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 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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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몬 괴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친위대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소장이었다. 그는 나치당 활동을 시작하여 SS에 입대했고, 루블린에서 Operation Reinhard에 참여하여 유대인 격리와 학살에 관여했다. 플라쇼프 수용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수감자들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살해했으며, 전쟁 후 체포되어 폴란드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그의 행적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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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 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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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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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몬 레오폴트 괴트 |
별명 | 푸와쇼프의 도살자 |
SS 경력 | |
충성 | 나치 독일 |
소속 | (친위대) |
복무 기간 | 1930년–1945년 |
계급 | (친위대 대위) |
부대 | (친위대 해골 부대) |
지휘 | 푸와쇼프 노동 수용소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08년 12월 11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일 | 1946년 9월 13일 |
사망지 | 몬텔루피히 교도소, 크라쿠프, 폴란드 |
배우자 | |
파트너 | 루스 이레네 칼더 |
자녀 | 4명 |
재판 및 형벌 | |
재판 | 최고 국가 재판소 |
유죄 판결 | 인도에 반하는 죄 |
형벌 | 사형 |
상태 | 사형 집행 |
2. 초기 생애 및 나치 활동
아몬 괴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반유대주의 및 나치즘에 경도되었다. 그는 17세에 나치 청소년 단체에 가입하고, 이후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준군사 단체인 ''Heimwehr''(향토 방위군)를 거쳐 1930년 나치당과 오스트리아 SS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나치 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빈에서 SS 대원으로 활동하며 승진했으나, 오스트리아 내 나치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폭발물 획득 등 불법 활동에 연루되어 독일로 도피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1938년 안슐루스 이후 빈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점령지 폴란드에서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제국 위원부(RKFDV) 소속으로 활동하며 나치의 인종 정책 실행에 관여했다. 1942년 여름에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투입되어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의 구체적인 가족 배경, 초기 나치 활동 및 SS 경력, 그리고 전쟁 중의 행적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아몬 프란츠 괴트(Amon Franz Göthde)는 1908년 12월 11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사 서적 전문 출판사인 "아몬 프란츠 괴트 출판사(Verlagsanstalt Amon Franz Göthde)"를 소유한 프란츠 괴트였고, 어머니는 베르타(결혼 전 성씨 슈벤트(Schwendt))였다. 괴트는 외아들이었다. 괴트 가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상류 중산층에 속했고 당시 고급품이던 자동차도 소유하고 있었다.아버지 프란츠는 해외 출장이 잦았고, 어머니 베르타가 부재 시 회사를 경영했다. 부모가 모두 바빴기 때문에 아버지 쪽 숙모인 케테(Kathy)가 주로 괴트를 양육했다.
괴트는 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실과 김나지움을 다녔다. 이후 Waidhofen an der Thaya|바이토벤 안 데어 타야de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빈으로 돌아와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다.
그는 17세에 나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반유대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준군사조직인 ''Heimwehr''(향토 방위군)의 회원이었다. 1930년 9월, 그는 당원 번호 510,764번을 부여받고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SS에도 입대하여 SS 번호 43,673번과 SS-''Mann'' 계급을 받았다.
1937년까지 잠시 SS와 나치당 활동을 중단하고 뮌헨에서 살면서 부모의 출판 사업을 도우려 했다. 그는 부모의 권유로 결혼했으나 몇 달 만에 이혼했다.
1938년 안슐루스 직후 빈으로 돌아와 당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38년 10월 23일, 오토바이 경주에서 만난 안나 가이거와 SS 민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에 부부는 SS가 요구하는 신체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는데, 1939년 태어나 생후 7개월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아들 페터, 1940년 태어난 아들 베르너, 1941년 태어난 딸 잉게보르크가 있었다. 부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빈에 집을 유지했다.
2. 2. 초기 나치 활동
괴트는 1908년 12월 11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서 출판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괴트는 17세(1925년경)에 나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반유대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준군사 조직인 'Heimwehr'(향토 방위군)의 회원이었다. 그는 1930년 9월, 당원 번호 510,764번을 받고 오스트리아 지부의 나치당에 가입하기 위해 Heimwehr를 탈퇴했다. (다른 자료에서는 1931년5월 31일 정식 입당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괴트는 1932년 오스트리아 SS에 정식 입대하여(SS 번호 43,673) SS-만(SS-''Mann'') 계급을 받았다. (1930년 입대설도 있으나 정식 입대는 1932년으로 여겨진다.)괴트는 빈의 Margareten 구역 Ortsgruppe(지구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곧 Mariahilf 구역으로 옮겨 돌격대(SA)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33년 봄까지 빈에서 SS 부대에 복무하며 52nd SS-Standarte의 부관 겸 소대장(Zugführer)으로 승진했고, 곧 SS-샤르퓌러(SS-''Scharführer'', 분대장) 계급을 받았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당 활동이 불법화되었다. 괴트는 나치당을 위한 폭발물 획득 등 불법 활동과 반나치 성향의 오스트리아 공무원 암살 테러 시도 등으로 수배되자 독일 뮌헨으로 도피했다. 그는 뮌헨에서 라디오와 무기를 오스트리아로 밀수하고 SS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10월 오스트리아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12월에 석방되었다. 1934년 7월, 엥겔베르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총리 암살 시도 사건 이후 다시 체포되었으나, 감옥에서 탈출하여 다하우 강제 수용소 인근의 SS 훈련 시설로 도피했다.
그러나 뮌헨에서 SS 지구 지도자 알프레트 빅글러(Alfred Bigler) 상급대령과의 불화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SS와 나치당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뮌헨에서 부모의 출판 사업을 도우려 했으며, 결혼했지만 몇 달 만에 이혼했다.
