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이 스케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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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자이 스케마사는 오미(近江)의 고쿠진 영주로, 1491년에 태어나 1542년에 사망했다. 그는 아자이 가문의 가독을 계승한 후, 슈고 교고쿠 가문의 후계자 분쟁에 휘말려 아사미 사다노리와 함께 교고쿠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롯카쿠 가문과 대립하며 고호쿠 지역의 세력을 키웠으나, 교고쿠 가문과의 갈등과 롯카쿠 가문의 침공 속에서 1541년 교고쿠 다카히로의 반란을 겪고 사망했다. 그의 사후 가독은 장남 히사마사가 이었으나, 가문은 데릴사위 아키마사와의 갈등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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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이 스케마사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자이 스케마사 |
본명 | 아자이 료세이 (浅井亮政) |
출생 | 1491년 |
사망 | 1542년 1월 21일 |
직위 | 다이묘 |
가문 | 교고쿠 가문 아자이 씨 |
가문 유형 | 일본 씨족 |
개인 정보 | |
다른 이름 | 신자부로 (新三郎) |
계명 | 규가이소고 거사 (救外宗護居士) |
묘소 | 도쿠쇼지 (徳勝寺, 현 나가하마시) |
관위 | 비젠노카미 (備前守) |
가문 | |
부모 | 아버지: 아자이 나오타네 양아버지: 아자이 나오마사, 양어머니: 분와 게이슈니 (文和慶集尼) |
형제자매 | 아자이 마사타네 아자이 료세이 아자이 이엔 여자 (시모사카 요이치 부인) |
배우자 | 정실: 아자이 구라야 (아자이 나오마사의 딸) 측실: 케이안 주쇼 (馨庵寿松, 아마고 씨의 딸) |
자녀 | 아자이 히사마사 마사히로 (政弘) 호라야샤 (虎夜叉, 야마시로노카미) 아자이 쓰루치요 마쓰이치 (미타무라 사다요리 부인) 주케이 (아자이 다다타네 부인) |
양자 | 타야 아키마사 |
생애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섬긴 주군 | 교고쿠 다카키요, 다카히로 |
2. 생애
엔토쿠 3년(1491년), 아자이 스케마사는 오미 국의 고쿠진 영주 아자이 가문의 방계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기록은 거의 없지만, 사촌 형제인 아자이 나오마사의 딸과 결혼하여 아자이 가문의 적통을 이었다.[1]
스케마사가 아자이 가문의 가독을 계승할 당시, 아자이 가문은 북오미 반 국의 슈고 교고쿠씨(京極氏)의 휘하에 있었다. 교고쿠 다카키요가 가독을 차남 다카요시에게 물려주려 하자, 스케마사는 오미의 고쿠진 아사미 사다노리와 함께 다카키요의 장남 다카히로를 지지하며 이에 반대하여, 1523년 다카키요와 다카요시 등을 오와리로 추방하였다.[1]
이후 교고쿠 가문은 고쿠진 잇키가 주도하게 되었고 스케마사가 그 중심 역할을 맡았으나, 아사미 사다노리가 전횡하려 하자 오다니성 축성을 통해 그에게 대항했고, 1525년에는 그를 실각시키고 고쿠진 잇키의 맹주가 되어 교고쿠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1]
스케마사는 고호쿠(江北, 북 오미)에 세력을 넓혔으나, 남 오미의 슈고 롯카쿠 사다요리와 대립하게 되었다. 롯카쿠씨는 오미 겐지(近江源氏)인 사사키씨(佐々木氏)의 적류이자 교고쿠 가문의 본가로, 아시카가 장군가를 비호하며 무로마치 막부에 관여하는 등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롯카쿠 가문과의 대립에서 스케마사는 불리한 입장이었고, 여러 차례 침공을 당했으나 휘하의 고쿠진들을 장악하여 롯카쿠 씨의 공세를 견뎌내고 있었다.
