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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사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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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베 사다 사건은 1936년 일본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게이샤와 창부로 일하던 아베 사다가 연인 이시다 키치조를 살해하고 성기를 절단한 사건이다. 사건은 1936년 5월 18일 발생했으며, 아베 사다는 이시다의 목을 졸라 질식사시킨 후, 성기를 절단하여 소지했다. 체포된 아베 사다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소 후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아베 사다 패닉'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며,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쳐 영화, 소설, 연극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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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사다 사건
사건 개요
아베 사다 사건 현장
사건 현장이 된 오쿠의 기다림 장소 "만사키" (마사키)
명칭아베 사다 사건
공식 명칭해당 없음
장소도쿄시아라카와구오쿠산교치 (현 도쿄도 아라카와구 니시오구 2초메 7-9)
날짜1936년5월 18일 오전 2시 (일본 시간)
개요나카이였던 아베 사다가 애인 남성을 교살하고, 음경을 잘라냈다.
원인애인에 대한 독점욕
수단교살
무기허리끈
사망자1명
범인아베 사다
관할다카나와 경찰서

2. 사건의 배경 및 전개

게이샤창부 등을 하면서 각지를 전전하던 아베 사다는 1935년 4월경, 나고야의 작은 요리집에서 일하던 중 손님으로 온 오미야 고로와 교제하게 되었다. 오미야는 주쿄 상업학교의 교장이자 나고야 시의회 의원으로, 사다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장래에는 오뎅 가게 같은 작은 요릿집을 경영하면 좋겠다며 요리를 배우는 것을 권했다.

1936년(쇼와 11년) 2월 1일, 사다는 "다나카 카요"라는 가명으로 도쿄 나카노에 있는 붕장어 요리점 "요시다야"의 숙식하는 여종업원이 되었다. 10일 정도 지나자 가게 주인 이시다 키치조와 사다는 관계를 맺게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게를 나와 자주 둘이서 만나게 된다. 이시다의 아내도 이 관계를 알게 되었고, 4월 22일 두 사람은 야반도주했다. 시부야, 타마가와의 대기실을 전전하다가 5월 11일부터 도쿄시 아라카와구 오구대기실 "만사키"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이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성행위 중 사다는 나이프를 이시다의 음경에 대고 "이제 다른 여성과 절대 농담하지 말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이시다는 이를 비웃었다. 이틀 밤 연속의 성행위 중, 사다는 이시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이시다는 계속하라고 사다에게 말했다. 성교 중에 목을 조르는 행위는 쾌감을 더한다고 이시다는 사다에게 말했다고 한다. (질식 플레이)

2. 1. 사건 발생

1936년 5월 16일 저녁부터 아베 사다는 이시다 키치조와 함께 오르가슴 중에 이시다의 호흡을 멈추기 위해 허리끈을 사용하며 2시간 동안 성교를 반복했다. 세게 목을 조르자 이시다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울혈이 생겼다. 사다는 이시다의 목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긴자의 시세이도 약국에 가서 좋은 약이 없는지 물었지만, 시간이 지나야 낫는다는 말을 듣고 브로므바레릴요소(칼모친)를 구입하여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 후, 사다는 이시다에게 칼모친을 여러 차례 나누어 총 30정을 먹였다.

사다가 졸기 시작했을 때, 이시다는 "내가 잠들 때, 내 목 주위에 허리끈을 걸어 다시 조여줘. 네가 나를 조르기 시작하면 아프니까 이번에는 멈추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다는 이시다가 농담을 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가졌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5월 18일 오전 2시, 이시다가 잠든 사이, 사다는 두 번 허리끈으로 그를 질식시켜 죽였다. 사다는 나중에 경찰에서 "마치 무거운 짐이 내 어깨에서 올려진 것처럼, 이시다를 죽인 후, 나는 매우 편안해졌다"고 진술했다. 사다는 식칼로 그의 성기를 절단했다. 잡지 표지 (하트론지)에 음경과 고환을 싸서 체포될 때까지 3일 동안 가지고 다녔다.

