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룩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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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룩타이는 15세기 몽골의 권력자로, 1408년 올크 테무르를 폐위시키고 올제이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했다. 그는 오이라트와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명나라 영락제와 여러 차례 대립했다. 1410년 명나라 군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으나, 이후 영락제의 친정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는 아다이 칸을 옹립하며 재기를 시도했으나, 1434년 토곤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아부지아와 손자의 아내는 명나라로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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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룩타이 | |
---|---|
기본 정보 | |
![]() | |
한국어 | 아룩타이 |
몽골어 | Аругтай |
페르시아어 | اروقتای |
출생 - 사망 | |
출생 | 1374년 |
사망 | 1439년 또는 1452년 |
활동 | |
활동 시기 | 15세기 초 |
주요 역할 | 북원의 태사 승상 |
칭호 | 바가 보골 |
가문 | |
씨족 | 아수드 씨족 |
2. 생애
1403년 올크 테무르 칸 휘하에서 지원[1]의 관직을 맡았다. 1408년 올크 테무르를 폐위시키고, 티무르 제국에서 귀국한 올제이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했다. 이후 오이라트와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었고, 명의 국경 지대에 침입하여 영락제와도 적대했다.
1409년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패하여 헤를렌 강으로 도주했다. 직후 10만 대군을 이끄는 명나라 군인 구복의 정벌을 받았으나, 올제이 테무르와 함께 복병을 이용한 포위로 명군을 괴멸시켰다. 1410년 영락제의 친정을 받자 명군의 공격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을 주장하는 올제이 테무르와 대립하여 북원은 올제이 테무르파와 아루크타이파로 분열되었다. 오논 강에서 올제이 테무르가 대패한 후, 할하 강 상류에서의 전투에서 아루크타이 역시 영락제에게 패했지만, 명군은 멀리 도주한 그를 붙잡지 못했다.
같은 해 겨울부터 독자적으로 조공을 행했고, 올제이 테무르 사후에도 빈번하게 조공하여 영락제의 환심을 사서, 할하 강 전투에서 포로가 된 형제들을 돌려받았다. 영락제로부터 화녕왕의 지위를 받았다. 1414년 영락제의 제2차 친정에서 명군과 함께 오이라트를 격파했고, 1416년에는 오이라트 내의 최유력자 마흐무드를 살해하여 오이라트를 압박했다. 1422년 명나라의 국경 지대에 침입하여 영락제의 제3차 친정을 초래했다. 명군은 아루크타이가 본거지로 삼은 후룬베이얼 지방으로 진군했으나, 아루크타이는 가축과 군량을 버리고 도망쳤다. 1423년과 1424년 영락제는 아루크타이를 잡기 위해 두 차례 친정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락제가 사망한 직후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의 역습으로 인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부중은 흩어졌으며, 명에 귀순하는 자도 있었다. 아루크타이는 몽골 고원 동부의 울리야하이 삼위에게로 도망쳐 재기를 꾀했다. 명나라는 항복한 자들에게 관직과 금품을 하사하여 후하게 대우했고, 여러 장수들은 약화된 아루크타이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홍희제는 원정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목의 변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북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울리야하이 삼위를 지배하게 된 아루크타이는 올크 테무르의 유아 아다이를 받들어 재기하여, 톡토아 부카를 옹립하는 오이라트와 다투었다. 1434년 톡토아 부카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여, 처자식이 살해당하고 가축도 빼앗겼으며, 패전 후 그를 따르던 자는 실계간 한 명뿐이었다. 같은 해에 토곤에 의해 실계간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아복지아(화용의 아버지)와 손자의 아내 속목답사는 명나라로 망명했고, 선덕제는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후하게 대우했다.
2. 1. 어린 시절
아룩타이 또는 아루타이의 가계와 정확한 생년월일,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수드부 출신으로, 일설에는 알란인 또는 알란계 민족인 오세트인이라는 설도 있다.[1] 명나라 사서에는 아루타이, 몽골원류에는 아루크타이로 나타난다. 몽골원류에 의하면 아룩타이의 본명은 오게데릭(Өгөдерек)이라 한다. 몽골어로 완고함, 완강함, 고집을 뜻한다. 오이라트부의 바툴라 칭상은 아수드부를 공격, 아루그타이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아룩타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알을 운반한다는 뜻이다. 그는 알을 나르는 곳에 보내졌기 때문에 알을 운반한다는 뜻의 아루그타이 또는 아루그타이 타이시, 아루그타이 칭상으로 불리게 되었다.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아룩타이는 광주리를 등에 짊어지고, 마른 소똥을 주우러 다녀서 짊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룩타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그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뒤에 보르지긴 사무르 공주의 도움으로 오이라트를 탈출한 아룩타이는 아수드부로 귀환하였다.
