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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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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 동맹 전쟁은 19세기 중반, 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파라과이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다. 독립 이후 영토 분쟁으로 갈등을 겪던 이들 국가는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하며 파라과이와 충돌했다. 파라과이는 전쟁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리아추엘로 해전 패배 이후 삼국 동맹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카시아스 공작의 지휘 아래 삼국 동맹군은 파라과이 영토를 침공하여 아순시온을 함락시켰고, 게릴라전 끝에 파라과이 대통령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사망하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 결과, 파라과이는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고 영토를 상실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전쟁 당사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의 역사적 평가와 영국의 역할, 그리고 대량 학살 논란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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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동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명칭파라과이 전쟁
삼국 동맹 전쟁
원어 명칭es: Guerra del Paraguay (구에라 델 파라과이)
pt: Guerra do Paraguai (게하 두 파라과이)
gn: Paraguái Ñorairõ (파라과이 뇨라이로)
es: Guerra de la Triple Alianza (구에라 데 라 트리플 알리안사)
pt: Guerra da Tríplice Aliança (게하 다 트히플리시 알리안사)
시기1864년 11월 13일 – 1870년 3월 1일
장소남아메리카,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결과동맹국의 승리
삼국 동맹 조약 종료
브라질-파라과이 간 로이자-코테지페 조약
아르헨티나-파라과이 간 마차인-이리고옌 조약
플라틴 지역의 자유로운 항해
파라과이에 대한 동맹국의 점령
영토 변화파라과이, 전쟁 이전 영토의 약 40%에 해당하는 영토 상실
브라질, 아파 강 북쪽 분쟁 지역을 확정적으로 획득 (현재 마투그로수두술 주)
아르헨티나, 분쟁 지역인 미시오네스 주와 필코마요 강 남쪽 모든 분쟁 지역을 확정적으로 획득 (현재 포르모사 주)
교전 세력
동맹국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적대국1842년 파라과이
지휘관
동맹국페드루 2세 황제 (브라질 제국)
카시아스 공작 (브라질 제국)
외 백작 (브라질 제국)
타만다레 후작 (브라질 제국)
인하우마 자작 (브라질 제국)
에르발 후작 (브라질 제국)
포르투알레그리 백작 (브라질 제국)
폴리도로 조르당 (브라질 제국)
바르톨로메 미트레 (아르헨티나)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아르헨티나)
후안 안드레스 젤리 이 오베스 (아르헨티나)
벤세슬라오 파우네로 (아르헨티나)
베난시오 플로레스 (우루과이)
엔리케 카스트로 (우루과이)
파라과이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도밍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호세 에두비히스 디아스
페드로 이그나시오 메사
엘리사르도 아키노
벤세슬라오 로블레스
비센테 바리오스
호세 마리아 브루게스
베르나르디노 카바예로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레스킨
안토니오 데 라 크루스 에스티가리비아
페드로 두아르테
조지 톰슨
병력 규모
동맹국브라질 제국: 약 139,000명
아르헨티나: 약 30,000명
우루과이: 5,583명
총합: 약 175,000명
파라과이300,000명
사상자 및 피해
동맹국브라질 제국: 군인 50,000명, 민간인 50,000명
아르헨티나: 군인 18,000명, 민간인 13,000명
우루과이: 10,000명
총합: 50,000–200,000명 (추정)
파라과이군인 및 민간인 175,000–300,000명 (추정)
총 사상자150,000–50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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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삼국 동맹 전쟁 장면
위에서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리아추엘로 해전(1865), 투유티 전투(1866), 쿠루파이티 전투(1866), 아바이 전투(1868), 로마스 발렌티나스 전투(1868), 아코스타 뉴 전투(1869), 아순시온 점령(1869) 중 로페스 궁전, 파라과이 전쟁 포로(c. 1870)
투유티 전투
투유티 전투(칸디도 로페스 그림)

2. 배경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독립 이후 영토 분쟁과 패권 경쟁으로 갈등을 겪었다. 특히 라플라타 강 유역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4개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864년 플라티나 지역 지도. 우루과이와 파라과이가 중앙에 위치하고, 북쪽에는 볼리비아와 브라질, 남쪽에는 아르헨티나가 위치한다.  빗금 친 영역은 볼리비아가 파라과이의 서쪽 절반을,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의 북쪽 지역을,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양쪽이 브라질 남부 지역을 주장했음을 나타낸다.
1864년 플라티나 지역. 음영 처리된 영역은 분쟁 지역이다.


브라질 남부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페드루 2세


이 전쟁은 남아메리카의 식민지 시대 이후의 결과, 라플라타 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우루과이 내부 정세에 대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간섭, 영국의 경제적 관심,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영토 팽창 야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파라과이는 영토 및 관세 문제로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수년간 갈등을 겪었다.[4]

19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브라질 제국과 남아메리카의 스페인계 국가들은 영토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지역 국가들은 여러 이웃 국가들과 국경 분쟁을 겪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후,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에 대한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은 이 지역 국가들의 외교 및 정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브라질은 1844년 파라과이의 독립을 최초로 인정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여전히 분리주의 주로 간주했다. 아르헨티나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1829~1852) 통치하에 있을 때,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공통의 적으로 여겨졌던 로사스에 대항하여 브라질은 파라과이군의 요새화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순시온에 관리 및 기술 지원을 파견했다.

