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다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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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다 고조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선수 시절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1985년부터 1998년까지 활동했으며, 스위치 히터로서 1987년과 1988년 센트럴 리그 수위 타자를 차지했다. 1989년에는 1경기 6도루로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여러 프로 야구 팀의 코치를 역임했고, 2017년에는 KIA 타이거즈의 타격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현재는 아마존 재팬 합작 회사에서 근무하며, 교토 세이쇼 고등학교 어드바이저 코치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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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다 고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이름 | 쇼다 고조 |
원어 이름 | 正田 耕三 |
로마자 표기 | Kozo Shoda |
출생일 | 1962년 1월 2일 |
출생지 | 일본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사망일 | (알 수 없음) |
신장 | 170cm |
체중 | 75kg |
포지션 | 내야수 / 코치 |
투구 | 우투 |
타석 | 양타 |
프로 입단 | 1984년 (드래프트 2위) |
첫 출장 | NPB / 1985년 5월 22일 |
최종 출장 | NPB / 1998년 9월 29일 (은퇴 경기) |
획득 타이틀 | (정보 없음) |
계약금 | (정보 없음) |
연봉 | (정보 없음)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와카야마시립와카야마상업고등학교 신일본제철히로하타 |
프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5년 ~ 1998년) |
코치 경력 | |
일본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수비/주루 코치 (1998년 ~ 1999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수비/주루·타격 코치 (2000년 ~ 2004년) 한신 타이거스 타격 코치 (2005년 ~ 2007년) 오릭스 버펄로스 타격 코치 (2010년 ~ 2011년) 교토세이쇼 고등학교 (현재) |
대한민국 | SK 와이번스 2군 종합 코치, 1군 타격 코치 (2009년) 한화 이글스 타격 코치 (2015년 ~ 2016년) KIA 타이거즈 타격 코치 (2017년 ~ 2019년) KIA 타이거즈 잔류군 타격 코치 (2019년) |
해설 경력 | |
방송사 | 데일리 스포츠 야구 해설위원 (2008년) 선 TV 야구 해설위원 (2008년) |
국가대표 경력 | |
올림픽 | 1984 로스앤젤레스 (야구) |
수상 내역 | |
센트럴 리그 수위 타자 | 2회 (1987년, 1988년) |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 2회 (1988년, 1989년) |
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 | 5회 (1987년 ~ 1991년) |
올스타전 MVP | 1988년 3차전 |
NPB 올스타 | 5회 (1987년 ~ 1990년, 1993년) |
통산 기록 (1998년 기준) | |
타율 | 0.287 |
안타 | 1546 |
홈런 | 44 |
타점 | 875 |
도루 | 146 |
2. 선수 시절
쇼다 고조는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 야구부에서 활약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3]
1984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2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소년 시절 한신 타이거스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프로 선수로서 히로시마에서 야구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9] 아마추어 야구 최고봉에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 무대에 도전했으며, 3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가업인 소바집을 이을 생각이었다.[10]
1985년 시즌 도중, 고바 타케시 감독의 권유로 스위치 히터로 전향했다.[10] 우치다 준조 타격 코치의 지도 아래 맹훈련을 거듭하여,[10][11] 1986년에는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90경기에 출전, 타율 .288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1987년 주전 2루수로 자리 잡으며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다. 시노즈카 도시오와 공동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골든 글러브상도 수상했다. 홈런 없이 수위 타자를 차지한 것은 2리그제 이후 처음이며, 스위치 히터로서는 NPB 사상 최초였다.
1988년 외상성 견봉하 점액낭염을 앓았지만,[14] 재활 후 복귀, 2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과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9년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인 1경기 6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이 되었다.
