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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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은 1825년부터 1828년까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시스플라티나(현재의 우루과이)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발생했다. 전쟁의 배경은 17세기부터 이어진 라플라타 강 유역에 대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갈등으로, 시스플라티나 지역은 브라질 독립 이후 브라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시스플라티나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독립 운동을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했다. 전쟁은 브라질의 해상 봉쇄와 육상에서의 전투로 전개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체결하여 우루과이의 독립을 확정했다. 이 전쟁으로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는 지지를 잃고 퇴위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내전이 심화되었다. 영국은 라플라타 지역에서 자유 무역 지대를 확보하며 이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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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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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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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시스플라티나 전쟁 |
전쟁의 부분 | 플라타 전쟁 |
기간 | 1825년 12월 10일 - 1828년 8월 27일 |
장소 | 현재의 우루과이, 브라질 남부 지방, 아르헨티나 |
결과 | 1828년 예비 평화 협약 |
교전 세력1 | 브라질 제국 |
교전 세력2 |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 |
지휘관 및 지도자 | |
브라질 제국 | 페드루 1세 바르바세나 후작 히우 다 프라타 남작 라구나 자작 제임스 노턴 구스타프 폰 브라운 벤투 마누엘 벤투 곤사우베스 |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 |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마누엘 도레고 카를로스 M. 데 알베아르 후안 라바예 윌리엄 브라운 후안 A. 라바예하 프루크투오소 리베라 마누엘 오리베 |
병력 규모 | |
브라질 제국 (1826년) | 6,832명 (정규군) |
브라질 제국 (1828년) | 15,000명 |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 (1826년) | ~12,000명 (정규군 및 민병대) |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 (1828년) | 6,000명 |
참전 부대 | |
브라질 제국 | 브라질 제국군, 브라질 제국 해군 |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 | 아르헨티나 육군, 아르헨티나 해군 |
결과 | |
영토 변경 | 시스플라티나가 우루과이로 독립 |
지도 |
2. 배경
1811년 라플라타 부왕령의 일부였던 오리엔테 주의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같은 해 5월 18일 독립군은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1] 1814년 아르티가스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연방 연합의 보호자로 선포됐다.[1]
1816년 포르투갈 령 브라질은 오리엔테 주를 침략,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하고 3년간 전쟁을 계속해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아르티가스를 패배시켰다.[1] 1821년 브라질 제국은 이 땅을 시스플라티나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시스플라티나 주의 주민들은 브라질 통치에 반대, 33인의 동부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선언했고,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하며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발발했다.
1811년, 밴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에 의해 이 지역은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의 연방주의자 거점이 되었고, 아르티가스는 연방 동맹의 거점으로 밴다 오리엔탈을 동방주(東方州)로 재편성했다. 그러나 동방주는 1816년부터 포르투갈군의 침략을 받았고, 1820년 아르티가스가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패배하자 완전히 점령당했다.[1]
1821년 동방주는 반(反)아르티가스파의 현지 과두 지배층의 협력 등을 통해 시스플라티나주(Cisplatina)로 개칭되었고,[1] 브라질이 독립한 후에는 브라질 제국 최남단 주가 되었다.
