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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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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은 1860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은 후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다. 그는 1883년 대한제국에 파견되어 경복궁 관문각 등 궁궐 건축에 참여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을 목격하고 증언했다. 이후 건축 및 토목 사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후 한반도를 떠났으며, 구 러시아 공사관과 관문각 건축에 관여했다. 그는 을미사변의 증언자로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한국에 남아있는 건축물을 통해 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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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원어 이름Афанасій Середін-Сабатін (우크라이나어)
별칭살파정 (薩巴丁), 살파진 (薩巴珍)
국적러시아
출생출생일: 1860년 1월 1일
출생지: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브니
사망사망일: 1921년 1월 1일
사망지: 러시아 볼고그라드
사망 원인: 신경쇠약으로 인한 합병증
학력 및 경력
학력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학교
러시아 제국 해군 양성소
직업건축가
가족
배우자리디아 샬리치 (Lydia C. Shalich, 독일과 폴란드 혼혈의 러시아인)
자녀1남 4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부모아버지: 이반 바실리예비치 세레딘사바틴(우크라이나 귀족)
어머니: 코사크인
주요 건물
주요 건물러시아 공사관
기타 정보

2. 생애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은 1860년 1월 1일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브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타바 인근 루브니에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평민 코사크 출신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왕립예술아카데미와 건축학교를 다녔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해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여 항해사가 되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 함대에서 복무 중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1883년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에게 고용되어 대한제국으로 건너와 경복궁 관문각 등 궁궐 건축에 참여했다. 1895년 을미사변을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신경쇠약으로 가족을 떠나 러시아 각지를 방랑하다 1921년 돈강 유역의 로스토프나도누볼고그라드 부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냥, 수영, 테니스, 캠핑을 즐겼지만, 학업과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고 수입이 일정치 않아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1]

'''가계'''


  • 아버지: 이반 바실리에비치 세레딘사바틴. 폴타바 우크라이나 지방의 지주.
  • 어머니: (이름 불명), 자포로제 코사크의 후손인 우크라이나 평민.
  • 부인: 리디아 크리스티아노브나 샬리치, 폴란드인-독일인 출신, 1936년 상하이에서 사망.

2. 1. 초기 생애와 러시아에서의 활동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은 1860년 1월 1일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브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지방 귀족 출신으로, 폴타바 인근 루브니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세레딘사바틴은 평민 신분의 코사크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재혼하였다. 1874년, 만 14세가 되던 해에 세레딘사바틴은 계모의 학대를 피해 1,000km 이상 떨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삼촌에게 의탁했다.[1]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예술아카데미에 1년간 재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1학년만 마친 후 건축학교로 옮겼다. 하지만 건축학교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하지 못했다. 졸업 증명서가 없었던 그는 건축가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후 해군 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항해사가 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 함대로 임관했다. 그는 극동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1]

1883년 9월 17일, 세레딘사바틴은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에게 측량 토목기사로 고용되어 대한제국으로 떠났다.[9]

2. 2. 대한제국에서의 활동

1883년 9월 17일,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의 고용으로 세레딘사바틴은 측량 토목기사로서 대한제국에 들어왔다.[1] 그는 영조교사(營造敎士)로서 왕궁 신축을 위한 도면 작성 준비나 벽돌 가마를 짓는 일을 맡았다.[9] 24세의 젊은 나이에 경복궁 관문각 등 궁궐 건축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세레딘사바틴은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였다.[9] 이 사건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는 잠시 한반도를 떠났다가 1899년경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9]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떠날 때까지 건축 및 토목 사업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문화재청(CHA) 큐레이터에 따르면, 현재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세레딘사바틴의 작품으로 확인된 건물은 두 채이다.[2]

건물명설명
경복궁 관문각(觀文閣)3층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1977년 11월 22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구 러시아 공사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2. 3. 을미사변 목격

1895년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증언하였다.[9] 이 사건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바틴은 잠시 한반도를 떠났다가 1899년경 인천으로 돌아왔으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전까지 한국에서 건축 및 토목 사업에 참여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흔히 "민비"[3]로 불림)는 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었다.[4] 2001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보고서에는 카를 이바노비치 베버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에게 보낸 보고서와 고종 및 여러 증인의 증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관 대리공사였던 베버의 보고서[4]와 한국 국왕의 직원이었던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군인들이 왕궁에 침입하여[5]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궁궐 북쪽 뜰에서 시신을 훼손했다.[6] 명성황후는 당시 43세였다.[7]

