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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리오 스탐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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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944년 탱고계에 데뷔하여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함께 활동했다. 이탈리아 유학 후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 1955년에는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여 'Afiches' 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영화 음악 작곡, 탱고 홀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아르헨티나 작곡가 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0년에는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2022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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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리오 스탐포네
기본 정보
아틸리오 스탐포네
아틸리오 스탐포네 (1975년)
본명아틸리오 스탐포네
출생1926년 7월 1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망2022년 11월 2일 (96세)
사망지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적아르헨티나
직업
직업피아니스트
작곡가
편곡가
음악 경력
장르탱고
악기피아노
활동 시기1943년~2022년
관련 활동오스발도 푸글리에세
호라시오 살간
수상
수상카를로스 가르델 상 (2007)
아르헨티나 국회 명예 칭호 (2017)

2. 생애

2010년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크리스토발 지구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다. 이후 페드로 루비오네에게 사사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연구하였다. 1944년에 탱고계에 데뷔, 페드로 아피아나,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악단에서 활약하였다. 1950년에는 음악연구를 위하여 이탈리아에 갔으며, 연구를 하는 한편 비안코의 악단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952년에 귀국한 그는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협력하여 오케스트라를 조직, 1955년에는 자기 악단을 결성하였다. 현대 감각에 넘치는 그의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1956년의 처녀작 <아피체스>가 유명하며, 로베르토 고예네체를 대중화하는데 기여했다.[1]

1950년 후안 페론 대통령의 장학금으로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서 카를로스 제키를 사사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중동을 순회한 후, 19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1955년 페데리코가 라디오 벨그라노와 계약하면서 오케스트라 단독 지휘를 맡게 되었고, '엘 마르네'(에두아르도 아롤라스), '9점'(프란시스코 카나로), '고백'(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와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 '포스터'(호메로 엑스포시토 작사) 등 여러 표준 작품들을 대중화했다.[2]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옥텟 등 여러 그룹과 협력했으며, 1958년 뉴욕시 오디오 피델리티 레코드에서 '탱고 아르헨티노'를 녹음했다. 1959년 마이크로폰 레이블에서 악기 연주곡과 리카르도 루이스 보컬이 들어간 더블 레코드를 녹음, 이후 수십 년간 탱고 부흥 오케스트라를 위해 10개 이상 앨범을 냈다. 주요 멤버는 에두아르도 왈차크, 티토 베스프로반(바이올린), 아브라함 셀렌손(비올라), 엔리케 라누, 호세 브라가토(첼로), 오스발도 몬테스(반도네온), 루벤 루이스(기타), 오마르 머터(더블 베이스), 엘라디아 블라스케스, 버지니아 루케(보컬)이다.[2]

1964년 축구 선수 리날도 마르티노, 배우 페드로 알레안드로와 함께 "카뇨 14" 탱고 홀을 설립, 1960~70년대 탱고 부흥 이전 시대에 장르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아니발 트로일로, 오라시오 살간 등 유명 탱고 음악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5] 1985년 아르헨티나 작곡가 협회(SADAIC) 회장으로 선출되었고,[1] 1993년 은퇴 후에도 이사회에 남았다. 1985년, 2005년 코넥스 상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2000년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 아르헨티나 음악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

1970년 앨범 '개념'은 합창단 도입, 음악에 심포닉 사운드를 불어넣었다.[2] 그의 오케스트라가 대중화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작사가
빵과 양파(Con pan y cebolla)-
호머에서 호머로(De Homero a Homero)-
실연(Desencanto)-
물장수(Aguatero)-
카디카모(Cadícamo)-
시민(Ciudadano)-
콘체르탄고(Concertango)-
소년(El Niño)-
타피르(El Tapir)-
내 도시 축하(Fiesta de mi ciudad)-
축제와 밀롱가(Fiesta y milonga)-
홀수(Impar)-
나의 친구 콜로(Mi amigo Cholo)-
버릇없는 여자아이(Mocosa)-
구둣발질(Taconeando)-
소녀(Pequeña)-
나의 삶(Vida mía)-



1981년 오스카 아라이즈 발레 '탱고', 1984년 루이스 푸엔조 감독 '공식적인 이야기'(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부수 음악 작곡. 1987년 '콘서트 탱고'는 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 데뷔, 스페인아르헨티나에서 성공. 마르코스 주리나가 '탱고 바'(1987, 라울 훌리아 주연), 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 헌정 공연 '디스세폴린'(1989) 음악 담당.