2. 1. 식민지 시대의 분쟁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 이후, 동방 연안으로 알려진 지역은 1822년 브라질 독립 이후 브라질 제국과 연합 지방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1] 이 분쟁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식민 제국으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라플라타 강 유역의 경계는 결코 확정되지 않았다.[2]분쟁은 1679년에 시작되었는데, 라플라타 강을 브라질의 자연적인 남쪽 경계로 간주해 온 포르투갈은 리우데자네이루 주 총독 마누엘 로보에게 라플라타 강 우안에 콜로니아 두 사크라멘토를 건설하도록 명령했고, 1680년에 건설되었다.[3] 포르투갈은 라플라타 강 유역 확장을 통해 대륙 내륙 접근, 상페루에서의 은 밀수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하고자 했다.[4]

스페인은 이 지역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1724년 브루노 마우리시오 데 사발라가 몬테비데오 마을을 건설했을 때 라플라타 강 반대편에 식민지를 건설했다.[5] 두 제국 사이의 수세기 동안의 전쟁과 정착 시도 끝에 콜로니아 두 사크라멘토는 1801년 바다호스 조약에 의해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6]
2. 2. 아르티가스의 독립 운동과 포르투갈의 침략
1811년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같은 해 5월 18일 독립군은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1] 1814년 아르티가스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연방 연합의 보호자로 선포됐다.[1] 그러나 동방주는 1816년부터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았고, 1820년 아르티가스가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점령당했다.[1]1821년 동방주는 친(親)포르투갈 성향의 현지 과두 지배층의 협력으로 시스플라티나주로 개칭되었고,[1]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 연합왕국의 주로 편입되었다.[2] 브라질 독립 후에는 브라질 제국 최남단 주가 되었다.[1]

2. 3. 브라질의 통치와 협상의 실패
1821년 7월 31일, 몬테비데오의 카빌도는 방다 오리엔탈 전 지역 대표자들과 함께 브라질과의 통합을 승인하여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 연합왕국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다. 이듬해, 페드로 왕자가 포르투갈 코르테스에 반기를 들자, 시스플라티나 군사정부를 제외한 브라질 주의 브라질 정부 군사정부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1] 포르투갈이 패배하고 리스본으로 철수하자 시스플라티나 주는 브라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2]1823년 6월 25일, 연합 주가 브라질의 독립을 승인한 후 아르헨티나 정부는 시스플라티나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소유권을 주장하며 브라질 제국과 외교 회담을 시작했다.[3] 1823년 아르헨티나는 발렌틴 고메즈를 리우데자네이루에 파견하여 브라질의 평화적인 철수를 협상했다.[4] 아르헨티나 외교 사절단은 일련의 제안을 했으나, 브라질 정부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하고 1824년 2월에 답변을 요구했다.[5] 1824년 2월 6일, 브라질 제국 정부는 시스플라티나 할양 관련 협상을 거부하는 답변을 내놓았다.[6]
3. 전개
1825년, 브라질이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하자 아르헨티나 함대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대서양에 진출했다. 이후 브라질 해군은 아르헨티나 침공을 시도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를 점거하려 했으나, 1827년 아르헨티나에 의해 격퇴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대는 강을 건너 몬테비데오에 사령부를 설치했고, 카를로스 마리아 데 알베아르는 브라질 본토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826년 페드루 1세는 반격을 계획하고 남부 브라질 지원병과 유럽 용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징집하려 했으나, 이로 인해 페드루 1세에 반발하는 폭동이 발생했다. 브라질군은 본토에서 아르헨티나군의 행군을 방해했지만, 아르헨티나 군대는 브라질 지역에 계속 주둔했다. 이투잘링고 전투를 비롯하여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사란디 전투와 준칼 해전 등에서 아르헨티나군은 브라질 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특히 산티아고 몬테 해전에서 아르헨티나 해군은 브라질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브라질은 인구 부족 현상을 겪었고, 잇따른 패전으로 페드루 1세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다.
3. 1. 33인의 동부인의 봉기
1825년 4월,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장군은 33인의 동방인을 이끌고 시스플라티나주(Cisplatina)로 개명된 조국에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이 전투는 점차 반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 몬테비데오를 점령할 무렵에는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라플라타 연방에 망명해 있던 동방인들은 브라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연방 가입을 희망했다. 또한 연방 내부에서도, 특히 구 연방 동맹을 형성했던 리토랄 3주를 중심으로 동방주를 탈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중앙 정부가 부재하면 탈환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각 주의 타협으로 1825년 1월 기본법에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가 외교권을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몬테비데오 점령 후, 라바예하 장군은 같은 해 8월 마누엘 오리베와 프룩투오소 리베라 등과 함께 독립과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선포하자, 10월 연방 의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분노한 브라질은 12월 이 전투를 지원했던 라플라타 연방에 선전포고를 했다.