2. 4. 대한제국 이후의 삶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사바틴은 한반도를 떠났다. 그는 영어를 배워 영국 신문의 극동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중국 베이다이허 등지에서 주택 개발업을 벌이기도 했다.[1]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사바틴은 신경쇠약을 앓아 가족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그 후 시베리아와 우랄 지방 등 러시아 곳곳을 방랑하다 1921년 사망했다. 그의 사망지는 돈강 유역의 로스토프나도누볼고그라드 부근으로 추정된다.[1]

사바틴은 사냥을 즐겨 쌍열 산탄총을 소지했으며, 수영과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고, 캠핑을 즐기는 등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1] 그러나 그는 학업과 가정에 성실하지 못했고, 수입이 일정치 않아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1]

3. 스위스 출신설 논란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하였는데,[10] 이는 사바틴이 러시아인이라는 점에서 독립문 설계자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의 타티야나 심비르체바 박사는 2009년 10월 2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한국사학회(공동대표 박정신 숭실대 교수) 제4회 월례발표회에서 '조선국왕폐하의 건축가 사바친'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심비르체바 박사는 세레딘사바틴이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심비르체바 박사는 사바틴이 서재필이 언급한 스위스인 기사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다.[11]

4. 주요 건축물

사바틴이 처음 조선에 도착한 1880년대부터 1904년에 대한제국을 떠나기 전까지 여러 토목사업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바틴이 직접 관여했다고 확실하게 입증된 건축물은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과 관문각 두 개뿐이다.[12] 제물포구락부 등 다른 건물들은 사바틴이 한반도에 머무른 시기와 건축 시기가 일치하여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증명된 바 없다.[13] 사바틴은 고종 등 정부 고위층에 직접 고용된 것이 아니라 총세무사 등 중간 관리자에게 고용되었고, 정부도 사바틴을 조계지 측량과 양식 공사 등을 위한 일회성으로 고용했을 뿐이었다. 또한, 사바틴은 한국인들과 격리되어 조선 건축 양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대한민국 문화재청 큐레이터에 따르면,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업적으로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은 두 채뿐이다.[2]


  • 구 러시아 공사관, 서울, 1890년 완공
  • 경복궁 관문각, 서울, 1891년 완공, 경복궁 북문 근처에 있었던 서양식 3층 건물. 일제가 파괴했음
  • 구 러시아 공사관, 1977년 11월 22일에 지정된 대한민국의 사적 중 하나이다.

참조

[1] 웹사이트 Сеульский строитель http://kikonline.ru/[...] газета «Курган и курганцы», №143/2009 2009-12-22
[2] 뉴스 What did the Russian architect see? - Show marking 30th anniversary of Korea-Russia diplomatic ties highlights Seredin-Sabatin’s eyewitness account of Empress Myeongseong’s assassination https://www.koreaher[...] 2022-07-28
[3] 뉴스 Characteristics of Queen of Corea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895-11-10
[4] 뉴스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http://www.donga.com[...] 2002-01-01
[5] 웹사이트 Queen Min http://koreaweb.ws/k[...] Gari Ledyard, Sejong Professor of Korean History Emeritus at Columbia University 2013-03-24
[6] 뉴스 Queen Min of Korea: Coming to Power http://www.gkn-la.ne[...] 2007-02-19
[7] 웹사이트 Queen Min http://www.gkn-la.ne[...] 2013-03-24
[8] 문서 그의 아내 리디아 크리스티아노바 샬리치는 독일-폴란드 혼혈로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동폴란드 태생이다. 그녀는 목소리가 좋아 종종 리사이틀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수영을 잘하고 캠핑을 즐겼다고 한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고 [[1936년]] 69세의 나이로 [[중국]]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9] 뉴스 What did the Russian architect see? https://www.koreaher[...] The Korea Herald 2022-07-28
[10] 웹인용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1. 독립의식의 계발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2-07-28
[11] 뉴스 한국 서양건축의 비조 사바친 베일 벗어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22-07-28
[12] 뉴스 ‘명성황후 시해 목격자’ 러 청년 사바틴이 조선의 건축물에 남긴 흔적은…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07-30
[13] 웹인용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을 목격한 「1883 러시아 청년 사바틴, 조선에 오다」 특별전 개최 보도자료 https://www.cha.go.k[...]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22-07-28
[14] 뉴스 김태중. "개화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v.12.n.7 (1996): 107-120. https://www.auric.or[...] 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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