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호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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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길 호지스는 1924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선수와 감독으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에는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뉴욕 메츠에서 1루수로 활약하며 8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통산 370홈런을 기록했다. 1955년에는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1957년부터 1959년까지 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1962년에는 뉴욕 메츠 창단 멤버로 합류했고, 1963년부터는 워싱턴 세네터스, 1968년부터는 뉴욕 메츠의 감독을 맡아 1969년 메츠를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972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202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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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호지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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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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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1루수 / 감독 |
타석 | 우타 |
송구 | 우투 |
출생일 | 1924년 4월 4일 |
출생지 | 미국인디애나주프린스턴 |
사망일 | 1972년 4월 2일 |
사망지 | 미국플로리다주웨스트팜비치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43년 10월 3일 |
데뷔팀 | 브루클린 다저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63년 5월 5일 |
최종팀 | 뉴욕 메츠 |
선수 팀 |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3, 1947–1961) 뉴욕 메츠 (1962–1963) |
통계 | |
타율 | .273 |
홈런 | 370 |
타점 | 1,274 |
감독 경력 | |
감독 팀 | 워싱턴 세너터스 (1963–1967) 뉴욕 메츠 (1968–1971) |
감독 성적 | 650승 753패 |
승률 | 0.463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 8회 (1949–1955, 1957) |
월드 시리즈 우승 | 3회 (1955, 1959, 1969) |
골드 글러브 | 3회 (1957–1959) |
기록 | 1950년 8월 31일 한 경기 4홈런 |
영구 결번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14 뉴욕 메츠 No. 14 |
명예의 전당 |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헌액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연도 | 2022 |
헌액 방법 | 골든 데이즈 위원회 |
득표율 | 75% |
2. 선수 경력
브루클린과 로스앤젤레스 시절 1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였다. 강력한 파워와 뛰어난 수비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디애나주 출신으로 고교 시절 여러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대학 진학 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다.[1]
1943년 잠시 메이저 리그를 경험한 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동성 무공 훈장을 받았다.[3] 전역 후 포수로 복귀했으나 로이 캄파넬라의 등장과 재키 로빈슨의 포지션 변경으로 1948년부터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 이후 다저스의 주전 1루수로 자리매김하며 피 위 리스, 듀크 스나이더, 캄파넬라 등과 함께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다. 1949년부터 7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19] 1950년에는 한 경기 4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7][8] 1952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극심한 슬럼프는 브루클린 팬들의 따뜻한 격려를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10][12] 이후 다시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955년 월드 시리즈와 1959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15] 1957년부터 1959년까지 3년 연속으로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인정받았다.[19] 다저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한 후에도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1961년 시즌 후 신생팀 뉴욕 메츠의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이적하여 1962년 팀의 첫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 등으로 선수 생활 막바지에 이르렀고, 1963년 워싱턴 세네터스로 트레이드된 직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아마추어 시절