1990년 2번 타자, 2루수로 활약하며 팀에 기여했다. 1991년까지 5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받으며 수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1992년 오른 손목 부상으로 89경기 출전에 그쳤지만,[17] 1993년 우타석에 전념하며 재기를 노렸다.[13]
1994년 미무라 토시유키 감독 부임 후 오가타 고이치의 2루수 전향 검토에도 불구, 훈련으로 2루수 자리를 지켰다. 1995년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선수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96년 이후 타격 부진을 겪었으나, 1998년 코치 겸임으로 뛰며 규정 타석을 채우고 타율 .274를 기록,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은퇴를 결심, 그해 9월 2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다.[21] 통산 1546안타, 146도루, 타율 .276, 44홈런을 기록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 야구부에서 활약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대표팀에 출전, 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3] 와카야마시 역 근처에 있는 소바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와카야마 시립 조토 중학교에서는 학동 야구에서 전국 우승을 경험했다. 옛 이름은 "고조"였으나, 중학생 시절 집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가 골절된 것을 계기로 개명했다.[4][5]시립 와카야마 상업 고등학교에서는 탁월한 수비 능력으로 1학년 여름부터 2루수 레귤러가 되었지만,[6] 3학년 여름의 와카야마 대회는 1회전에서 동급생인 이시이 다케시와 시마다 무네히코의 배터리를 보유한 미시마 고등학교에 패했다.[3]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사회인 야구의 신일본제철 히로하타에 진출했다. 1983년 도시 대항에서는 8강전에서 홈런을 쳐내는 등 활약했지만, 준결승에서 도바시의 에이스 가와바타 준에게 막혀 패퇴했다.[7]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대표로 2루수를 맡아 주로 1번 타자를 맡아 15타수 6안타의 성적으로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감독 마쓰나가 레이이치로부터 플레이와 더불어 리더십을 칭찬받았다.[8]
올림픽 후,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2순위로 지명되었다. 쇼다 본인은 소년 시절부터 열광적인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고, 히로시마 측으로부터 사전에 타진이 없었지만, "나는 한신 팬이지만, 프로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히로시마에 야구를 하러 간다"라고 말하며 히로시마에 입단했다.[9] 아마추어 야구의 최고봉에서 플레이한 것으로 더욱 한 단계 위의 레벨에 도전하고 싶어져, 만약 싹이 트지 않으면 3년 안에 그만두고 가업인 소바집을 이을 생각이었다.[10]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4년 드래프트 2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루수로 수비 보직을 배정받았다. 1987년 시즌 최고 타율인 3할 3푼 3리를 기록해 타격왕 타이틀을 석권했으며, 이듬해인 1988년에는 3할 4푼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1989년 34도루를 기록해 데뷔 후 처음으로 도루왕에 등극했고, 1988년과 1989년에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으며, 1987년부터 1991년에는 5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통산 1546안타, 146도루, 2할대 타율, 44홈런을 기록했다.
1985년 시즌 도중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감독 고바 타케시의 권유로 가을부터 스위치 히터로 전향을 시도했다.[10]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 외에는 항상 배트를 쥐고 있을 정도로 맹연습을 했고[10], 타격 코치 우치다 준조도 연간 350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얼굴을 맞대고 지도했다.[11]
1986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90경기에 출전해 타율도 .288로 상승했다. 팀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쇼다는 처음으로 야구를 해서 다행이라고 느꼈지만[12], 레귤러 자리를 굳히기 위해 오프의 하와이로의 우승 여행에도 배트 2개를 지참하고 연습을 거듭했다.[13] 친가인 소바 가게에서는 "쇼다가 홈런을 치면 소바를 반값으로 합니다"라는 안내문이 프로 입단 후 2년간 붙어 있었지만, 실시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3]
1987년에는 2루수 레귤러로 자리 잡았고, 올스타전에도 처음으로 출전했다. 최종전에서 번트 안타를 기록해 시노즈카 도시오와 동률로 나란히 처음으로 타이틀인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골든 글러브상에도 선정되었다. 이 수위 타자에는 다양한 기록이 따라붙었는데, 동률로 2명이 나란히 기록한 것은 1969년의 하리모토 이사오·나가부치 요조 이후 2번째였고, 홈런 0개로 획득한 것은 2 리그제 후 처음(1 리그 시대 포함하면 1936년 가을의 나카네 시, 1944년의 오카무라 토시아키에 이어 3번째, 43년 만)이었으며, 스위치 히터로서는 NPB 사상 처음이었다.
