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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다카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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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고쿠 다카요시는 남북조 시대부터 오미 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사사키 씨의 후예로, 가독 다툼과 추방, 아사이 씨와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옹립하는 데 힘썼으나, 오다 노부나가와의 대립으로 인해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자신은 은거했다. 말년에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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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다카요시
인물 정보
씨족교고쿠 씨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에이쇼 원년 (1504년)
사망덴쇼 9년 1월 25일 (1581년 2월 28일)
이명다카요시, 다카요시, 다카요시
묘소시가 현마이바라시의 도쿠겐인
관위나가토 수, 주무소보
막부무로마치 막부
섬긴 군주아시카가 요시테루요시아키
아버지교고쿠 다카키요 (교고쿠 자이무네라고도 함)
어머니미상
형제자매다카노부, 다카요시
배우자아자이 히사마사의 딸 (교고쿠 마리아)
자녀다카쓰구, 다카토모, 마쓰노마루도노 (다케다 모토아키라의 아내,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딸 (우지이에 유키히로의 아내), 마그달레나 (구쓰키 노부쓰나의 아내)
양녀마쓰코 (다케다 요시치카의 아내)

2. 생애

교고쿠 다카요시는 아버지 다카키요의 총애를 받아 형인 다카노부와 가독을 다투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나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들의 지지를 받은 다카노부에게 패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다카노부도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하여 추방되었고, 교고쿠 씨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

추방된 후 다카요시는 같은 사사키 씨인 미나미오미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다투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한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키타오미로 맞아들여져 일시적으로 영주에 복귀했지만,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된다. 한때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으로 섬겼지만, 에이로쿠 3년(1560년)에 권력 탈환을 목표로 다시 오미로 내려가 롯카쿠 씨와 결탁하여 아사이 가타마사(후의 나가마사)에 대해 거병했지만 실패하여 오미에서의 남은 지배권을 모두 잃는다. [1]

에이로쿠 8년(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요시테루가 살해되자,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옹립에 진력했다. 하지만,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자 다카요시 자신은 오미에 은거하고, 아들 고호시(다카쓰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 고호시는 원복 후 다카쓰구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대로 노부나가에게 섬겼다. 겐키 3년(1572년)에는 차남 교고쿠 다카토모가 탄생했다.

덴쇼 9년(1581년), 아내 교고쿠 마리아와 함께 아즈치성 아래의 수도원에서 행해지던 기독교 설교를 40일 동안 듣고, 니에키 솔디 오르간티노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그 며칠 후에 사망했다.[2] 갑작스러운 죽음에 사람들은 불벌로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3]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교고쿠 씨는 남북조 시대 이후 대대로 오미에 자리잡은 사사키 씨의 혈통을 이어받아 4직의 가계를 가진 명문이었다. 아이치강 이북의 오미 6군의 지령두직을 맡았던 우지노부를 직접적인 조상으로 하며, 우지노부의 증손인 다카우지(도요)는 아시카가 막부에서 활약하여 와카사, 오미, 이즈모, 가즈사, 히다, 셋쓰의 슈고를 역임했다.[1]

다카요시는 아버지 다카키요의 총애를 받아 형인 다카노부와 가독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나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들의 지지를 받은 다카노부에게 패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다카노부도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하여 추방되면서 교고쿠 씨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

추방된 후 다카요시는 같은 사사키 씨인 남(南)오미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다투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한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북(北)오미로 받아들여져 기타오미의 영주로 잠시 복귀했지만,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된다. 한때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으로 섬겼지만, 에이로쿠 3년(1560년)에 권력 탈환을 목표로 다시 오미로 내려가 롯카쿠 씨와 결탁하여 아사이 가타마사(후의 나가마사)에 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오미에서의 남은 지배권을 모두 잃는다. 다카요시는 아사이 히사마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는데, 이 여성이 후에 두 아들을 낳은 교고쿠 마리아이다.[1]

에이로쿠 8년(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요시테루가 살해되자,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옹립에 힘썼다. 하지만,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자 다카요시 자신은 오미에 은거하고, 아들 고호시(다카쓰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 고호시는 원복 후 다카쓰구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대로 노부나가에게 섬겼다. 겐키 3년(1572년)에는 차남 교고쿠 다카토모가 태어났다.

