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토아부카 타이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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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은 1433년 오이라트 부족의 지도자 토곤 타이시에 의해 몽골의 대칸으로 옹립된 인물이다.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명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몽골로 돌아와 오이라트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대칸으로 즉위했다. 1438년 아다이 칸을 멸망시키고 몽골을 통합했으나,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에게 실권이 있었다. 이후 에센과의 갈등으로 인해 살해되었고, 그의 사후 오이라트가 몽골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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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토아부카 타이순 칸 | |
---|---|
기본 정보 | |
이름 | 토그토아 부카 |
칸의 칭호 | 타이순 칸 |
다른 표기 | 岱總汗 (대총한) 脫脫不花 (탈탈불화) |
몽골어 | Тогтох Бух (토그토흐 부흐) |
몽골 문자 | ᠲᠣᠭᠲᠠᠬᠤ ᠪᠤᠬᠠ |
몽골 문자 (유니코드) | ᠳᠠᠶᠢᠰᠤᠩ ᠬᠠᠭᠠᠨ |
통치 | |
칭호 | 북원 또는 몽골의 보그드 칸, 대원 울루스의 대칸 |
재위 기간 | 1433년 – 1452년 1월 19일 |
즉위 | 1433년 |
선대 칸 | 아다이 칸 |
후대 칸 | 아그바르진 |
개인 정보 | |
출생 | 1416년 |
사망 | 1452년 |
사망 장소 | 외몽골 켄티 |
배우자 | 토곤 태사의 딸 알타가나 사마르 타이푸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왕조 | 북원 |
아버지 | 아자이 |
2. 생애
톡토아부카(또는 토크토부카) 타이순 칸은 1410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1416년 또는 1422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 원 순제 토곤 테무르 칸 혹은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칸의 손자인 카르고초크 두렌테무르 콩타이지의 손자이자 아자이 타이지의 아들이었다. 《몽골원류》와 중국 측 사료인 《명사》, 《만력무공록》(萬歷武功錄) 등 여러 기록에서 그가 원나라 황실 가문 출신임을 뒷받침한다.[10] 조선의 세종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스스로 쿠빌라이 칸의 후손임을 밝혔다.[22]
그의 이름 '톡토아부카'는 몽골어로 '멈추다', '중지하다'라는 의미의 '토크토'(Тогтох|토크토mon)와 '황소'를 뜻하는 '부카'(Буха|부카mon)가 합쳐진 것이다.
《명사》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스드부의 지도자 아룩타이 타이시와 부냐시리 울제이 테무르 칸이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했을 때, 톡토아부카가 명나라 군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기록이 있다. 언제 몽골로 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 아자이 타이지가 사망한 후, 톡토아부카는 동생 아그바르진, 만두울과 함께 몽골 지역을 떠돌다가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였던 토곤 타이시를 찾아갔고, 토곤 타이시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당시 몽골 고원은 1425년 오이라다이 칸이 사망한 후 여러 세력 간의 내전 상태였다. 1433년 토곤 타이시는 케룰렌강 유역에서 톡토아부카를 명목상의 몽골 대칸으로 옹립했다. 이로써 당시 동몽골 세력이 내세운 아다이 칸과 함께 두 명의 칸이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타이순 칸은 오이라트의 도움으로 아다이 칸 세력을 제거하고 몽골을 통합했으나, 실권은 오이라트의 토곤 타이시와 그의 아들 에센 타이시에게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고, 명나라와 토목의 변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후계자 문제 등으로 에센 타이시와 갈등하다 1452년 살해당했다.
2. 1. 생애 초기
톡토아부카는 1410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416년 또는 1422년 출생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정확한 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22] 그는 쿠빌라이 칸의 후손으로[11][12], 원 순제 토곤 테무르 칸 또는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 칸의 손자인 카르고초크 두렌테무르 콩타이지의 손자이며, 아자이 타이지의 아들이었다. 《몽골원류》와 중국 측 사료인 《명사》, 《만력무공록》(萬歷武功錄) 등에서도 그가 원나라 황실 가문 출신임을 기록하고 있다.[10] 일부 명나라 기록에서는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의 증손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의 세종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스스로 쿠빌라이 칸의 후손임을 밝혔다.[22]그의 이름 '톡토아부카'는 몽골어로 '멈추다', '중지하다'라는 의미의 '토크토'(Тогтох)와 '황소'를 뜻하는 '부카'가 합쳐진 것이다.
