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 폰 페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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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셀 폰 페르센은 1755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군인, 정치가, 외교관이다. 그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로 유명하며,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고,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왕실의 탈출을 도왔다. 1810년, 스웨덴 왕세자 칼 아우구스트의 사망과 관련하여 독살 혐의를 받게 되자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사후에 누명은 벗겨졌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악셀 폰 페르센은 스웨덴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군인, 외교관, 정치가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 프랑스 사교계에 데뷔하여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에도 참전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왕당파로서 바렌 사건 등 프랑스 왕가의 탈출 시도를 지원했다. 이후 스웨덴으로 돌아와 구스타프 4세 아돌프 국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810년 왕세자 독살설에 휘말려 스톡홀름에서 군중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귀족의 삶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악셀 폰 페르센이 살해된 지 몇 달 후, 그와 그의 가족은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칼 아우구스트 왕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혐의를 벗었다. 이후 그는 모든 격식과 의례를 갖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여동생 소피 파이퍼는 스톡홀름을 떠나 노르셰핑 근처의 로프스타드 저택으로 물러났다. 소피는 그곳에 오빠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2. 생애
2. 1. 유년기 및 청년기
악셀 폰 페르센은 1755년 9월 4일 스톡홀름에서 야전 원수 악셀 폰 페르센 (1719년)과 백작부인 헤드비그 카타리나 데 라 가르디 사이에서 태어났다.[35] 그는 4남매 중 둘째였으며, 누이로는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와 에바 소피, 남동생으로는 파비안 라인홀트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 헤드비그 카타리나는 에바 에케블라드의 조카였으며, 할아버지는 한스 라인홀트 페르센 장군이었다. 그의 사촌 여동생들인 울리카 폰 페르센과 크리스티나 아우구스타 폰 페르센은 구스타브 시대 스웨덴의 유명한 시녀이자 사교계 명사였다.
페르센 가문의 조상은 30년 전쟁(1618년~1648년) 당시 에스토니아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했으며, 크리스티나, 칼 10세, 칼 11세 통치 기간 동안 명성을 얻었다. 1735년, 페르센 가문은 스톡홀름 외곽 멜라렌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스테닝게 궁전을 구입했다. 그의 아버지 프레드릭 악셀 폰 페르센은 모자당의 실질적인 의회 지도자로서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어린 악셀은 아버지가 루이 15세 밑에서 복무한 덕분에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집에서는 프랑스어로 대화했으며, 가정교사로부터 프랑스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를 배웠다.[36] 이후 주로 군사 교육을 받았다.
1770년 7월 3일, 15세의 페르센은 견문을 넓히고 군사 학교 학업을 마치기 위해 첫 해외 여행을 떠났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토리노, 스트라스부르, 뤼네부르크 등을 방문했다.[36] 1771년 10월에는 스위스를 거쳐 페르네에서 철학자 볼테르를 만났다. 1772년 11월에는 이탈리아 토리노로 가서 찰스 엠마누엘 3세 국왕을 알현했다.[36]
1773년 12월, 18세가 된 페르센은 프랑스 파리 사교계에 데뷔했다. 키가 크고 단아한 용모에 웅변술까지 갖춘 그는 순식간에 파리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유명 인사가 되었다. 1774년 1월, 그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국왕 루이 15세와 그의 애인 마담 뒤 바리를 알현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성령 기사단 의식에 참석했다. 같은 달, 파리 오페라의 가면 무도회에서 당시 도팽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음 만났다.
> "도팽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나에게 오랫동안 말을 걸었다. 마침내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지자 모두가 그녀에게 몰려들었고, 그녀는 세 시에 관람석으로 물러갔다. 나는 무도회를 떠났다."[1]
동갑내기였던 페르센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점차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러한 우호적 관계에는 스웨덴의 국익을 바라는 구스타프 3세의 의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페르센이 아버지 대신 에바 뢰벤의 연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2] 1774년 5월,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자, 페르센은 혹시 모를 스캔들로 왕비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스웨덴으로 급히 귀국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약 4개월간 머물며 조지 3세 국왕과 샬럿 왕비를 만났다. 1775년 초, 스웨덴으로 돌아온 그는 약 3년간 구스타프 3세 국왕 밑에서 복무했다.