1988년에는 봄에 외상성 견봉하 점액낭염을 앓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료인 다카하시 요시히코와의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 (후술) 이 어깨 통증 때문에 5월 12일부터 2주 동안 1군 등록이 말소되었지만, 근력 트레이닝을 통한 재활로 복귀했다.[14]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 출전과 수위 타자 획득을 달성했다. 시즌 막바지에는 수위 타자를 확정하기 위해 감독 아난 준로가 선발 멤버에서 쇼다를 제외했지만, 쇼다 본인은 "타이틀을 못 따도 경기에 출전하고 싶다"고 호소했다.[15]
1989년에는 히로시마의 최종전을 남기고 먼저 일정을 마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토마시노 겐지가 32도루로 센트럴 리그 최다 도루였지만, 4개 차로 쫓던 쇼다가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인 1경기 6도루(그 중 5개는 당시 포수였던 야마자키 타케시에게서)를 기록해 34도루로, 그 해의 도루왕이 되었다. 또한, 전년에 이어 리그 최다인 7개의 3루타를 기록했다.
1990년에는 1번·유격수의 노무라 겐지로에 이은 2번·2루수를 맡아, 6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견제구를 받고 귀루하다가 오른 어깨를 다쳐 등록이 말소되었지만,[16] 10일 만에 복귀했다. 그 해부터 1992년까지 매년 .29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수비에서도 1991년까지 5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4월에 생애 첫 월간 MVP를 수상했지만, 오른 손목을 부상하여 89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현상 유지인 연봉 7,000만 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7] 이듬해 1993년에는 이 부상으로 인해 우타석에 전념했다.[13] 그 해에는 121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이 .257로 하락했고, 오프에 스위치 히터 재전향을 위해 10월 25일에 오른 손목 수술을 받았다.[13] 또한, 이 해부터 히로시마의 선수 회장을 맡았다.
1994년부터 히로시마 감독으로 취임한 미무라 토시유키는, 쇼다의 회복이 불확실한 점을 감안하여 오가타 고이치를 2루수로 컨버트하는 것을 검토했다.[13] 이에 대해 쇼다는 깁스를 착용한 채 훈련을 하는 끈기로 2루 포지션을 지켰고, 오가타는 외야수가 되었다. 그 해 오프에는 2,500만 엔이 인상된 연봉 9,500만 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8]
1995년 12월부터는 현역 은퇴로 퇴임한 오카다 아키노부의 후임을 찾지 못한 노동 조합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회장이 되었고, 현역 은퇴까지 같은 직을 맡았다. 대학 출신이 아닌 선수가 노조 선수회 회장이 된 것은 2017년 12월의 스미타니 긴지로 (고등학교에서 프로 입단) 취임까지 쇼다뿐이었다.
1996년에는 레귤러 정착 후 최저 타율 .235로 마감했고, 300만 엔 삭감된 연봉 1억 700만 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9]
1997년에는 재기를 걸고, 오픈전에서는 타율 .276으로 괜찮은 상태로 시즌을 맞이했다.[20] 하지만 타격 부진에 빠져 4월 20일에는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11년 만에 시즌 100안타를 밑돌았고 규정 타석에도 미치지 못했고 도루 성공도 처음으로 0회로 끝났다.
1998년에는 코치 겸임이 되었고, 2루도 이 해 야쿠르트에서 테스트 입단한 토마시노 겐지와 병용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의 타격 부진은 해소되었고 규정 타석에 도달했으며 타율도 .274로 부활을 어필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8월 중순에 구단에 은퇴를 신청했다.[21] 그 해에는 7월 5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1,500안타를 달성, 9월 5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사요나라 안타를 기록하는 등 마지막까지 활약했고, 9월 2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주니치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또한 이틀 전인 9월 2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는 동료인 오노 유타카의 은퇴 경기였고,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는 씩씩했던 쇼다도 이 경기에서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10] 응원가는 닌자 부대 겟코의 테마송이었다.