1937년 SS 복귀를 허가받은 괴트는 1938년 안슐루스(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직후 빈으로 돌아와 당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일반친위대 부대인 "제89친위대 연대"(SS-Standarte 89)에 소속되었다. 친위대 인종 이주 본부(RuSHA)의 허가를 받아 1938년 10월 23일, 오토바이 경주에서 만난 안나 가이거(Anny Geiger)와 SS 민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 부부는 SS의 엄격한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첫째 아들 페터(1939년생)는 생후 7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베르너(1940년생)와 잉게보르크(1941년생) 두 자녀가 성장했다. 부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빈에 집을 유지했다.
전쟁 발발 후 괴트는 제11 SS 연대(11th SS-Standarte) 제1 SS 돌격대(1st SS-Sturmbann)로 전출되었고, 1940년 11월(다른 자료에서는 1941년 초) SS-오버샤르퓌러(SS-''Oberscharführer'', 상사)로 승진했다. 1940년 3월 국방군(Wehrmacht)에 Unterfeldwebel(하사관) 계급으로 징집되었으나, SS 복무 기록상 실제 복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중반부터 1942년 5월 말까지 괴트는 독일 민족성 강화 국가판무관부(RKFDV)의 카토비체(당시 독일령 상부 슐레지엔 동부) 사무소에서 Einsatzführer(행동 책임자) 겸 재무 담당자로 근무했다. 이 시기 그는 유럽 유대인들을 격리, 이주, 살해하려는 나치의 계획 실행 과정에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41년 7월 14일(다른 자료에서는 1941년 11월) SS-운터슈투름퓌러(SS-''Untersturmführer'', 소위)로 임명되었다.
1942년 여름(또는 8월), 괴트는 루블린으로 전근하여 크라쿠프 지역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SSPF)인 SS-여단지도자 오딜로 글로보치니크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그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참여했는데, 이는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에 3개의 절멸 수용소를 건설 및 운영하는 작전이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기간(약 6개월) 동안 그의 구체적인 활동은 비밀 유지 서약 때문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괴트는 게토 해체 작전, 즉 유대인들을 선별하여 살해하거나 수용소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그의 잔혹함으로 인해 "루블린의 피에 굶주린 개"라는 악명을 얻었다.
2. 3. 친위대 입대 및 초기 경력
괴트는 1908년 12월 11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서 출판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에 나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반유대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준군사 단체인 Heimwehr|향토 방위군de의 회원이었다. 특히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던 '슈타이어마르크 향토방위'(Steirischer Heimatschutzde) 빈 지부에서 활동했다. 1930년 나치당과 향토 방위군 간의 선거 연대 시도가 실패하자, 괴트는 나치즘에 더욱 경도되어 향토 방위군을 탈퇴했다.1930년 9월, 괴트는 당원 번호 510,764번을 부여받고 나치당 오스트리아 지부에 가입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1931년 5월 31일 정식 입당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빈의 Margaretende 구역 지역 조직(Ortsgruppede)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곧 Mariahilfde 지역 조직으로 옮겨 돌격대(SA, Sturmabteilungde)의 정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1930년에 오스트리아 SS에 지원하여 2년간의 후보 기간을 거쳐 1932년에 정식 친위대(SS, Schutzstaffelde) 대원(SS 번호 43,673)이 되었고, SS-Mannde 계급을 받았다. 1933년 1월까지 빈에서 SS 부대(Truppede) Deimel 및 Sturmde Libardi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제52 SS연대(52nd SS-Standartede)의 부관 겸 소대장(Zugführerde)으로 승진했다. 곧이어 SS-Scharführer|분대장de으로 진급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당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어 불법 정당으로 규정되었다. 괴트는 오스트리아 SS 부대의 일원으로서 테러 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나치당을 위해 폭발물을 획득하는 등 불법적인 활동으로 수배되었고, 반나치 성향의 오스트리아 정부 관료 암살 테러에도 연루되어 독일 뮌헨으로 도피했다.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밀리에 오가며 라디오와 무기를 오스트리아로 밀반입하고 SS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1933년 10월 오스트리아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12월에 석방되었다. 1934년 7월, 나치 당원들이 일으킨 엥겔베르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총리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구금되었으나, 감옥에서 탈출하여 다하우 강제 수용소 옆에 위치한 다하우의 SS 훈련 시설로 도피했다.
그러나 뮌헨에서 SS 지구 지도자였던 알프레트 비글러(Alfred Biglerde) 친위대 상급대령(Oberführerde)과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1934년부터 1937년까지 SS와 나치당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뮌헨에서 살면서 부모의 출판 사업을 도왔으며, 부모의 권유로 결혼했으나 몇 달 만에 이혼했다.
