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야 소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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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야 소이치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이다. 후쿠이현 출신으로, 후쿠이 상업고등학교 시절 '호쿠리쿠의 이치로'라고 불리며 2001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9순위로 지명되었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 히로시마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2008년에는 개막전 선발 출장, 2009년에는 3할 타율을 기록했다. 2018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RCC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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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야 소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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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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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마야 소이치로 |
원어 이름 | 天谷 宗一郎 (Amaya Sohichiro) |
출생일 | 1983년 11월 8일 |
출생지 | 후쿠이현 사바에시 |
신장 | 178cm |
체중 | 84kg |
포지션 | 외야수 |
투구 | 좌투 |
타석 | 좌타 |
프로 경력 | |
드래프트 | 2001년 NPB 드래프트 9순위 |
소속 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02–2018) |
첫 출장 | 2004년 8월 20일 |
마지막 출장 | 2018년 10월 4일 (은퇴 경기) |
NPB 통계 (2018년 시즌까지) | |
타율 | 0.255 |
홈런 | 27 |
타점 | 159 |
2. 프로 입단 전
50m 달리기 6초 0의 준족과 선구안, 날카로운 스윙이 인정되어 2001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9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등번호는 '''69'''번으로 결정되었다. 후쿠이현립 후쿠이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프로 입단은 동료 요코야마 류지 이후 7년 만이다.
2. 1. 유년 시절
후쿠이현 사바에시 출신이다. 토바 초등학교와 사바에 시립 중앙 중학교를 졸업했다.후쿠이현립 후쿠이 상업고등학교 시절에는 타격 센스와 빠른 발을 바탕으로 "호쿠리쿠의 이치로"라고 불렸다. 2학년 여름 현 대회 결승에서 우쓰미 테쓰야, 이경일 등을 보유한 쓰루가 게히고를 연장 10회 접전 끝에 3-2로 꺾고 고시엔 출전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고시엔 본선에서는 7번 우익수로 출전했지만 첫 경기에서 패했다. 당시 1년 선배로 야마기시 조가 팀 동료였다. 이듬해 봄 고시엔에서는 3번 타자로 출전, 1회전에서 홈런 1개를 포함해 3안타, 1이닝 2도루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여름 고시엔에도 출전하여 3시즌 연속 고시엔 무대를 밟았다.
2. 2. 고등학교 시절
후쿠이 현립 후쿠이 상업고등학교 시절에는 타격 센스와 빠른 발을 바탕으로 "호쿠리쿠의 이치로"라고 불렸다. 2학년 여름에 열린 현 대회 결승전에서는 우쓰미 데쓰야, 이경일 등이 속한 쓰루가 게히고를 연장 10회 접전 끝에 3-2로 꺾고 고시엔 대회 출전을 이끌었다.[1] 그러나 고시엔 본선에서는 7번 우익수로 출전했지만 팀은 첫 경기에서 패했다.[1] 당시 1년 선배인 야마기시 조가 팀 동료였다.[1]다음 해인 3학년 봄에 열린 고시엔 대회에서는 3번 타자로 출전하여 1차전에서 1홈런 3안타와 1이닝 2도루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1] 3학년 여름에 열린 고시엔 대회에도 출전하여 통산 3회 연속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1]
50m를 6초대에 주파하는 빠른 발과 뛰어난 선구안, 날카로운 스윙을 인정받아 200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9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1] 후쿠이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프로에 입단한 것은 동료 요코야마 류지 이후 7년 만의 일이었다.[1]
3. 프로 선수 경력
히로시마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경력을 쌓았다. 2009년 4월 3일 개막전에 8번·우익수로 선발 출전하며[2] 1군 무대에 데뷔했다. 5월에는 타율 .400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5월 13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오른쪽 유구골 골절상을 입어 장기간 이탈했다.[2] 그러나 경이적인 회복 속도로 49일 만에 2군 경기에 복귀했고, 7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 1군에 복귀했다.[3] 부상 여파로 94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타율 3할, 5홈런, 41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올렸다.
2010년에는 타격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4월 28일 요코하마전에서 팀 역사상 21년 만에 1경기 4도루를 기록했고, 8월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쳤다. 8월 22일 요코하마전에서는 펜스를 뛰어넘는 홈런성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를 펼쳤다.