2. 3. 선수 경력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신일본제철 히로하타 경식 야구부에서 활약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대표팀에 출전, 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1984년 드래프트 2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루수로 수비 보직을 배정받은 후 1987년에 시즌 최고 타율인 3할 3푼 3리를 기록해 타격왕 타이틀을 석권했으며, 이듬해인 1988년에 3할 4푼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9년 34도루를 기록해 데뷔 후 처음으로 도루왕에 등극했고, 1988년과 1989년에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됐으며, 1987년부터 1991년에는 5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통산 1546안타, 146도루, 2할대 타율, 44홈런을 기록했다.1985년 시즌 도중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감독 고바 타케시의 권유로 가을부터 스위치 히터로 전향을 시도했다.[10]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 외에는 항상 배트를 쥐고 있을 정도로 맹연습을 했고[10], 타격 코치 우치다 준조도 연간 350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얼굴을 맞대고 지도했다.[11]
1986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90경기에 출전해 타율도 .288로 상승했다. 팀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쇼다는 처음으로 야구를 해서 다행이라고 느꼈지만[12], 레귤러 자리를 굳히기 위해 오프의 하와이로의 우승 여행에도 배트 2개를 지참하고 연습을 거듭했다.[13]
1987년에는 2루수 레귤러로 자리 잡았고, 올스타전에도 처음으로 출전했다. 최종전에서 번트 안타를 기록해 시노즈카 도시오와 동률로 나란히 처음으로 타이틀인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골든 글러브상에도 선정되었다. 이 수위 타자에는 다양한 기록이 따라붙었는데, 동률로 2명이 나란히 기록한 것은 1969년의 하리모토 이사오·나가부치 요조 이후 2번째였고, 홈런 0개로 획득한 것은 2 리그제 후 처음(1 리그 시대 포함하면 1936년 가을의 나카네 시, 1944년의 오카무라 토시아키에 이어 3번째, 43년 만)이었으며, 스위치 히터로서는 NPB 사상 처음이었다.
1988년에는 봄에 외상성 견봉하 점액낭염을 앓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료인 다카하시 요시히코와의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 (후술) 이 어깨 통증 때문에 5월 12일부터 2주 동안 1군 등록이 말소되었지만, 근력 트레이닝을 통한 재활로 복귀했다.[14]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 출전과 수위 타자 획득을 달성했다. 시즌 막바지에는 수위 타자를 확정하기 위해 감독 아난 준로가 선발 멤버에서 쇼다를 제외했지만, 쇼다 본인은 "타이틀을 못 따도 경기에 출전하고 싶다"고 호소했다.[15]
1989년에는 히로시마의 최종전을 남기고 먼저 일정을 마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토마시노 겐지가 32도루로 센트럴 리그 최다 도루였지만, 4개 차로 쫓던 쇼다가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인 1경기 6도루(그 중 5개는 당시 포수였던 야마자키 타케시에게서)를 기록해 34도루로, 그 해의 도루왕이 되었다. 또한, 전년에 이어 리그 최다인 7개의 3루타를 기록했다.
1990년에는 1번·유격수의 노무라 겐지로에 이은 2번·2루수를 맡아, 6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견제구를 받고 귀루하다가 오른 어깨를 다쳐 등록이 말소되었지만,[16] 10일 만에 복귀했다. 그 해부터 1992년까지 매년 .29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수비에서도 1991년까지 5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4월에 생애 첫 월간 MVP를 수상했지만, 오른 손목을 부상하여 89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현상 유지인 연봉 7000만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7] 이듬해 1993년에는 이 부상으로 인해 우타석에 전념했다.[13] 그 해에는 121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이 .257로 하락했고, 오프에 스위치 히터 재전향을 위해 10월 25일에 오른 손목 수술을 받았다.[13] 또한, 이 해부터 히로시마의 선수 회장을 맡았다.