다이에이 5년(1526년), 롯카쿠 사다요리가 고호쿠로 침공하여 오다니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에치젠에서 출진한 아사쿠라 노리카게가 중재하여 교고쿠 씨, 아자이 씨와 롯카쿠 씨는 화해한다.[3][4] 그러나 이 화해는 임시적이었고, 다카키요와 스케마사는 미노로 피신했다가 다음 해에 고호쿠로 복귀했다.
교로쿠 원년(1528년) 8월, 나이호가와라(현 나가하마시)에서 전투가 벌어졌고(나이호 합전), 교로쿠 4년(1531년) 4월 6일, 미노우라(현 마이바라시)에서 롯카쿠 씨와 아자이 씨가 전투를 벌였으나(미노우라 합전), 아자이 측이 패배했다. 덴분 2년(1533년) 봄, 롯카쿠 씨와 교고쿠 씨의 화해가 성립되어, 스케마사는 롯카쿠 측에 출두했다.
잦은 롯카쿠 씨의 침공으로 외적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국인들이 결속을 강화했고, 덴분 3년(1534년) 무렵에는 스케마사가 명실상부하게 교고쿠 가문의 집정으로서 고호쿠의 여러 정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8월, 스케마사는 오다니에서 교고쿠 다카키요, 다카노부 부자를 향응하며 국인 일규 위에 서게 되었다.
스케마사는 교고쿠 가문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지만, 교고쿠 다카히로가 아버지 교고쿠 다카키요와 화해하고 반(反) 스케마사 파 고쿠진 영주들과 함께 스케마사와 대립하였다. 스케마사는 롯카쿠 가문과 대치 중이어서 덴분 3년(1534년)에 교고쿠 부자와 화해하였다. 그러나 덴분 10년(1541년), 다시 교고쿠 다카히로가 스케마사에게 반기를 들었다. 스케마사는 교고쿠 가문과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듬해 1월 6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50세였다.
스케마사 사후, 적장자 히사마사와 데릴사위 타야 아키마사가 가독 승계를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켰다.
2. 1. 가독 승계
엔토쿠 3년(1491년)에 스케마사는 오미의 고쿠진 영주 아자이 가문의 방계로 태어났다. 유소년기의 기록은 거의 없으나, 사촌 형제인 아자이 나오마사의 딸과 결혼하여 아자이 가문의 적통을 잇게 되었다.[1] 스케마사는 북 근강의 국인인 아자이 나오타네의 아들이며, 나오마사의 딸 쿠라야와 결혼하여 나오마사의 뒤를 이었다.[1]2. 2. 교고쿠 가문의 후계자 분쟁과 오미 지배
스케마사가 아자이 가문의 가독을 계승하였을 때, 아자이 가문은 북 오미 반 국의 슈고 교고쿠씨(京極氏)의 휘하에 있었다.이 시기에 교고쿠 가문의 당주는 교고쿠 다카키요(京極高清)였으나 다카키요가 가독을 차남 다카요시에게 물려주려는 뜻을 보였기 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스케마사는 오미의 고쿠진 아사미 사다노리(浅見貞則)와 함께 다카키요의 장남 다카히로(高延)를 지지하며 다카키요와 대립하였다. 사다노리와 스케마사는 주군 다카키요와 다카요시 및 다카요시 지지파를 오와리로 추방하였다.