《명사》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스드부의 지도자 아룩타이 타이시와 부냐시리 울제이 테무르 칸이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했을 때, 톡토아부카가 명나라 군에 포로로 잡혀갔던 기록이 전한다. 언제 몽골로 돌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 아자이 타이지가 사망한 후, 톡토아부카는 동생 아그바르진, 만두울과 함께 몽골 지역을 떠돌았다. 한때 명나라에 투항하여 감숙성 변경 지역인 에르친(Erchin)을 하사받기도 했다.[7] 이후 그는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였던 토곤 타이시를 찾아갔고, 토곤 타이시는 톡토아부카와 그의 형제들을 받아들였다.
톡토아부카는 논 호르친부 고를로스 씨족 추장 차브단의 딸 알타가나(Altagana) 카툰과 결혼했으나, 알타가나가 부하와 사통하자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알타가나에게서 아들 멀런 칸이 태어났다. 훗날 토곤 타이시는 자신의 딸 오이라트부의 사마르 타이푸(Samar taifu) 카툰을 톡토아부카와 결혼시켰다. 사마르 카툰은 에센 몽케와 마르코르기스 오헤크트 칸 형제를 낳았다.
당시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 타이시는 스스로 대칸이 되고자 했으나,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인 황금 씨족이 아니었기에 몽골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토곤 타이시는 자신의 사위가 될 톡토아부카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433년 토곤 타이시는 오이라트 귀족들과 함께 케룰렌강 유역에서 톡토아부카를 명목상의 몽골 대칸으로 옹립했다.
2. 2. 대칸 즉위 과정
엘베그 칸의 손자이자 아자이의 아들인 톡토아부카는[2] 서부 몽골에서 동생 아그바르진, 만두울과 함께 유랑하던 중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 타이시를 만났다. 토곤 타이시는 자신의 딸 사마르 타이푸(Samar taifumn) 카툰을 톡토아부카와 결혼시켰다.당시 몽골 고원은 1425년 오이라다이 칸이 사망한 후, 토곤 타이시가 이끄는 오이라트와 서부 몽골 부족들, 그리고 아다이 칸을 내세운 동부 및 중부 몽골 부족들 사이의 내전 상태였다.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 타이시는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으나, 칭기스 칸의 직계 후손인 황금 씨족이 아니었기에 전통적인 율법에 따라 몽골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13][14]
이에 1433년 토곤 타이시는 자신의 사위이자 칭기스 칸의 후손인 톡토아부카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했다. 국호는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칸호는 '위대한', '신성한'이라는 뜻의 몽골어 '복드'(Богдmn)를 붙여 복드 타이순 칸 (ᠪᠣᠭᠳᠠ ᠲᠠᠢᠶᠢᠰᠦᠨ ᠬᠠᠭᠠᠨmn, Богд Тайсун хаанmn)이라 하였다. 타이순 칸(혹은 타이송 칸 太松汗)은 태종 칸(太宗 汗)을 의미하는 칭호였다. 이로써 몽골에는 아다이 칸과 타이순 칸이라는 두 명의 칸이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칸으로 즉위한 직후, 타이순 칸은 장인인 토곤 타이시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아다이 칸을 공격하여 몽골 동북부로 몰아냈다. 이후 1434년에는 오이라트와 적대하던 알룩타이를 토벌했으며, 1438년에는 마침내 아다이 칸을 제거하여 몽골 고원의 유일한 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타이순 칸은 오이라트로부터 후룬베이얼 지역을 받았고[13], 케룰렌 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았다.[15] 알룩타이 휘하의 세력은 타이순 칸에게 흡수되었으며, 토곤 타이시는 승상(칭상)의 지위에 올라 명목상 타이순 칸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다.[16]
권력 구조는 타이순 칸이 몽골 동부 3개 부족을, 그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친왕)이 몽골 서부 3개 부족을, 그리고 에센 타이시(토곤 타이시의 아들)가 오이라트와 서부 4개 부족을 통치하는 형태로 분할되었다.