인디애나주 프린스턴에서 1924년 4월 4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탄광 노동자였던 찰스 P. 호지스였고, 어머니는 아이린(결혼 전 성 호르스트마이어)이었다. 형 로버트와 여동생 마조리가 있었다. 가족의 성은 1930년 이전에 'Hodge'에서 'Hodges'로 변경되었다.[1] 호지스가 7살 때, 가족은 인근 인디애나주 피터스버그로 이사했다.[1] 그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스포츠를 가르쳤다.호지스는 피터스버그 고등학교에서 미식축구, 야구, 농구, 육상 등 4개 종목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총 7개의 대표팀 경력(varsity letter)을 쌓았다.[1] 1941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부터 클래스 D 계약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대신 대학 코치가 되기를 희망하며 육상 장학금으로 세인트 조셉 대학교에 입학했다.[1] 세인트 조셉 대학교는 좋은 체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었고, 호지스는 푸마스(Pumas) 팀에서 야구와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또한 미국 해병대 예비역 장교 훈련단(ROTC)의 일원이기도 했다.[1]
2학년을 마친 후, 지역 스포츠 용품점 주인이자 비상근 다저스 스카우트였던 스탠리 피즐의 제안을 받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 그는 뉴욕주 올린에 있는 클래스 D 팀 오일러스(Oilers)에서 훈련했지만, 정식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2. 2.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43, 1947-1961)
브루클린 다저스는 1943년 시즌, 19세의 호지스를 메이저 리그로 불러올렸다. 그는 10월 3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크로슬리 필드에서 3루수로 데뷔했으나, 2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수비에서도 2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데뷔 11일 후, 그는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하와이의 진주만과 카우아이섬을 거쳐 제16 대공 포병대대의 준사관으로 복무했으며, 티니언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 대공 포수로 참전했다. 전투 중 용맹함을 인정받아 동성 무공 훈장과 전투 "V"를 수여받았다.[3]1946년 2월 해병대에서 제대한 호지스는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피드먼트 리그의 뉴포트 뉴스 다저스에 포수로 복귀했다. 그는 129경기에 출전하여 .278의 타율과 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리그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당시 팀 동료 중에는 훗날 영화 및 텔레비전 스타가 되는 척 코너스가 1루수로 있었다. 전쟁 후 오프 시즌에는 오클랜드 시립 대학교에서 과정을 이수하며 농구를 하기도 했다.[4]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의 인종 장벽을 허문 역사적인 해에 호지스는 다시 브루클린으로 콜업되었다. 처음에는 브루스 에드워즈의 백업 포수로 24경기에 출전했으며, 5월 17일 포브스 필드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프리츠 오스터뮬러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안타를 기록했다. 6월 18일에는 리글리 필드에서 시카고 컵스의 행크 보로위를 상대로 첫 홈런을 쳤다. 하지만 그해 총 28경기에서 .156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고, 194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 렉스 바니의 대타로 한 타석에 들어섰으나 삼진으로 물러났다.[5] 로이 캄파넬라가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고 로빈슨이 1948년에 2루수로 이동하면서, 감독 레오 듀로처는 호지스를 1루수로 전향시켰다.

1948년 호지스는 1루수로 96경기, 포수로 38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249, 11홈런, 70타점을 기록했다.[19] 그의 수비율은 .986이었는데, 이는 그가 주전으로 활약한 시즌 중 유일하게 .990 미만을 기록한 해였다. 1949년부터 다저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맞이했다. 캄파넬라(C), 로빈슨(2루수), 피 위 리스(유격수), 빌리 콕스(3루수), 듀크 스나이더(중견수), 칼 퍼릴로(좌익수/우익수) 등과 함께 호지스는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6월 25일 포브스 필드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어 이후 7년 연속 선정되는 기록의 시작을 알렸다. 그해 23개의 홈런(당시 핵 윌슨의 내셔널 리그 우타자 기록과 타이)과 115타점(NL 4위)을 기록했으며, 수비에서는 풋아웃(1,336), 병살타(142), 수비율(.995)에서 모두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다.[19] 다저스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 레이스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한 경기 차로 제치고 우승했지만, 194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에게 다시 패했다. 호지스는 시리즈 타율 .235에 그쳤으나, 다저스의 유일한 승리였던 2차전에서 결승 득점을 올렸다.[6]
1950년 8월 31일, 호지스는 에베츠 필드에서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4개의 홈런을 터뜨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9이닝 경기에서 달성한 것으로는 루 게릭 이후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 기록이었다. 그는 워런 스판을 포함한 4명의 다른 투수를 상대로 홈런을 쳤고,[7] 이 경기에서 기록한 17개의 총 루타는 메이저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8] 그해 수비율(.994) 리그 1위를 기록했고, 159개의 병살타를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32홈런과 113타점으로 각각 리그 3위에 올랐으며,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8위를 기록했다.[19]