이후로 교고쿠 가문은 고쿠진 잇키가 주도하게 되어 스케마사가 그 중심 역할을 맡았으나, 다카키요 추방 때 함께 싸웠던 아사미 사다노리가 전횡하려고 하기 시작하자 사다노리를 추방하고, 고쿠진 잇키의 맹주가 되어 교고쿠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료세이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무렵, 아자이 씨는 북 오미 반국의 수호인 교고쿠 씨의 피관이었다.[1] 그러나 교고쿠 다카키요가 가독을 차남인 다카요시에게 물려줄 의향을 보이자 반발한 아자이, 미타무라, 호리, 이마이 등 국중은 구니진 잇키를 형성했다.[1] 1523년 윤 3월, 아사미 사다노리가 국중의 중심이 되어 다카키요의 장남인 다카노부를 옹립하고, 다카키요, 다카요시, 더 나아가 유력 가신인 가미사카 노부미쓰를 오와리로 몰아냈다.[1]
국인 일규의 맹주였던 아사미 사다노리는 교고쿠 다카노부 밑에서의 신체제에서도 중심이 되어 오노에성에 다카노부를 감금하고 횡포를 부렸다.[1] 이 시기에 료세이는 아사미 씨에 대항하기 위해 오다니성 축성을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1] 료세이는 한 번 쫓아낸 가미사카 씨와 화해하고 교고쿠 다카키요를 복귀시키는 것으로 아사미 사다노리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한다.[1] 더 나아가 교고쿠 다카노부도 오다니 성으로 맞이하여 1525년에 료세이는 국인 잇키의 맹주가 된다.[1]
2. 3. 롯카쿠 가문과의 대립
스케마사는 고호쿠(江北, 북 오미)에 세력 기반을 쌓았으나, 그로 인해 남 오미의 슈고 롯카쿠 사다요리와 대립하게 되었다. 롯카쿠씨는 원래 오미 겐지(近江源氏)인 사사키씨(佐々木氏)의 적류이자 교고쿠 가문의 본가에 해당하는 존재로, 이 시기에는 아시카가 장군가를 비호하며 무로마치 막부에 관여하는 등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원래 오미 전체의 슈고였던 롯카쿠 가문과의 대립에서 스케마사는 불리한 입장에 있었고, 여러 차례 침공을 당했다. 그러나 휘하의 고쿠진(국인)들을 장악하여 롯카쿠 씨의 공세를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세력을 확대해 가던 료세이(아자이 스케마사)를 상대로, 남오미 수호 롯카쿠 사다요리가 다이에이 5년(1526년) 5월에 고호쿠로 침공했다. 롯카쿠 사다요리는 오다니 성을 공격했지만 견고하여 공격에 애를 먹었고, 오히려 롯카쿠 씨 본국에서는 이바 사다노리의 난이 발생했다.[1][2] 결국 에치젠에서 출진한 아사쿠라 노리카게가 중재하여 교고쿠 씨, 아자이 씨와 롯카쿠 씨는 화해한다(『사원 잡요초』9월 4일 조).[3][4] 아사쿠라 노리카게의 출진에 대해, 『동 아자이 군지』는 료세이 지원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아사쿠라 소테키 이야기』등에서 실제로는 롯카쿠 씨에게 협력하여 오다니 성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화해는 임시적인 것이었던 듯하며, 다카키요(교고쿠 다카키요), 료세이는 미노로 도망치게 되었다. 다카키요, 료세이는 다음 해에는 고호쿠로 복귀했다.
다이에이 7년(1527년)에 초코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오미의 화해를 꾀하여, 호소카와 다카쿠니, 다카 사다타카, 도키 요리나리등에게 작전을 실행하게 했지만,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이바 사다노리의 난에서 롯카쿠 씨에게 원군을 보냈던 점도 있어 실패로 끝난다.
교로쿠 원년(1528년) 8월, 우에사카 노부미쓰가 다시 교고쿠 다카노부에게 붙어, 나이호가와라(현 나가하마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나이호 합전).
교로쿠 4년(1531년) 정월 하순, 다카키요 부자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요청에 따라 료세이를 다카시마 군으로 파견하고,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구키를 탈출하여 가타타를 거쳐 사카모토에 이르렀다. 4월 6일, 미노우라(현 마이바라시)에서 롯카쿠 씨와 아자이 씨가 전투가 벌어졌고(미노우라 합전), 격전 끝에 아자이 측이 패배했다.