1994년부터 히로시마 감독으로 취임한 미무라 토시유키는, 쇼다의 회복이 불확실한 점을 감안하여 오가타 고이치를 2루수로 컨버트하는 것을 검토했다.[13] 이에 대해 쇼다는 깁스를 착용한 채 훈련을 하는 끈기로 2루 포지션을 지켰고, 오가타는 외야수가 되었다. 그 해 오프에는 2500만엔이 인상된 연봉 9500만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8]
1995년 12월부터는 현역 은퇴로 퇴임한 오카다 아키노부의 후임을 찾지 못한 노동 조합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회장이 되었고, 현역 은퇴까지 같은 직을 맡았다. 대학 출신이 아닌 선수가 노조 선수회 회장이 된 것은 2017년 12월의 스미타니 긴지로 (고등학교에서 프로 입단) 취임까지 쇼다뿐이었다.
1996년에는 레귤러 정착 후 최저 타율 .235로 마감했고, 300만엔 삭감된 연봉 1.07억엔으로 계약을 갱신했다.[19]
1997년에는 재기를 걸고, 오픈전에서는 타율 .276으로 괜찮은 상태로 시즌을 맞이했다.[20] 하지만 타격 부진에 빠져 4월 20일에는 선발에서 제외되었고, 11년 만에 시즌 100안타를 밑돌았고 규정 타석에도 미치지 못했고 도루 성공도 처음으로 0회로 끝났다.
1998년에는 코치 겸임이 되었고, 2루도 이 해 야쿠르트에서 테스트 입단한 토마시노 겐지와 병용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의 타격 부진은 해소되었고 규정 타석에 도달했으며 타율도 .274로 부활을 어필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늘리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8월 중순에 구단에 은퇴를 신청했다.[21] 그 해에는 7월 5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1,500안타를 달성, 9월 5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사요나라 안타를 기록하는 등 마지막까지 활약했고, 9월 29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주니치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또한 이틀 전인 9월 2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는 동료인 오노 유타카의 은퇴 경기였고, 자신의 은퇴 경기에서는 씩씩했던 쇼다도 이 경기에서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10] 응원가는 닌자 부대 겟코의 테마송이었다.
은퇴 후에도 히로시마에 남아 1군 내야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지만, 1년 만에 퇴임했다. 당시 내야진은 젊은 선수 위주였고 중심이 될 베테랑이 부족하여 수비의 허점이 눈에 띄었으며, 가마다 미노루는 선 TV 박스석 해설에서 "쇼다는 은퇴를 1년 더 기다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히로시마 퇴단 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1군 주루·타격 코치(2000년 - 2001년) → 1군 타격 코치(2002년 - 2004년)를 역임하여 이소베 코이치와 기타가와 히로토시에게 타격 지도를 행했고[22], 2001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 긴테쓰는 나시타 마사타카 감독·고바야시 시게루 1군 투수 코치·마유미 아키노부 1군 타격 코치가 "남자다운 수뇌진 삼인방"으로 홍보되었지만, 쇼다가 그 삼인방에 섞여 사진 촬영 등을 한 것이, "용자의 스타디움·프로야구 명장면" 등에서 소재로 다루어졌다.
긴테쓰 구단 해산 후에는 3개 구단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2005년 가장 먼저 제안을 받은 한신의 1군 타격 코치에 취임[22]했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아래에서 아카호시 노리히로와 토리타니 다카시에게 맹훈련을 시켰고[22], 같은 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7년에는 팀 타율과 득점이 리그 최하위로 3위로 끝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패배 직후 해고 통보를 받았다[23]。
한신 퇴단 후에는 선 TV 해설자·데일리 스포츠 평론가(2008년)를 맡았고, 같은 해 가을에 김성근이 감독을 맡는 KBO 리그·SK 와이번스에 추계 캠프 임시 코치로 참가했다. 2009년에는 SK 2군 종합 코치에 취임하여, 같은 해 7월에는 타선 부진으로 인해 보직 변경으로 이세 타카오를 대신하여 1군 타격 코치로 승격하여, 시즌 종료까지 맡았다.