1864년 브라질은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했고, 이는 파라과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당시 우루과이는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의 내전 상황이었고, 브라질은 콜로라도당을, 파라과이는 블랑코당을 지원했다. 브라질이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며 우루과이를 침공하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라플라타 지역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여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2. 1. 전쟁 전 파라과이

라플라타 강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


역사가들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1813-1840) 대통령과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1841-1860) 대통령 시절이 파라과이가 남미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던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두 대통령은 파라과이를 이웃 나라들과 고립된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로페스 일가의 정치 체제는 시민 사회의 발전 여지가 없는 극도의 중앙집권 체제를 추구했으며, 개인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로페스 일가는 파라과이를 하나의 거대한 사유지처럼 다스렸다.

파라과이 정부는 모든 수출품을 직접 관리했다. 마테나 값비싼 목공품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파라과이는 강한 보호 무역 정책을 펼쳤고, 외국으로부터의 대출을 금지했으며, 높은 관세를 매겨 외국 물품의 수입을 금지했다. 186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권을 물려받은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군사 분야에서는 아버지와 달리 군대를 현대화하고 군수 산업을 확대하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200명 이상의 외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전신선을 설치하고 철강, 직물, 종이, 잉크, 군함, 무기, 화약 등의 산업을 팽창시키기 위해 철도를 설치했다. 1850년 완성된 이비쿠이 생산 공장에서는 대포, 박격포 등 많은 무기를 생산했다. 아순시온의 조선소에서는 군함이 생산되었다.

파라과이 산업과 군사력의 성장을 위해서는 세계 시장과의 거래가 필수적이었으나, 파라과이는 내륙국이었다. 파라과이의 항구는 강에 있었으며,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파라과이 강과 파라나 강을 통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영토였던 라플라타 강 하구를 거쳐야 했다. 솔라노 로페스는 대서양 항구를 얻고자 했으며, 브라질 영토를 차지하려는 팽창주의적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파라과이 전쟁이 남북 전쟁으로 면화 공급지가 필요했던 영국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다른 역사적 연구 결과와 맞지 않아 반박되었다.

솔라노 로페스는 팽창주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준비했다. 군수 산업을 발전시키고, 많은 남성을 군대에 동원했으며(의무병 제도가 이미 존재),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시키고, 파라과이 강 어귀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강에서 사용할 무장한 배들을 만들었다.

외교 관계에서 로페스는 우루과이의 블랑코당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은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연합하고 있었다.

1864년, 브라질이 우루과이 내정에 간섭하자 로페스는 힘의 균형 붕괴를 우려하여 브라질에 선전 포고를 했다. 아르헨티나는 중립을 지켰으나, 파라과이가 코리엔테스 주를 침입하자 파라과이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는 로페스가 미트레에게 아르헨티나 영토 통과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면서 발생했다. 파라과이는 우루과이의 브라질 군대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고자 했다.

2. 2. 라플라타 강 문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후, 두 국가는 라플라타 강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으며, 결국 전쟁을 벌였다.[4]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던 브라질은 1811년 파라과이의 독립을 처음으로 승인했다. 아르헨티나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1829-1852) 통치하에 있을 때,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공통된 적이었고, 브라질은 파라과이의 요새화와 군대 발전을 지원하며 아순시온에 기술 지원을 제공했다.[4] 마투그로수와 리오데자네이루를 잇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브라질 선박은 쿠이아바로 가기 위해 파라과이 영토인 파라과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파라과이 정부로부터 항해 허가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독립한 이후,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에 대한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은 이 지역 국가들의 외교 및 정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44년, 브라질은 파라과이의 독립을 최초로 인정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여전히 분리주의 주로 여겼다. 아르헨티나가 후안 마누엘 로사스(1829~1852) 통치하에 있을 때,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공통의 적으로 여겨졌던 로사스에 대항하여 브라질은 파라과이군의 요새화와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순시온에 관리 및 기술 지원을 파견했다.

내륙 지방인 마토그로소 주와 리우데자네이루를 잇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브라질 선박은 파라과이 영토를 통과하여 파라과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쿠이아바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선박 운송을 위해 파라과이 강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에 대한 아순시온 정부의 허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 3. 우루과이 내전과 브라질의 개입