1951년에는 4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다저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40홈런 고지를 밟은 선수가 되었다. 이 기록은 1953년 캄파넬라(41개)에 의해 깨졌지만, 호지스는 1954년 42홈런으로 다시 기록을 되찾았다. 1951년 시즌에는 118득점(NL 3위, 개인 최고), 171병살타(자신의 NL 기록 경신), 126어시스트(NL 1위)를 기록했으며, 홈런(NL 2위), 총 루타(307, NL 3위), 장타율(.527, NL 5위), 타점(103, NL 6위)에서도 상위권에 올랐다.[19] 하지만 팀은 바비 톰슨의 극적인 홈런("세상에 울려 퍼진 타구")으로 유명한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패했다.[9]

1952년 시즌 막판부터 호지스는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정규 시즌 마지막 4경기와 양키스와의 1952년 월드 시리즈 7경기에서 단 하나의 안타도 치지 못하며(총 21타수 무안타)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10] 당시 홈 구장 에베츠 필드의 팬들은 그에게 야유 대신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보냈고, 이는 호지스와 브루클린 팬들 사이의 특별한 유대감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다. 슬럼프는 1953년 시즌 초까지 이어지자 브루클린의 한 성직자는 신자들에게 호지스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팬들의 응원 속에 그는 곧 타격감을 회복했다. 팀 동료 칼 에르스킨은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호지스에게 "길, 자네 덕분에 나도 믿음이 생겼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12] 1952년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는 오심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11]
1953년 호지스는 타율 .302, 31홈런(NL 6위), 122타점(NL 5위)을 기록하며 부활했다.[19] 195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양키스를 상대로 타율 .364를 기록하고 1차전에서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지만,[19] 팀은 또다시 양키스에 패배했다.[13] 1954년에는 새로운 감독 월터 앨스턴 아래 개인 최고 기록 시즌을 보냈다. 타율 .304, 42홈런(팀 신기록), 130타점, 장타율 .579를 기록했으며, 특히 19개의 희생 플라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메이저 리그 기록이다. 홈런과 타점은 테드 클루제스키에 이어 리그 2위였고, 풋아웃(1,381)과 어시스트(132)에서는 다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는 10위를 기록했다.[19]

마침내 1955년, 브루클린 다저스는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호지스는 정규 시즌에서 타율 .289, 27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4] 통산 다섯 번째로 만난 양키스와의 1955년 월드 시리즈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차전에서 2점 홈런으로 역전을 이끌고 추가 안타로 쐐기를 박았으며, 5차전에서도 선취 득점을 올렸다. 3승 3패로 맞선 7차전에서는 4회 선제 적시타와 6회 희생 플라이로 팀의 2득점을 모두 책임졌다.[19] 선발 투수 조니 포드레스가 2-0 완봉승을 거두었고, 엘스턴 하워드의 마지막 땅볼 타구를 리스가 잡아 호지스에게 송구하면서 다저스는 감격적인 첫 우승을 확정지었다.[15]
1956년에도 다저스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195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돈 라르센의 퍼펙트 게임 등 명장면 속에 양키스에게 다시 패했다.[16] 호지스는 시리즈 1차전에서 3점 홈런을 쳤고, 2차전에서는 3안타 4타점을 기록하는 등 분전했다.[17] 그해 시즌 후 다저스의 일미 야구 일본 방문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호리우치 쇼를 상대로 고라쿠엔 구장의 장외 홈런을 치기도 했다.[60]
1957년 호지스는 통산 14번째 만루 홈런을 기록하며 당시 내셔널 리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974년까지 유지됨). 그는 타율 .299(NL 7위), 98타점(NL 5위)을 기록했고, 1,317개의 풋아웃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홈런(27), 안타(173), 득점(94), 3루타(7), 장타율(.511), 총 루타(296) 등 여러 타격 지표에서 리그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그해 9월에는 에베츠 필드에서의 마지막 다저스 득점을 기록했으며,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최우수 선수 투표에서 개인 최고 순위인 7위를 기록했다.[19] 또한 이 해 처음 제정된 골드 글러브 1루수 부문 초대 수상자가 되었고, 이후 3년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58년 다저스는 로스앤젤레스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호지스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내셔널 리그 선수로는 역대 7번째로 통산 300홈런을 달성했다. 1959년에는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59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꺾고 개인 통산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었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타율 .391을 기록했으며, 특히 4차전에서는 8회 말 동점 상황에서 결승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4시즌 동안 평균 26개의 홈런과 82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월드 시리즈 통산 기록은 39경기 출전, 타율 .267, 5홈런, 21타점이다. 그는 1961년 시즌까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활약했다.