1937년 SS 복귀를 허가받았고,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직후 빈으로 돌아와 당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빈에 주둔한 일반 친위대 부대인 제89친위대 연대(89th SS-Standartede)에 소속되었다. 친위대 인종 및 정착본부(RuSHA)의 엄격한 신체검사와 승인을 거쳐 1938년 10월 23일, 오토바이 경주에서 만난 안나 가이거(Anny Geigerde)와 SS 규정에 따른 민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첫째 아들 페터는 1939년에 태어나 생후 7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베르너(1940년생)와 잉게보르크(1941년생) 두 자녀만 성장했다. 괴트 부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빈에 집을 유지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괴트는 제11친위대 연대(11th SS-Standartede)의 제1돌격대(1st SS-Sturmbannde)로 전출되었고, 1940년 11월(혹은 1941년 초)에는 SS-Oberscharführer|상사de로 승진했다. 1940년 3월 5일 국방군(Wehrmacht)에 Unterfeldwebel|하사관de 계급으로 징집된 기록이 있으나, 그의 지속적인 SS 복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실제 군 복무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중반부터 1942년 5월 말까지, 괴트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제국 위원부(RKFDV, Reichskommissariat für die Festigung deutschen Volkstumsde)의 오버슐레지엔 동부 카토비체 지부에서 작전 지도자(Einsatzführerde) 겸 재정 담당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점령지 폴란드에서 독일 민족의 이주 및 정착 업무와 함께, 유럽 유대인들을 격리, 이주시키고 살해하는 나치의 정책 집행에 관여하며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복무 태도와 신체적, 이념적 특성을 칭찬하는 복무 증명서(Dienstleistungszeugnisde)를 받기도 했다. 1941년 7월 14일(혹은 11월)에는 SS-Untersturmführer|소위de로 진급했다.
1942년 여름(혹은 8월), 괴트는 루블린으로 전근되어 크라쿠프 지역의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SSPF)인 SS-Brigadeführer|여단지도자de 오딜로 글로보크니크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그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에 3개의 절멸 수용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작전이었다. 작전 참가자들은 비밀 유지 서약을 했기 때문에 이 시기 괴트의 구체적인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루블린 게토를 비롯한 여러 게토 해체 작전을 지휘하며 유대인들을 선별하여 살해하거나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극도의 잔혹함으로 인해 괴트는 "루블린의 피에 굶주린 개"라는 악명을 얻었다.
3. 친위대 경력
1943년 2월 11일, 아몬 괴트는 친위대-해골부대에 배속되어 200acre 규모의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 건설 감독 및 지휘를 첫 임무로 맡았다. 이 수용소는 두 개의 오래된 유대인 묘지 부지 위에 노동력 착취를 통해 한 달 만에 건설되었다. 괴트는 다른 강제 수용소 지휘관들과 달리 대도시 출신이었으며, 임명 전 하인리히 힘러와 개인 면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1943년 3월 13일, 크라쿠프 게토가 해산되면서 노동 가능 유대인들은 플라쇼프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노동 부적합자로 판정된 수천 명은 절멸 수용소로 보내져 살해되거나 게토 정리 과정에서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새로 부임한 괴트는 수감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신이다"라고 말하며 수용소 초기 단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플라쇼프에서의 임무 외에도 괴트는 타르누프 게토 해산을 담당하는 장교였다. 당시 타르누프에는 도시 인구의 약 45%에 해당하는 25,000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중 약 10,000명이 노예 노동자로 플라쇼프로 보내졌다. 게토가 해산될 때까지 8,0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고, 마지막 수집은 1943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중무장한 경비대가 에워싼 마그데부르크 광장에 집결했다가 다음 날 정오까지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 중 절반 미만이 여정에서 살아남았으며, 생존자 대부분은 노예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아우슈비츠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1946년 전범 재판 증언에 따르면, 괴트는 게토 해산 과정에서 30명에서 90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직접 사살했다.
1943년 자신의 생일에, 괴트는 플라쇼프에 막 도착한 나탈리아 카르프에게 피아노 연주를 명령했다. 카르프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C-샤프 단조 야상곡을 너무 잘 연주하자 괴트는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이 살도록 허락했다.
괴트는 또한 4,000명의 유대인과 1,500명의 폴란드인 노예 노동자를 수용했던 셰브니에 강제 수용소 해산을 담당하는 장교였다. 괴트의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그는 이 임무를 부하인 SS-하우프샤르퓌러 요제프 그리멕에게 위임했으며, 그리멕은 대량 학살을 위해 수용소 사령관인 SS-하웁트슈투름퓌러 한스 켈러만에게 파견되었다. 1943년 9월 21일부터 1944년 2월 3일까지 수용소는 점차 해산되었다. 거의 모든 폴란드인 수감자들은 플라쇼프 또는 괴트가 지휘하던 보흐니아 게토로 이송되었다. 약 1,000명의 유대인이 인근 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대부분 도착하자마자 가스 처형되었다. 해산 후, 괴트는 수용소의 모든 물품을 정리하여 플라쇼프로 운송하도록 지시했다.
1943년 7월 28일, 괴트는 게토 해산 및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친위대 및 경찰 전문가 부서인 F과에 배정되었다. 1944년 4월까지, 괴트는 친위대 오버슈투름퓌러(중위) 계급을 건너뛰고 하웁트슈투름퓌러(대위) 계급으로 2계급 특진을 받았다. 그는 또한 무장 친위대의 예비 장교로 임명되었다. 1944년 초에 크라쿠프-플라쇼프 노동 수용소의 지위는 친위대 경제행정본부(WVHA)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있는 영구적인 강제 수용소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크라쿠프-플라쇼프는 폴란드에 있는 13개의 공식 강제 수용소 중 하나가 되었다. 괴트의 개인 비서이자 속기사였던 유대인 미에테크 펨퍼는 재판에서 괴트가 악명 높게 만든 무작위적이고 잔혹한 살인의 대부분이 그 초기 기간에 저질러졌다고 증언했다. 1944년 5월 초, 괴트는 10,000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곧 플라쇼프에 수감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새로운 도착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5월 14일에 괴트는 수용소의 모든 아이들을 유치원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괴트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살해했다. 강제 수용소는 노동 수용소보다 친위대에 의해 더 면밀히 감시되었으므로, 지정이 변경되었을 때 상황이 약간 개선되었다.