1851년 이후 브라질은 세 차례에 걸쳐 우루과이 정세에 정치·군사적으로 개입하며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그중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개입이었던 1864년의 우루과이 전쟁이 바로 파라과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루과이의 양대 정당인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은 각각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지원을 받으며 내전을 벌이는 구도였는데, 1854년에 수립된 콜로라도당의 베난시오 플로레스 정권은 이듬해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이 무렵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 지도부는 양당의 화해를 모색했고, 소위 "융합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1858년에 콜로라도당의 반동파가 화해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융합파 대통령에 의해 진압되었고, 배후 인물들은 처형되었다. 1860년에는 블랑코당의 대통령이 취임했다. 콜로라도당은 융합파가 블랑코당에 기울었다고 의심하고, 융합파 정권 전복을 모의하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실각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와 아르헨티나 연방의 주도권 다툼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플로레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 장관에게 접근하여, 콜로라도당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지하는 대가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의 융합파와 싸우는 것을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1862년, 국가 재통일을 달성하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미트레는 합의대로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에 무장과 병력을 지원했고, 이에 힘입어 플로레스는 1863년 4월 우루과이에 침공했다. 미트레는 과거 자신과 동료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했던 로사스를 지지했던 블랑코당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에 조종된 플로레스는 "해방 십자군"을 자처하며 파라과이와 동맹을 맺은 베로의 블랑코당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 우루과이 정국 동향을 지켜보던 파라과이의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9월 6일, 아르헨티나 정부에 서한을 보내 우루과이 내정 불간섭을 요구했지만, 미트레는 이를 거부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전쟁에 대비하여 의무 병역 제도를 도입했고, 이듬해 2월에는 6만 4천 명의 병사가 추가로 징집되었다.[5]

한편, 브라질도 기존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서 벗어나, 블랑코당이 브라질에서 소 도둑질을 했다는 구실을 대며 1863년 12월 공개적으로 콜로라도당을 지원하게 되었다. 플로레스의 반란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864년 4월, 브라질 정부는 전권위원을 태운 해군 함대를 우루과이 해역에 파견하여, 가우초 농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임기가 만료된 베로의 후임으로 블랑코당 정권을 이어받은 대통령은 결국 파라과이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솔라노 로페스는 처음에는 이 요청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우루과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를 제안했지만, 브라질에 의해 거부되었다. 더 나아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끼여 소멸 직전에 놓인 우루과이의 운명이, 머지않은 미래의 파라과이와 다를 바 없다고 우려하게 된다.

이렇게 8월에 아기레 정권이 브라질의 최후통첩을 받자, 솔라노 로페스는 블랑코당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브라질 공사에게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정부는 파라과이의 경고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브라질 국민의 생명과 이익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답변하면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10월에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군대를 파병하여 콜로라도당과 함께 블랑코당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브라질의 행동이 라플라타 지역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곧 자국의 안전에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솔라노 로페스는 11월 12일 파라과이 강에서 마투그로수 주지사가 타고 있던 브라질 상선 '마르케스 지 올린다(Marquês de Olinda)'를 나포하고, 선원과 승객을 구금함으로써 대결 의지를 분명히 했다. 12월 13일, 파라과이가 브라질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며 파라과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쟁의 경과

1864년 12월,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마투그로수 주를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파라과이군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코룸바 요새를 3일 만에 함락시키고, 1865년 1월에는 코룸바를 점령했다. 다른 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했으나, 쿠이아바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는 브라질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한 계책이었다.

1865년 3월,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하고 코리엔테스 주를 공격했다. 로페스는 후스토 데 우르키사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우르키사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파라과이군은 남쪽으로 진군했으나 결국 공격은 실패했다. 동시에 다른 부대는 히우그란지두술 주로 진격하여 상보르자와 우루구아이아나를 점령했다.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 해전에서 브라질 함대가 파라과이 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삼국 동맹은 라플라타 강 유역을 장악했고, 파라과이는 고립되었다. 상보르자를 점령했던 파라과이군은 우루과이 강 근처에서 우루과이군에 패배했다.

동맹군은 엔트레리오스 주에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1865년 말, 5만 명 이상의 병력이 파라과이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1866년 9월 12일, 로페스는 바르톨로메 미트레와 회담을 가졌으나, 삼국 동맹 조약 내용 때문에 평화 조약은 맺어지지 못했다.

1866년 10월, 카시아스 공작이 브라질군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브라질군은 전염병 등으로 지쳐 있었지만, 카시아스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의무병 부대를 조직했다. 로페스는 휴마이타 요새를 강화했다. 카시아스는 파라과이 요새를 우회하여 아순시온과 휴마이타 사이를 끊으려 했다.

1867년 8월, 미트레가 지휘권을 다시 잡고 쿠루파이티 공격을 주장했다. 브라질 지휘관들은 반대했지만, 미트레는 공격을 강행했다. 로페스는 투유티에서 동맹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1868년 1월, 카시아스가 다시 지휘권을 얻어 쿠루파이티를 우회하고 휴마이타를 함락시켰다.

카시아스는 피퀴씨리 강에서 로페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868년 12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로페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세로 레온으로 도망쳤다. 1869년 1월 1일, 삼국 동맹군은 아순시온을 점령했다.

페드루 2세의 사위였던 가스통 도를레앙이 파라과이에서의 마지막 작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69년 8월, 삼국 동맹은 아순시온에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세웠다. 로페스는 아순시온 북동쪽 산맥에서 저항군을 조직했다. 가스통은 2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맥의 저항군을 상대로 1년 이상 전투를 벌였다.