2. 3. 뉴욕 메츠 (1962-1963)
1961년 시즌이 끝난 후, 새롭게 창단된 뉴욕 메츠는 첫 내셔널 리그 확장 드래프트에서 호지스를 지명했다. 당시 호지스는 무릎 부상 등으로 인해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활약 시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퇴까지 고려했으나 메츠 구단의 설득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1962년 4월 11일, 호지스는 메츠 구단 역사상 첫 홈런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순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부상의 여파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고, 그해 5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52를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결국 1963년 5월, 호지스는 워싱턴 세네터스(훗날 텍사스 레인저스가 됨)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네터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고, 이 트레이드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3. 감독 경력
1963년 시즌 중반, 워싱턴 세네터스의 감독 제의를 받은 호지스는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5월 23일, 그는 외야수 지미 피어솔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세네터스로 이적하며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하고 감독직에 전념했다.[19] 그의 선수로서 마지막 안타는 5월 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기록한 1타점 1루타였으며, 마지막 홈런은 1962년 7월 6일에 기록한 통산 370호 홈런이었다.
호지스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워싱턴 세네터스의 감독을 맡아, 부임 기간 동안 팀 성적을 매년 꾸준히 향상시켰다. 1967년에는 76승 85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6위에 올랐다.
1967년 시즌 종료 후, 뉴욕 메츠의 감독직 제안을 받은 호지스는 세네터스와의 계약 문제를 정리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23] 1968년 메츠 감독으로 부임한 첫해에는 73승 89패로 당시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으며,[1] 이듬해인 1969년에는 100승 62패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월드 시리즈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꺾고 창단 첫 우승을 달성하는 '미라클 메츠' 신화를 이끌었다.[26] 이 공로로 호지스는 ''스포팅 뉴스''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1970년과 1971년에도 메츠는 2년 연속 83승 79패의 동일한 성적으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3위를 기록하며 꾸준히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였다.[28][29][1]
3. 1. 워싱턴 세너터스 (1963-1967)
1963년 5월 23일, 뉴욕 메츠는 외야수 지미 피어솔을 받는 조건으로 호지스를 워싱턴 세네터스로 트레이드했다. 호지스는 미키 버논의 후임으로 세네터스의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선수 생활에서 은퇴를 선언했다.[21][19]호지스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세네터스를 지휘했다. 그가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팀은 한 번도 승률 5할을 넘기지 못했지만, 취임 당시 시즌 100패 이상을 기록하던 팀 성적은 매년 꾸준히 향상되었다.[1] 1967년에는 76승 85패(.472)를 기록하며 감독 재임 기간 중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1]
1964년 12월, 호지스는 친정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대규모 7인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외야수 프랭크 하워드, 포수 더그 카밀리, 투수 닉 윌하이트, 필 오르테가, 피트 리처트, 1루수 딕 넨, 3루수 켄 맥멀렌을 영입했다. 특히 프랭크 하워드는 이후 세네터스의 핵심 선수로 성장하여 팀 전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1]
1965년 시즌 중에는 알코올 사용 장애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투수 라인 듀렌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8월 18일, 경기 부진 후 절망한 듀렌이 다리 위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하려 하자, 호지스는 직접 현장으로 가서 "너는 스스로에게 이런 짓을 할 만큼 나약하지 않아"라고 설득하여 그를 단념시켰다.[22] 듀렌은 이후 알코올 의존증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았다. 또한 1965년에는 다저스 시절 동료였던 포수 출신 루브 워커를 투수 코치로 영입했으며, 에디 요스트, 조 피냐타노와 함께 코치진을 구성하여 팀을 이끌었다.