카뇨 14는 1987년 문 닫았다가 10년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지역에서 다시 문 열었다. 2000년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 아르헨티나 음악 국립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6]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 오케스트라 감독 역임, 2008년 미겔 코한, 구스타보 산타올라야 영화 '거장들의 카페' 지휘자로 출연.[4] 2022년 11월 2일 96세 나이로 사망.[7]

2. 1. 어린 시절과 음악 교육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크리스토발 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주세페는 이미 전형적인 오케스트라에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10세 때 급성 충수염 수술을 받은 어린 아틸리오에게 회복 중에 피아노를 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형의 탱고 앙상블에 합류했다.[2]

이후 페드로 루비오네에게 사사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연구하였다. 1941년에는 코리엔테스 거리에서 인기 있는 카페 마르조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로베르토 디마스에 합류했고, 1942년에는 페드로 마피아의 티비다보 카바레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 마피아는 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어린 피아니스트의 선정적인 분위기의 무대 출연을 허락받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3] 그는 오케스트라 활동과 명문 공립 예비학교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대학에서의 공부를 병행했다.[3]

2. 2. 초기 경력과 아스토르 피아졸라와의 만남

산 크리스토발에서 태어난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페드로 루비오네에게 사사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웠다.[1] 1944년 탱고계에 데뷔하여 페드로 아피아나, 아스토르 피아솔라 악단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스탐포네는 코리엔테스 거리에서 인기 있었던 카페 마르조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로베르토 디마스에게 발탁되었고, 1942년에는 페드로 마피아가 이끄는 티비다보 카바레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3] 마피아는 어린 스탐포네의 재능에 감명을 받아 그의 아버지에게 직접 찾아가 공연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보내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3] 이후 스탐포네는 오케스트라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로베르토 루피노, 알베르토 카마라와 함께 일했다. 1945년에는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던 아스토르 피아솔라를 만나게 된다.[2]

1946년, 스탐포네는 아스토르 피아솔라와 함께 활동하였고, 1948년 그룹이 해산된 후에는 빈첸초 스카라무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피아니스트로서의 기량을 더욱 발전시켰다.[2]

2. 3. 이탈리아 유학과 오케스트라 결성

1950년, 스탐포네는 음악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후안 페론 대통령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서 카를로스 제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2] 이탈리아에서 연구를 하는 한편, 비안코의 악단에서 활동하였다.

19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스탐포네-페데리코 오케스트라는 TK 레코드 레이블을 통해 '예쁜 시골 소녀(Criolla linda)'와 '작은 땅(Tierrita)'과 같은 작품들을 녹음했다.[2] 1955년, 페데리코가 라디오 벨그라노와 계약하면서 스탐포네는 오케스트라의 단독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에두아르도 아롤라스의 '엘 마르네(El Marne)', 프란시스코 카나로의 '9점(Nueve puntos)', 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와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의 '고백(Confesión)', 호메로 엑스포시토가 작사한 스탐포네 자신의 작품 '포스터(Afiches)' 등 많은 표준 작품들을 대중화시켰다.[2] 'Afiches'는 최고의 탱고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인 로베르토 고예네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1]

2. 4. 다양한 활동과 탱고 부흥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크리스토발 지구에서 태어난 스탐포네는 10세 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하였고, 페드로 루비오네에게 사사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연구하였다. 1944년 탱고계에 데뷔하여 페드로 아피아나,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악단에서 활약하였다. 1950년에는 음악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비안코 악단에 참가하기도 했다.[1]

1952년 귀국 후,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협력하여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고, 1955년에는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였다. 그의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연주는 높이 평가받았다. 스탐포네의 작품으로는 1956년 처녀작인 <아피체스>가 유명하며, 이 곡은 로베르토 고예네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1]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옥텟 등 다른 그룹들과도 계속 협력하였다. 1958년 뉴욕시의 오디오 피델리티 레코드 레이블을 통해 '탱고 아르헨티노(Tango Argentino)'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온스(El once)', '사방치기(La rayuela)', '도박사(Cabulero)', '감성적인(Sensiblero)'과 같은 곡들로 유명하다.[1]

