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갈라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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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스 갈라라가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85년부터 2005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활약했다. 1루수와 3루수를 소화했으며, 몬트리올 엑스포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콜로라도 로키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텍사스 레인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애너하임 에인절스, 뉴욕 메츠 등 여러 팀에서 뛰었다. 1993년 내셔널 리그 타율 1위를 차지했고, 1996년과 1997년에는 홈런왕과 타점왕을 석권하며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했다. 2번의 컴백 선수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암 투병 후 복귀하여 감동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통산 399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2005년 뉴욕 메츠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베네수엘라 대표팀 코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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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갈라라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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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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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1루수 |
타석 | 우타 |
송구 | 우투 |
출생일 | 1961년 6월 18일 |
출생지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
사망일 | 해당사항 없음 |
프로 경력 | |
데뷔 리그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
데뷔 | 1985년 8월 23일 |
마지막 리그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
마지막 경기 | 2004년 10월 3일 |
수상 경력 | |
올스타 | 5회 (1988년, 1993년, 1997년, 1998년, 2000년) |
골드 글러브 | 2회 (1989년, 1990년) |
실버 슬러거 | 2회 (1988년, 1996년) |
내셔널 리그 타격왕 | 1993년 |
내셔널 리그 홈런왕 | 1996년 |
내셔널 리그 타점왕 | 2회 (1996년, 1997년) |
기록 | |
타율 | .288 |
홈런 | 399개 |
안타 | 2,333개 |
타점 | 1,425점 |
선수 경력 | |
소속 팀 | 몬트리올 엑스포스 (1985년~1991년, 200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2년) 콜로라도 로키스 (1993년~1997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98년, 2000년) 텍사스 레인저스 (2001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1년, 2003년)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4년) |
명예의 전당 | |
종류 | 베네수엘라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2010년 |
2. 선수 경력
베네수엘라 출신인 갈라라가는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와 계약하여 포수와 3루수로 뛰었다. 1978-79 시즌에 데뷔했으며, 원래 유틸리티 선수였으나 3시즌 후 팀의 주전 1루수가 되었다. 팀 동료로는 토니 아르마스, 보 디아스, 매니 트리요 등 빅 리그 선수들이 있었다.[2] 펠리페 알루 감독의 추천으로 1979년 몬트리올과 계약했다.[2] 당시 일부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은 17세의 파워 히터 신동이 프로 선수로 뛰기에는 과체중이라고 생각했지만, 몬트리올이 그를 지명하여 계약에 성공했다.[14]
갈라라가는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MiLB)에서 여러 팀을 거쳤다. 1984년 잭슨빌에서 .289의 타율, 27개의 홈런, 87타점(RBI)을 기록하며 더블 A(Double-A) 사우스턴 리그(Southern League) 최우수 선수(Most Valuable Player)로 선정되었다.[2] 그는 또한 총 루타수(271), 장타율(.508) 등 여러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기 전, 갈라라가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121경기에 출전하여 .269/25/85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트리플 A(Triple-A) 인터내셔널 리그(IL) 신인상을 수상했다.
갈라라가는 1985년 8월 23일 몬트리올에서 데뷔했다.[1] 그 시즌 24경기에 출전하여 2개의 홈런과 4타점을 기록하며 .187의 타율을 기록했다.
1986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8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25타점으로 내셔널 리그 신인 선수 중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7월 10일에 관절경적 무릎 수술을 받았고, 한 달 후에 복귀했지만, 다음 날 갈비뼈의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9월에 복귀하여 105경기에서 .271, 10개의 홈런, 42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1]
1987년 시즌에 .305의 타율, 13개의 홈런, 90타점을 기록했고, 리그에서 2루타(doubles)(40개)로 2위를 차지했다.
1988년에는 .302의 타율, 99 득점(Run (baseball)), 29개의 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MVP급 시즌을 보였다. 리그에서 안타(Hit (baseball)) (184개)와 2루타(42개)에서 선두를 달렸고, 처음으로 올스타 자격을 얻었다.[1] 시즌 말에 몬트리올 엑스포스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9년에는 삼진(158개)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하며 .257의 타율, 23개의 홈런, 85타점으로 생산성이 떨어졌다. 첫 만루 홈런(Grand slam (baseball))을 터뜨렸고, 처음으로 홈을 도루했으며, 1루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골드 글러브 상을 받았다.