1967년 시즌 종료 후 뉴욕 메츠의 감독 웨스 웨스트럼이 사임하자, 메츠는 호지스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다. 세네터스와의 계약 기간이 1년 남아있었지만, 호지스는 여전히 브루클린에 집과 사업체를 두고 있었고 뉴욕에서의 높은 인기를 고려하여 메츠의 제안을 수락했다. 세네터스 단장 조지 셀키크는 메츠로부터 보상금 10만달러와 투수 빌 데니를 받는 조건으로 호지스의 이적에 동의했다.[23] 호지스는 메츠와 3년간 15만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하며 워싱턴을 떠나게 되었다.[23]
3. 2. 뉴욕 메츠 (1968-1971)
뉴욕 메츠의 감독 웨스 웨스트럼이 1967년 9월 사임하자, 메츠는 후임으로 길 호지스를 원했다. 당시 호지스는 워싱턴 세네터스와 1년 계약이 남아 있었지만, 여전히 브루클린에 볼링장 등 금전적 이해관계가 있었고 가족과 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메츠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뉴욕 지역에서 그의 높은 인기는 메츠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세네터스 단장 조지 셀키크는 호지스를 잃고 싶지 않았으나, 메츠가 10만달러를 지불하고 투수 빌 데니를 보상 선수로 보내자 이적에 동의했다. 이후 호지스는 뉴욕 메츠와 3년간 15만달러의 계약을 맺었다.[23]호지스가 메츠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팀은 창단 이후 한 번도 승률 .500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1968년 시즌, 메츠는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500 승률에서 단 4경기 뒤처지며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남은 80경기 중 46경기를 패배했다. 최종 성적은 73승 89패로 내셔널 리그 9위에 머물렀지만, 이는 당시 메츠 구단 7년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었다.[1] 하지만 1968년 9월 2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도중 호지스는 가벼운 심근 경색을 겪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중 얻게 된 오랜 흡연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이 심장마비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24]
1969년, 호지스는 메츠를 이끌고 100승 62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구단 역사상 첫 승리 시즌과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전년 대비 27승이나 더 많은 승수였다. 팀은 에이스 투수 톰 시버와 제리 쿠스먼, 유망주 놀런 라이언, 그리고 외야수 클리언 존스와 토미 애기 등의 활약에 힘입었다. 메츠는 신설된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3연승으로 꺾고[25],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1차전 패배 후 4연승을 거두며 5경기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연출했다.[26] 이 시즌의 성공으로 메츠는 '미라클 메츠'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호지스는 만년 하위팀을 월드 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스포팅 뉴스''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월드 시리즈 5차전 6회 말, 오리올스 투수 데이브 맥낼리가 던진 공이 클리언 존스의 발에 맞았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호지스는 공에 묻은 구두약을 홈 플레이트 심판 루 디머로에게 보여주며 존스가 공에 맞았음을 증명했고, 결국 존스는 1루로 출루했다. 이후 돈 클렌데논이 투런 홈런을 터뜨리며 메츠는 5-3으로 승리하고 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었다.[27] 이 '구두약 사건'은 호지스의 침착함과 공정함에 대한 명성이 심판 판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1]
호지스 감독 체제 하의 메츠는 이후 2년 동안에도 승리 시즌을 기록했다. 1970년과 1971년 모두 83승 79패의 동일한 성적으로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3위를 차지했다. 1970년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시카고 컵스에 이어 3위를 기록했고,[28] 1971년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이어 시카고 컵스와 공동 3위를 기록했다.[29] 그러나 '미라클 메츠'의 영광을 재현하며 플레이오프에 다시 진출하지는 못했다.[1]
'''감독 기록'''
연도 | 구단 | 순위 / 팀 수 | 경기 | 승리 | 패전 | 승률 |
---|---|---|---|---|---|---|
1963 | WS3 | 10 / 10 | 121 | 42 | 79 | .347 |
1964 | 9 / 10 | 162 | 62 | 100 | .383 | |
1965 | 8 / 10 | 162 | 70 | 92 | .432 | |
1966 | 8 / 10 | 159 | 71 | 88 | .447 | |
1967 | 6 / 10 | 161 | 76 | 85 | .472 | |
1968 | NYM | 9 / 10 | 163 | 73 | 89 | .451 |
1969 | 1 / 6 | 162 | 100 | 62 | .617 | |
1970 | 3 / 6 | 162 | 83 | 79 | .512 | |
1971 | 3 / 6 | 162 | 83 | 79 | .512 | |
통산: 9년 | 1414 | 660 | 753 | .467 |
- 순위는 최종 순위
- 순위의 '''굵은 글씨'''는 월드 시리즈 제패
4. 사망과 유산
1972년 봄, 선수 파업 기간 중이던 4월 2일 부활절 일요일, 호지스는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동료 코치들과 골프를 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갑작스러운 심근 경색으로 쓰러져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장례식은 그의 뜻에 따라 맨해튼의 성 패트릭 대성당 대신 그가 다니던 브루클린 미드우드의 우리 주 그리스도의 도움 교회에서 치러졌으며, 브루클린의 홀리 크로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4월 7일로 예정되었던 뉴욕 메츠의 시즌 개막전은 선수들의 요청과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동의 하에 취소되었다. 코치였던 요기 베라가 감독직을 이어받았다.
