신의회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참의부 내부에 조직 분열이 발생했고, 참의부 다수파는 1928년 12월 정의부 분열파와 신민부 군정파와 합세하여 참의부 해산을 선언하고 혁신의회를 결성했다.[1] 혁신의회에 참여하지 않은 참의부 잔류파는 심용준이 이끄는 정의부 다수파와 신민부 민정파와 연합하여 1929년 4월 국민부에 합류했다.[1]

1928년, 재정위원장 한의제(韓義濟)가 친일파를 조직하여 참의부를 배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참의부는 게릴라전을 통한 국내 진입 대신 만주 지역에서의 반일 무장투쟁과 친일파 색출에 집중하게 되었다.[1] 1929년 국민부가 성립되었을 때,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다른 조직으로 이탈했다. 이후 김승학이 참의부를 이끌었으나, 10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참의부는 해체되었다. 한편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 이영희(李永熙)는 가전현(佳電縣) 지역에서 15명의 부하와 함께 군사고문부 부활을 추진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참의부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23
[2] 웹사이트 참의부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29
[3] 웹사이트 참의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29
[4] 웹사이트 참의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23
[5] 간행물 만주의 삼부(三府) 1~9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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