1990년에는 .256의 타율, 20개의 홈런, 87타점으로 이전 시즌과 거의 동일한 결과를 보였다. 3년 연속 삼진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지만, 두 번째 골드 글러브를 획득했다. 6타점 경기, 2번의 4타점 경기를 기록했고,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쳤다.
1991년에는 왼쪽 햄스트링 부상과 왼쪽 무릎 관절 아래쪽 손상을 복구하기 위한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107경기에서 .219의 타율, 9개의 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켄 힐(Ken Hill (baseball))을 얻기 위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로 트레이드되었다.
카디널스에서 1992년 시즌을 맞았지만, 시즌 초반 투구에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7월까지 회복하지 못했다.[10] .243의 타율과 39타점을 기록했지만, 카디널스 타격 코치 돈 베일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베일러가 오프시즌에 초대 로키스 감독이 되자, 자유 계약으로 그를 영입하도록 추천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 합류한 1993년(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시즌, 최종 타율 0.370으로 내셔널 리그 타자들 중 타율 1위를 기록했으며, 조 디마지오가 1939년(193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에 0.381을 기록한 이후 우타자 중 최고 타율이었다.[2]
1994-1995년 MLB 파업으로 단축된 1994년(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시즌, 4월 한 달 동안 30타점을 기록하며 새로운 내셔널 리그 기록을 세웠으나, 7월 28일에 오른손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1995년(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6월 25일, 3이닝 연속 홈런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280의 타율, 31개의 홈런, 106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1996년(199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과 1997년(199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사이에는 총 411타점(150, 140)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각각 .304, .318의 타율을 기록했고, 각각 47, 4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7년 5월 31일, 케빈 브라운을 상대로 그랜드 슬램을 쳤는데, 플로리다 말린스의 프로 플레이어 스타디움의 상단 관중석 20번째 줄에 떨어졌다. 이 홈런은 약 161.24m로 측정되면서 가장 논란이 많은 홈런이기도 하다.[2]
로키스는 토드 헬튼을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시즌 말에 갈라라가를 방출했고,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3년 계약을 맺었다.[10][11]
1998년, 애틀랜타에서의 첫 시즌에 타율 0.305, 44홈런, 121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두 개의 다른 팀에서 2시즌 연속으로 4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MLB 역사상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99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림프관 암 종양이 발견되어, 1999년 시즌 전체를 화학 요법 치료를 받으며 결장했다.
2000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화학 요법과 훈련 후 다시 필드로 돌아왔고, 개막전에서 홈런으로 결승타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타율 0.302, 28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The Sporting News''로부터 두 번째 내셔널 리그 컴백 선수상을 받았다.
2001년, 라파엘 팔메이로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주전 1루수로 있어 백업 선수로 전락했다. 주로 지명타자(DH)나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72경기에서 .235의 타율, 10개의 홈런, 34타점을 기록하며 시즌 중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12][13]
2002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정규 시즌 계약을 맺었다. 2003년 시즌 전에는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다시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자이언츠에서 .301의 타율, 12개의 홈런, 42타점을 기록했다.
2004년, 암이 재발하여 두 번의 3주간 화학 요법을 받았고, 애너하임 에인절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솔트레이크 스팅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9월에 메이저 리그로 복귀하여 몇 경기에 출전하여 1개의 홈런(통산 399호)을 쳤다.