3. 2. 리베라의 배신과 초기 전투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장군은 1825년 4월, 33인의 동방인을 이끌고 시스플라티나주로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4] 이 전투는 점차 반다 오리엔탈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몬테비데오를 점령할 무렵에는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4] 몬테비데오 점령 후, 라바예하 장군은 같은 해 8월 마누엘 오리베와 프룩투오소 리베라 등과 함께 독립과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선포했다.[4]3. 3. 아르헨티나의 개입과 브라질의 선전포고
1825년 4월,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장군은 33인의 동방인을 이끌고 시스플라티나주로 개명된 조국에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이 전투는 점차 반다 오리엔탈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 몬테비데오를 점령할 무렵에는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몬테비데오 점령 후, 라바예하 장군은 같은 해 8월 마누엘 오리베와 프룩투오소 리베라 등과 함께 독립과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선포했다. 10월, 연방 의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분노한 브라질은 12월 이 전투를 지원했던 라플라타 연방에 선전포고를 했다.3. 4. 해전
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였다. 1825년 브라질 함대는 65척 이상의 대형 군함(총 690문의 함포)과 소형 무장 패킷선 및 수송선 31척을 보유했다. 브라질 독립 전쟁 이후 토머스 코크레인 경이 포르투갈로부터 획득한 함선을 구매하거나 편입하면서 함대 규모가 두 배로 증가했다. 함선 구매 외에도 제국 정부는 현지 조선소에서 프리깃 2척, 코르벳 2척, 그리고 여러 척의 건보트와 요트를 건조했다.브라질 제국 해군(Imperial Brazilian Navy)은 전열함 2척(''페드루 1세'', ''프린시페 레알(1771)''), 프리깃 8척, 코르벳 7척, 루거 1척, 브리그 17척, 스쿠너 24척, 건보트 33척 및 기타 함선을 포함하여 총 121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함선 외에도 브라질 함대에는 무장되어 군함으로 개조된 상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함선의 질은 다양했다. 프리깃은 8년 이상 된 함선이 없었지만, 코르벳과 브리그는 ''이타파리카'', ''리베랄'', ''카시케''와 같이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함선부터 ''마리아 다 글로리아'', ''마세이오''와 같이 북미에서 건조된 새로운 함선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763년과 1771년에 각각 건조된 전열함 ''페드루 1세''와 ''프린시페 레알''은 노후하고 상태가 좋지 않았다.
브라질의 해군 정책은 정부 반대파의 비판 대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해군을 "해상 경찰"이라고 묘사하며, 라플라타 강의 얕은 수역 항해에 더 적합한 낮은 흘수의 스쿠너를 구입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아미티지는 브라질이 라플라타 강에서의 전쟁에는 적합하지 않은 중장갑 함선을 구매하고 건조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토스카노는 광대한 해안선과 해상 무역로를 방어해야 하는 브라질과 같은 국가에게는 크고 작은 함선을 모두 갖춘 균형 잡힌 해군을 보유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돈 페드루 1세는 해군을 이용하여 연합주(라 플라타 연방)의 몬테비데오 항과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을 봉쇄했고, 아르헨티나 해군의 기지는 카르멘 데 파타고네스로 이동했다. 1827년,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카르멘 데 파타고네스를 공격했으나, 현지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초전에서 브라질군은 패했지만, 아르헨티나 내부의 통일파와 연방파의 대립 등으로 인해 1826년 11월 몬테비데오를 탈환했다. 그러나 1827년 2월 이투자인고 전투(파소 데 로사리오 전투)에서 대패하자 이후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준칼 해전 등에서 브라질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몬테산티아고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3. 5. 육상전
카를로스 마리아 데 알베아르 장군이 이끄는 아르헨티나군은 초기에 두라즈노 마을 근처에 본부를 설치하고 브라질 영토를 침략하여 소규모 충돌을 벌였다. 1826년 페드루 1세 황제는 반격을 계획했지만, 브라질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으로 인해 병력 징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황제는 군 지휘권을 바르바세나 후작 펠리스베르투 칼데이라 브란트에게 넘겨야 했다. 브라질군의 반격은 이투자잉고 전투에서 아르헨티나군에 의해 저지되었다.4. 결과
전쟁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 모두에게 큰 손해를 입혔고, 이 지역에서 상업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영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828년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평화 회의가 열렸다. 라플라타 강 양안을 아르헨티나가 소유하는 것을 꺼렸던 영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제국과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반다 오리엔탈을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으로 독립시켰다.