수용소는 개장 당시 약 2,000명의 수감자를 수용했다. 1944년 운영 최고조에 달했을 때, 636명의 경비원이 25,000명의 영구 수감자를 감독했고, 추가로 150,000명이 이 수용소를 통과하여 통과 수용소 역할을 했다. 생존자들에 의해 거대하고 위압적인 남자로 묘사된 괴트는 매일 개인적으로 수감자들을 살해했다. 그의 두 마리 개, 그레이트 데인인 롤프와 알자스 잡종견인 랄프는 수감자들을 물어 죽이도록 훈련되었다. 그는 너무 느리게 움직이거나 뜰에서 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사무실 창문에서 쐈다. 그는 수프가 너무 뜨거워서 유대인 요리사를 사살했다. 그는 두 명의 하녀인 헬렌 요나스-로젠스바이그와 헬렌 히르쉬를 잔혹하게 학대했는데, 그들은 모든 수감자들처럼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플라쇼프에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괴트는 별장에서 편안하게 살았고, 수용소에서 타는 자동차와 말을 소유했다. 그는 유대인 구두 수선공 수감자에게 매주 새 신발을 만들게 했다.
생존자 헬렌 요나스-로젠스바이그는 "생존자로서 나는 우리가 모두 외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 그런 공포, 그런 잔혹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결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멀리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변소, 숨을 수 있는 곳 어디든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쉰들러의 유대인(Schindlerjuden)''인 폴데크 페퍼버그는 "괴트를 보면 죽음을 본다"고 말했다.
괴트는 작업 팀의 구성원 중 한 명이 탈출하거나 어떤 위반 행위를 저지르면, 전체 팀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한 번은 작업반 중 한 명이 탈출했기 때문에 작업반의 모든 두 번째 구성원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또 다른 경우, 그중 한 명이 수용소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작업반의 모든 다섯 번째 구성원을 개인적으로 사살했다. 수감자들이 음식을 밀수하다가 발각되면 총살당했다. 플라쇼프의 주요 살인 장소는 후요바 구르카였는데, 대량 학살과 살인에 사용된 큰 언덕이었다. 펨퍼는 플라쇼프에서 8,000명에서 12,000명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3. 1.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괴트는 1938년 안슐루스 직후 빈으로 돌아와 나치당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38년 10월 23일 오토바이 경주에서 만난 안나 가이거(Anna Geiger)와 SS 규정에 따른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 부부는 나치 우생학에 기반하여 결혼 적합성을 판단하기 위해 SS가 실시한 일련의 엄격한 신체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빈에 영구적인 집을 유지했다.이름 | 출생 연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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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Peter) | 1939년 | 생후 7개월에 디프테리아로 사망 |
베르너(Werner) | 1940년 | |
잉게보르크(Ingeborg) | 1941년 |
초기에 89 SS-Standartede에 배정되었던 괴트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11 SS-Standartede의 제1 SS-Sturmbannde으로 전출되었고, 1941년 초에 SS-Oberscharführerde(상사)로 진급했다. 1940년 3월 5일, 그는 Wehrmachtde에 Unterfeldwebelde(하사관) 계급으로 징집되었지만, 그의 지속적인 SS 복무 기록으로 보아 실제 복무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중반부터 1942년 5월 말까지, 괴트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제국 위원부( Reichskommissariat für die Festigung deutschen Volkstumsde – RKFDV)의 동부 상부 슐레지엔(East Upper Silesia) 카토비체 사무소에서 Einsatzführerde(행동 책임자) 겸 재무 담당자로 일했다. 이 시기 그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격리, 이주, 살해하려는 나치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 행정가로서 능력을 보였다. 그는 1941년 7월 14일 SS-Untersturmführerde(소위)로 임명되었다. 괴트는 또한 그의 지휘관으로부터 복무 및 그의 신체적, 이념적 특성을 칭찬하는 Dienstleistungszeugnisde(복무 증명서)를 받았다.
1942년 여름, 괴트는 루블린으로 전근하여 크라쿠프 지역의 SS 및 경찰지도자인 SS-Brigadeführerde 오딜로 글로보치니크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그는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에 3개의 절멸 수용소를 건설하는 작전의 암호명인 라인하르트 작전( Operation Reinhardde)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전 참가자들은 비밀 유지를 맹세했기 때문에 그가 라인하르트 작전에서 복무한 6개월 동안의 구체적인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 재판 기록에 따르면, 괴트는 희생자들을 이들 수용소로 이송하고 학살하는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3. 2. 동부 전선 배치 및 '라인하르트 작전' 참여
1941년 중반부터 1942년 5월 말까지, 괴트는 독일 민족 통합을 위한 제국 위원부(Reichskommissariat für die Festigung deutschen Volkstums – RKFDV)의 동부 상부 슐레지엔 카토비체 사무소에서 ''Einsatzführer''(행동 책임자) 겸 재무 담당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유럽의 유대인들을 격리, 이주시키고 살해하려는 나치의 계획 실행에 있어 숙련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나치 체제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1941년 7월 14일, 그는 SS-''Untersturmführer''(소위)로 진급했으며, 그의 지휘관으로부터 복무 태도와 신체적, 이념적 특성을 칭찬하는 ''Dienstleistungszeugnis''(복무 증명서)를 받기도 했다.1942년 여름, 괴트는 루블린으로 전근하여 크라쿠프 지역의 SS 및 경찰지도자였던 SS-''Brigadeführer'' 오딜로 글로보치니크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이는 그가 라인하르트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라인하르트 작전'은 베우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에 세 개의 절멸 수용소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 암호명이었다. 이 작전의 참가자들은 엄격한 비밀 유지 서약을 했기 때문에, 괴트가 라인하르트 작전에 복무한 6개월 동안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괴트는 희생자들을 이들 절멸 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4.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장
1943년 2월 11일, 아몬 괴트는 친위대-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에 배속되어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건설 감독 및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하인리히 힘러와의 개인 면담을 거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당시 강제 수용소 사령관 임명의 일반적인 절차였다. 괴트는 빈 출신으로, 다른 수용소 근무 친위대(SS) 장교들과는 다른 배경을 가졌다.