2. 2. 권력 장악
1408년 올크 테무르를 폐위시키고, 티무르 제국에서 귀국한 올제이 테무르를 칸으로 옹립했다.[1] 아루크타이는 오이라트와 몽골 고원의 패권을 다투었고, 명의 국경 지대에 침입하여 영락제와도 적대했다.2. 3. 오이라트, 명나라와의 전쟁
1409년 명나라 조정에서 북원으로 파견한 사신 곽기(郭骥)를 사살하여 영락제의 분노를 샀다.[1] 1410년 영락제의 제1차 막북 친정 때 울제이테무르 칸과 대립하며 패배했다.[1] 1412년 울제이 테무르 칸이 암살당한 후 명나라에 복속하는 척하며 조공을 바쳤다.[1] 1413년 영락제로부터 화녕왕(和寧王)에 책봉되었다.[1] 화녕왕은 카라코룸의 한자 번역어이다.1414년 영락제의 2차 북방 원정 때 명나라 군과 협력하여 오이라트를 물리쳤다.[1] 1415년 아다이를 칸으로 추대하고 오이라트와 대립했다. 1416년 오이라트의 마하무를 죽였다.[1] 1422년 명나라를 공격하여 영락제의 3차 친정을 초래했다. 1423년 영락제의 4차 친정, 1424년 영락제의 5차 친정 때 아룩타이는 패배 후 도주했고, 영락제는 귀환 중 사망했다.[1]
2. 4. 패전과 최후
1424년 아룩타이는 다퉁, 카이핑 등을 공격, 함락시켰다. 영락제가 직접 명나라 군을 이끌고 징벌하려 북원을 공격하여 아룩타이를 패배시켰고, 아룩타이는 돌론 강 근처에서 도피했다. 영락제는 아룩타이가 초원으로 도피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귀환하던 길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목초지와 몽골 노욘(귀족)의 숙영지가 파괴되어 몽골 귀족들은 불만을 품었고, 아룩타이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1425년 오이라다이 에세크 칸이 죽자 아다이 칸은 명목상 전몽골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해 아다이 칸은 아자이 타이지와 연합, 오이라트를 패배시켰다. 이후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와 여러번 교전했으나 토곤 타이시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우량하이 동부, 요동 동부에서 유목 생활을 하였다.
명나라 장군들은 약화된 아룩타이 토벌을 주장했지만 홍희제는 원정을 주저하였다.
아자이 타이지는 1421년 자신의 주군을 살해한 것을 기억하고 변심하여 아자이의 아들 토크토아부카와 오이라트부의 토곤 타이시가 손잡고 아룩타이를 공격, 격파했다. 1434년 토크토아부카와 오이라트 토곤은 아수드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아룩타이의 처자를 살해하고 가축들을 끌고 갔다. 아룩타이는 아들 시라겐과 함께 도피했으나 그해 9월 토곤이 이끄는 오이라트 추격대에게 패배하고, 모나 산(母納山, 현 내몽골 인산(陰山)과 다얼한마오밍안 연합기 근처)으로 피신했다가 토곤에게 살해되었다. 일설에는 냄비에 넣어져 팽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2. 5. 사후
아루크타이의 아들 아부지아(阿卜只阿)와 손자의 처 수무다즈(速木答思)는 명나라로 투항했고, 선덕제는 이들을 후대하였다.[1]3. 몽골원류(蒙古源流)에서의 아룩타이
몽골원류에 의하면 아룩타이의 본명은 오게데릭(Өгөдерек)이며, 몽골어로 완고함, 완강함, 고집을 뜻한다. 오이라트부의 바툴라 칭상은 아수드부를 공격, 아루그타이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다. 아룩타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알을 운반한다는 뜻으로, 그는 알을 나르는 곳에 보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2]
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아룩타이는 광주리를 등에 짊어지고, 마른 소똥을 주우러 다녀서 짊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아룩타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몽골원류에서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의 승상 바트라에게 노비로 불려 알크타이(アルクタイ)라는 이름을 받았다. 후에 아다이 칸 옹립에 협력하여 태사 지위를 받았고, 자신을 학대했던 바트라의 아들 바쿰을 노예로 삼아 토간이라고 이름 지었다. 몽골원류에서 아다이 즉위 전 아룩타이의 지위는 낮았기 때문에, 울제이 테무르 옹립, 영락제와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없다.
4. 관직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은 그에게 태보 겸 추밀원지원(太保兼追密院知院)을 임명했다.[1] 1413년 명나라 영락제는 아룩타이를 화녕왕(和寧王)에 봉했다. 1414년 아룩타이는 스스로를 개부의동삼사, 특진, 금자광록대부, 태사, 중서우승상, 추밀원위두지원(開府儀同三司 特進 金紫光祿大夫 太師 中書右丞相 樞密院為頭知院)이라 칭했다.
참조
[1]
문서
軍事長官に相当する官職
[2]
문서
君主に次ぐ地位を持つ高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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