2005년영어 뉴욕 메츠와 계약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받았으나, 2005년 3월 29일 "젊은 선수에게 기회를 줄 적절한 시기"라며 은퇴를 결정했다.[8]
갈라라가의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연도 | 기록 |
---|---|
1984 | 마이너 리그 2A에서 MVP 수상 |
1985 | 3A에서 루키 오브 더 이어를 수상하고 메이저 리그에 승격. 8월 23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전에서 메이저 데뷔. 같은 해 2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187, 2 홈런을 기록 |
1986 | 10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1, 10홈런, 42타점을 기록 |
1987 | 타율 .305, 13홈런, 90타점 기록 |
1988 | 29홈런,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 실버 슬러거상 수상. |
1989 ~ 1990 | 2년 연속 골드 글러브상 선정. |
1991 | 부상으로 인해 타율 .219, 9홈런으로 시즌 마감. |
갈라라가의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경기 | 타율 | 홈런 | 타점 | 비고 |
---|---|---|---|---|---|
1993년(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20 | .370 | 22 | 98 | 수위 타자, 컴백상 수상 |
1994년(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03 | .319 | 31 | 85 | |
1995년(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39 | .280 | 31 | 106 | |
1996년(199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59 | .304 | 47 | 150 | 홈런왕, 타점왕, 실버 슬러거 |
1997년(199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54 | .318 | 41 | 140 | 타점왕 |
2. 1. 베네수엘라 리그 및 마이너 리그 시절
갈라라가는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와 계약하여 포수와 3루수로 뛰었다. 1978-79 시즌에 데뷔했으며, 원래 유틸리티 선수였으나 3시즌 후 팀의 주전 1루수가 되었다. 팀 동료로는 토니 아르마스, 보 디아스, 매니 트리요 등 빅 리그 선수들이 있었다.[2] 펠리페 알루 감독의 추천으로 1979년 엑스포스와 계약했다.[2] 당시 일부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은 17세의 파워 히터 신동이 프로 선수로 뛰기에는 과체중이라고 생각했지만, 몬트리올이 그를 지명하여 계약에 성공했다.[14] 그는 1993년 베네수엘라 윈터 리그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 팀에서 뛰었다.마이너 리그 베이스볼(MiLB)에서 갈라라가는 웨스트팜비치 엑스포스(1979년, 1982년–1983년), 캘거리 엑스포스(1979년–1980년), 제임스타운 엑스포스(1981년), 잭슨빌 선스(1984년),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1985년)에서 뛰었다. 1984년 잭슨빌에서 .289의 타율, 27개의 홈런, 87타점(RBI)을 기록하며 더블 A(Double-A) 사우스턴 리그(Southern League) 최우수 선수(Most Valuable Player)로 선정되었다.[2] 그는 또한 총 루타수(271), 장타율(.508) 등 여러 부문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기 전, 갈라라가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121경기에 출전하여 .269/25/85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트리플 A(Triple-A) 인터내셔널 리그(IL) 신인상을 수상했다.
2. 2. 몬트리올 엑스포스 (1985-1991)
베네수엘라의 윈터리그 팀인 Leones del Caranas에서 선수로 뛰었는데 당시 과체중이었지만 몬트리올이 그를 지명한 후[14] 계약에 성공했다. 갈라라가는 1985년 8월 23일 몬트리올에서 데뷔했다.[1] 그 시즌의 마지막 6주 이상 동안 그는 부진하여 24경기에서 2개의 홈런과 4타점을 기록하며 .187(75타수 14안타)의 타율을 기록했다.1986년에 유망한 출발을 보였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8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25타점으로 모든 내셔널 리그 신인 선수 중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갈라라가는 7월 10일에 관절경적 무릎 수술을 받았다. 한 달 후에 복귀했지만, 다음 날 갈비뼈의 근육이 찢어지면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갈라라가는 9월에 복귀하여 105경기에서 .271, 10개의 홈런, 42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1]
몇몇 팀 동료들에게 가려진 갈라라가는 어려운 신인 시절을 견뎌냈고, 1987년 시즌에 꾸준히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305의 타율, 13개의 홈런, 90타점을 기록했고, 리그에서 2루타(doubles)(40개)로 2위를 차지했다. 갈라라가는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수비를 보여주며 땅볼 송구를 잘 처리했고, 3-6-3 병살 처리에 뛰어난 민첩성을 보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Cardinals)의 감독 화이티 헤르조그(Whitey Herzog)는 그를 "길 호지스(Gil Hodges) 이후 내가 본 최고의 수비형 우타자 1루수"라고 칭찬했다.
1988년에 갈라라가는 엑스포스(Expos)의 최고의 선수로 부상했다. 그는 .302의 타율, 99 득점(Run (baseball)), 29개의 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MVP급 시즌을 보냈다. 갈라라가는 또한 리그에서 안타(Hit (baseball)) (184개)와 2루타(42개)에서 선두를 달렸고, 그의 경력 처음으로 올스타 자격을 얻었다.[1] 그는 시즌 말에 몬트리올 엑스포스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9년은 빅 캣(Big Cat)에게는 힘든 시즌이었다. 갈라라가는 올스타 게임 이후 부진하면서 몬트리올 팬들의 좌절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갈라라가는 삼진(158개)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하며 .257의 타율, 23개의 홈런, 85타점으로 생산성이 떨어졌다. 그는 90타점 이상으로 3시즌 연속 기록을 세울 엑스포스(Expo)가 되는 데 5타점 부족했다. 힘든 시즌에도 불구하고 갈라라가는 그의 첫 만루 홈런(Grand slam (baseball))을 터뜨렸고, 그의 경력 처음으로 홈을 도루했고, 1루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골드 글러브 상을 받았다.