2. 3. 혼인 동맹과 영토 분쟁
타이순 칸은 논 호르친부 고를로스 씨족 체브덴의 딸인 알타가나(알트진)와 혼인하였다. 오이라트부의 실력자였던 에센 타이시 역시 칭기즈 칸의 이복 동생 벨구테이의 후손인 온니우드부 주치 씨족의 막내딸과 결혼하여 혼인 동맹을 맺었다.당시 에센 타이시는 하미 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하미의 칸 두바다시르는 에센 타이시의 외조카였다. 이를 통해 타이순 칸 역시 하미 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443년 에센 타이시는 두바다시르 칸의 여동생과 다시 결혼하여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타이순 칸은 에센 타이시의 여동생이자 두바다시르 칸의 어머니를 몽골로 초대하기도 했으며, 이후 두바다시르 칸이 왕비 및 여동생과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했을 때 타이순 칸은 그에게 모자를 선물하며 환대했다. 이 방문 이후 하미의 칸은 카라코룸을 자유롭게 방문하여 몇 달씩 머무르곤 했다.
명나라 조정은 하미가 몽골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나, 두바다시르 칸은 명나라의 항의를 무시했다. 때로는 사마르칸트에서 온 사절이 에센 타이시를 통해 타이순 칸과 소통하기 위해 카라코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몽골과 명나라 사이에는 영토 분쟁 지역이 존재했다. 동쪽으로는 명나라와 인접한 우리앙카이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몽골 대칸의 직접 통치하에 있었으나 명나라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오이라트와 인접한 하미 칸국이 있었다. 하미는 본래 원나라의 영토였으나 후에 자립하여 명나라에 귀순한 상태였고, 이 지역 역시 명나라가 주시하는 분쟁 지역이었다. 몽골의 군주와 귀족들은 방어와 육로 교통의 요충지인 우리앙카이와 하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2. 4. 몽골 통일과 명나라와의 관계
1433년 케룰렌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아 오이라트의 추대로 명목상의 몽골 카안(대칸)으로 즉위하였다.[15] 1434년 오이라트와 연합하여 동몽골의 경쟁자였던 아수드(아스트)부 수장 아룩타이를 토벌하였다. 1438년에는 오이라트의 추장 토곤 타이시,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 등과 연합하여 명나라의 지원을 받던 아다이 칸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마침내 몽골을 통합하였다.[13] 또한 토곤 타이시는 아수드부의 아룩타이를 격살하여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써 타이순 칸은 몽골 전역의 대칸이 되었으나, 실권은 오이라트부의 토곤 타이시에게 있었다.[16] 타이순 칸은 오이라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하고, 결국 1439년 오이라트와 화해했다. 토곤 타이시는 승상(칭산)의 지위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다.[16] 타이순 칸은 오이라트로부터 후룬베이얼 지역을 받았다.[13]토곤 타이시 집권기에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 정치적 협력과 무역에 중점을 두었으나, 토곤은 1439년 명나라와의 전쟁을 계획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센 타이시가 오이라트부의 수령이 되면서 명나라와의 관계는 점차 긴장 관계가 되었다. 타이순 칸은 에센을 타이시로 임명하고,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을 지농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권은 에센 타이시에게 있었고, 그는 자신의 누이 소생 아들을 칸으로 세우려 했다.
타이순 칸은 명목상 군주였으나, 원나라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1439년 칭기즈 칸의 여덟 유르트 앞에서 공식적으로 북원의 보그드 칸 타이순 칸으로 즉위했다. 그는 원나라를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자신을 태종(太宗)이라 칭했는데, 이는 오이라트를 제외한 대부분 몽골 부족의 지지를 받았다. 오이라트는 시기상조로 여겼으나, 명나라는 당시 영락제 시절과 달리 몽골의 중심부를 공격할 힘이 약했기에, 타이순 칸을 '대원 태종' 대신 '북원 타이순 칸' 또는 '달단 칸(타타르 칸)'[16]이라 부르며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다.