2011년에는 타율 .210으로 부진했지만, 12월 27일 히로시마 홈 TV 아나운서 츠보야마 카나코와 결혼했다.[4]
2012년에는 6월에 1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월간 타율 .373을 기록했다. 6월 17일 세이부전에서는 키시 타카유키를 상대로 1회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을 기록했고,[5] 8월 25일 한신전에서는 팀 20년 만의 런닝 홈런을 쳤으며, 9월 27일 자이언츠전에서는 9회 말 역전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2013년부터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출전 기회가 줄었다. 2014년에는 마츠야마 류헤이의 부상으로 1군에 등록되어 6월 15일 2년 만에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2015년에는 30경기, 2016년에는 55경기 출전에 그쳤다.
2018년 9월 27일 현역 은퇴를 발표했고,[5] 10월 4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이언츠와의 은퇴 경기에서 1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하여 1회 말 스카노 토모유키를 상대로 1루 땅볼로 물러나며 현역 마지막 타석을 소화했다.
3. 1. 입단 초기 (2002년 ~ 2006년)
2002년 프로 1년 차에는 2군에서 40타수 2안타, 타율 .050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8개의 볼넷과 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1] 2003년에는 타격이 향상되어 2군 1번 타자를 맡았고, 한때 타율 4할을 넘어서며 전반기에는 2군 타격 1위를 독주했다. 후반기에는 약점인 바깥쪽 변화구에 고전하며 타율이 떨어졌지만, 최종적으로 2군에서 타율 .266, 6홈런, 27도루를 기록하며 웨스턴 리그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사구가 많아 출루율은 3할 5푼을 넘었다.[1]2004년에는 전년도 오프 시즌부터 시도했던 한발타법(一本足打法일본어)을 그만두고 원래의 스리풋 타법(すり足打法일본어)으로 되돌리는 등 타격 면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으로 1군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지만, 시범 경기에서 타율 .133으로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8월 20일에 프로 3년 만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지만, 2타수 무안타, 도루 0개를 기록하고 8월 30일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10월 3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프로 첫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프로 첫 안타를 기록하고, 적극적인 주루로 2루를 훔치는 등 빠른 발을 과시했다. 웨스턴 리그에서는 2위와 20개 차이를 벌리며 42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1]
2005년에는 전년도 오프에 왼쪽 무릎 인대가 손상되었고, 봄 캠프에서는 염좌를 겪으며 개막을 2군에서 시작했다. 6월 14일 웨스턴 리그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슬라이딩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당했다. 잦은 부상으로 1군 출장은 2경기에 그쳤다.[1]
2006년에는 5월에 1군으로 승격되었지만, 약 1개월 만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주로 대주자로 출전했지만, 도루는 기록하지 못했고 타격에서도 8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반면 2군에서는 최고 출루율 .366, 24도루로 3번째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1]
3. 2. 주전 도약과 시련 (2007년 ~ 2011년)
2007년에는 등번호를 '''49'''번으로 변경했다. 4월 28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5월에 들어 1군 주전 자리를 빼앗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견제구로 귀루할 때 왼쪽 어깨를 다치면서 1군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20경기 출전에 그쳤다.[1]2008년에는 춘계 캠프에서 마티 브라운 감독으로부터 "재능, 타격 센스, 스피드가 매력적이다. 꼭 쓰고 싶다"고 극찬을 받아, 3월 28일 개막전(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1번·중견수로 첫 개막 선발 출장을 했다. 4월 5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 연장 10회에 나스노 다쿠미를 상대로 자신의 첫 번째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고[1], 4월 중순에는 수위 타자에 오르는 등, 과제였던 타격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전년까지 실책이 눈에 띄었던 외야 수비도 본래의 넓은 수비 범위를 살리게 되었고, 한신에서 이적해 온 아카마츠 마사토와 함께 철벽 외야를 형성했다. 최종적으로 규정 타석에 3타석 미달, 타율도 .263까지 떨어졌지만, 자기 최다인 135경기에 출전하며 비약적인 시즌을 보냈다. 4월 5일 요코하마전에서는 자신의 첫 번째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고, 해당 경기의 히어로 인터뷰에서는 "맛있는 술을 마시고 내일도 야구장에 와 주세요!"라고 독특한 발언을 하여 야구장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4월 6일 요코하마전에서도 하세가와 마사유키와 함께 히어로 인터뷰에 나서 "내일은 월요일이라 일이 있을 테니 술은 자제하세요"라고 발언했다.