가스통은 로페스를 잡기 위해 남쪽 숲으로 200명가량의 파견대 2부대를 보냈다. 1870년 3월 1일, 파견된 부대가 세로 코라에 있는 파라과이의 마지막 캠프를 기습했다. 뒤이은 전투에서 로페스는 부상을 입고 군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부상으로 걸을 수 없었던 로페스는 보좌관과 관료들의 부축을 받아 달아났으나, 관료들은 로페스를 버리고 달아났다. 로페스가 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삼국 동맹의 카마라 장군이 몇 명의 군사를 데리고 도착하여 항복을 권하고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으나, 로페스는 "조국과 같이 죽겠다!"라고 외치며 거절하고 검으로 카마라 장군을 공격하려 했다. 로페스는 카마라의 군사들에게 바로 사살되었으며, 이로써 길었던 전쟁은 끝났다.[5]

3. 1. 삼국 동맹의 결성

1864년 우루과이 전쟁은 브라질이 1851년 이후 세 번째로 우루과이 정세에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루과이의 양대 정당인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은 각각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지원을 받으며 내전을 벌였다. 1854년 콜로라도당의 베난시오 플로레스 정권은 쿠데타로 붕괴되었으나, 양당 지도부는 화해를 모색하여 "융합파" 정권을 수립했다. 1858년 콜로라도당 반동파의 반란은 가브리엘 안토니오 페레이라 대통령에 의해 진압되었고, 1860년에는 블랑코당의 베르나르도 베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콜로라도당은 융합파가 블랑코당에 기울었다고 의심하여 정권 전복을 모의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실각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와 아르헨티나 연방의 주도권 다툼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플로레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쟁 장관 바르톨로메 미트레에게 접근하여, 콜로라도당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지하는 대가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의 융합파와 싸우는 것을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1862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한 미트레는 합의대로 콜로라도당에 무기와 병력을 지원했고, 플로레스는 1863년 4월 우루과이에 침공했다. 미트레는 과거 자신을 추방했던 로사스를 지지했던 블랑코당을 용서할 수 없었다. 플로레스는 "해방 십자군"을 자처하며 파라과이와 동맹을 맺은 베로의 블랑코당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 파라과이의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9월 6일 아르헨티나 정부에 우루과이 내정 불간섭을 요구했지만, 미트레는 이를 거부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전쟁에 대비하여 의무 병역 제도를 도입했고, 이듬해 2월에는 6만 4천 명의 병사가 추가로 징집되었다.

한편, 브라질도 1863년 12월 공개적으로 콜로라도당을 지원하게 되었다. 1864년 4월, 브라질 정부는 조제 안토니오 사라이바를 우루과이 해역에 파견하여, 가우초 농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아타나시오 아기레 대통령은 파라과이에 도움을 요청했고, 솔라노 로페스는 중재를 제안했지만, 브라질에 의해 거부되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끼여 소멸 직전에 놓인 우루과이의 운명이 파라과이와 다를 바 없다고 우려한 솔라노 로페스는 8월 아기레 정권이 브라질의 최후통첩을 받자, 블랑코당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브라질 공사에게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정부는 파라과이의 경고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10월에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군대를 파병하여 콜로라도당과 함께 블랑코당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솔라노 로페스는 11월 12일 파라과이 강에서 브라질 상선 '마르케스 지 올린다(Marquês de Olinda)'를 나포하고, 12월 13일 파라과이가 브라질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며 파라과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1865년 4월, 우루과이에서 블랑코당의 아길레 정권이 붕괴되고, 콜로라도당의 플로레스가 브라질군과 함께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지원으로 정권에 오른 콜로라도당은 파라과이에 선전포고했고, 1865년 5월 1일 아르헨티나·브라질·우루과이의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5]

3. 2. 파라과이의 공세와 좌절

파라과이는 전쟁 초기,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공세를 펼쳤다. 1864년 12월, 파라과이군은 브라질의 마투그로수 주를 공격했다. 이들은 코룸바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1865년 1월에는 코룸바를 점령했다. 파라과이군은 계속 진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했으나, 쿠이아바 점령에는 실패했다. 파라과이군의 주 목적은 브라질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남부 라플라타 강 유역에서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5]

파라과이의 마투그로수 주 공격
날짜사건비고
1864년 12월코룸바 요새 공격 및 점령155명의 수비대가 3일간 저항
1865년 1월코룸바 점령
1864년 12월 29일도라도스 변경 공격17명의 수비대 격파
1865년 4월콕심 함락



이후 파라과이는 코리엔테스 주와 히우그란지두술 주를 공격했다. 1865년 3월,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코리엔테스 주 통과를 요청했으나,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파라과이는 1865년 3월 18일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를 하고, 코리엔테스 주의 항구를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했다.[5]

파라과이는 코리엔테스 주와 엔트레리오스 주의 주지사였던 후스토 데 우르키사의 지원을 얻고자 했으나, 우르키사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파라과이군은 남쪽으로 진군했으나 결국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동시에 다른 부대는 1865년 5월 아르헨티나 남쪽 국경을 넘어 히우그란지두술 주로 향했고, 상보르자와 우루구아이아나를 점령했다.[5]

그러나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 해전에서 브라질 함대가 파라과이 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5] 이 전투의 승리로 삼국 동맹은 라플라타 강 유역을 장악했고, 파라과이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로페스는 코리엔테스 주 점령 부대에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상보르자 점령 부대는 우루구아이아나를 점령하며 전진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우루과이 강 근처에서 우루과이 군대에 패배했다.[5]

3. 3. 삼국 동맹의 반격과 파라과이 침공

1864년 12월, 파라과이는 마투그로수주를 공격하며 전쟁을 주도했다. 파라과이군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빠른 승리를 거두었다. 코룸바 요새를 공격하여 3일 만에 함락시켰고, 이후 코룸바를 점령했다. 다른 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쿠이아바 점령에는 실패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한 계책이었다.

