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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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로, 182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작곡과 음악 저널리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오페라 《유디트》, 《로그네다》, 《악마의 힘》 등을 작곡했으며, 러시아 음악계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옹호하고, 안톤 루빈시테인, 밀리 발라키레프 등과 교류하며 평론가로 활동했다. 세로프는 187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미망인 발렌티나 세로바와 아들 발렌틴 세로프가 그의 유산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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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세로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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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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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세로프 |
출생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직업 | 작곡가, 음악 비평가 |
가족 | |
배우자 | 발렌티나 세메노브나 세로바 |
자녀 | 발렌틴 세로프 |
2. 생애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국 법학 학교에 입학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같은 음악인을 친구로 두었다.[1][2][4] 1840년 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일했지만, 1850년 음악가의 길을 선택하여 작곡과 음악 비평을 시작했다.[2] 1863년에는 제자였던 발렌티나 세로바와 결혼하여 아들 발렌틴 세로프를 낳았고, 아들은 훗날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2] 187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사후 아내 발렌티나가 그의 유작을 완성하고 유산을 널리 알렸다.[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1820년 1월 1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무부 관리였던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세로프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외할아버지 카를 루드비히 하블리츠는[2][3] 독일계 유대인 출신 박물학자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세로프의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해 제국 법학 학교에 등록시켰으나,[1] 세로프는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고, 법학 학교 동기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친구가 되었다.[1][2][4] 스타소프는 훗날 유명한 미술 평론가가 되었다.[5]2. 2. 법률가 경력과 음악으로의 전향
세로프는 1840년에 제국 법학 학교를 졸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 관료로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으며, 프스코프와 크림반도의 수도인 심페로폴에서도 근무했다.[2] 그러나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져 1850년에 법률가 경력을 포기하고 작곡과 음악 평론을 시작했다. 음악 강연도 했지만, 이 두 활동은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2. 3. 결혼과 가족
1863년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자신의 제자였던 발렌티나 세로바(결혼 전 이름은 베르그만)와 결혼했는데, 그녀 또한 작곡가였다.[2] 1865년에는 아들 발렌틴 세로프가 태어났다. 발렌틴 세로프는 훗날 저명한 화가가 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러시아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복숭아를 든 소녀'(1887년)와 '태양에 가려진 소녀'(1888년)가 있으며, 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2. 4. 사망
1871년,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악마의 힘》은 아내 발렌티나 세로바와 니콜라이 솔로비요프에 의해 완성되었다.[6] 세로프의 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에 있다.
3. 음악 활동 및 평가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오페라 작곡으로 유명하며, 그의 첫 오페라 《유디트》는 1863년에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로그네다》 역시 성공을 거두었으나, 오늘날 그의 오페라들은 자주 공연되지 않고 콘서트에서 발췌곡 형태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6] 1991년에는 《유디트》의 CD 녹음이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지휘자 안드레이 치스티아코프에 의해 제작되었다. 《로그네다》와 《악마의 힘》은 1940년대에 축약된 버전으로 녹음되었다.
세로프는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했지만, 동료 음악가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에 대한 평가를 두고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대립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를 숭배하여 강력한 무리 작곡가 그룹과도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세로프는 세자르 큐이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2]
3. 1. 주요 작품
- ''유디프'' (Юдифь|유디프ru, 1861–63)
- ''로그네다'' (Рогнеда|로그네다ru, 1863–65)
- ''악마의 힘'' (Вражья сила|브라즈야 실라ru, 1867–71)
《유디트》는 파올로 자코메티의 희곡을, 《로그네다》는 드미트리 아베르키예프의 대본을, 《악마의 힘》은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전 5막 오페라이다. 세 작품 모두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악마의 힘》은 작곡가 사후 부인 발렌티나 세로바와 니콜라이 솔로비요프(:en:Nicolai Soloviev)에 의해 완성되었다.[19]
3. 1. 1. 오페라 《유디트》
Юдифьru는 전 5막 오페라로, 1861년부터 1862년에 걸쳐 작곡되었다. 1863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탈리아의 극작가 파올로 자코메티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17]3. 1. 2. 오페라 《로그네다》
《로그네다》는 전 5막 오페라이다. 대본은 드미트리 아베르키예프가 썼다. 1863년부터 1865년에 걸쳐 작곡되었으며, 같은 해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성공적이었지만, 마이에르베어를 비롯한 서유럽 음악을 모방했다는 비평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8]3. 1. 3. 오페라 《악마의 힘》
《악마의 힘》은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를 바탕으로 한 전 5막 오페라이다.[19] 1867년부터 1868년에 걸쳐 악보의 주요 부분이 작곡되었지만, 세로프는 미완성인 채로 1871년에 사망했다. 사후 제5막은 세로프 부인 발렌티나 세로바와 니콜라이 솔로비요프(:en:Nicolai Soloviev)에 의해 완성되었고, 1871년 4월 마린스키 극장에서 에두아르드 나프라브니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19]이 오페라는 러시아의 사육제인 마슬레니차 풍속과 세속적인 묘사가 풍부하며, 그중에서도 "엘료옴카의 노래"는 베이스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이 특기로 했다.[19]