2009년에는 4월 3일 개막전에서 8번·우익수로 출전했다. 4월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5월에 들어 컨디션을 끌어올려 3번 타자로 기용되어, 팀 타율이 2할 초반으로 저조한 가운데 타율 .400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5월 13일 한신전에서 파울 타구를 쳤을 때 오른쪽 유구골이 골절되어 장기 이탈했다.[2] 그러나, 경이적인 회복력을 보여 49일 만에 2군에서 실전 복귀, 7월 15일 요코하마전에서 "3번·우익수"로 선발 출전하며 1군에 복귀했다.[3] 골절의 영향으로 94경기 출전에 그쳤고, 전년과 마찬가지로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자신의 첫 타율 3할·5홈런·41타점을 기록했다.
2010년에는 오픈전에서 타율 3위 .396을 기록하고, 3번·중견수로 발탁되었지만, 시즌에 들어가자 타율 1할 후반에서 2할 전후를 맴도는 심각한 타격 부진에 빠져, 타격 컨디션이 좋은 아카마츠나 히로세 준에게 선발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많아졌다. 후반전부터는 다소 회복했지만, 전반전의 부진이 발목을 잡아 타율 .245로 성적이 떨어졌다. 4월 28일 요코하마전에서, 팀에서는 쇼다 고조(1989년 10월 15일 주니치전에서 1경기 6도루를 기록) 이후 21년 만에 1경기 4도루를 기록했고, 8월 2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에 노마구치 타카히코를 상대로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쳤지만, 아카마츠와 투수의 좌우에 따라 병용되는 등 완전히 레귤러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8월 22일 요코하마전에서는, 8회 초에 브렛 하퍼가 사이토 유키를 상대로 친 센터로 향하는 홈런성 타구를, 약 1.8m의 펜스를 뛰어 올라 몸을 뒤로 젖히는 자세로 잡아냈다. 이때, 사이토는 홈런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마야가 공을 잡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이와 같은 빅 플레이는 8월 4일 요코하마전에서도 동료 아카마츠가 보여주었고(참고로 그때의 투수도 사이토였다. 타자는 무라타 슈이치), 아마야는 그것을 "굉장히 의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22일 새벽, 니혼 TV의 스포츠 뉴스에서 아카마츠의 플레이가 특집으로 다루어졌을 때, 마쓰다 스타디움에 전시되어 있는, 아마야가 펜스에 기어 올라 홈런을 잡는 모습을 본뜬 "격돌! 아마야 군" 인형이 소개되었고, 불과 하룻밤 만에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참고로 훗날, 올라간 펜스 바로 아래 후마킬라가 베이프의 광고를 게재했기에, 동사에서 아마야에게 베이프, 약용 핸드솝 등이 보내진 것이, 홍보 담당인 히가 히사미쓰의 블로그에서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아카마츠도, 기어 올라간 펜스에 광고를 게재했던 이시가마 타카키 베이커리로부터 빵 선물 세트가 증정되었다.
2011년에는 개막 초부터 타격 부진으로 5월에는 타율 1할대로 떨어져, 2군 강등도 경험했다. 6월에 1군 복귀 후에는 회복한 듯 보였지만, 여름 이후 다시 컨디션이 떨어져 대타나 대주자·수비 강화로 기용되는 일이 많아져, 타율 .210으로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12월 27일에 츠보야마 카나코(히로시마 홈 TV 아나운서)와 결혼했음을 발표했다.[4]
연도 | 구단 | 외야 | |||||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2007 | 히로시마 | 10 | 7 | 0 | 1 | 0 | .875 |
2008 | 127 | 184 | 5 | 3 | 1 | .984 | |
2009 | 91 | 156 | 4 | 6 | 1 | .964 | |
2010 | 93 | 176 | 6 | 4 | 1 | .978 | |
2011 | 76 | 83 | 3 | 0 | 2 | 1.000 | |
통산 | 397 | 606 | 18 | 14 | 5 | .978 |
3. 3. 베테랑의 품격 (2012년 ~ 2018년)
2012년에는 부진으로 인해 개막을 2군에서 시작했고, 5월에 1군으로 승격되었다. 6월에는 16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는 등 월간 타율 .373을 기록하며 한때 타율 .327까지 올랐다. 6월 중순부터는 1번 타자로 고정 기용되었고, 같은 달 17일 세이부전에서는 세이부 돔에서 키시 타카유키를 상대로 1회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을 쳤다.[5] 7월까지는 타율 3할 대를 유지했지만 8월 이후 컨디션이 떨어졌고, 타순도 5번이나 7번으로 내려가거나, 상대 좌완 투수가 선발인 경기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8월 25일 한신전에서 팀 20년 만의 런닝 홈런을 치거나, 9월 27일 자이언츠전에서 9회 말에 역전 사요나라 안타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타율 .264로 마감했지만, 과거 2년을 웃도는 성적을 남겼다.2013년에는 시즌 내내 1군과 2군을 오갔고, 레귤러 정착 후 최소인 34경기 출전에 그쳤다. 프로 5년차인 2006년 이후 7년 만에 시즌 무홈런으로 마무리했고, 타율 .208로 타격 부진에 빠졌다. 2군에서는 7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89, 3홈런의 성적을 남겼다.