1865년 3월,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선전포고하고 코리엔테스주를 공격했다. 로페스는 후스토 데 우르키사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우르키사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파라과이군은 남쪽으로 진군했으나 결국 공격은 실패했다. 동시에 다른 부대는 히우그란지두술주로 진격하여 상보르자와 우루구아이아나를 점령했다.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 전투에서 브라질 함대가 파라과이 함대를 격파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삼국 동맹은 라플라타 강 유역을 장악했고, 파라과이는 고립되었다. 상보르자를 점령했던 파라과이군은 우루과이 강 근처에서 우루과이군에 패배했다.

동맹군은 엔트레리오스주에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1865년 말, 5만 명 이상의 병력이 파라과이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1866년 9월 12일, 로페스는 바르톨로메 미트레와 회담을 가졌으나, 삼국 동맹 조약 내용 때문에 평화 조약은 맺어지지 못했다.

1866년 10월, 카시아스 공작이 브라질군 지휘권을 이어받았다. 브라질군은 전염병 등으로 지쳐 있었지만, 카시아스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의무병 부대를 조직했다. 로페스는 휴마이타 요새를 강화했다. 카시아스는 파라과이 요새를 우회하여 아순시온과 휴마이타 사이를 끊으려 했다.

1867년 8월, 미트레가 지휘권을 다시 잡고 쿠루파이티 공격을 주장했다. 브라질 지휘관들은 반대했지만, 미트레는 공격을 강행했다. 로페스는 투유티에서 동맹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1868년 1월, 카시아스가 다시 지휘권을 얻어 쿠루파이티를 우회하고 휴마이타를 함락시켰다.

카시아스는 피퀴씨리 강에서 로페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1868년 12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로페스는 항복을 거부하고 세로 레온으로 도망쳤다. 1869년 1월 1일, 삼국 동맹군은 아순시온을 점령했다.

3. 4. 카시아스 공작의 지휘와 우마이타 요새 함락

카시아스 공작은 1866년 10월 브라질군의 지휘권을 이어받아 11월에 파라과이에 도착했다. 당시 브라질군은 전염병으로 인해 매우 지쳐 있었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파견대는 동맹군에서 철수했다. 바르톨로메 미트레와 베난시오 플로레스는 본국의 정치 문제로 귀국했고, 카시아스는 군대를 재정비해야 했다.[5]

1866년 11월부터 1867년 7월 사이에 카시아스는 의무병 부대를 조직하고 군대 보급 체계를 마련하여 콜레라 확산을 막고 병사들의 부상을 치료했다. 이 기간 동안 브라질 군대는 소규모 접전과 쿠루파이티 폭격 외에는 큰 활동을 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이 기회를 틈타 우마이타 요새의 군사력을 강화했다.[5]

카시아스는 파라과이 요새의 왼쪽 날개를 측면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파라과이 요새를 우회하여 아순시온과 우마이타 사이의 연결을 끊고 파라과이군을 포위하려 했다. 이를 위해 카시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러나 1867년 8월, 다시 지휘권을 잡은 미트레는 쿠루파이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오른쪽 날개를 공격하는 전략을 다시 실행하려 했다. 미트레의 지휘 아래 브라질 부대는 우마이타로 가는 길을 멈추고 쿠루파이티로 향했다. 지휘부는 분열되었고, 미트레는 진격을 주장했지만, 브라질 지휘관들은 우마이타를 아순시온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우선시했다. 로페스는 이 기회를 틈타 투유티 전투에서 동맹군의 후위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1868년 1월, 미트레가 다시 돌아가고 카시아스는 지휘권을 되찾아 쿠루파이티를 우회하고 우마이타로 재진격했다. 오랜 포위 끝에 1868년 7월 25일, 우마이타는 함락되었다.[5]

3. 5. 아순시온 함락과 게릴라전

초원에서 브라질 군대를 살펴보고 있는 가스통 도를레앙


1868년 12월, 카시아스 공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변 도시들을 점령했다. 12월 24일, 카시아스를 포함한 지휘관들은 로페스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로페스는 거부하고 세로 레온 지역으로 달아났다. 1869년 1월 1일, 삼국 동맹군은 아순시온을 점령했다.[5]

페드루 2세의 사위였던 가스통 도를레앙이 파라과이에서의 마지막 작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69년 8월, 삼국 동맹은 아순시온에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세웠다. 로페스는 아순시온 북동쪽 산맥에서 저항군을 조직했다. 가스통은 2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산맥의 저항군을 상대로 1년 이상 전투를 벌였다.