귀국 후 2010년, 다시 오카다 감독 아래에서 오릭스 버펄로스 1군 타격 코치에 취임했다. T-오카다에게 "오른발을 들고 치면 완급에 대응할 수 없고, 낮은 변화구를 잡아당긴다"고 하여 노 스텝 타법으로 변경하여 대폭발시켰다[24]。 12월 7일, 야구 명예의 전당 입후보자 명단의 플레이어 부문에 게재되었다[25]。미야자키 유키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캠프 첫날 정다 타격 코치로부터 '너! 그런 플라밍고처럼 다리를 들어서, 그런 걸로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프로를 얕보면 안 된다'는 폼 수정을 지시받았습니다. 완전히 자신의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두 명의 베테랑 코치 (헤드코치 다카다 노부히로와 정다)의 지도에 제가 자신의 방향성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26][27]라고 말했다. 2011년 8월 26일 롯데전 종료 후에 타격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구단 본부장으로 프런트에 들어갔지만[28], 같은 해 오프에 퇴단했다.
오릭스 퇴단 후에는 오사카부가도마시에 있는 NPO 법인에서 복지 활동, 야구 교실, 강연회 등을 하고 있었다. 아동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복지 활동을 하고 있는 NPO 법인의 스폰서가 되어 거액의 기부를 했다.
2015년부터 다시 김성근이 감독을 맡는 한국 KBO·한화 이글스 1군 타격 코치에 취임하여, 2군 육성 겸 수비 코치를 맡았고 2016년 퇴임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기아 타이거즈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기아 퇴단 후에는 "야구와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동기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길을 선택하여, 아마존 재팬 합작 회사에서 파견 사원으로 근무했다. 물류 창고에서 선반에서 내린 상품을 카트에 싣는 일을 했고, 2020년 9월에는 한국의 다른 구단으로부터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아마존에서의 근무를 계속하고 있다[29]。
2021년 2월에 학생 야구 자격을 회복하고, 같은 해 3월 13일부터 교토 세이쇼 고등학교 어드바이저 코치로서 고교 야구 선수 지도를 시작하고 있다[30]。 또한, 아마존에서의 근무도 계속하고 있어, 주 4일은 아마존, 3일은 학교의 그라운드로 향하는 사이클로 활동하고 있다[29]。
사회인 시절에는 금속 배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왼쪽 겨드랑이가 벌어지는 버릇이 있었다.[13] 프로 1년차에 스위치 히터 연습을 시작했을 때, 카프에는 다카하시 요시히코나 야마자키 류조 등 이미 양쪽 타자 전향에 성공한 선수가 있었지만, 쇼다는 코치 우치다 준조로부터 "따라하는 것으로 통용될 정도로 프로는 달콤하지 않으니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라"는 조언을 받아 이에 따랐다.[11] 또한, 우치다의 지시로 1,200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절구공이형 배트를 사용해 최단 거리로 배트를 볼에 맞추는 스윙을 익혔다.[11] 우타석에서도 연습을 거듭하여, 동일한 스윙을 익혔다.[13] 젊은 시절부터 준족을 활용하는 땅볼 타법 스윙을 갈고 닦은 것을 도요다 야스미쓰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8]
우타석만 사용했던 1993년에는 부상도 있어서 타율이 .257로 낮았으며, 쇼다 본인은 양쪽 타자로 전향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가 한계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13] 좌타석에서는 1루까지의 거리가 2걸음이나 짧아졌다고 하며, 처음으로 수위 타자가 된 1987년에는 33개의 내야 안타를 기록했다.[31] 또한 그 중 번트 안타는 15개에 달해, 번트 시의 타이밍과 요령이 주위로부터 평가받았다.[31] 세이프티 번트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상대 수비가 얕아지는 효과가 있어, 히트 존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었다.[32]
좌타를 익히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한때는 전향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우치다에게 험악한 표정으로 호통을 듣고 다시 연습에 매달렸다.[15] 시노즈카의 광각 타법에 동경을 느꼈지만, 시노즈카가 2루 주자가 되었을 때 느린 공의 타법을 물어 "자신도 힘을 빼고 치면 된다"는 답변을 듣고, 따라할 수 없다고 느꼈다.[15] 참고로, 1994년에는 1년 만에 양쪽 타자로 복귀했지만, 몸이 스윙을 기억하고 있어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13] 손목 부담 경감을 위해, 그 해부터 배트를 경량의 880그램으로 바꿨다.[13]
3. 야구선수 은퇴 후
1999년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수비 주루·타격 코치, 2005년부터 3년간 한신 타이거스에서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39]
2008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고, 같은 해 가을 KBO 리그 SK 와이번스 추계 캠프에 임시 코치로 참가했다. 2009년부터 SK 와이번스 2군 코치를 맡았고, 이후 1군으로 승격되어 코치로 활동하다가 시즌 후 오릭스 버펄로스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다.[39]
2011년 8월 26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종료 후 팀 타격 침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2015년 한화 이글스 타격코치를 거쳐 2017년부터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를 맡았다. 정민철 전 한화 투수가 긴테쓰 스카우트 제의를[40] 받기도 했다. KIA 타이거즈의 우승에 기여했다.