플라쇼프 수용소는 두 개의 오래된 유대인 묘지 부지에 노동력 착취를 통해 건설되었고, 1943년 3월 크라쿠프 게토 해체 후 노동 가능한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송되면서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괴트는 소장 취임 연설에서 수감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플라쇼프 외에도 타르누프 게토 및 셰브니에 강제 수용소 해산을 지휘하며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플라쇼프 수용소로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1943년 7월 친위대 대위(SS-Hauptsturmführer)로 2계급 특진했다.
괴트는 극도의 잔혹성으로 악명 높았으며, 수감자들에 대한 자의적인 살해와 학대를 일삼아 "플라쇼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44년 초, 플라쇼프 수용소는 친위대 경제행정본부(WVHA) 직할의 정식 강제 수용소로 지위가 변경되었고, 이로 인해 괴트의 자의적인 폭력 행사가 다소 제약을 받게 되었다는 증언도 있으나, 그의 잔혹 행위는 계속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무장 친위대 예비역 대위로 임명되었다. 수용소는 운영 최고조에 달했을 때 2만 5천 명 이상의 상시 수감자를 관리했다.
괴트는 수감자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전선 배치를 피하기 위해 수용소 존속에 힘썼다. 그의 부패와 잔혹함, 부하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는 결국 내부 고발로 이어져 친위대 수사 판사 콘라트 모르겐(Konrad Morgen)의 조사를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4. 1. 소장 임명 및 권한
아몬 괴트는 1943년 2월 11일 친위대-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에 배속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건설 감독 및 지휘였다. 이 수용소는 2개의 오래된 유대인 묘지 부지에 노동력 착취를 통해 건설되었으며, 1943년 3월 13일 크라쿠프 게토가 해체되면서 노동 가능한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괴트는 임명 전 하인리히 힘러와 직접 면담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당시 강제 수용소 사령관 임명의 일반적인 절차였다.수용소 사령관(Kommandant)이 된 괴트는 새로 온 수감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신이다"라고 선언했으며, 특히 초기에는 수용소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미에테크 펨퍼는 괴트의 악명 높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살인 대부분이 바로 이 절대 권력을 누리던 초기에 자행되었다고 증언했다.
1943년 7월 28일, 괴트는 게토 해체 및 이송을 전문으로 하는 친위대 및 경찰 전문가 부서(Fachgruppe F)에 배치되었다. 1944년 4월에는 친위대 하우프트슈투름퓌러(Hauptsturmführer, 대위) 계급으로 진급했는데, 이는 오버슈투름퓌러(Obersturmführer, 중위) 계급을 건너뛴 이례적인 2계급 특진이었다. 또한 무장 친위대의 예비역 장교로도 임명되었다.
1944년 초, 크라쿠프-플라쇼프 노동 수용소는 친위대 경제행정본부(WVHA) 직할의 정식 강제 수용소로 지위가 변경되었다. 이로써 플라쇼프는 폴란드 내 13개 공식 강제 수용소 중 하나가 되었다. 정식 강제 수용소는 노동 수용소보다 친위대의 감시가 더 엄격했기 때문에, 지위 변경 후 수용소 상황이 다소 개선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4. 2. 크라쿠프 게토 해체
1943년 3월 13일, 크라쿠프 게토가 해체되었다. 이 해체 작업은 아몬 괴트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게토의 유대인 주민 중 노동이 가능하다고 판단된 이들은 새로 건설된 플라쇼프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반면, 노동 부적합자로 분류된 수천 명은 절멸 수용소로 보내져 살해당했으며, 게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치는 수백 명 이상의 유대인을 거리에서 살해했다. 괴트는 플라쇼프 수용소에 새로 도착한 수감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신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했다.thumb
4. 3. 잔혹 행위 및 사치스러운 생활
1943년 2월 11일, 아몬 괴트는 친위대 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에 배속되어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감독 및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친위대 내에서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빈 출신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 근무 장교들과는 다른 배경을 가졌다. 수용소 사령관 임명 전 하인리히 힘러와 개인 면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플라쇼프 수용소는 오래된 유대인 묘지 부지에 노동력 착취를 통해 건설되었으며, 1943년 3월 13일 크라쿠프 게토가 해체되면서 일할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노동력이 없다고 판단된 수천 명은 절멸 수용소로 보내졌고, 수백 명은 게토 정리 과정에서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괴트는 새로 부임한 수감자들에게 "나는 너희의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초기에는 수용소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당시 친위대 소위 계급으로는 이례적인 소장 취임이었는데, 이는 동부 전선 악화로 인한 인력 부족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의 강제 노동 수용소"는 일반 강제 수용소와 달리 통일된 규칙이 없어 소장인 괴트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괴트는 플라쇼프 외에도 타르누프 게토 해산을 지휘했다. 약 1만 명의 유대인이 플라쇼프로 보내졌고, 1943년 9월 1일 게토의 최종 해체 시 남은 8천 명의 유대인 대부분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절반 이상이 이송 중 사망하거나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괴트는 전후 재판 증언에서 타르누프 게토 해산 과정에서 30명에서 90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직접 사살했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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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괴트는 셰브니에 강제 수용소 해산을 담당했으며, 이 임무를 부하인 친위대 하우프샤르퓌러 요제프 그리멕에게 위임하여 대량 학살을 지시했다. 1943년 9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수용소가 점진적으로 해체되면서 폴란드인 수감자들은 플라쇼프 등으로 이송되었고, 약 1천 명의 유대인은 인근 숲에서 총살, 나머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대부분 가스 처형되었다. 괴트는 해산 후 수용소 물품을 플라쇼프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1943년 7월 28일, 괴트는 게토 해산 및 이송 전문 부서인 F과에 배정되었고, 같은 해 동부 친위대 및 경찰 고급 지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뤼거와 크라쿠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율리안 셸너의 추천으로 친위대 중위 계급을 건너뛰고 친위대 대위(SS-Hauptsturmführer)로 2계급 특진했다. 1944년 4월 20일에는 무장 친위대 예비역 대위가 되어 군 장교 반열에 올랐다.