2014년에는 팀이 8연패를 기록하고 있던 6월 14일, 마츠야마 류헤이가 왼쪽 무릎을 부상당함에 따라 시즌 첫 1군 등록되었다. 이날 롯데전에서 1번 라이트로 선발 복귀하여 첫 타석부터 안타를 쳤고, 6월 15일에는 2년 만에 선두 타자 홈런을 날려 팀을 연패에서 탈출시켰다. 그 후에도 7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이나, 8월 20일 요코하마전에서도 선두 타자 홈런을 날렸다. 8월 이후에는 도바야시 쇼타, 스즈키 세이야, 복귀한 마츠야마 등에 선발 자리를 빼앗겼지만, 좌타 대타로, 대타 타율 .333, 대타 출루율 .440의 성적을 남겼다.
2015년에는 전년보다 출전 횟수를 줄여, 30경기, 타율 .214, 2타점, 3도루를 기록했다. 5월 21일에 등록 말소되었고, 그 이후 1군 출장은 없었다. 4월 7일 자이언츠전에서, 1점 리드인 9회에 좌익수 수비 강화로 기용되었지만, 카메이 요시유키가 날린 좌익수 플라이를 바람의 영향으로 낙구하여 2루 진루를 허용했고, 이후 이바타 히로카즈가 적시타를 쳐 동점을 허용했고, 최종적으로 팀은 패했다.
2016년에는 개막 1군에 합류했다. 2번째 경기에 7번 라이트로 출전하여, 3번째 타석에서 결승 적시타를 쳐 팀의 시즌 첫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에도 선발 출전 기회가 주어져 결승타를 날리는 등 활약했지만, 6월 5일에 등록 말소되었다. 그 후에도 1군과 2군을 오갔고, 55경기 출전에 그쳤다. 대타로 30번 기용(24타수)되었지만 1개도 안타를 치지 못하는 등, 타격 부진에 시달려 타율 .175로 마무리했다.
2018년 9월 27일, 현역 은퇴가 구단으로부터 발표되었다[5]. 10월 4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의 자이언츠전에서 은퇴 경기가 치러졌고, 1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 1회 말 스카노 토모유키와 대결해 1루 땅볼로 물러나 현역 마지막 타석을 마쳤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자신의 타격 스타일을 지키기 위해 타석에 들어설 때 작은 목소리로 "센터(반환), 센터…"라고 중얼거린다. 준족이기 때문에 병살타가 적고, 일정 이상의 장타력도 있어 다양한 타순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성을 가진 타자이다. 선구안이 좋으며, 2008년과 2010년에는 시즌 타율이 2할 5푼 전후로 끝났지만 모두 3할을 크게 넘는 출루율을 기록했다.
1군에 정착한 2008년에는 좌익수·중견수 기용이 주를 이루었고, 외야에서 가장 어깨 힘이 요구되는 우익수 출장은 거의 없었지만, 외야가 넓고 우익선으로 빠진 타구가 즉시 3루타로 연결되는 마쓰다 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이 바뀐 2009년에는 수비 범위를 중시한 수뇌부의 의향에 따라 우익수로 컨버전되었다.
옛날부터 좋은 선수의 것은 무엇이든 따라 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스파이크는 아카호시 노리히로(전 한신), 글러브는 동료인 히로세 준의 모델을 착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5. 개인 기록
실패
번트
플라이
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