호지스는 선수 시절 뛰어난 1루수로 활약하며 1950년대 메이저 리그 1루수 중 다수의 공격 지표에서 선두를 달렸고, 8번의 올스타 선정과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첫 3번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사망 이후 수십 년간 그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여부는 많은 논의를 낳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2021년 골든 데이 위원회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뉴욕 메츠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으며,[63][37] 인디애나주 파이크 군 북부를 지나는 화이트 강 동쪽 지류 위의 다리가 길 호지스 메모리얼 다리로 명명되는 등 여러 장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1948년, 호지스는 브루클린 출신의 조안 롬바르디(1926년 ~ 2022년)와 결혼하여 슬하에 길버트 주니어, 아이린, 신시아, 바바라 네 자녀를 두었다.[30] 가족은 브루클린 미드우드에 거주했으며, 호지스는 이곳에서 볼링장을 포함한 여러 사업 투자를 했다. 그의 조카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스포츠 작가인 톰 베르두치이다.[57] 아내 조안 호지스는 남편 사후 50년을 더 살았으며, 남편의 명예의 전당 헌액 한 달 후이자 96번째 생일을 2주 앞둔 2022년 9월에 사망했다.[58]
호지스는 야구 관련 저서를 남기기도 했는데, 『길 호지스의 전법: 현대 야구』는 1971년 일본에서 미하라 오사무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4. 1. 갑작스러운 죽음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흡연 습관을 들인 호지스는 1968년 9월 2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중 가벼운 심장마비를 겪은 바 있다.[24]1972년 4월 2일 부활절 오후, 선수 파업으로 뉴욕 메츠와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시범 경기가 취소되자, 호지스는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동료 코치 조 피냐타노, 루브 워커, 에디 요스트와 함께 골프를 치고 있었다. 27홀 라운드를 마치고 숙소인 라마다 인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30] 그는 심근 경색으로 오후 5시 45분경 굿 사마리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착 20분 만에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0][33]
당시 함께 있던 피냐타노는 호지스가 뒤로 넘어져 인도에 머리를 부딪혔고, 많은 피를 흘리며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는 길의 머리에 손을 댔지만, 곧 피가 멈췄다. 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 품에서 죽었다."라고 말했다.[33]
호지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옛 동료 재키 로빈슨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핵심이었다.[33] 이 일과 캠피 등 다른 동료들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 길의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고 말하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31] 심장병과 당뇨병을 앓던 로빈슨 역시 6개월 뒤인 10월 24일, 53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32] 듀크 스나이더는 "길은 훌륭한 선수였지만,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고, 조니 포드리스는 "나는 아파요. 나는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알지 못했다"며 슬퍼했다. 충격을 받은 칼 어스킨은 "길의 죽음은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와 같다"고 표현했다.[33] 돈 드라이스데일은 자서전에서 호지스의 죽음이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렸으며, 마치 가족을 잃은 것 같아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33] 호지스의 아들 길 호지스 주니어에 따르면, 장례식에 참석한 하워드 코셀이 그를 차 뒷좌석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재키 로빈슨이 격렬하게 울며 "내 아들의 죽음 다음으로, 오늘은 내 인생에서 최악의 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3]
장례식 전날 밤에는 브루클린 플랫부시 애비뉴의 토레그로사 장례식장에서 추모객을 맞았다.[30] 장례 미사는 4월 6일 브루클린 미드우드에 있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도움 교회(Our Lady Help of Christians Church)에서 거행되었으며, 약 600명이 참석했고 수천 명의 조문객이 교회 밖에서 함께 했다.[34][35] 장례식 다음 날인 4월 7일, 메츠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시즌 개막전을 치를 예정이었으나, 선수들은 경기를 포기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했고 파이리츠 측도 경기를 취소했다. 유해는 옛 에베츠 필드가 있던 곳에서 약 1.6km 떨어진 브루클린 홀리 크로스 묘지에 안장되었다.[35]
장례식 당일, 뉴욕 메츠의 1루 코치였던 요기 베라가 감독직을 이어받았다.[36] 셰이 스타디움에서는 개막일에 미국 국기가 조기로 게양되었고, 메츠 선수들은 1972 시즌 내내 호지스를 추모하기 위해 왼쪽 팔에 검은 완장을 착용했다.