4. 상세 정보
正田 耕三|쇼다 고조일본어는 와카야마 시립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일본제철 히로하타를 거쳐, 198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고바야시 다카시와 함께 팀 내에서 맹연습을 거듭하여, 1987년 캠프에서는 고바야시가 2만 번의 빈 스윙을 하면 쇼다는 그 배인 4만 번을 해냈다[32]。시즌 중에도 히로시마에서의 야간 경기 종료 후에는 니시구 미사사정의 합숙소 연습장, 또는 오노정의 실내 연습장 중 한 곳에서 피칭 머신을 상대로 매일 심야에 타격 연습을 했다. 1988년 유후인에서의 자율 훈련 종료 후에는, 200접시의 온천 만주를 가지고 각 연습장 근처의 집을 돌며 소음을 사과했다[33]。1988년 올스타 게임 출장이 결정되었을 때에는 그 동안의 연습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으며[14], 한때는 코치로부터 연습을 중단당하기도 했다[10]。
수위 타자를 획득한 후에도 좌타를 연마하기 위해 원정에서도 오전 중에 타격 연습을 하고 나서 구장으로 들어갔으며, 홈에서는 구장에서의 조기 특타를 실시했다[15]。{{by|1996년]]에도 가네모토 도모아키나 오가타에 지지 않는 수의 스윙을 해냈다[34]。
4. 1. 수상·타이틀
수상 내역 |
---|
4. 2. 개인 기록
{연도 | 소속팀 | 타수 | 안타 | 홈런 | 도루 | 타율 |
---|---|---|---|---|---|---|
1985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68 | 9 | 0 | 0 | .180 |
1986년 | 244 | 63 | 1 | 10 | .288 | |
1987년 | 458 | 131 | 0 | 11 | .333 | |
1988년 | 436 | 134 | 3 | 12 | .340 | |
1989년 | 578 | 161 | 1 | 34 | .323 | |
1990년 | 522 | 139 | 3 | 9 | .301 | |
1991년 | 555 | 140 | 8 | 9 | .291 | |
1992년 | 409 | 108 | 4 | 15 | .301 | |
1993년 | 512 | 114 | 7 | 4 | .257 | |
1994년 | 526 | 130 | 5 | 3 | .280 | |
1995년 | 537 | 123 | 3 | 7 | .274 | |
1996년 | 556 | 113 | 2 | 4 | .235 | |
1997년 | 366 | 78 | 6 | 0 | .241 | |
1998년 | 425 | 103 | 1 | 0 | .274 | |
통산: 14년 | 6192 | 1546 | 44 | 146 | .287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22]
- 베스트 나인: 2회 (2루수 부문: 1988년, 1989년)[22]
- 골든 글러브 상: 5회 (2루수 부문: 1987년 - 1991년)[22]
- 월간 MVP: 1회 (야수 부문: 1993년 4월)[22]
- 올스타전 MVP: 1회 (1988년 제3전)[22]
- 올스타전 출장: 5회 (1987년 - 1990년, 1992년)[22]
- 1경기 6도루: 1989년 10월 1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NPB 타이기록[22]
4. 2. 1. 첫 기록
- 첫 출장·첫 타석: 1985년 5월 22일, 대 한신 타이거스 6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9회초 대타로 출장, 야마모토 카즈유키를 상대로 삼진[30]
- 첫 안타: 1985년 5월 2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6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30]
- 첫 홈런: 1986년 5월 2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7차전 (이시카와 현립 야구장), 1회 스기모토 타다시로부터 좌월 만루 홈런[30]
4. 2. 2. 기록 달성 경력
正田 耕三|쇼다 고조일본어는 1984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하여 2루수로 수비 보직을 배정받았다. 1987년에 시즌 최고 타율 3할 3푼 3리를 기록해 타격왕 타이틀을 석권했으며, 이듬해인 1988년에도 3할 4푼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9년에는 34도루로 도루왕에 올랐다. 통산 1546안타, 146도루, 44홈런을 기록했다.수상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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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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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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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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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3. 기타
쇼다 고조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과 지도자 경력을 통해 일본 프로 야구와 한국 프로 야구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수상 경력
- 올스타전 출장: 5회 (1987년 ~ 1990년, 1993년)
- 코치 경력
구단 | 직책 | 연도 |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군 내야 수비·주루 코치 | 1999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1군 주루·타격 코치 | 2000년 ~ 2001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 1군 타격 코치 | 2002년 ~ 2004년 |
한신 타이거스 | 1군 타격 코치 | 2005년 ~ 2007년 |
SK 와이번스 | 2군 종합 코치 | 2009년 |
SK 와이번스 | 1군 타격 코치 | 2009년 7월 ~ 시즌 종료 |
오릭스 버펄로스 | 1군 타격 코치 | 2010년 ~ 2011년 |
한화 이글스 | 1군 타격 코치 2군 육성 겸 수비 코치 | 2015년 ~ 2016년 |
기아 타이거즈 | 1군 타격 코치 | 2017년 ~ 2019년 |
- 기타 활동:
- 선 TV 해설자 및 데일리 스포츠 평론가 (2008년)
- NPO 법인 복지 활동, 야구 교실, 강연회 (오릭스 퇴단 후)
- 아마존 재팬 합작 회사 파견 사원 (기아 퇴단 후)
- 교토 세이쇼 고등학교 어드바이저 코치 (2021년 3월 13일 ~ 현재)
4. 3.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85년 ~ 1998년 | 4 |
1999년 ~ 2004년 | 78 |
2005년 ~ 2007년, 2010년 ~ 2011년, 2017년 ~ 2019년 | 87 |
2009년 | 88 |
2015년 ~ 2016년 | 81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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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Kozo Shoda
https://www.baseball[...]
2020-05-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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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犬猿の仲」高橋慶彦×正田耕三、禁断の対談が実現。「天才やもん、あいつ」と頭にきていた選手は?|プロ野球|集英社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https://sportiva.shu[...]