갈라라가의 1990년 시즌은 엑스포스(Expos)가 이 매끄러운 수비의 1루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고 중얼거리게 했다. 빅 캣은 2시즌 연속으로 처음 2번의 풀타임 시즌에서 설정한 기준을 반복하지 못했다. 갈라라가는 .256의 타율, 20개의 홈런, 87타점으로 그의 이전 시즌과 거의 동일한 결과를 보였다. 그는 3년 연속 삼진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투수들은 갈라라가의 타석에서의 조급함을 이용했고, 그에게 좋은 공을 던지지 않았다. 타석에서의 어떤 발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라가는 수비에서 엄청난 기여를 계속했고, 내야수의 실책 송구를 잡아내고, 3-6-3 병살을 시작했으며, 두 번째 골드 글러브를 획득했다. 그 시즌 그는 또한 6타점 경기, 2번의 4타점 경기를 기록했고, 그의 경력 처음으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쳤다.
부상으로 인해 갈라라가는 1991년에 그의 경력 최악의 공격 시즌을 보냈다. 5월에서 7월 사이에 왼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장애를 입었고, 나중에 왼쪽 무릎 관절 아래쪽 손상을 복구하기 위해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몬트리올은 그의 방망이만큼 그의 글러브를 그리워했고, 그가 없는 53경기에서 43개의 내야 실책(Error (baseball))을 범했다. 그 시즌 갈라라가는 107경기에서 .219의 타율, 9개의 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그의 경력에서 두 번째로 홈을 도루했고, 그의 통산 100번째 홈런을 쳤다. 시즌이 끝날 무렵, 갈라라가는 선발 투수 켄 힐(Ken Hill (baseball))을 얻기 위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로 트레이드되었다.
1978-79 시즌에 베네수엘라 윈터 리그에서 데뷔했다. 당시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감독이었던 펠리페 알루의 추천으로 1979년 1월 드래프트 외로 엑스포스와 계약했다.[10]
연도 | 기록 |
---|---|
1984 | 마이너 리그 2A에서 MVP를 수상 |
1985 | 3A에서 루키 오브 더 이어를 수상하고 메이저 리그에 승격. 8월 23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전에서 메이저 데뷔. 같은 해 2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187, 2 홈런을 기록 |
1986 | 10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1, 10홈런, 42타점을 기록 |
1987 | 타점을 90점으로 끌어올렸고 (90), 타율도 3할 기록 (.305) |
1988 | 데뷔 3년간 통산 홈런 25개를 뛰어넘는 시즌 29홈런을 기록.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 타격에서의 활약이 평가되어, 이 해에 실버 슬러거상을 수상. |
1989 ~ 1990 | 2년간 타격면에서는 타율이 2할 5푼대였지만, 수비면에서의 활약을 평가받아 2년 연속으로 골드 글러브상에 선정. |
1991 | 홈런이 두 자릿수에 미치지 못했고, 타율도 2할 2푼을 밑돌았다. 루키 해를 제외하고 데뷔 이후, 자기 최저의 성적으로 끝남. |
2. 3.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2)
갈라라가는 1992년 카디널스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었지만, 시즌 초반에 투구에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7월까지 회복하지 못했다.[10] 1992년 시즌 2번째 경기인 4월 7일 뉴욕 메츠전에서 사구로 오른손목이 골절되었고,[10] 이 부상으로 44일간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296의 타율을 기록했고, 7월 1일 이후 10개의 홈런을 모두 쳐내 후반기 슬러깅률 .497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243의 타율과 39타점을 기록했지만, 카디널스 타격 코치 돈 베일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베일러가 오프시즌에 초대 로키스 감독이 되자, 그는 콜로라도가 갈라라가에게 기회를 주고 자유 계약으로 그를 영입하도록 추천했다. 전년보다 적은 출장 경기수를 기록했지만, 전년보다 많은 홈런과 타점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FA가 되었다.2. 4. 콜로라도 로키스 (1993-1997)
로키스에 합류하면서 갈라라가는 선수 경력에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1993년(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시즌은 놀라운 개인적 성과로 가득했고, 그는 뛰어난 타자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시즌 대부분 동안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했다. 갈라라가의 최종 타율 0.370은 전년도보다 127포인트나 상승한 수치였다. 그는 내셔널 리그 타자들 중 타율 1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조 디마지오가 1939년(193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에 0.381을 기록한 이후 우타자 중 최고 타율이었다.[2]다양한 부상으로 42경기에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빅 캣(The Big Cat)'은 56개의 멀티 안타 경기를 기록하며 리그를 이끌었다. 그는 22개의 홈런, 98타점, 71득점, 35개의 2루타, 4개의 3루타를 기록했으며, .403의 출루율과 .602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장타율은 리그 2위였다. 갈라라가의 .370 타율은 그를 확장 팀 소속 선수이자 베네수엘라 출신 선수 중 최초로 타격왕을 차지한 선수로 만들었다. 토니 그윈은 .358의 타율로 2위를 차지했다. 갈라라가는 MVP 투표에서 10위를 차지했지만 ''The Sporting News''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시즌 후, 그는 세 번째로 관절경 무릎 수술을 받았다.