1944년 초, 플라쇼프 수용소는 친위대 경제행정본부(WVHA) 직속의 영구 강제 수용소로 지위가 변경되었다. 이는 플라쇼프를 폴란드 내 13개 공식 강제 수용소 중 하나로 만들었다. 괴트의 개인 비서였던 미에테크 펨퍼는 괴트의 무작위적이고 잔혹한 살인이 주로 이 지위 변경 이전에 행해졌다고 증언했다. WVHA의 감독 강화로 인해 수감자 처형 및 고문에 본부 허가가 필요해지면서 괴트의 자의적인 살해는 다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1944년 5월, 헝가리 유대인 1만 명 수용을 위해 기존 수감 아동 대부분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살해하는 등 잔혹 행위는 계속되었다. 강제 수용소로 지정 변경 후 상황이 약간 개선되기는 했다.
수용소 운영 최고조에는 2만 5천 명의 상시 수감자와 15만 명의 통과 수감자를 636명의 경비원이 감독했다. 생존자들은 괴트를 키 193cm, 몸무게 120kg의 거구로 묘사했으며, 그는 매일 수감자들을 개인적으로 살해했다. 그는 롤프(그레이트 데인)와 랄프(알사티안 잡종)라는 두 마리 개를 훈련시켜 수감자들을 공격하게 했고, 사무실 창문에서 느리게 움직이거나 쉬는 수감자들을 저격총으로 쏘았다. 수프가 너무 뜨겁다는 이유로 유대인 요리사를 사살했으며, 하녀였던 헬렌 요나스-로젠스바이그와 헬렌 히르쉬를 잔혹하게 학대했다. 헬렌 요나스-로젠스바이그는 "생존자로서 나는 우리가 모두 외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 그런 공포, 그런 잔혹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결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멀리서 보았을 때, 모든 사람이 변소, 숨을 수 있는 곳 어디든 숨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는 처형 기록을 카드에 모아 친족까지 말살하려 했다. 이러한 행위로 그는 "플라쇼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다른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 폴데크 페퍼버그는 "괴트를 보면 죽음을 본다"고 말했다. 괴트는 연대 책임을 물어 작업반원 중 한 명이 탈출하면 두 번째 구성원마다 사살하거나, 돌아오지 않으면 다섯 번째 구성원마다 직접 사살했다. 음식 밀반입이 발각된 수감자도 총살했다. 플라쇼프의 주요 처형 장소는 후요바 구르카("Prick Hill")라는 언덕이었다. 펨퍼는 플라쇼프에서 8천 명에서 1만 2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괴트는 국고에 귀속되어야 할 유대인 재산을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별장에서 파티를 열고, 매주 새 신발을 맞추고, 여러 대의 자가용 말과 차를 소유했다. 그는 비만과 심한 당뇨병을 앓고 있어 전선 배치를 피하려 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이지 않은 물품(브러시, 유리 제품, 섬유 제품, 신발 등)을 생산하는 플라쇼프 수용소의 존속에 힘썼다. 괴트는 부하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하며 사소한 잘못으로 징계 위원회나 경찰에 넘기면서 자신은 공공연히 암거래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부하 친위대원들이 친위대 수사 판사 콘라트 모르겐(Konrad Morgen) 박사에게 "우리 군 병사들이 독소전에서 죽어가는데 괴트는 파샤(Pasha)처럼 살고 있다"는 내용의 소장을 보내기도 했다.
1943년 괴트의 생일에는 플라쇼프에 막 도착한 나탈리아 카르프에게 피아노 연주를 명령했는데, 카르프가 프레데리크 쇼팽의 야상곡 다 단조를 훌륭하게 연주하자 그녀와 여동생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다.
4. 4. 셰브니에 강제 수용소 해산
아몬 괴트는 4,000명의 유대인과 1,500명의 폴란드인 노예 노동자를 수용했던 셰브니에 강제 수용소 해산을 담당하는 장교이기도 했다. 괴트의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그는 이 임무를 부하인 친위대 하우프샤르퓌러(Hauptscharführer) 요제프 그리멕에게 위임했으며, 그리멕은 대량 학살을 위해 수용소 사령관인 친위대 하웁트슈투름퓌러(Hauptsturmführer) 한스 켈러만에게 파견되었다.1943년 9월 21일부터 1944년 2월 3일까지 수용소는 점진적으로 해산되었다. 거의 모든 폴란드인 수감자들은 플라쇼프 또는 괴트가 지휘하던 보흐니아 게토로 이송되었다. 약 1,000명의 유대인은 인근 숲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나머지는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대부분 도착하자마자 가스 처형되었다. 해산 후, 괴트는 수용소의 모든 물품을 정리하여 플라쇼프로 운송하도록 지시했다.