1778년, 페르센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왕실로부터 스웨덴인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779년에는 프랑스군의 왕립 바비에르 연대에 입대하여[36] 로샹보 백작의 부관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6년 - 1783년)에 참전했다.[36] 그는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36] 1783년에는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신시내티 협회 훈장을 받았다.[37]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궁정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36][38] 같은 시기, 피사에 머물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의 초청을 받아 그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1784년 스웨덴으로 귀국했다.[36]
1785년, 페르센은 프랑스의 왕립 스웨덴 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36] 이후 파리에 거주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까이에서 도왔다. 1788년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핀란드로 건너가 참전하여 스웨덴의 승리에 기여했고, 이는 유럽에서 스웨덴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같은 해 가을, 프랑스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페르센은 다시 프랑스로 파견되었다.[36] 이는 페르센이 프랑스 왕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구스타프 3세가 당시 주 프랑스 대사였던 스타엘 남작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36]
2. 2.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
1774년 1월, 파리 오페라의 가면 무도회에서 당시 왕태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음 만났다. 페르센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도팽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나에게 오랫동안 말을 걸었다. 마침내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지자 모두가 그녀에게 몰려들었고, 그녀는 세 시에 관람석으로 물러갔다. 나는 무도회를 떠났다.[1]
두 사람은 동갑이었기에 점차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우호 관계에 스웨덴의 국익을 증진하려는 구스타프 3세 국왕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1774년 5월,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루이 16세가 즉위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자, 페르센은 혹시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왕비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이후 미국 독립 전쟁(1776년-1783년)에 참전하였다.
1778년 여름, 페르센은 프랑스로 돌아와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족들을 다시 만났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센을 보자 "아! 여기 옛 친구가 있네."라고 말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3] 이후 페르센은 프랑스 왕실로부터 스웨덴인 연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왕비의 총애를 받으며 그녀의 사적인 공간인 프티 트리아농에서 열리는 모임에도 초대받는 신뢰받는 인물이 되었다.[27] 프티 트리아농은 베르사유 궁전과 달리 격식 없이 소박한 분위기였으며, 왕비는 이곳에서 손님들을 친구처럼 대했다.[4] 페르센은 당시 상황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9월 8일: "내가 아는 가장 예쁘고 상냥한 공주인 여왕은 나에 대해 자주 묻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그녀는 크로이츠에게 내가 일요일에 열리는 그녀의 카드 파티에 왜 가지 않는지 물었고, 내가 그런 파티가 없는 일요일에 갔다는 말을 듣고 일종의 변명을 보냈다..."
: 11월 19일: "여왕은 나를 매우 친절하게 대한다. 나는 종종 그녀의 카드 게임에 가서 그녀를 알현하고, 매번 그녀는 호의가 가득한 작은 말을 나에게 건넨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나의 스웨덴 군복에 대해 말했기에, 그녀는 그것을 입은 나를 보고 싶어했다. 나는 목요일에 그렇게 옷을 입고, 궁정이 아니라 여왕의 아파트에 갈 것이다.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상냥한 공주이다."[3]
두 사람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궁정 내 질투를 유발하기도 했다. 페르센의 잘생긴 외모와 우아함, 재치에 왕비가 특별히 매료되었다는 인식이 퍼졌고,[25] 곧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페르센은 1780년 초, 로샹보 백작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당시 프랑스 주재 스웨덴 공사였던 구스타프 필립 크로이츠는 구스타프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젊은 페르센 백작은 여왕에게 매우 좋은 대접을 받아서 여러 사람들의 시샘을 샀습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징후를 보았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젊은 백작의 행동은 겸손함과 신중함으로 칭찬할 만했지만, 무엇보다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점이 훌륭했습니다. 그는 떠남으로써 모든 위험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극복하려면 그의 나이를 뛰어넘는 굳건함이 필요했습니다. 여왕은 마지막 날 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고, 종종 눈물을 글썽였습니다.[28]
1783년 6월, 페르센은 미국에서 돌아왔고,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적인 모임에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계속되었으나, 주고받은 서신의 대부분이 분실되거나 파기, 또는 내용이 삭제되어 연인 관계였음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하다.[29] 하지만 2016년부터 프랑스 유물 보존 연구 센터(CRCC)의 과학자들이 특수 기술을 이용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에게 보낸 편지 중 삭제된 부분 일부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30] 복원된 내용에서 육체적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이 있었음은 확인되었다.[31]
이후 페르센은 178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까이에서 도왔다.