사다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시트에 "'''사다키치 두 사람 뿐'''", 왼쪽 허벅지에 "'''사다키치 둘'''"이라고 쓰고, 이시다의 왼팔에 식칼로 "'''사다'''"라고 새겼다. 이시다의 스테테코와 셔츠를 허리 감개 아래에 넣고 사다는 숙소 사람에게 "(키치조는) 몸이 안 좋아서 자고 있으니 오후까지 깨우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오전 8시쯤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온 후, 사다는 오미야 고로를 만나 반복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사다의 살인을 아직 모르는 오미야는 사다가 또 다른 연인을 데려간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오미야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사다와 육체 관계를 맺었다. 오미야와 헤어진 사다는 그날 밤, 아사쿠사의 여관에서 묵었다.

사다의 사과는 자신과 오미야의 교제가 스캔들을 일으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사키의 여자 종업원이 사다의 편지를 오미야의 숙소에 전달한 적이 있어 발각은 시간 문제였다. 이 직후, 오미야는 중요 참고인으로 오구 경찰서에 신병이 구속되어, 엄중한 조사를 받았지만, 범행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2. 2. 범행 이후

5월 19일, 사다는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았다. 시나가와역 앞의 숙관(시나가와 관)에 오오와다 나오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숙박했다. 오사카로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석간 신문에서 각 역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다는 마사지를 받고, 맥주 3병을 마시고, 오오미야 고로, 친구, 이시다 앞으로 이별 편지를 썼다. 5월 20일 오후 4시, 다카나와서의 안도 형사가 방을 방문하자 "아베 사다를 찾고 있죠? 제가 찾으시는 아베 사다입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형사들은 사다의 침착한 태도에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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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는 체포되자 "저는 그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정식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시다는 다른 여성에게 안길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죽이면, 다른 어떤 여성도 다시는 그를 만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시다의 성기를 절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그의 머리나 몸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항상 그의 곁에 있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범죄의 자세한 내용이 공표되었을 때의 유언비어에서는, 이시다의 음경이 놀라운 크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체포 후, 사다에게 질문한 경찰은 이를 부정했다. "이시다의 것은 딱 평균이었습니다. 저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테크닉과 헌신적인 애무를 하는 이시다가 좋았습니다"라고 사다는 답했다. 사다 체포 후, 이시다의 음경과 고환은 도쿄 의과대학 병리학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반에게 공개했던 듯하다.

1936년(쇼와 11년) 12월 21일, 도쿄 형사 지방 재판소는 사다에게 살인 및 사체 손괴죄로 '''징역 6년의 판결(구형 10년)'''(미결 통산 120일)을 받아 복역했다. 1940년 (쇼와 15년)에 "기원 2600년"의 은사로 남은 형기가 1/2로 감형되어, 다음 해 1941년(쇼와 16년) 5월 17일에 출소했다[4]。석방 후, 사다는 이름을 바꾸고 일반인으로서 생활했다.

3. 아베 사다

1905년 5월 28일 도쿄시 간다구 신긴초(현재의 도쿄도 지요다구 칸다타마치) 출생.

3. 1. 체포 및 재판

5월 19일, 사다는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았다. 시나가와역 앞의 숙관(시나가와 관)에 오오와다 나오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숙박했다. 오사카로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석간 신문에서 각 역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다는 마사지를 받고, 맥주 3병을 마시고, 오오미야 고로, 친구, 이시다 앞으로 이별 편지를 썼다. 5월 20일 오후 4시, 다카나와서의 안도 형사가 방을 방문하자 "아베 사다를 찾고 있죠? 제가 찾으시는 아베 사다입니다"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형사들은 사다의 침착한 태도에 놀랐다고 한다.[3]

사다는 체포되자 "저는 그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정식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시다는 다른 여성에게 안길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죽이면, 다른 어떤 여성도 다시는 그를 만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시다의 성기를 절단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그의 머리나 몸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항상 그의 곁에 있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라고 진술했다.[3]

이 범죄의 자세한 내용이 공표되었을 때의 유언비어에서는, 이시다의 음경이 놀라운 크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체포 후, 사다에게 질문한 경찰은 이를 부정했다. "이시다의 것은 딱 평균이었습니다. 저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테크닉과 헌신적인 애무를 하는 이시다가 좋았습니다"라고 사다는 답했다. 사다 체포 후, 이시다의 음경과 고환은 도쿄 의과대학 병리학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반에게 공개했던 듯하다.[3]