1959년 마이크로폰 레이블에 합류하여, 두 개의 악기 연주곡과 리카르도 루이스의 보컬이 들어간 두 개의 곡이 수록된 더블 레코드를 녹음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레코드 회사와 계속해서 일했으며, 그의 탱고 부흥 오케스트라를 위해 10개가 넘는 앨범을 녹음했다. 주목할 만한 멤버로는 에두아르도 왈차크와 티토 베스프로반(바이올린), 아브라함 셀렌손(비올라), 엔리케 라누와 호세 브라가토(첼로), 오스발도 몬테스(반도네온), 루벤 루이스(기타), 오마르 머터(더블 베이스), 엘라디아 블라스케스와 버지니아 루케(보컬)가 있다.[2]

1964년, 축구 선수 리날도 마르티노, 배우 페드로 알레안드로와 함께 "카뇨 14" 탱고 홀을 설립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위치한 이 탱고 홀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탱고 부흥 이전 시대에 이 장르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안토니오 트로일로, 오라시오 살간 등 유명 탱고 음악가들을 불러들였다.[5]

1985년 동료들에 의해 아르헨티나 작곡가 협회(SADAIC) 회장으로 선출되었다.[1] 1993년 SADAIC 회장직에서 은퇴했지만 이사회에 남았다. 1985년과 2005년 코넥스 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2000년에는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 아르헨티나 음악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

2. 5. 후기 활동과 업적

스탐포네는 1950년 후안 페론으로부터 대통령 장학금을 받아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서 카를로스 제키(Carlos Zecchi)에게 배웠다.[1] 프랑스, 이탈리아, 중동을 순회한 스탐포네는 19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스탐포네-페데리코 오케스트라는 TK 레코드(TK Records) 레이블을 통해 '예쁜 시골 소녀(Criolla linda)'와 '작은 땅(Tierrita)'과 같은 작품들을 녹음했다.[2] 1955년 페데리코가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던 라디오 벨그라노와 계약을 맺으면서 스탐포네는 오케스트라의 단독 지휘권을 갖게 되었고, '엘 마르네(El Marne)'(에두아르도 아롤라스), '9점(Nueve puntos)'(프란시스코 카나로), '고백(Confesión)'(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와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 스탐포네 자신의 작품인 '포스터(Afiches)'(호메로 엑스포시토 작사) 등 여러 표준 작품들을 대중화시켰다.[2]; 'Afiches'는 최고의 탱고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인 로베르토 고예네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1]

그는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옥텟(Octeto Buenos Aires)을 포함한 다른 그룹들과 계속 협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1957년 앨범 '진보적인 탱고(Tango progresivo)'는 음향 편집이 형편없기로 악명이 높았고, 매장에서 철수되었다. 스탐포네는 1958년 뉴욕시(New York City)의 오디오 피델리티 레코드(Audio Fidelity Records) 레이블을 통해 '탱고 아르헨티노(Tango Argentino)'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온스(El once)'(오스발도 프레세도), '사방치기(La rayuela)'(훌리오 데 카로), '도박사(Cabulero)'(레오폴도 페데리코), '감성적인(Sensiblero)'(훌리안 플라자)와 같은 곡들로 유명하다. 그는 1958년 루시아 마르코(Lucía Marcó)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1]

스탐포네는 1959년 마이크로폰(Microfón) 레이블에 합류하여, 두 개의 악기 연주곡과 리카르도 루이스(Ricardo Ruiz)의 보컬이 들어간 두 개의 곡이 수록된 더블 레코드를 녹음했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레코드 회사와 계속해서 일했으며, 그의 탱고 부흥 오케스트라를 위해 10개가 넘는 앨범을 마이크로폰을 통해 녹음했는데, 주요 멤버로는 에두아르도 왈차크(Eduardo Walczak)와 티토 베스프로반(Tito Besprovan)(바이올린), 아브라함 셀렌손(Abraham Selenson)(비올라), 엔리케 라누(Enrique Lanoo)와 호세 브라가토(José Bragato)(첼로), 오스발도 몬테스(Osvaldo Montes)(반도네온), 루벤 루이스(Rubén Ruiz)(기타), 오마르 머터(Omar Murtagh)(더블 베이스), 엘라디아 블라스케스(Eladia Blázquez)와 버지니아 루케(Virginia Luque)(보컬)가 있다.[2]