2. 3. 프랑스 혁명과 페르센
1787년 프랑스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페르센은 구스타브 3세에 의해 비밀리에 프랑스 국왕 부부에 대한 특별 사절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스웨덴과 프랑스 간의 민감한 외교적 소통 일부는 스웨덴 대사관 대신 페르센을 통해 이루어졌다.[36] 그는 파리에 더 가까이 머물기 위해 오퇴유로 거처를 옮겼다.
1788년 봄, 페르센은 러시아에 대한 핀란드 원정에 구스타브 3세와 함께 참전했으나[8], 같은 해 12월 프랑스로 돌아와 당시의 긴장된 분위기를 목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흥분 상태에 있습니다. 헌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병이며, 모든 사람이 행정가이며 진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9]
1789년 5월 2일,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페르센은 5월 5일 루이 16세의 개회사를 지켜보았다. 곧 제3신분이 국민 의회를 선언하자 왕가는 군대를 파리 주변에 집결시켰다. 페르센은 우려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이 프랑스 군인을 확신하지 못하고 가능한 한 외국인을 고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9] 7월 14일, 바스티유가 습격당하자 페르센은 7월 16일 베르사유에서 국왕 부부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루이 16세가 파리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센에게 동행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10] 페르센은 루이 16세를 따라 파리까지 갔으며, 8월 8일에는 봉건적 특권 폐지를 포함한 8월 칙령이 제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 프랑스 전역의 혼란과 왕권의 약화를 기록으로 남겼다.[9] 10월, 베르사유 행진이 일어나 왕가가 파리로 강제 이동하게 되었을 때도 페르센은 그 과정을 목격하고 파리까지 동행했다. 그는 당시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다시는 그 두 날과 같은 고통스러운 광경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11]
왕가가 파리에 사실상 연금된 상태가 되자, 페르센은 그들의 망명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791년 4월 2일 망명 계획을 함께 논의하던 미라보 백작이 사망하고[12], 4월 18일 왕가가 미사를 위해 생클루로 가려다 군중에게 저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페르센은 탈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베를린 마차를 구입하여 6월 20일 밤, 왕가의 탈출을 도왔다. 페르센은 직접 마부 역할을 하며 왕가를 튈르리 궁전에서 파리 외곽 본디까지 호송했다.[36] 그러나 왕가는 6월 22일 밤 바렌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송환되었고, 이 사건은 바렌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페르센이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에게도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페르센은 프랑스를 떠나 코블렌츠와 브뤼셀 등지에서 망명 중에, 아르투아 백작 등 망명 귀족들과 접촉하여 유럽 열강들이 프랑스에 개입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는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을 이용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았다. 1791년 8월, 페르센은 빈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를 만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동 대응을 촉구했으나[36], 레오폴트 2세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8월 27일 발표된 필니츠 선언 역시 다른 유럽 열강들의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어 실질적인 군사 행동을 약속하지 않았고, 이에 페르센은 실망감을 표했다.[13]
1792년 2월, 페르센은 위험을 무릅쓰고 위조된 신분증을 이용해 파리에 잠입하여 2월 13일과 14일에 왕가를 만났다. 그러나 재차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2월 27일 브뤼셀로 돌아왔다.[36] 3월 16일, 그의 후원자였던 구스타브 3세가 암살되면서 스웨덴의 프랑스 혁명 전쟁 개입 가능성은 사라졌고, 페르센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스웨덴에서는 구스타브 3세의 동생 칼 13세가 어린 구스타브 4세의 섭정이 되었다.