가스통은 로페스를 잡기 위해 남쪽 숲으로 200명가량의 파견대 2부대를 보냈다. 1870년 3월 1일, 파견된 부대가 세로 코라에 있는 파라과이의 마지막 캠프를 기습했다. 뒤이은 전투에서 로페스는 부상을 입고 군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부상으로 걸을 수 없었던 로페스는 보좌관과 관료들의 부축을 받아 달아났으나, 관료들은 로페스를 버리고 달아났다. 로페스가 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삼국 동맹의 카마라 장군이 몇 명의 군사를 데리고 도착하여 항복을 권하고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으나, 로페스는 "조국과 같이 죽겠다!"라고 외치며 거절하고 검으로 카마라 장군을 공격하려 했다. 로페스는 카마라의 군사들에게 바로 사살되었으며, 이로써 길었던 전쟁은 끝났다.[5]

4. 전쟁의 결과

페드루 2세의 사위 가스통 도를레앙이 파라과이에서의 마지막 작전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69년 8월, 삼국동맹은 아순시온에 시릴로 안토니오 리바롤라를 대통령으로 한 임시정부를 세웠다. 로페스는 아순시온 북동쪽 산맥에서 저항군을 조직했고, 가스통은 2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1년 이상 전투를 벌였다.[13]

승전 축하 행사를 준비하는 브라질


브라질 군대는 전쟁이 끝난 후 1876년까지 파라과이에 주둔하며 그란차코 지역을 노리던 아르헨티나와의 무력 충돌을 막았다. 전쟁으로 파괴된 파라과이 마을은 버려졌고, 생존자들은 아순시온 변두리로 이주했다. 파라과이는 영국 상품 시장이 되었고, 막대한 빚을 졌다.

브라질은 런던 은행, 베어링스 은행, 로스차일드에게 빚을 져 재정 위기를 겪었다.[30] 전쟁으로 노예제가 약화되었고, 군대는 강화되어 페드루 2세 폐위와 공화정 수립에 영향을 미쳤다.[34] 데오도루 다 폰세카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75년, 브라질과 파라과이는 우호 조약을 맺고 전리품을 반환했지만, 파라과이 국가 문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마테차는 파라과이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전쟁으로 생산량이 급감했고 브라질이 주 생산국이 되었다.[54]

4. 1. 파라과이의 피해

파라과이는 삼국 동맹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고,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으며,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17] 전쟁 후 파라과이는 오랫동안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19]

정확한 사상자 수는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파라과이 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는 데 동의한다. 전쟁 전 파라과이 인구는 추정치에 따라 30만 명에서 133만 7천 명까지 다양하다.[15] 1871년 인구 조사에서는 221,079명의 생존자가 기록되었는데, 이 중 여성은 106,254명, 어린이와 노인은 86,079명, 남성은 28,746명이었다.[16]

1999년, 토마스 위햄 박사의 연구는 1870년과 1871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약 15만에서 16만 명의 파라과이인들이 살아남았고 그 중 성인 남성은 28,000명이라고 추정했다.[21] 이는 여성 대 남성의 비율이 4:1이며, 전쟁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은 20:1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위햄 박사는 전쟁 전 인구를 1846년 인구 조사를 기초로 42만에서 45만 명으로 추정하여, 파라과이 인구의 60%에서 70%가 사망했다고 결론지었다.[21]

스티븐 핑커는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했다는 점을 들어, 이 전쟁이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22]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질병은 민간인 사망자를 증가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 부족, 열악한 위생, 콜레라와 같은 질병으로 사망했다.[22]

전쟁 후 파라과이는 파괴된 국가 구조, 영토 상실, 경제 붕괴로 인해 이웃 국가들과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높은 전쟁 부채는 1943년 제툴리우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에 의해 탕감되었다.[19] 1869년 아순시온에 친브라질 정부가 수립되었고, 파라과이는 1876년까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군대에 점령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미트레 대통령은 전쟁이 3개월 만에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5년 동안 지속되었고, 정부군 간의 전투가 종결된 후에도 장기간의 게릴라전이 계속되었다.[5] 포로들은 상파울루의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갔고, 군인과 민간인을 불문하고 수많은 파라과이인들이 사망했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개전 당시 약 525,000명이었던 파라과이 인구 중 211,009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추측도 있다. 영토 또한 미시오네스주와 포르모사주가 아르헨티나에, 동부 지역이 브라질에 합병되면서 전쟁 전 영토의 4분의 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쟁 후 파라과이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회복하고, 성인 남성 대부분을 잃은 것으로 인한 인구 분포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약 반세기의 시간을 보냈다. 영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강요당하여 경제적으로 영국과 아르헨티나에 종속되었고, 전쟁 전 파라과이 농지의 98%를 차지했던 공유지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매입되어 파라과이에도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같은 대토지 소유제가 도입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브라질에 종속되어 이후 이 두 국가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2.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변화

브라질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런던 은행, 베어링스 은행,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졌다.[30] 전쟁 5년 동안 자체 수입의 두 배를 쏟아부어 재정 위기를 겪었다.[30]

전쟁을 위해 노예들이 해방되면서 브라질의 노예제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군대는 새롭게 재편되어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전쟁을 통해 전통과 내부 결속력을 갖춘 강력한 조직으로 탈바꿈했고, 이후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3]

경제 불황과 군사력 강화는 1889년 페드루 2세의 폐위와 공화정부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34]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브라질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 영토 일부를 합병하며 라플라타 강 유역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전쟁 중 브라질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며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중앙 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가 통합에 기여했다.