4. 2.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영구 결번
1972년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길 호지스를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1973년 6월 9일, 뉴욕 메츠는 호지스의 등번호 14번을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 중 하나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33]수십 년 동안 길 호지스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여부는 많은 논쟁을 낳았다.[49] 그는 195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감독으로서 1969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33] 그러나 그의 통산 기록이 명예의 전당 기준에 다소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홈런, 타점 등 주요 공격 지표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한 적이 없으며, 최우수 선수상(MVP) 투표에서도 높은 순위를 기록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49]
호지스는 1969년부터 1983년까지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의 명예의 전당 투표 후보 자격을 유지했다.[45][46] 그는 매년 많은 표를 얻었지만, 헌액 기준인 75%에는 미치지 못했다. 마지막 투표였던 1983년에는 63.4%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46] BBWAA 투표 기간 동안 총 3,010표를 얻어 당시까지 헌액되지 못한 선수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47]
이후 명예의 전당 원로 위원회와 이를 계승한 여러 위원회(골든 에라 위원회, 골든 데이 위원회)에서 꾸준히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번번이 헌액에 실패했다.[48][50][51] 오랜 기다림 끝에, 2021년 12월 5일 골든 데이 위원회 투표에서 16표 중 12표(75%)를 얻어 마침내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되었다.[54] 호지스는 2022년 7월 24일 공식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딸 아이린이 그를 대신하여 연설했다.[55][56]
명예의 전당 헌액 직후인 2022년 6월 4일, 그의 선수 시절 오랜 소속팀이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역시 호지스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공헌을 영원히 기렸다. 이날 행사에는 뉴욕 메츠 선수단도 참석하여 의미를 더했다.[37]
4. 3. 기타 업적 및 평가
호지스는 선수 시절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홈런 (310), 경기 (1477), 타석 (5313), 득점 (890), 안타 (1491), 타점 (1001), 총루 (2733), 스트라이크아웃 (882) 등 여러 부문에서 1950년대 메이저 리그 1루수 중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그리고 1957년에 다시 올스타 팀에 선정되어 총 8번의 올스타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당시 1루수 중 가장 많은 횟수였다. 또한, 수비 능력도 뛰어나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첫 3번의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당대 최고의 수비형 1루수로 평가받았다. 1950년대 전체 선수 중에서는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2위를 기록했다.
호지스의 사망 이후, 그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그는 1969년부터 1983년까지 미국 야구 작가 협회(BBWAA)의 명예의 전당 투표 자격을 가졌으며, 매년 최종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10명의 선수들만큼 많은 표를 받기도 했다.
1969년, 호지스는 당시 뉴욕 시장 존 린지로부터 뉴욕시 최고 시민 훈장인 청동 메달을 받았다.
1972년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한 여러 사업이 진행되었다. 1973년 6월 9일, 뉴욕 메츠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33] 202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이후, 그의 오랜 소속팀이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역시 2022년 6월 4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 전 행사에서 그의 등번호 1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를 기렸다.[37]
1978년 4월 4일, 그의 54번째 생일에 브루클린 마린 파크와 퀸스 로커웨이를 잇는 마린 파크웨이 다리는 그의 업적을 기려 마린 파크웨이-길 호지스 기념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33] 인디애나주 파이크 군 북부를 지나는 화이트 강 동쪽 지류 위의 다리 역시 길 호지스 메모리얼 다리로 명명되었다. 이 외에도 브루클린 캐롤 스트리트의 공원, 브루클린 쉘 로드의 리틀 리그 야구장, 애비뉴 L과 P.S. 193의 일부, 브루클린 미드우드의 베드포드 애비뉴 일부(길 호지스 웨이), 브루클린 밀 베이슨의 볼링장(길 호지스 레인스) 등 여러 장소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38] 그의 고향인 인디애나주 프린스턴의 고등학교 야구 경기장과 피터스버그의 리틀 리그 야구팀(호지스 다저스)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9] 2009년에는 피터스버그에 그의 선수 및 감독 시절 모습을 담은 약 15.85m x 약 4.88m 크기의 벽화가 헌정되었다.[40]

호지스는 여러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1979년 인디애나 야구 명예의 전당 창립 멤버로 헌액되었고,[41] 1982년에는 뉴욕 메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7년에는 해병대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42]