1792년 4월 20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6월 20일에는 튀일리 궁이 군중에게 습격당하는 등 왕가의 처지는 더욱 위험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암호 편지로 페르센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11월 7일 제마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자 페르센은 브뤼셀에서 철수하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14]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페르센은 쾰른에서 접했다.[15] 8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재판을 위해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되자, 페르센은 그녀를 구출할 방법을 모색했지만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했다.[17] 10월 6일에는 바렌 사건 당시 루이 16세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장-밥티스트 드루에를 만나 정보를 얻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마저 처형되었다. 페르센은 브뤼셀에서 이 비보를 듣고 깊은 슬픔에 잠겨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현실에 압도당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느낄 힘이 없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그녀에 대해, 그녀의 고통의 모든 끔찍한 상황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저를 고문했습니다."[18]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1798년 1월, 페르센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한 제2차 라슈타트 회의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2. 4. 스웨덴에서의 정치 활동과 최후
1791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폰 페르센은 이후 몇 년간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확장되는 프랑스 혁명 제국을 지켜보았다.[19] 1792년 구스타프 3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어렸기 때문에 구스타프 3세의 동생인 칼 13세가 섭정을 맡았다.[36] 이 시기에는 구스타프 3세의 지지자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으나, 1796년 11월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오르면서 폰 페르센을 포함한 구스타프 3세의 지지자들은 다시 궁정에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36] 폰 페르센과 그의 친구 타우베 남작은 젊은 국왕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조언자 중 두 명이 되었으며, "혁명 프랑스에 대한 확고한 반대,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 덴마크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궁극적으로 노르웨이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20]
1797년 11월, 폰 페르센은 라슈타트 회의에 스웨덴 대표로 참석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을 만났다.[38] 독일에 머무는 동안 그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를 대신해 카를스루에를 방문하여, 그해 10월 왕과 결혼하게 될 바덴의 프레데리카 공주와의 혼담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1799년 독일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 그는 왕국의 영주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가을, 웁살라 시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동조 분위기가 감지되자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이를 우려했다. 웁살라 대학교 학생들이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를 축하하는 행사를 열자, 국왕은 폰 페르센을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했다.[39] 이는 프랑스 왕당파였던 폰 페르센이 스웨덴 내 급진주의 세력을 견제하도록 한 조치였다. 그해 겨울, 혹독한 추위와 기근으로 스톡홀름, 예테보리, 노르셰핑, 린셰핑, 말뫼 등 스웨덴 여러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폰 페르센은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누가 전반적인 격변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며 불안감을 나타냈다.[21] 이듬해 4월, 웁살라 오케스트라가 "라 마르세예즈"의 일부를 포함한 곡을 연주하도록 유도하려 한 사건으로 인해 4명의 대학 내 급진주의자들이 재판을 받고 처벌받았으며, 이 사건은 웁살라의 급진주의 운동에 타격을 주었다.
정부가 거의 파산하고, 흉작과 무역 감소로 인해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이 약화되면서,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마지못해 릭스다그의 첫 번째 회의를 발표했다. 릭스다그는 6월 중순에 해산되었지만, 여러 저명한 귀족들이 회의장을 걸어 나가 귀족 신분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해산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실제로 경쟁자들이 채운 정치적 공백을 남겼다.