2021-11-30
[3]
간행물
Number
1998-08-13
[4]
간행물
月刊THE CARP
2015-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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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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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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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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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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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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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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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7-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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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
1998-12-2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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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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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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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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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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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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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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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23年 第51回競技者表彰委員会 野球殿堂入り候補者名簿」発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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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崎祐樹連載#13】1年目のキャンプ 正田耕三打撃コーチの指導との相性は良くなかった
https://www.tokyo-sp[...]
東京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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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崎祐樹連載#14】プロ1年目の沖縄キャンプで完全に自分の方向性を見失ってしま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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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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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リックス】正田打撃コーチ引責辞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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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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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元首位打者の正田耕三氏は今、高校野球指導とアマゾン勤務の二刀流 そのワケは?
https://www.daily.co[...]
2021-03-1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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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広島の正田耕三氏「目標は甲子園!」 京都成章のコーチとしてスタート
https://www.daily.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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ヴェテラ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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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回】【カープファン必見】32年の時を経てあの夢の二遊間が今復活!正田耕三さん登場!正田あの時はごめん!【高橋慶彦】【カープ】【正田耕三】【カープOBを回る旅】【第2弾】
https://www.youtube.[...]
202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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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오릭스행' 쇼다, "SK 타선, 8개 구단 최고"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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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송진우 정민철 '러브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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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199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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