덴쇼 9년(1581년), 아내와 함께 아즈치성 아래의 수도원에서 행해지던 기독교 설교를 40일 동안 듣고, 니에키 솔디 오르간티노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그 며칠 후에 사망했다.[2] 갑작스러운 죽음에 사람들은 벌을 받아 죽었다고 수군거렸다.[3]

2. 2. 가독 상속 분쟁과 망명

형인 다카노부와 가독 상속을 두고 다투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国人)들의 지지를 받은 다카노부에게 패하여 추방되었다.[1] 이후 다카노부도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하여 추방되면서 교고쿠 씨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

추방된 후 다카요시는 같은 사사키 씨 계열인 미나미오미(南近江)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다투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한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기타오미(北近江)로 받아들여져 일시적으로 영주로 복귀했지만,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되었다.[1] 한때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으로 섬겼지만, 에이로쿠 3년(1560년)에 권력 탈환을 목표로 다시 오미로 내려가 롯카쿠 씨와 결탁하여 아사이 가타마사(후의 나가마사)에 대해 거병했지만 실패하여 오미에서의 남은 지배권을 모두 잃는다.[1] 다카요시는 아사이 히사마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는데, 이 여성이 후에 두 아들을 낳은 교고쿠 마리아이다.[1]

2. 3. 아자이 씨와의 협력과 갈등

교고쿠 씨는 남북조 시대 이후 대대로 오미에 할거한 사사키 씨의 흐름을 이어받은 명문이었다. 아이치강 이북의 오미 6군의 지령두직을 맡았던 우지노부를 직접적인 조상으로 한다.[1]

다카요시는 아버지 다카키요에게 총애를 받아 형인 다카노부와 가독을 다투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나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들의 지지를 받은 다카노부에게 패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다카노부도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하여 추방되면서 교고쿠 씨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

추방된 후 다카요시는 같은 사사키 씨 계열인 미나미오미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다투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한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키타오미로 맞아들여져 키타오미의 영주로 일시 복귀했지만,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된다. 한때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으로 섬겼지만, 에이로쿠 3년(1560년)에 권력 탈환을 목표로 다시 오미로 내려가 롯카쿠 씨와 결탁하여 아사이 가타마사(후의 나가마사)에 대해 거병했지만 실패하여 오미에서의 남은 지배권을 모두 잃는다. 다카요시는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는데, 이 여성이 후에 두 아들을 낳은 교고쿠 마리아이다.[1]

에이로쿠 8년(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요시테루가 살해되자,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옹립에 진력한다. 하지만,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자 다카요시 자신은 오미에 은거하고, 아들 고호시(다카쓰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 고호시는 원복 후 다카쓰구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대로 노부나가에게 섬겼다. 겐키 3년(1572년)에는 차남 교고쿠 다카토모가 탄생했다.

2. 4. 아시카가 요시아키 옹립과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

교고쿠 씨는 남북조 시대 이후 대대로 오미에 할거한 사사키 씨의 흐름을 이어받아 4직의 가계를 가진 명문이었다. 다카요시는 아버지 다카키요에게 총애를 받아 형인 다카노부와 가독을 다투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나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들의 지지를 받은 다카노부에게 패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다카노부도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하여 추방되었고, 교고쿠 씨의 쇠퇴는 결정적이 되었다.[1]

추방된 후 다카요시는 같은 사사키 씨인 미나미오미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다투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한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키타오미로 맞아들여져 키타오미의 영주로 일시 복귀했지만,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된다. 한때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으로 섬겼지만, 에이로쿠 3년(1560년)에 권력 탈환을 목표로 다시 오미로 내려가 롯카쿠 씨와 결탁하여 아사이 가타마사(후의 나가마사)에 대해 거병했지만 실패하여 오미에서의 남은 지배권을 모두 잃는다.[1]

에이로쿠 8년(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요시테루가 살해되자, 다카요시는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 옹립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자 다카요시 자신은 오미에 은거하고, 아들 고호시(다카쓰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 고호시는 원복 후 다카쓰구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대로 노부나가에게 섬겼다. 겐키 3년(1572년)에는 차남 교고쿠 다카토모가 탄생했다.