스탐포네는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라시오 데 글라세(Palais de Glace)에서의 공연과 '1900년대의 건달(Un Guapo del 900)'(1960)과 '덫 속의 손(La mano en la trampa)'('덫 속의 손(The Hand in the Trap)', 1961)을 포함한 여러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유명해졌다.[4]

그는 1964년 축구 스트라이커인 리날도 마르티노(Rinaldo Martino)와 배우 페드로 알레안드로(Pedro Aleandro)와 함께 "카뇨 14(Caño 14)"를 설립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위치한 이 탱고 홀은 그 유형 중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가 되었고, 1960년대와 70년대의 부흥 이전 시대에 이 장르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트로일로, 오라시오 살간(Horacio Salgán), 우발도 데 리오(Ubaldo de Lío), 후안 카를로스 코페스(Juan Carlos Copes) 등 현지 탱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불러들였다.[5]

그의 1970년 앨범 '개념(Concepto)'은 합창단을 도입하고 음악에 더욱 심포닉한 사운드를 불어넣었다.[2] 그의 오케스트라가 대중화한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작품명작사가
빵과 양파(Con pan y cebolla)-
호머에서 호머로(De Homero a Homero)-
실연(Desencanto)-
물장수(Aguatero)-
카디카모(Cadícamo)-
시민(Ciudadano)-
콘체르탄고(Concertango)-
소년(El Niño)-
타피르(El Tapir)-
내 도시 축하(Fiesta de mi ciudad)-
축제와 밀롱가(Fiesta y milonga)-
홀수(Impar)-
나의 친구 콜로(Mi amigo Cholo)-
버릇없는 여자아이(Mocosa)-
구둣발질(Taconeando)-
소녀(Pequeña)-
나의 삶(Vida mía)-



스탐포네는 1981년 오스카 아라이즈(Oscar Araiz)의 발레 '탱고(Tango)'의 음악을 작곡했고, 1984년에는 루이스 푸엔조(Luis Puenzo) 감독의 '공식적인 이야기(The Official Story)'(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의 부수적인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1987년 작품인 '콘서트 탱고(Tango en concierto)'는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Teatro Real)에서 데뷔하여 스페인아르헨티나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시대의 다른 작품으로는 마르코스 주리나가(Marcos Zurinaga)의 '탱고 바(Tango Bar)'(1987, 라울 훌리아 주연)와 탱고 작곡가 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를 기리는 극장 공연인 '디스세폴린(Discepolín)'(1989)의 음악이 있다. 그의 명성과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한 그의 활동은 1985년 동료들에 의해 아르헨티나 작곡가 협회(SADAIC) 회장으로 선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

유서 깊은 탱고 홀인 카뇨 14는 1987년 문을 닫았다. 그러나 10년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레콜레타 지역의 비센테 로페스(Vicente López) 거리 2134번지로 이전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스탐포네는 1993년 아리엘 라미레스(Ariel Ramírez)의 후임으로 SADAIC 회장직에서 은퇴했지만 이사회에 남았다. 그는 1985년과 2005년 코넥스 상(Konex Award)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2000년에는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 아르헨티나 음악 국립 오케스트라(Juan de Dios Filiberto National Orchestra of Argentine Music)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 그는 필리베르토 오케스트라에서의 임무를 계속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 오케스트라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6] 2008년 미겔 코한(Miguel Kohan)과 구스타보 산타올라야(Gustavo Santaolalla)의 노년의 탱고 거장들을 위한 헌정 영화인 '거장들의 카페(Café de los maestros)'에서 지휘자로 출연했다.[4]

2. 6. 노년과 사망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2022년 11월 2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그는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토 아르헨티나 음악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2000년)과[6]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 오케스트라 감독으로 활동하며 노년에도 탱고 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08년에는 미구엘 코한과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영화 '거장들의 카페(Café de los maestros)'에 출연하여 노년의 탱고 거장들을 위한 헌정 공연을 지휘했다.[4]