4. 3. 우루과이의 상황

우루과이는 이 전쟁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내정 간섭이 줄어들었지만, 우루과이 군은 큰 피해를 보았고 파라과이로부터 얻은 것은 없었다.[6] 전쟁 이후에도 정정 불안은 계속되었으며, 20세기 초 콜로라도당의 호세 바티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통적인 대립이 이어졌다.

4. 4. 영국의 경제적 이득

영국은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었다. 영국은 전쟁 당사국 모두에게 차관을 제공했고, 파라과이를 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전쟁 전 파라과이 농지의 98%를 차지했던 공유지는 아르헨티나인들에게 매입되어 파라과이에도 대토지 소유제가 도입되었다.[4]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전비를 빌렸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종속적인 태도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브라질은 런던은행과 베어링스 은행, 그리고 로스차일드에게 빚을 졌다. 전쟁 5년 동안 브라질은 자체 수입금의 2배 가량을 소모하면서 싸웠고, 재정적 위기가 왔다.[4] 브라질은 제툴리우 바르가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영국으로부터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미국이 부상할 때까지 이 지역에서 완전한 경제적 패권을 확립했다.[4]

4. 5. 마테 산업에 미친 영향

식민지 시대 이후, 마테차는 파라과이의 주요 수출 작물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파라과이에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라과이의 마테차 수확량은 급감하여, 1865년에서 1867년 사이에 무려 95%나 감소했다고 한다.[53] 전쟁 당시 양측 군인들은 마테차를 마시며 허기를 달래고 전투 불안감을 완화했다.[54]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빼앗긴 땅 대부분은 마테차가 풍부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19세기 말에는 브라질이 마테차 생산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54] 외국 기업가들이 파라과이 시장에 진출하여 남은 마테차 생산과 산업을 장악했다.[53]

5. 전쟁의 역사적 평가와 논쟁

라틴아메리카식민주의 잔재,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플라타강 유역을 둘러싼 경쟁, 우루과이 내정에 대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간섭, 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영토 확장 야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삼국 동맹 전쟁이 일어났다.[4] 파라과이는 영토 및 관세 문제로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전쟁 결과 파라과이는 완패했다. 삼국 동맹이 재래식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장기적인 게릴라전으로 전황이 바뀌면서 파라과이 군인과 시민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게릴라전은 1870년 3월 1일 로페스가 사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파라과이 전쟁 전 인구의 약 90%인 120만 명이 사망했다는 추정치가 있는 반면, 5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30만 명 정도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스티븐 핑커는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하여 현대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파라과이는 전쟁의 혼란과 인구 불균형을 극복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남아메리카 최초의 공화국 중 하나였던 파라과이는 1993년에야 처음으로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브라질은 전쟁으로 노예제가 종결되었고, 급증한 부채를 갚는 데 10년이 걸렸으며, 국가 경제 성장이 급감했다. 일각에서는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민족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전쟁 후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우루과이는 이 전쟁 이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났다.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1813-1840)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1841-1860) 대통령 시절은 파라과이가 남미에서 가장 발전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두 대통령은 파라과이를 이웃 국가들과 고립된 자급자족 경제 체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로페스 일가의 정치 체제는 시민사회의 발전 여지가 없는 극도의 중앙집권 체제를 추구했으며, 개인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로페스 일가는 파라과이를 거대한 사유지처럼 통치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모든 수출품을 직접 관리했다. 마테나 값비싼 목공품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파라과이는 강력한 보호 무역 정책을 펼쳤고, 외국으로부터의 대출을 금지했으며, 높은 관세를 통해 외국 물품 수입을 막았다. 186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권을 물려받은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는 아버지의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군사 분야에서는 군대를 현대화하고 군수산업을 확대하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200명 이상의 외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전신선을 설치하고 철강, 직물, 종이, 잉크, 군함, 무기, 화약 등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도를 건설했다. 1850년 완성된 이비쿠이 생산 공장에서는 대포, 박격포, 총알 등을 생산했다. 아순시온의 조선소에서는 군함이 건조되었다.

일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파라과이 국민에 대한 대량 학살을 대량 학살의 사례로 간주한다.[40][41] 메르코수르 의회는 전쟁 중 범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합의된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42]

1975년 12월, 브라질의 에르네스토 게이젤 대통령과 파라과이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대통령이 아순시온에서 우호 및 협력 조약에 서명한 후,[43] 브라질 정부는 전리품 중 일부를 파라과이에 반환했지만 일부는 보관했다. 2013년 4월 파라과이는 "크리스티안" 대포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브라질은 이 대포를 과거 군 주둔지(현재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해 왔으며, 브라질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44]