5. 몰락과 처형
1944년 9월 13일, 아몬 괴트는 유대인 재산 절도, 수감자 학대, 강제 수용소 규정 위반 등의 혐의로 SS에 의해 기소되어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 이후 플라쇼프 수용소의 관리는 SS-''오버슈름führer'' 아르놀트 뷔셔에게 넘어갔으며, 수용소는 1945년 1월 15일에 폐쇄되었다. 괴트는 SS 법정에 서게 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1945년 초 그에 대한 혐의는 기각되었다. 이후 SS 의사들은 그에게 정신 질환 진단을 내렸고, 바이에른 바트 퇼츠의 정신병원에 잠시 수용되었다.
종전 후인 1945년 5월, 괴트는 미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국방군 군복을 입고 자신의 SS 신분을 숨기려 했으나, 결국 정체가 드러났다. 생존자 요제프 레브코비츠 등의 노력으로 그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재판을 위해 폴란드로 인도되었다.
괴트는 1946년 8월 27일부터 9월 5일까지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최고 국가 재판소의 재판을 받았다. 재판 결과, 그는 나치당 가입, 수감자들에 대한 투옥, 고문, 학살 명령, 그리고 다수의 살인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그의 살인죄 유죄 판결은 전쟁 범죄 재판 역사상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괴트는 1946년 9월 13일, 크라쿠프의 몬텔루피치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비스툴라 강에 뿌려졌다.
5. 1. 체포 및 재판

1944년 9월 13일, 아몬 괴트는 휴가를 받아 고향 빈으로 돌아갔다가 SS에 의해 현지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유대인 재산 절도(나치 규정에 따르면 국가 소유), 그가 관리하던 수감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을 제공하지 않은 점, 수감자 처우 및 처벌에 관한 강제 수용소 규정 위반, 그리고 수감자와 부사관이 수용소 인력 기록에 무단으로 접근하도록 허용한 점 등이었다. 이러한 부패 및 학대 혐의에 대한 조사는 SS 판사 게오르크 콘라트 모르겐 박사가 주도했는데, 그는 이전에 루블린 강제 수용소 소장 헤르만 플로어슈테트나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소장 카를 오토 코흐 같은 다른 수용소 고위 간부들도 동일한 죄목으로 체포하여 처형시킨 바 있다.
괴트가 직위에서 해임된 후 플라쇼프 수용소의 관리는 SS-''오버슈름führer'' 아르놀트 뷔셔에게 넘어갔으며, 이 수용소는 1945년 1월 15일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 괴트는 모르겐 판사 앞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1945년 초, 뮌헨 법원은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그에 대한 기소를 기각하거나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괴트는 SS에서 제대하게 되었다. SS 의사들은 괴트에게 정신 질환 진단을 내렸고, 그는 바이에른 바트 퇼츠에 있는 정신병원에 잠시 수용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의 구치소 생활로 괴트는 상당히 야윈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1월, 민간인 신분이 된 괴트는 브륀리츠에 위치한 오스카 쉰들러의 공장을 방문했다. 당시 쉰들러는 겁에 질린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는 이제 단순한 민간인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5월, 괴트는 미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그는 국방군 군복을 입고 자신의 SS 장교 신분을 숨기려 했다. 그는 과거 다하우 강제 수용소가 있던 자리에 마련된 임시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2020년대 연구에 따르면, 생존자 요제프 레브코비츠의 증언, 즉 미군이 처음에는 포로들 사이에서 괴트를 놓쳤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1946년, 레브코비츠는 괴트를 추적하여 그의 신원을 확인했고, 크라쿠프-플라쇼프 수용소의 다른 생존자들에게 추가적인 신원 확인을 요청하며 그를 재판에 회부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5. 2. 사형 집행
전쟁 후, 아몬 괴트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 부지에 설치된 포로 수용소에서 미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독일 국방군 제복을 입고 자신이 일반 병사라고 주장했지만, 곧 정체가 발각되었다. 결국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횓과 함께 폴란드로 인도되었다.
1945년 7월 크라쿠프로 이송된 괴트는 1946년 8월 27일부터 9월 5일까지 폴란드 최고 국가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된 나치당에 가입한 혐의와 개인 및 집단의 투옥, 고문, 학살을 명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구체적으로는 프와쇼프 수용소에서 8,000명 살해 책임, 크라쿠프 게토에서 2,000명 학살에 대한 공동 책임, 여러 수용소에서 수백 명을 처형한 책임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직접 살해하고, 불구로 만들고, 고문한 혐의로 살인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전쟁 범죄 재판에서 내려진 최초의 유죄 판결 중 하나였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 측이 증인으로 부를 유대인의 이름을 읽자, 괴트는 "뭐? 그렇게 많은 유대인이 아직 남아있어? 돼지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았어야 했는데"라고 외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은 단지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제기된 혐의는 다른 친위대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증인들이 그의 살인 행위를 증언할 때는 얼굴을 돌리거나 증언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결국 괴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구성원이라고 주장하며 감형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기각되었다.
1946년 9월 13일, 크라쿠프의 몬텔루피치 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곳은 그가 지휘했던 플라쇼프 수용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괴트는 키가 매우 컸기 때문에 형 집행 과정에서 밧줄이 두 번이나 끊어지는 일이 발생했고, 세 번째 시도 끝에 목뼈가 부러져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하일 히틀러"였다.
괴트의 유해는 화장된 후 비스와 강에 뿌려졌다.