1441년 타이순 칸은 동몽골의 케룰렌강 유역 주변을 병합하여 몽골 전역을 명목상 통치했으나, 실권은 여전히 오이라트 귀족들에게 있었다. 1442년 5월, 타이순 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전달하며 스스로 쿠빌라이 칸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나,[23][11][12] 세종이 통치하던 조선 조정은 이를 외면했다.[22] 1440년대에는 서쪽으로 키르기스와 싸워 잠시 하미를 정복했으며, 동쪽으로는 여진에 군대를 보내 종주권을 인정받기도 했다.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타이순 칸은 무기 교역을 금지했지만, 에센 타이시는 달랐다. 에센은 명나라 국경 수비대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몽골 말을 공급하고 농작물 외에도 활, 갑옷, 창, 칼 등 무기를 사들였다. 몽골 사신들은 장인을 모아 무기를 만들거나, 말을 거래하고, 중국 관리들은 무기를 위장하여 몽골 사신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에센 타이시의 요구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의 수도 기존 2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났다. 사신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말을 선물하고 금, 은, 비단 등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 교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으며, 동시에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타이순 칸과 에센 타이시는 간쑤 성 점령을 노렸으나, 명나라가 방어를 강화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에센 타이시는 몽골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야심 아래,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하미 칸국(카라델)과 우리앙하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에센은 자신의 외조카인 하미 칸 두바다시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로 인해 명나라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1448년 에센은 하미를 결국 복속시켰다[3]. 이후 간쑤 지역의 삼위(三衛)를 공격하여 푸위위(撫余衛)를 몰아내고 자신의 총독을 임명했고, 타이순 칸 역시 직접 타이닝위(泰寧衛)를 공격했다. 도옌위(朶顔衛)도 에센에게 약탈당하고 항복함으로써, 세력을 회복한 북원은 명나라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1449년, 명나라가 몽골 사신의 추가 파견 허용과 공주 요구를 거절하자 에센 타이시는 명나라 침공을 결정했다. 타이순 칸은 명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에센의 계획에 동참하여 우리앙하이 군대를 이끌고 랴오둥으로 진격하여 40일간 도시를 포위하고 약탈했다. 같은 시기 에센은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토목의 변에서 명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정통제를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타이순 칸은 포로가 된 정통제를 비교적 정중하게 대우했으며, 명나라가 몸값 지불을 거부하자 1450년 정통제를 돌려보냈다.
토목의 변 이후, 타이순 칸과 에센 타이시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주된 원인은 후계자 문제였다. 타이순 칸에게는 에센의 누이가 비(妃)로 있었으나, 타이순 칸이 그녀의 아들이 아닌 다른 비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15][19] 이에 불만을 품은 에센은 타이순 칸이 명나라와 결탁하여 오이라트를 공격하려 한다고 의심했다.[20] 결국 타이순 칸은 할하부의 지원을 받아 에센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13] 패배한 타이순 칸은 우리앙하이 지역으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당했다.[5][20] 타이순 칸 사후, 오이라트 출신 어머니를 두지 않은 북원 황족 대부분이 학살당했다.[5][20][21]
타이순 칸은 몽골 재통일을 이룬 다얀 칸의 증조부인 아그바르진의 형으로, 북원 황족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이다.[8]
2. 5. 에센과의 갈등, 피살
토목의 변 이후, 태자(후계자) 옹립 문제를 둘러싸고 타이순 칸과 에센 타이시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18] 타이순 칸의 황후 중 한 명은 에센의 누이였으나, 타이순 칸은 그녀의 아들이 아닌 다른 황후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15][19] 이 때문에 에센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또한, 에센은 타이순 칸이 명나라와 빈번히 교류하는 것을 보고, 명나라와 결탁하여 오이라트를 공격하려 한다고 의심했다.[20] 타이순 칸의 말과 갑옷을 훔친 자를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이 보호하며 돌려주지 않은 사건도 타이순 칸과 아그바르진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451년, 결국 타이순 칸은 군사를 일으켜 에센 타이시를 공격했다.[13] 그러나 에센은 타이순 칸의 동생이자 경쟁자인 아그바르진 지농에게 칸의 자리를 약속하며 연합했다. 타이순 칸과 이혼한 전처 알타가나 카툰의 친정인 골로스부 역시 타이순 칸에게 원한을 품고 에센 측에 가담했다. 할하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타이순 칸은 에센에게 패배했다.[13]
설상가상으로 1451년 12월 28일, 명나라의 요동 장군 서등(徐勝)이 몽골을 침공하여 타이순 칸의 처자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나, 에센과의 전투 때문에 이를 막지 못했다.
1452년 1월, 에센과 아그바르진 연합군은 카라코룸을 포위하여 타이순 칸의 거처를 점령했다. 이때 동몽골의 많은 황족과 귀족(노얀)들이 에센에게 투항했고, 타이순 칸의 군대는 투르판 근처 또는 카라코룸 전투에서 오이라트 군에게 크게 패배했다.