1936년 12월 21일, 도쿄 형사 지방 재판소는 사다에게 살인 및 사체 손괴죄로 '''징역 6년의 판결(구형 10년)'''(미결 통산 120일)을 받아 복역했다. 1940년 (쇼와 15년)에 "기원 2600년"의 은사로 남은 형기가 1/2로 감형되어, 다음 해 1941년 (쇼와 16년) 5월 17일에 출소했다[4]

3. 2. 출소 이후

아베 사다는 출소 후, 사이타마현에서 샐러리맨 남성과 사실혼 관계를 맺었으나, 남성이 아베 사다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파국을 맞았다.[5] 종전 직후 "정본"이라 불린 카스트리 잡지 중 하나인 『쇼와 호색 일대 여인 오사다 색 참회』를 둘러싸고 저자와 출판사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5] 한때 본명을 밝히고 일하기도 했으나, 1971년에 실종되었다.[5]

4. 사회적 파장 및 문화적 영향

4. 1. 아베 사다 패닉



오구의 요정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다음 날인 19일 조간에 보도되었고, 센세이션한 사건은 국민을 흥분시켰다.[2] 참외 얼굴에 야회말이를 한 호리호리한 여성을, 사다로 착각한 신고를 받은 긴자나 오사카의 번화가는 일시 소란이 일어나 패닉 상태가 되었고, 신문은 그것을 재미있게 썼다.

이 해에 일어난 2·26 사건 쿠데타의 인용으로, 목격 사례의 범죄가 "시도 이치-하치"("5-18" 또는 "5월 18일")라고 풍자적으로 불렸다. "우에노 동물원 흑표범 탈출 사건", "2·26 사건"과 함께 "'''쇼와 11년 3대 사건'''"이라고도 불렸다.[2]

또한, 아베 사다 사건에 관한 센세이션한 보도는, 군부에 의한 정보 조작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4. 2. 군부의 정보 조작 의혹

4. 3. 유사 사건

1953년 도쿄도 분쿄구에서 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4월 29일에도 도쿄도 스기나미구 오기쿠보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파트 2층에서 도쿠시마현 출신의 당시 예비학교 학생이었던 여관 후계자(21세)와, 이 여관의 종업원으로 일하던 여성(32세)이 이별 문제로 다투다, 여성이 그의 성기를 칼로 찔렀다. 예비학교 학생의 성기는 껍질 한 장만 남기고 거의 절단된 상태가 되어, 원상태로 봉합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1954년에는 오사카부의 피차별 부락 출신 여성 교사가 결혼 차별을 받고, 황산으로 연인의 성기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 황산 사건)

4. 4.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아베 사다 사건은 일본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오다 사쿠노스케의 「요부」 (1947년),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 (1997년) 등이 대표적이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사랑의 콜리다'(L'Empire des sens)는 1976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이 영화의 사진과 각본을 묶은 단행본 관련 재판은 1982년 도쿄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어나더 스토리 운명의 분기점(アナザーストーリーズ 運命の分岐点) "아베 사다 사건 ~ 쇼와 시대를 산 요부의 맨얼굴 ~" (NHK, 2020년 12월 22일 첫 방송)과 같이 재현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5. 한국의 시각

참조

[1] 뉴스 尾久紅燈街に怪奇殺人 舊主人の惨死體に血字を切刻んで美人女中姿を消す 待合に流連の果て 東京朝日新聞 1936-05-19
[2] 웹사이트 <文化環境研究所 News> 第41号 https://web.archive.[...] 2011-09-17
[3] 뉴스 篠山市で行政代執行 元遊郭の空き家を強制撤去 http://sun-tv.co.jp/[...] サンテレビ 2020-05-23
[4] 뉴스 お定、刑期満了で出所 朝日新聞(夕刊) 1941-05-18
[5] 뉴스 『阿部定事件』から82年 純愛ではない?最新心理鑑定で見えてきた真相とは https://times.abema.[...] ABEMA PRIME(ABEMA TIMES、2018年5月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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