1994-1995년 MLB 파업으로 단축된 1994년(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시즌에서 갈라라가는 4월 한 달 동안 30타점을 기록하며 새로운 내셔널 리그 기록을 세웠다. 그는 다시 한 번 놀라운 한 해를 보낼 것처럼 보였지만, 7월 28일에 오른손이 골절되었다. 갈라라가가 부상을 당했을 때, 콜로라도는 1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반 경기 차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가 없이는 로키스는 나머지 경기에서 3승 10패를 기록했다. 갈라라가는 31개의 홈런(리그 5위)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타율 .319, 85타점을 기록했다.
1995년(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6월 25일, 갈라라가는 3이닝 연속 홈런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그는 시즌을 .280의 타율, 31개의 홈런, 106타점으로 마쳤다. 갈라라가의 기록은 4년 만에 처음으로 건강하게 시즌을 보냈다는 사실에 힘입었다. 그 시즌에 로키스는 4명의 선수가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며 1977년(197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다저스와 같은 기록을 세웠다. 같은 시즌 8월 29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갈라라가는 9회 2아웃 상황에서 안타를 쳐 폴 와그너의 노히트 노런 시도를 무산시켰다. 이것이 와그너가 로키스를 4-0으로 꺾으면서 허용한 유일한 안타였다.[5]
그 다음 몇 시즌 동안, 갈라라가는 야구에서 최고의 타점 생산 선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996년(199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과 1997년(199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사이에 총 411타점(150, 140)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그는 각각 .304, .318의 타율을 기록했고, 각각 47, 4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갈라라가의 성과가 얇은 공기, 해발 1마일의 타자 친화적인 쿠어스 필드 덕분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또한 약 137.16m 이상 날아가는 많은 원정 경기 홈런을 날렸다.
1997년 5월 31일, 갈라라가가 친 가장 유명한 홈런은 그랜드 슬램으로, 케빈 브라운을 상대로 친 홈런으로, 플로리다 말린스의 프로 플레이어 스타디움의 상단 관중석 20번째 줄에 떨어졌다. 이 홈런은 처음에는 약 174.65m로, 나중에는 약 161.24m로 측정되면서 가장 논란이 많은 홈런이기도 하다. 당시 이 홈런은 로키스와 해당 구장의 기록을 모두 경신했다.[2] 2011년, ESPN의 홈런 트래커는 거리를 약 142.65m로 재계산했다.[2][6] 하지만 2017년, 야구 연구 저널은 베네수엘라 중앙 대학교의 공학 교수인 호세 L. 로페즈 박사와 오스카 A. 로페즈 박사가 분석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갈라라가의 홈런 거리가 517.5에서 529.4피트 사이였다고 결론 내렸다.[7] 이로써 1997년 5월 31일의 갈라라가의 그랜드 슬램은 Statcast가 도입되기 전 500피트를 넘었다고 입증된 몇 안 되는 홈런 중 하나가 되었다.[7] 앞서 갈라라가는 두 경기에서 각각 약 138.68m와 약 137.46m의 홈런을 쳐서 총 약 437.39m를 기록했고, 평균 약 145.69m를 기록했다.