6. 가족 관계
괴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4년 부모의 권유로 이루어졌으나 약 1년 만에 끝났다. 1938년 10월 23일에는 인스브루크 출신의 아니 가이거(Anny Geiger)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아니와의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장남 페터는 생후 9개월 만에 사망했고, 장녀 잉게보르크(잉게)는 1990년대 초에, 차남 베르너는 1960년대 말에 사망했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괴트는 브레슬라우 또는 글라이비체 출신의 미용사이자 배우 지망생이었던 루트 이레네 칼더(Ruth Irene Kalderde)와 프와슈프 수용소 소장 시절 2년가량 연인 관계를 맺었다. 칼더는 1942년 혹은 1943년 초 오스카 쉰들러의 에나멜 공장에서 비서로 일하며 괴트를 처음 만났다. 쉰들러의 주선으로 만남이 이루어졌고, 칼더는 괴트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전해진다. 칼더는 곧 괴트와 동거하며 불륜 관계를 시작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째 부인 아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괴트는 아니와 이혼하고 루트와 재혼할 생각이었다. 칼더는 수용소 자체는 방문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프와슈프에서 괴트와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녀는 훗날 이 시기를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남편 괴트는 왕이었고 나는 왕비였다. 누구라도 싫어할 리 없겠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만이 유감입니다"라고 회상했다. 루트는 기본적으로 수용소 내의 일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때때로 그녀의 개입으로 일부 수감자들이 고문이나 총살을 피했다는 증언도 있다.
1945년 11월 7일, 칼더는 딸 모니카 크리스티아네 괴트(Monika Christiane Göthde, 훗날 모니카 헤르트비히)를 바트 퇼츠에서 출산했다. 이 아이는 괴트의 마지막 자녀였다. 괴트가 1946년 처형된 후, 루트는 괴트의 아버지가 아들과 루트의 약혼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괴트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후에도 괴트를 옹호하며 "그는 잔혹한 살인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몬이 몇몇 유대인을 살해한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다수는 아닙니다. 그런 수용소는 유원지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등 그의 잔혹 행위를 축소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루트 칼더는 폐기종으로 투병하다가, 1983년 다큐멘터리 '쉰들러' 인터뷰 직후 자살했다.
괴트의 딸 모니카 헤르트비히는 2002년 회고록 ''Ich muß doch meinen Vater lieben, oder?de''(나는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하는가?)''를 출간하며 아버지의 홀로코스트 범죄와 마주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녀는 어머니 루트 칼더가 홀로코스트에서의 아버지 역할을 직시하기 전까지 그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했다고 밝혔다. 모니카는 2006년 제임스 몰 감독의 다큐멘터리 ''Inheritance''에 출연하여, 아버지의 만행으로 고통받았던 유대인 생존자 헬렌 요나스-로젠와이그(Helen Jonas-Rosenzweig)와 만나기도 했다. 이 만남은 헤르트비히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요나스-로젠와이그는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우리는 살해된 사람들을 위해 이 일을 해야 합니다"라는 헤르트비히의 편지를 받고 만남에 동의했다. 요나스-로젠와이그는 인터뷰에서 헤르트비히를 만나는 것이 괴트에 대한 기억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녀 역시 피해자이며 독일에서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용기를 가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세상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그녀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당신도 알다시피… 그녀는 키가 크고, 특정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많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매우 증오했죠. 하지만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독일에서 그 이야기를 기꺼이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사람들은 알고 싶어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가해자의 자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가 그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모니카에게 동정심을 느낍니다. 저는 어머니이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가해자였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들도 그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모두 여기 온 이유입니다. 세상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야 합니다.
모니카는 2011년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חנוך זאביhe(하노흐 제에비)가 감독하고 제작한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아이들''에도 출연하여 다른 나치 지도자들의 후손들과 함께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2005년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행동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직 생존해 있는 전쟁 범죄자는 추구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모니카는 1970년 나이지리아 유학생과의 사이에서 딸 제니퍼 티게를 낳았으나 입양 보냈고, 1971년 독일인과 결혼하여 1976년 딸 이바테를 낳았다. 이바테는 약물 중독 문제를 겪었으며, 2001년 아들 다비트 아몬 괴트를 낳았다.
괴트의 손녀인 제니퍼 티게는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외할아버지가 아몬 괴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충격적인 경험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 ''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원제: Amon. Mein Großvater hätte mich erschossende, 한국어판 제목: 할아버지는 아몬 괴트)''를 2013년 출간했다.
괴트의 아버지 프란츠는 기회주의적으로 나치당에 입당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들의 처형 이후 루트 칼더가 괴트 성을 사용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편 전후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괴트는 프와슈프 수용소장 시절에도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녀들의 안부나 가업의 상황 등을 물었다. 아내 아니로부터 아들 베르너가 누나 잉게를 때렸다는 편지를 받고 "때리는 것은 아마 내 피일 것이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괴트의 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에서의 행위는 랄프 파인즈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 그를 연기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파인즈는 인터뷰에서 괴트를 연기하며 그의 '평범함', '일상성'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괴트가 자신의 일의 어려움에 대해 불평하는 등 일상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자 했다.
파인즈는 이 역할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묘사는 미국 영화 연구소(AFI)의 역대 영화 악당 50인 목록에서 15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실존 인물 묘사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플라쇼프 생존자 밀라 페퍼버그는 영화 촬영장에서 SS 제복을 입은 파인즈를 만났을 때, 실제 아몬 괴트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참을 수 없이 떨었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 괴트는 오스카 쉰들러와 대조적인 악역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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