5. 1. 영국의 역할 논쟁

1960년대 이후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역사 수정주의자들 사이에서 영국 정부의 책략이 전쟁 발발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45]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역사적 증거와 거의 또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브라질에서는 일부가 전쟁 중 삼국 동맹의 주요 자금 조달원이 영국이었다고 주장하며, 영국이 지역 내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지원을 제공했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거의 없다.[45] 1863년부터 1865년까지 브라질과 영국은 외교적 분쟁을 겪었고, 파라과이 전쟁 발발 5개월 후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관계를 단절했다. 1864년 영국 외교관이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게 지역에서 적대 행위를 시작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는 점과 영국이 동맹국들에게 파라과이를 공격하도록 "강요"했다는 증거는 없다.[45]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좌익 역사학자들(특히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그의 저서 "자본의 시대: 1848-1875"에서)은 파라과이 전쟁이 대륙에 대한 영국의 영향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46][47] 영국이 미국 남북 전쟁 동안 새로운 목화 공급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봉쇄된 미국 남부가 전쟁 전 주요 목화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48]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출신의 우익, 심지어 극우파 역사학자들도 영국의 영향이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49][50][51] 소련 대백과사전과 러시아 대백과사전(각각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공식 자료)에서도 영국 제국이 파라과이를 상대로 한 "삼국 동맹"의 전쟁 수행과 재정 유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 문서는 에드워드 손튼(Edward Thornton)(라플라타 유역 주재 영국 공사)이 영국 총리 존 러셀 경에게 보낸 편지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파라과이의 무지하고 야만적인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장 저명한 정부의 보호 아래 있다고 믿고 있으며 (...) 외세의 개입이나 전쟁을 통해서만 그들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주재 미국 공사였던 찰스 워시번(Charles Washburn)은 손튼이 갈등 발생 몇 달 전 파라과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했다.

> ... 아비시니아보다 더 나쁘고, 로페스는 테오드로스 2세보다 더 나쁘다. 국가로서의 파라과이의 멸망은 전 세계에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E.N. 테이트(E.N. Tate)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파라과이를 얼마나 싫어했든 손튼은 아순시온 방문 당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의 다툼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쟁으로 번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영향력은 그 후 몇 달 동안 평화를 위해 일관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전쟁 발발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된 증거가 없다고 지적한다.[45] 영국 경제와 상업적 이익이 전쟁으로 이익을 얻었지만 영국 정부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전쟁이 국제 무역(영국을 포함)을 손상시켰고, 영국 정부는 삼국 동맹 조약의 비밀 조항을 승인하지 않았다.[45] 당시 영국은 이미 이집트와 인도산 목화 수입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파라과이산 목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윌리엄 도리아(손튼을 대신하여 잠시 파라과이 주재 영국 대리 공사를 역임)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외교관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의 우루과이 개입을 비난했다. 하지만 손튼이 1863년 12월에 직무에 복귀했을 때 도리아는 미트레를 전적으로 지지했다.[52]

5. 2. 파라과이 전쟁의 성격 논쟁

라틴아메리카식민주의 잔재, 전략적 요충지였던 라플라타강 유역을 둘러싼 경쟁, 우루과이 내정에 대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간섭, 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영토 확장 야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쟁이 발발했다.[4] 파라과이는 영토 및 관세 문제로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라플라타 분지 장악 시도를 강조한다. 이는 지역 강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식민지 시대 이후 남아메리카 신생 국가들 간의 국경 분쟁, 라플라타 지역에 대한 권력 투쟁,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우루과이 내정 간섭, 솔라노 로페스의 동맹 지원 노력, 그의 팽창주의적 야망 등이 전쟁의 원인으로 거론된다.[4]

파라과이는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지만, 이웃 국가들은 파라과이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시대부터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국경 및 관세 분쟁을 겪었다.

일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파라과이 국민에 대한 대량 학살을 대량학살의 사례로 간주한다.[40][41] 메르코수르 의회는 전쟁 중 범죄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합의된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42]

6. 한국의 관점과 시사점

삼국 동맹 전쟁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야망과 라플라타강 유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이 전쟁으로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하는 등 현대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

이 전쟁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파라과이는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급격히 늘리고 게릴라전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1] 이는 자주 국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외교적 노력과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브라질은 파라과이의 중재 제안을 거절하고 군사적 개입을 강행하여 전쟁을 유발했다.[5] 이는 국제 사회의 연대와 협력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 1. 더불어민주당 관점 투영

더불어민주당은 전통적으로 강대국 중심의 외교 정책보다는 약소국과의 연대, 평화적 해결, 국제 정의 실현 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삼국 동맹 전쟁은 강대국의 횡포와 약소국의 비극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브라질 제국의 페드루 2세나 아르헨티나의 바르톨로메 미트레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삼국 동맹 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묘사될 수 있다. 반면, 파라과이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인물로 묘사될 수 있다.

삼국 동맹의 침략 행위는 비판적으로, 파라과이의 저항은 정당한 방어 행위로 서술될 수 있다. 특히, 전쟁의 결과로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했다는 스티븐 핑커의 주장은 이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한다.[5]

6. 2. 시사점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삼국 동맹 전쟁은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의 야망과 라플라타강 유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 인구의 60% 이상이 사망하는 등 현대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

이 전쟁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국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파라과이는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급격히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했다.[1] 이는 자주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또한, 외교적 노력과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브라질은 파라과이의 중재 제안을 거절하고 군사적 개입을 강행하여 전쟁을 유발했다.[5] 이는 국제 사회의 연대와 협력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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