타이순 칸은 소수의 측근과 함께 카라코룸을 탈출하여 케룰렌 강변으로 도피했다.[15] 그러나 1452년 도중, 추격해 온 오이라트 군대 또는 전 장인인 골로스부의 차브단(체브덴)에게 살해당했다.[5][20] 당시 케룰렌 강변은 골로스부의 영토였으며, 일설에는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과 지린성 궈얼뤄쓰(郭爾羅斯) 근처에서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차브단은 이후 에센에게 투항했다.
몽골 황금사에 따르면, 타이순 칸은 피살될 때 오이라트부에 대대로 전해지던 원나라 황제의 옥새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타이순 칸 사후, 북원의 황족들은 오이라트 출신 어머니를 둔 사람들을 제외하고 에센에 의해 대거 학살당했다.[5][20][21]
2. 6. 사후
타이순 칸이 살해된 후, 에센 타이시는 동몽골 보르지긴 황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때 어머니가 오이라트부 출신이 아닌 황족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타이순 칸의 동생인 아크바르지 지농이 잠시 대칸을 선포하며 그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에센 타이시에 의해 살해당했다.에센 타이시는 칭기스 칸 가계와 동몽골의 모든 흔적, 즉 기록, 문서, 족보 등을 의도적으로 소실시켰다. 1453년 에센 타이시가 스스로 카안의 자리에 오르면서, 칭기스 칸 가계가 아닌 오이라트 계통의 카안이 몽골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몽골 제국과 북원의 정통성이 사실상 단절되고 해체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타이순 칸의 존호인 타이송은 몽골어로 태종(太宗)을 뜻한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그를 정식 칸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칭호로 부르거나, 북원의 태종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했다.
3. 가족 관계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은 여러 부인과 자녀를 두었으며, 알려진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부인 | 부족/출신 | 자녀 | 비고 |
---|---|---|---|
막툼 카툰 | ? | ? | |
알타가나 카툰 Алтгана хатанmn | 골라트 부 | 알트진(Алтжин) 또는 알탄(Алтан) 카툰으로도 불린다. 타이순 칸과 이혼했다. 아들 멩켈레이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몽골 황금사에 따르면 자살했다고 한다. 일리와 달리는 몽골 황금사에 이름만 간략하게 언급된다. | |
사무르 카툰 Саймур хатунmn | 오이라트 초로스 부 | 오헤크트 칸 마르코르기스 |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의 누이이다. 소 하툰 삼르 태후로도 불린다. |
오이라트 공주 | 오이라트 | 압단 Abdan영어 |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 타이시의 딸이다. |
? | ? | 아그바르진 | 일설에는 타이순 칸의 동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
참조
[1]
서적
Lubsandanzan-Altan tobchi
[2]
서적
Sh.Tseyen-Oidov-Chinggis Bogdoos Ligden Khutugt hurtel (Khaad), p. 144.
[3]
서적
Peter C. Perdue-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p. 59.
[4]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273頁
[5]
서적
宮脇『最後の遊牧帝国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108頁
[6]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371頁
[7]
서적
宮脇『最後の遊牧帝国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104頁
[8]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248頁
[9]
간행물
森川「ポスト・モンゴル時代のモンゴル」『中央ユーラシアの統合』、329頁
[10]
간행물
森川「ポスト・モンゴル時代のモンゴル」『中央ユーラシアの統合』、329-330頁
[11]
서적
宮脇『最後の遊牧帝国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105頁
[12]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256,370-371頁
[13]
간행물
青木「トクト・ブハ」『アジア歴史事典』7巻、119-120頁
[14]
서적
『騎馬民族史 正史北狄伝』3巻、17-18頁
[15]
서적
宮脇『最後の遊牧帝国 ジューンガル部の興亡』、107頁
[16]
서적
『騎馬民族史 正史北狄伝』3巻、18頁
[17]
서적
『騎馬民族史 正史北狄伝』3巻、75頁
[18]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66頁
[19]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66-67頁
[20]
서적
『騎馬民族史 正史北狄伝』3巻、19頁
[21]
서적
岡田『モンゴル帝国から大清帝国へ』、67頁
[22]
문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5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첨지중추원사 이변이 주문사로 북경에 가다
[23]
문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5월 9일 무진 1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첨지중추원사 이변이 주문사로 북경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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