덴분 2년(1533년) 봄, 롯카쿠 씨와 교고쿠 씨의 화해가 성립되어, 료세이는 롯카쿠 측에 출두했다(『하가데라 연중행사』).
이처럼 빈번하게 롯카쿠 씨의 침공을 받으면서, 외적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 국인들이 결속을 강화했고, 오히려 대내적으로는 아자이 씨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동 아자이 군지』는, 료세이가 "명실상부하게 교고쿠 가문의 집정으로서, 고호쿠의 여러 정사를 전담"한 것은, 덴분 3년(1534년) 무렵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그 해부터 료세이가 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도장을 발급하게 된 점과, 8월에 오다니에서 교고쿠 다카키요, 다카노부 부자를 향응한 것을 들고 있다. 이 향응의 모습은, 『[https://www.digital.archives.go.jp/das/meta/M1000000000000068335.html 덴분 3년 아자이 비젠노카미 숙소 향응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로 인해 아자이 료세이는 완전히 국인 일규 위에 서게 되었다. 미야지마 케이이치는 이 향응을 아자이 료세이가 교고쿠 씨 권력 내에서 정치적 지위의 평화적인 "승인・확보"를 가시적으로 연출한 "의례의 장"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에는 이 향응에 참석한 다가 사다타카가 롯카쿠 측으로 돌아서고, 사다타카는 교고쿠 다카노부에게 공격을 받았다.
2. 4. 교고쿠 가문과의 화해와 재대립
스케마사는 교고쿠 가문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교고쿠 다카히로가 아버지 교고쿠 다카키요와 화해하고 반(反) 스케마사 파 고쿠진 영주들과 함께 스케마사와 대립하였다. 스케마사는 롯카쿠 가문과 대치 중이어서 덴분 3년(1534년)에 교고쿠 부자와 화해하였다.그러나 덴분 10년(1541년), 다시 교고쿠 다카히로가 스케마사에게 반기를 들었다. 스케마사는 교고쿠 가문과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한 채, 다음 해 1월 6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50세였다.
스케마사 사후, 적장자 히사마사와 데릴사위 타야 아키마사가 가독 승계를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켰다. 아키마사가 교고쿠 다카히로와 결탁하여 히사마사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히사마사는 롯카쿠 가문에 신종하였다.
3. 자손
스케마사는 5남 5녀를 두었고, 데릴사위인 일족 다야 아키마사가 있다. 장남 히사마사가 가독을 승계했지만, 히사마사의 아들 나가마사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해 남자 직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그러나 히사마사의 딸 마리아가 교고쿠 다카요시와 혼인하여, 스케마사가 평생 싸웠던 교고쿠 가문 쪽으로 여계 자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 친아버지: 아사이 나오타네
- 형: 마사타네
- 남동생: 이엔
- 여동생: 시모사카 요이치의 아내
- 의붓아버지: 아사이 나오마사
- 의붓어머니: 분와 케이슈니
- 정실: 쿠라야
- * 딸: 츠루치요 (카이즈도노) - 타야 아키마사를 사위로 삼음.
- * 데릴사위: 아키마사 (신사부로) - 카이즈의 타야 씨 출신.
- * 아들: 마사히로 (신시로) - 덴분 4년까지 사망.
- 측실: 아마고 씨 (케이안 쥬쇼)
- * 아들: 히사마사 (사루야샤)
- * 딸: 쥬케이 - 아사이 타다타네의 아내
- 생모 불명
- * 딸: 마츠이치 - 미타무라 사다요리의 아내
- * 아들: 토라야샤 (야마시로노카미)
참조
[1]
웹사이트
Azai Sukemasa
https://kotobank.jp/[...]
koobank
2021-11-25
[2]
웹사이트
浅井系図
https://www.digital.[...]
2024-04-13
[3]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4-04-14
[4]
웹사이트
浅井系図
https://www.digital.[...]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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