로키스는 토드 헬튼을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시즌 말에 갈라라가를 방출했다. 방출 당시 갈라라가는 구단 통산 홈런(172개)과 타점(579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갈라라가의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경기 | 타율 | 홈런 | 타점 | 비고 |
---|---|---|---|---|---|
1993년(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20 | .370 | 22 | 98 | 수위 타자, 컴백상 수상 |
1994년(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03 | .319 | 31 | 85 | |
1995년(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39 | .280 | 31 | 106 | |
1996년(199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59 | .304 | 47 | 150 | 홈런왕, 타점왕, 실버 슬러거 |
1997년(1997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즌) | 154 | .318 | 41 | 140 | 타점왕 |
2. 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98-2000)
콜로라도 로키스는 토드 헬튼을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해 시즌 말에 갈라라가를 방출했다. 자유 계약 선수로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3년 계약을 맺었다.[10][11]1998년, 애틀랜타에서의 첫 시즌에 갈라라가는 타율 0.305, 44홈런, 121타점을 기록했다. 이는 그를 두 개의 다른 팀에서 2시즌 연속으로 4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MLB 역사상 최초의 선수로 만들었다.
1999년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갈라라가는 허리 통증을 겪었다. 팀 트레이너와 팀 의사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검사 결과 허리 아래쪽 척추뼈인 두 번째 요추에서 비호지킨 림프종이라는 림프관 암의 한 형태인 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는 1999년 시즌 전체를 화학 요법 치료를 받으며 결장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3루수이자 전 동료인 비니 카스티야는 갈라라가의 암 투병을 기리기 위해 등번호를 14번으로 잠시 변경했다.
2000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갈라라가는 화학 요법과 훈련 후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2000년 시즌 개막전에서 홈런으로 결승타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갈라가는 타율 0.302, 28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The Sporting News''로부터 두 번째 내셔널 리그 컴백 선수상을 받았다. 갈라라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단주에게 2년 계약을 요청했지만, 구단은 1년 계약만 제시했다.
2. 6. 텍사스 레인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몬트리올 엑스포스 (2001-2003)
2001년, 갈라라가는 리그 변경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40세의 나이에 그는 다른 리그에서 다른 투수들을 상대해야 했고, 라파엘 팔메이로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주전 1루수로 있어 백업 선수로 전락하며 "길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갈라라가는 주로 지명타자(DH)나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가끔 좌완 투수를 상대로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72경기에서 .235의 타율, 10개의 홈런, 34타점을 기록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그는 시즌 중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12][13]2002년, 갈라라가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정규 시즌 계약을 맺었다. 2003년 시즌 전에는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다시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자이언츠에서 비정기적으로 출전하며 .301의 타율, 12개의 홈런, 42타점을 기록했다.
2. 7. 애너하임 에인절스 (2004)
년, 갈라라가는 암이 재발하여 두 번의 3주간 화학 요법을 받았고, 추가 치료를 위해 23일 동안 입원했다. 이는 1999년 갈라라가를 힘들게 했던 비호지킨 림프종과 같은 종류였지만, 그는 두 번째로 병을 이겨내고 애너하임 에인절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솔트레이크 스팅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9월에 로스터가 확장되면서 갈라라가는 메이저 리그로 복귀했다. 애너하임에서 그는 주로 교체 선수로 뛰었지만,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같은 젊은 선수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해 주며 라커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몇 경기에 출전하여 1개의 홈런을 쳤는데, 이는 갈라라가의 메이저 리그 통산 399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이었다.2004년 8월 6일, 갈라라가는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계약을 맺었다. 7경기에 출전하여 홈런 1개를 기록했고, 통산 홈런은 399개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1일에 자유 계약 선수(FA)가 되었다.[1]
2. 8. 뉴욕 메츠 (2005)
2005년영어 갈라라가는 뉴욕 메츠와 계약했다. 메츠는 43세의 그가 팀에 적합할지 알지 못한 채 스프링 트레이닝에 그를 초청했다. 갈라라가는 홈런 3개를 터뜨리며 공격에서는 아직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수비에서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갈라라가는 2005년 3월 29일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젊은 선수에게 기회를 줄 적절한 시기"라며 은퇴를 결정했다.[8]