3. 2. 다른 음악가들과의 관계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동료 음악가들과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 글린카의 두 오페라에 대한 평가를 두고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대립했으며, 안톤 루빈시테인, 밀리 발라키레프 등 여러 음악가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2]세로프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열렬한 옹호자였다.[14] 1863년 바그너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세로프는 바그너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11] 1868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상연하는 등 바그너의 작품을 러시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15][16]
3. 2. 1. 안톤 루빈시테인과의 관계
세로프는 안톤 루빈시테인에 대해 지휘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작곡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10] 또한,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러시아 음악 협회(RMO)의 레퍼토리를 '독일적이고, 보수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진'이라고 칭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대해서는 음악원이 외국인 사기꾼을 원조하고 있으며, 아카데믹한 훈련으로는 위대한 예술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이러한 적대심에는 루빈시테인이 러시아 음악의 딜레탕티즘 경향을 비판한 것을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 느꼈던 점, 러시아 음악 협회의 위원회나 음악원 교수로 초청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앙금, 그리고 밀리 발라키레프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반유대주의・반독일적 악의도 포함되어 있었다.[10] 1863년 리하르트 바그너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세로프는 바그너에게 '저는 그를 싫어하고, 어떤 양보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1]
3. 2. 2. 밀리 발라키레프와의 관계
안톤 루빈시테인을 비롯한 '서구파'와 밀리 발라키레프 등 '러시아 국민악파'가 대립하던 1860년대 러시아 음악계에서, 세로프는 '제3의 진영'이라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10]세로프는 처음에는 발라키레프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발라키레프 그룹을 옹호하는 평론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사이가 틀어지고, 세로프 자신이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경도되면서 발라키레프와 멀어졌다. 세로프와 스타소프는 법학 학교에서 만난 친구 사이로, 함께 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그러나 미하일 글린카의 두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생애』와 『루슬란과 류드밀라』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지를 두고 의견이 갈려 다투기 시작했고, 결국 결별했다.[12]
이후 세로프의 오페라 『유디트』를 발라키레프 그룹이 공격하면서 둘 사이의 불화는 결정적이 되었다. 세로프는 '강력한 일파(러시아 5인조)'라는 표현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며, 발라키레프 그룹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명칭으로 퍼뜨렸다.[12]
3. 2. 3.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의 관계
세로프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법학 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함께 음악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다. 그러나 미하일 글린카의 두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생애』와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대한 평가가 달라 다투게 되었고, 결국 결별하게 되었다.[12]3. 2. 4.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관계
세로프는 1858년 드레스덴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상연을 접한 이후 바그너의 옹호자가 되었다.[14] 당시 러시아에서 바그너는 기이한 이론을 내세우는 망명자, 혹은 위험한 정치범으로 여겨졌을 뿐, 그의 음악 자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제실 지배 하의 극장에서의 참신한 오페라 상연은 상상하기 어려웠다.[13] 세로프는 1863년 바그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을 시작으로, 1868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상연하는 등,[15] 바그너 작품을 러시아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16]4. 유산
알렉산드르 세로프는 1871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 그의 오페라 유디트와 로그네다는 당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현대에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6] 다만, 콘서트 형식으로 발췌된 부분이 가끔 연주되기도 한다.
4. 1. 발렌티나 세로바와 발렌틴 세로프의 역할
1871년, 알렉산드르 세로프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의 아내 발렌티나 세로바는 남편의 마지막 오페라를 완성하고 그의 작품을 알리는 데 힘썼다.[2] 아들 발렌틴 세로프는 당대 최고의 러시아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발렌틴 세로프의 대표작으로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복숭아를 든 소녀'(1887년)와 '태양에 가려진 소녀'(1888년) 등이 있으며, 많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4. 2. 현대의 재평가
알렉산드르 세로프의 오페라 유디트와 로그네다는 당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현대에는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다.[6] 다만, 콘서트 형식으로 발췌된 부분이 가끔 연주되기도 한다.1991년에는 안드레이 치스티아코프가 지휘하는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유디트를 CD로 녹음(일부 컷 포함)하였다. 로그네다와 ''악마의 힘'' 역시 1940년대에 축약된 형태로 녹음된 바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belcanto.[...]
Belcanto.ru
2013-03-17
[2]
웹사이트
Александр Серов (Alexander Serov)
http://www.classic-m[...]
Классическая музыка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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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Encyclopedic Dictionary
2013-03-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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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иблейский сюжет
2013-03-17
[5]
서적
Geschiedenis van de Russiche muziek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Harvard dictionary of music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189
[8]
문서
マース pp.70-75
[9]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189
[10]
문서
マース pp.70-75
[11]
문서
マース pp.70-7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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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ース pp.70-75
[13]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32
[14]
문서
マース p.102
[15]
문서
マース p.76
[16]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189
[17]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369
[18]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399
[19]
문서
ロシア音楽事典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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