우루과이는 독립했지만, 라바예하 대신 친브라질파인 리베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의 지원을 받는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대전쟁과 파라과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역시 연방파와 통일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연방파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도레고는 라바예하에게 1828년 12월 살해당했다. 라바예하가 스스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에 취임하면서 연방파와 통일파의 내전은 더욱 격렬해졌고,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라플라타 지역에서 자유무역지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4. 1. 예비 평화 협약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
전쟁으로 인한 양측의 높은 비용과 영국과의 무역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영국은 두 교전 당사국에게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평화 협상을 벌일 것을 압박했다.[1] 영국 중재 하에 아르헨티나 연합주와 브라질 제국은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시스플라티나의 독립을 우루과이 동부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했다.[2]이 조약은 또한 브라질에 이전 동부 예수회 선교지의 동부 지역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고, 무엇보다도 브라질인들에게 중대한 국가 안보 문제인 라플라타 강의 자유 항해를 보장했다.[2]
4. 2. 전쟁의 영향
이 전쟁의 결과, 1828년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평화 회의가 열렸고, 1830년 우루과이가 독립국으로 탄생했다. 브라질의 페드루 1세는 전쟁으로 지지를 잃고 우루과이 독립에 책임을 지고 1831년 퇴위했다.- 우루과이: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후에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독립 초기에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은 연방주의파와 브라질의 지원을 받은 자유주의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는 대전쟁과 파라과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 아르헨티나: 시스플라티나 주를 되찾는 데 실패했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국내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었다. 연방파와 통일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마누엘 도레고(Manuel Dorrego)가 후안 라바예하(Juan Lavalleja)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권력을 잡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
- 브라질: 시스플라티나 주를 잃었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페드루 1세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그의 퇴위로 이어졌다.
- 영국: 중재를 통해 라플라타 지역에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자유 무역 지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여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5. 유산
이 전쟁은 어느 쪽도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싸운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 전쟁은 아니었지만, 우루과이에서는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33인의 동방인은 브라질의 지배에서 우루과이를 해방시킨 국민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33인의 동방인 상륙은 "해방 원정"으로도 알려져 있다.[3]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우월한 전력의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슷한 반응을 얻고 있다. 아르헨티나 해군은 이 전쟁에 참여한 사람, 사건 및 함선의 이름을 딴 많은 함선을 명명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기예르모 브라운(Guillermo Brown)"으로 알려진 윌리엄 브라운은 아르헨티나 해군의 아버지로 여겨지며,[4][5][6][7] 이 전쟁에서의 그의 행동으로 인해 서사적 영웅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는 또한 "라플라타의 넬슨"으로도 알려져 있다.
브라질은 해군전 참여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전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브라질 역사가 중 이 전쟁을 자세히 조사한 사람은 거의 없다. 브라질의 국민 영웅은 브라질 독립, 로사스와의 갈등(플라티나 전쟁) 또는 파라과이 전쟁의 영웅들이다.
영국이 이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과 갈등 양측에 영국 해군 관계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영어권 세계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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