3. 은퇴 이후
안드레스 갈라라가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네수엘라 대표팀과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네수엘라 대표팀에 코치로 참여했다.[1]
4. 수상 및 기록
연도 | 수상 |
---|---|
1988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안타 (184개) |
1988년 | 내셔널 리그 최다 루타 (329개) |
1988년 | 내셔널 리그 최다 2루타 (42개) |
1988년 | 내셔널 리그 득점 창출 1위 (113점) |
1988년 | 내셔널 리그 최다 장타 (79개) |
1988년 | 실버 슬러거 상 (1루수 부문) |
1989년 | 골드 글러브 상 (1루수 부문) |
1990년 | 골드 글러브 상 (1루수 부문) |
1993년 | 내셔널 리그 타율 1위 (.370) |
1993년 | 컴백상 |
1993년 | 이달의 선수 2회 (6월, 9월) |
1996년 | 내셔널 리그 홈런 1위 (47개) |
1996년 | 내셔널 리그 최다 타점 (150점) |
1996년 | 실버 슬러거 상 (1루수 부문) |
1997년 | 내셔널 리그 최다 타점 (140점) |
2000년 | 컴백상 |
2001년 | ESPY 어워드 최고의 컴백 선수상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
2007년 | 콜로라도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 최초) |
2010년 | 베네수엘라 야구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헌액 |
- MLB 올스타 게임 선정 5회: 1992년, 1993년, 1997년, 1998년, 2000년
- 주간 MVP 5회: 1988년 5월 23일 - 29일, 1988년 5월 30일 - 6월 5일, 1988년 6월 27일 - 7월 3일, 1993년 5월 31일 - 6월 6일, 1995년 7월 3일 - 9일
- 통산 삼진: 2003 (역대 6위)
-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 최초의 올스타 게임 출전 (1993년)
- 로키스 통산 홈런당 타수 15.5개로 1위
- 1996년 150타점 시즌은 여전히 로키스의 단일 시즌 기록
- 서로 다른 시즌에 3개 트리플 크라운 부문 (타율, 홈런, 타점)에서 1위
- 올스타 브레이크 전 로키스 기록 타점 (1997년 84타점)
- NL 올해의 컴백 선수상을 2번 수상한 역사상 최초의 선수
갈라라가는 다큐 드라마 영화 ''갈라라가: 푸로 베이스볼'' (''Galarraga: Nothing But Baseball'' – 베네수엘라, 2000)과 작가 수 보라이스가 쓴 책 ''안드레스 갈라라가 – 실제 삶의 독자 전기'' (2003)에서 헌정되었다.
5. 기타
-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네수엘라 대표팀
-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네수엘라 대표팀
참조
[1]
웹사이트
Andres Galarraga St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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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Reference LLC
2020
[2]
웹사이트
Andrés Galarraga Biography
https://baseballbiog[...]
Baseball Biography
2009-06-1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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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s Galarraga Minor Leagues Statistics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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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Reference LLC
2020
[4]
웹사이트
Andres Galarraga
https://sabr.org/b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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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1
[5]
웹사이트
Colorado Rockies at Pittsburgh Pirates Box 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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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Reference LLC
1995-08-29
[6]
웹사이트
Rockies legend Andres Galarraga talks about his famous homer vs. Marlins
https://www.denverpo[...]
The Denver Post
2015-06-13
[7]
웹사이트
Analysis of Andrés Galarraga's Home Run of May 31, 1997 – Society for American Baseball Research
https://sabr.org/jou[...]
[8]
뉴스
Notebook: Galarraga retires with 399 homers
https://www.seattlet[...]
2005-03-30
[9]
웹사이트
Colorado Rockies Top 10 Single-Season Batting Leaders
https://www.baseball[...]
Sports Reference LLC
2020
[10]
웹사이트
The Ballplayers - Andres Galarraga
http://www.baseballl[...]
2009-06-13
[11]
간행물
"30球団マンスリー・リポート アトランタ・ブレーブ/ドラマチックな移籍劇を連発! 四番を放出し打点王ガララーガを獲得"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98-01
[12]
뉴스
中日 獲得候補にマグワイア
http://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新聞社
2001-12-12
[13]
뉴스
中日がマグワイアを候補に/ガララーガ、カンセコも
https://www.shikoku-[...]
四国新聞社
2002-12-11
[14]
뉴스
Better than you remember: Andrés Galarraga
https://www.mlb.com/[...]
MLB
2020-06-06
[15]
뉴스
"[오늘의MLB] (6.23) 강정호 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https://sports.news.[...]
이창섭 칼럼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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