그의 삶과 업적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2000년에는 작가 마리노 아모루소의 동명 책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길 호지스: 조용한 남자''가 공개되었고,[43] 2021년 11월에는 빈 스컬리, 토미 라소다, 칼 어스킨, 길 호지스 주니어 및 1969년 뉴욕 메츠 선수들의 인터뷰를 담은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길 호지스 스토리: 챔피언의 영혼''이 개봉되었다.[44]
5. 한국과의 관계
1956년, 브루클린 다저스가 일미 야구의 일환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호지스도 선수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차전 경기에서, 그는 투수 호리우치 쇼를 상대로 레프트 펜스를 넘기는 장외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재키 로빈슨에 이어 고라쿠엔 구장에서 장외 홈런을 친 두 번째 기록이었다. 이 홈런 타구는 하쿠산 거리까지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비거리가 20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홈런을 맞았던 투수 호리우치 쇼는 "저런 대단한 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것은 오히려 영광"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6. 통산 기록
8번의 올스타에 선정된 길 호지스는 통산 2,071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3, 장타율 .487, 1,921안타, 1,274타점, 1,105득점, 370홈런, 295개의 2루타, 63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다저스 소속으로 기록한 361홈런은 스나이더의 389홈런에 이어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통산 1,614개의 병살타는 찰리 그림 (1,733개)에 이어 내셔널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며, 1984년 크리스 쳄블리스가 이를 넘어설 때까지 우투수 1루수 최다 기록이었다. 통산 1,281개의 어시스트는 프레드 테니의 1,363개에 이어 리그 역사상 두 번째였으며, 우투수 1루수 중에서는 에드 코네치의 1,292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19]
1963 시즌 시작 당시, 은퇴 전 호지스는 당시까지 우타자 최다 홈런(370개)을 기록했고 (호지스 은퇴 직전 4월 19일 윌리 메이스가 이를 넘어섰다), 내셔널 리그 선수 최다 만루 홈런(14개)을 기록했다 (윌리 맥코비의 18개 만루 홈런에 의해 넘어섰다). 그는 한 경기 4홈런을 기록한 메이저 리그 기록을 공유한다 (메이저 리그 역사상 18명의 선수만이 이 기록을 달성했다).[19]
Category | G | BA | AB | R | H | 2B | 3B | HR | RBI | SB | CS | BB | SO | OBP | SLG | OPS |
---|---|---|---|---|---|---|---|---|---|---|---|---|---|---|---|---|
Total | 2,071 | .273 | 7,030 | 1,105 | 1,921 | 295 | 48 | 370 | 1,274 | 63 | 42 | 943 | 1,137 | .359 | .487 | .846 |
감독으로서는 통산 1,414경기를 지휘하며 660승 753패, 승률 .467을 기록했고, 1969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메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 승 | 패 | 승률 |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WSA | 1963 | 121 | 42 | 79 | .347 | 아메리카 리그 10위 | – | – | – | – |
WSA | 1964 | 162 | 62 | 100 | .383 | 아메리카 리그 9위 | – | – | – | – |
WSA | 1965 | 162 | 70 | 92 | .432 | 아메리카 리그 8위 | – | – | – | – |
WSA | 1966 | 159 | 71 | 88 | .447 | 아메리카 리그 8위 | – | – | – | – |
WSA | 1967 | 161 | 76 | 85 | .472 | 아메리카 리그 6위 | – | – | – | – |
WSA 합계 | 768 | 321 | 444 | .419 | – | – | – | – | ||
NYM | 1968 | 163 | 73 | 89 | .451 | 내셔널 리그 9위 | – | – | – | – |
NYM | 1969 | 162 | 100 | 62 | .617 | 내셔널 리그 동부 1위 | 7 | 1 | .875 | 월드 시리즈 우승 (BAL) |
NYM | 1970 | 162 | 83 | 79 | .512 | 내셔널 리그 동부 3위 | – | – | – | – |
NYM | 1971 | 162 | 83 | 79 | .512 | 내셔널 리그 동부 3위 | – | – | – | – |
NYM 합계 | 648 | 339 | 309 | .523 | 7 | 1 | .875 | |||
총계 | 1,414 | 660 | 753 | .467 | 7 | 1 | .875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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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 Hodges still stands tall on 50th Anniversary of 1969 'Amazin' Mets' World Series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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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World Series - New York Mets over Baltimore Orioles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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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Gil Hodges and a little shoe polish helped the Mets to their '69 Miracle ... an excerpt from Wayne Coffey's new book 'They Said It Couldn't Be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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