3. 주요 작품

연도제목비고
1949년마르셀라의 또 다른 자아뮤지컬 코미디
1949년나를 키스해줘, 페트로니타뮤지컬 코미디
1952년예쁜 시골 소녀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함께 오케스트라 결성 후 TK 레코드에서 녹음
1952년작은 땅레오폴도 페데리코와 함께 오케스트라 결성 후 TK 레코드에서 녹음
1955년엘 마르네에두아르도 아롤라스 작품
1955년9점프란시스코 카나로 작품
1955년고백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와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의 작품
1955년포스터호메로 엑스포시토 작사, 로베르토 고예네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
1957년진보적인 탱고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옥텟, 음향 편집 문제로 철수
1958년탱고 아르헨티노뉴욕시 오디오 피델리티 레코드에서 녹음, 온스 (오스발도 프레세도 작품), 사방치기 (훌리오 데 카로 작품), 도박사 (레오폴도 페데리코 작품), 감성적인 (훌리안 플라자 작품) 수록
1959년제목 미상마이크로폰 레이블, 2개의 악기 연주곡과 리카르도 루이스의 보컬이 들어간 2개의 곡
1960년1900년대의 건달영화 음악
1961년덫 속의 손영화 음악
1970년개념합창단 도입, 심포닉 사운드, 위령 (아니발 트로일로 작품), 크리올로 자존심 (훌리오 데 카로와 페드로 로렌즈 작품) 수록
연도 미상빵과 양파
연도 미상호머에서 호머로
연도 미상실연
연도 미상물장수
연도 미상카디카모
연도 미상시민
연도 미상콘체르탄고
연도 미상소년
연도 미상타피르
연도 미상내 도시 축하
연도 미상축제와 밀롱가
연도 미상홀수
연도 미상나의 친구 콜로
연도 미상버릇없는 여자아이
연도 미상구둣발질
연도 미상소녀
연도 미상나의 삶
1981년탱고오스카 아라이즈 발레 음악
1984년공식적인 이야기영화 부수 음악,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
1987년콘서트 탱고마드리드 테아트로 레알 데뷔
1987년탱고 바영화 음악, 라울 줄리아 주연
1989년디스세폴린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 헌정 극장 공연


4. 수상 경력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다양한 상을 받으며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 1985년과 2005년, 아르헨티나에서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코넥스 상(Konex Award)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1]
  • 1986년, 루이스 푸엔조 감독의 영화 '공식적인 이야기(The Official Story)'의 부수적인 음악을 작곡하여 최우수 외국어 영화(Academy Award for Best Foreign Language Film) 오스카상 수상에 기여했다.[4]

5. 기타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탱고 음악가로서 공연, 영화 음악 작곡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영화 음악 작품으로는 레오폴도 토레 닐손(Leopoldo Torre Nilsson) 감독의 '1900년대의 건달'(1960)과 '덫 속의 손(La mano en la trampa)'('덫 속의 손(The Hand in the Trap)', 1961) 등이 있다.[4]

1981년에는 오스카 아라이즈(Oscar Araiz)가 안무를 맡은 발레 '탱고(Tango)'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1984년에는 루이스 푸엔조(Luis Puenzo) 감독의 영화 '공식적인 이야기'(The Official Story)의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 이 영화는 198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1] 1987년에는 '콘서트 탱고(Tango en concierto)'를 발표하여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Teatro Real)에서 초연하는 등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마르코스 주리나가(Marcos Zurinaga) 감독의 영화 '탱고 바(Tango Bar)'(1987)와 엔리케 산토스 디스세폴로를 기리는 극장 공연 '디스세폴린(Discepolín)'(1989)의 음악을 담당했다.[1]

2008년에는 미구엘 코한(Miguel Kohan)과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거장들의 카페'(Café de los maestros)에 출연하여 노년의 탱고 거장들과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

참조

[1] 뉴스 Atilio Stampone, el gran amigo del tango http://www.lanacion.[...] La Nación
[2] 웹사이트 Todo Tango: Atilio Stampone http://www.todotango[...] 2013-10-30
[3] 간행물 Los grandes del tango Nélida Rochetto 1991-11
[4] 웹사이트 Atilio Stampone http://www.cinenacio[...]
[5] 뉴스 A puro tango, reabre sus puertas Caño 14 http://www.lanacion.[...] La Nación
[6] 블로그 Juan de Dios Filiberto http://orquestanacio[...]
[7] 웹사이트 Atilio Stampone, star protagonist of the great history of tango, died https://argentina.de[...]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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