2. 5. 기독교 개종과 갑작스러운 죽음

1581년 아내와 함께 아즈치성 아래의 수도원에서 행해지던 기독교 설교를 40일 동안 듣고, 니에키 솔디 오르간티노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그 며칠 후 사망했다.[2] 갑작스러운 죽음에 사람들은 불벌로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3]

3. 가족

구 분내용
아버지교고쿠 다카키요
부인교고쿠 마리아
자녀


3. 1. 아버지

교고쿠 다카키요는 교고쿠 씨의 시조로, 남북조 시대 이후 대대로 오미 지역을 다스린 사사키 씨 가문의 후예이다. 4직의 가계를 이은 명문가 출신으로, 아이치 강 이북 오미 6군의 지령두직을 맡았던 우지노부를 직계 조상으로 한다. 우지노부의 증손인 다카우지(도요)는 아시카가 막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와카사, 오미, 이즈모, 가즈사, 히다, 셋쓰의 슈고를 역임했다.[1]

다카요시는 아버지 다카키요의 총애를 받아 형 다카노부와 가독 상속을 두고 경쟁했으나, 아사미 사다노리와 아사이 스케마사를 비롯한 구니진들의 지지를 얻은 다카노부에게 패배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다카노부 역시 아사이 스케마사와의 갈등으로 추방되면서 교고쿠 씨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다카요시는 추방된 후, 같은 사사키 씨 일족인 미나미오미의 롯카쿠 씨의 지원을 받아 다카노부, 아사이 스케마사와 대립했다. 이후 다카노부와 대립하던 아사이 씨에게 아버지와 함께 키타오미로 영입되어 일시적으로 키타오미의 영주 지위를 회복했으나,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 신세였기 때문에 결국 오미를 떠나게 되었다.

3. 2. 부인

아사이 히사마사의 딸로, 교고쿠 다카요시의 부인이다. 교고쿠 다카쓰구, 교고쿠 다카토모, 교고쿠 다쓰코, 막달레나 등의 자녀를 두었다.[1] 덴쇼 9년(1581년), 남편과 함께 오르간티노에게 세례를 받았다.[2]

3. 3. 자녀

이름생모비고
교고쿠 다카쓰구교고쿠 마리아
교고쿠 다카토모교고쿠 마리아
교고쿠 다쓰코교고쿠 마리아후에 다케다 모토아키와 결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우지이에 유키히로와 결혼
막달레나교고쿠 마리아구쓰키 노부쓰나와 결혼


참조

[1] 서적
[2] 서적
[3] 간행물 説教を聴いた者の中に、かつて近江国の国主であった貴人がいたからである。彼は領国を失ったとはいえ、信長の庇護の下にあって今や偉大な殿であり、当城下にあるもっとも立派な邸宅の一つを所有していた。京極(高吉)殿と称するこの貴人は夫人と共に説教をことを決心したが、デウスのことをたいそう好むので四十日間続けて説教に耳を傾けてこれをよく悟り、四十日の終りには二人とも洗礼を受けた。この貴人たちには十一、二歳の幼い子息が一人あって、この頃、他所で信長に仕えていた。父親は彼が帰った時に家族全員と共に洗礼を受けさせることに決めていたが、それより数日後、我らの主が父親を御許に召し給うたので、その望みは叶えられなかった。彼の死によってその子息ならびに家人は皆、依然として異教徒のままであり、父の死は神と仏の罰によるものと考えて非常に畏れた。 同朋舎 1582-02-15
[4] 문서 혹자는 교고쿠 기무네(京極材宗)의 자식을 다카키요가 양자 (가족)|양자로 들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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