1801년 폰 페르센은 왕국의 원수로 임명되어 스웨덴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38] 이 무렵 그의 여동생 소피 파이퍼가 독일에서 스웨덴으로 돌아와 그의 가정을 돌보았다. 1802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했다.[38] 1805년 스웨덴이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자, 폰 페르센은 구스타프 4세와 함께 독일로 향했다.[38] 그러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부하자 구스타프 4세가 보복으로 프로이센 침공을 고려했을 때, 폰 페르센이 이를 만류하면서 국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36]
1809년 쿠데타로 구스타프 4세가 폐위되고 망명하자, 폰 페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36][38] 이 덕분에 그는 혁명 후에도 지위를 유지하며 대장으로 승진했지만, 보수파로서 폐위된 구스타프 4세의 아들 구스타프 왕세자를 지지했다.[36][38] 새로 즉위한 칼 13세는 덴마크의 왕자 칼 아우구스트를 왕세자로 지명했으나, 칼 아우구스트는 1810년 5월 28일 스카니아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졸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36]
칼 아우구스트의 죽음 이후, 폰 페르센과 그의 여동생 소피 파이퍼가 왕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36] 이 소문은 근거 없는 비방이었지만[36], 폰 페르센이 속한 구스타프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폰 페르센은 공개적으로 비난받았고 익명의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1810년 6월 20일, 칼 아우구스트 왕세자의 공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기마 친위대는 행렬의 선두를 맡았고, 왕국의 원수였던 폰 페르센은 왕 다음으로 높은 공식 서열을 가진 인물로서 다른 궁정 고위 인사들과 함께 관 앞에 마차를 타고 이동했으며, 행렬의 후미는 스카니아에서 왕세자의 유해를 호송해온 기병대가 뒤따랐다. 보병 친위대는 리다르후스토르겟에서 열병했다. 스톡홀름 주둔군 사령관 실버스파레 장군은 소요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 폰 페르센을 반대하는 궁정 파벌의 일원이었을 수도 있다.[23] 행렬이 혼스가탄과 쇠데르말름 광장을 천천히 지나갔고, 도시로 들어서자마자 폰 페르센을 향한 위협과 모욕이 쏟아졌다.[24]
> 먼저 저주가 쏟아지고, 다음에는 구리 동전과 각종 투사체가 마차에 던져져 창문이 깨졌고, 격렬한 위협과 돌멩이 세례가 끊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호위병이 오른쪽으로 돌려는 찰나 리다르후스토르겟에서 엄청난 군중이 폰 페르센의 마차를 막아섰다... [경비병]은 폭도들이 말의 멍에를 풀고 폰 페르센을 마차 밖으로 끌어내는 동안 수수방관했다.
폰 페르센은 격렬한 몸짓으로 자신을 붙잡은 공격자 중 한 명을 밀쳐내고 주위에서 밀려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벗어났다.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고, 저주는 외침에서 중얼거림으로 줄어들었다. 폰 페르센의 얼굴은 돌에 맞아 피가 흘렀고, 그의 훈장은 햇빛에 반짝였다. 그를 보호해야 할 경비병들은 호기심 어린 기대감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실버스파레 장군과 소규모 병력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개입은 대중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폰 페르센은 당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계획임을 깨닫고, 몸을 돌려 눈에 띄는 첫 번째 문으로 돌진했다. 군중은 이 지점으로 모여들었고, 몇몇은 그를 쫓아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창문에 나타나 "승리의 함성"과 함께 폰 페르센의 망토와 칼을 던져 떨어뜨렸고, 분노한 군중이 그것을 움켜쥐었다. 폰 페르센은 다시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의 장갑이 벗겨져 그의 얼굴에 던져졌고, 그의 코트는 찢겨 짓밟혔다. 폰 페르센을 구하려던 실버스파레는 그를 체포하여 왕세자 살해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순간, 기마 호위병이 돌아서서 떠났다. 폰 페르센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폰 페르센의 동시대 인물인 구스타프 모리츠 암펠트 남작은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정부는 마치 화가 난 맹수에게 주의를 돌리기 위해 무언가를 던져주는 것처럼, 국민에게 가지고 놀 희생자를 주고 싶어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모든 것을 더 깊이 생각해 볼수록 폭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대체 군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군대와 군사 호위대가 실제로 존재했던 행렬 도중 대낮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25]
악셀 폰 페르센은 그날 스톡홀름에서 국왕 다음으로 스웨덴에서 가장 고위직에 있는 인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국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인은 스웨덴계 핀란드인 오토 요한 탄데펠트가 폰 페르센의 가슴을 두 발로 밟아 "가슴 으스러짐"으로 밝혀졌다.[26] 장교 2명이 페르센을 국회의사당으로 호송하여, 그곳에 연금하는 형태로 군중들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지만, 페르센은 의사당 앞 계단에서 린치를 당해 사망했다.[36] 폭동은 1시간 이상 지속되었지만, 현장에 있던 근위 연대는 폭동을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36]
구스타프파에 속하는 구스타프 마우리츠 알름펠트는 폭동의 책임을 군중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며, "이런 사건이 정규군이 있는 곳에서 백주 대낮에 일어났다"고 의문을 제기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칼 13세 정권이 구스타프파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알름펠트가 도망쳤기 때문에 페르센이 피해를 입었다고 평하고 있다.[36]
1810년 12월, 법원은 칼 아우구스트가 병사했다는 판단을 내렸고, 페르센은 오명을 벗고 고관으로서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40]
3. 유산 및 평가
''Åt en oförgätlig broder, mannamodet uti hans sista stunder den 20 juni 1810 vittna om hans dygder och sinnes lugnsv'' (잊을 수 없는 오빠에게. 1810년 6월 20일 마지막 순간 보여준 그의 용기는 그의 미덕과 평온한 마음을 증명한다.)
''I dessa neider där han fordom niutit wänskapen och friden skall hans skugga mötas af wälsignelse och tårar.sv'' (한때 그가 우정과 평화를 누렸던 이곳에서 그의 영혼은 축복과 눈물로 맞이하리라.)
3. 1.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에 대한 논란
1778년 늦여름, 폰 페르센은 친구인 슈테딩크 남작과 함께 노르망디로 가서 브로이 공작 휘하의 군사 훈련을 참관했다. 군사 훈련 외에도 장교와 부인들이 참석하는 저녁 식사와 무도회를 즐겼다. 이때 폰 페르센은 3년여 만에 프랑스 왕족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폰 페르센의 기록에 따르면, 8월 2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를 보고 "아! 여기 옛 친구가 있네."라고 말하며 반가움을 표시했고, 이후에도 여왕은 그에게 자주 안부를 묻고 카드 파티에 초대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3]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 소유지였던 프티 트리아농은 베르사유 궁전 부지 내에 있었다. 베르사유의 격식과 달리 프티 트리아농에서는 비교적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4] 이곳의 손님들은 개인적으로 초대받아 친구처럼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나, 이러한 배타적인 모임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했다.
젊은 귀족 폰 페르센은 프랑스에 헌신했던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과 자신의 뛰어난 자질 덕분에 프랑스 궁정에서 환영받았다. 특히 18세의 폰 페르센을 처음 만났던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은 그의 외모와 재치에 매력을 느꼈다고 전해진다.[25]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폰 페르센이 1778년 여름 프랑스를 다시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신뢰받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프티 트리아농에서 열리는 그녀의 개인적인 모임에 초대되었다.[27] 그들의 우정은 빠르게 깊어졌고, 이는 궁정 내에서 질투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보몽의 기록에 따르면, 폰 페르센과 여왕의 친밀한 관계가 널리 알려지고 그가 여왕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자,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1780년 초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보몽은 폰 페르센이 프랑스 주재 스웨덴 공사였던 구스타프 필립 크로이츠에게 로샹보 백작의 ''부관''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당시 크로이츠는 구스타프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페르센 백작은 여왕에게 매우 좋은 대접을 받아 여러 사람들의 시샘을 샀습니다.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백작의 행동은 겸손함과 신중함으로 칭찬할 만했지만, 무엇보다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점이 훌륭했습니다... 여왕은 마지막 날 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고, 종종 눈물을 글썽였습니다."라고 보고하며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와 페르센의 신중한 처신을 언급했다.[28]
1783년 6월 미국에서 돌아온 후, 폰 페르센은 다시 여왕의 사적인 모임에 참여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다시 퍼졌지만, 주고받은 편지 대부분이 분실되거나 파기되었고, 일부 내용은 의도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는 오랫동안 부족했다.[29] 그러나 2016년부터 프랑스 유물 보존 연구 센터(CRCC) 소속 과학자들이 여왕이 페르센에게 보낸 편지 중 삭제된 부분의 일부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30] 복원된 내용은 육체적인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매우 강렬한 정서적 교감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31]
3. 2.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1938년 미국 장편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마티네 아이돌 타이론 파워가 페르센 역을 연기했다.
2006년 드라마/로맨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제이미 도넌이 그를 연기했다.
페르센은 이케다 리요코의 일본 만화 시리즈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또한 캐산드라 클레어의 ''섀도우 헌터'' 프랜차이즈와 관련된 단편 소설 시리즈인 ''베인 연대기''에서도 언급된다.
4. 서훈 내역
- 스웨덴 대십자장
5. 관련 명언
1793년 1월 21일, 브뤼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르센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하였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의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하여…"[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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