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암보이나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암보이나 사건은 1623년 암보이나 섬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을 고문하고 처형한 사건이다. 배경에는 향신료 무역 독점을 둘러싼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경쟁이 있었으며, 1619년 런던에서 방어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지속되었다. 네덜란드 측은 잉글랜드의 요새 점령 음모를 주장하며 잉글랜드인들을 체포, 고문, 처형했고, 이 사건은 양국 관계를 악화시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후 배상금 지급으로 해결되었지만, 잉글랜드의 동남아시아 영향력 약화와 네덜란드의 지배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 작품에서도 언급되었다.

2. 배경

암보이나섬은 정향 등 귀한 향신료가 생산되는 말루쿠 제도의 주요 섬 중 하나였다. 16세기포르투갈이 처음 진출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으나, 이후 네덜란드잉글랜드가 차례로 진출하면서 17세기 초에는 세력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특히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자, 양국 정부는 1619년 런던에서 조약을 맺어 갈등을 봉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양측의 대립은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2. 1. 향신료 무역 경쟁

암보이나섬말루쿠 제도 남쪽 스람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정향(클로브) 등 당시 유럽에서 고가에 거래되던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였다. 이로 인해 여러 유럽 국가들이 이 섬에 진출하고자 경쟁했다.

1512년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가 처음으로 이 섬에 도달한 이후, 포르투갈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599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경쟁이 시작되었고, 1605년 2월에는 네덜란드의 스티븐 반 데르 하겐이 포르투갈 세력으로부터 뉴 빅토리아 요새를 큰 저항 없이 점령하며 섬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뒤이어 잉글랜드1615년에 암보이나섬에 진출하여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면서 네덜란드와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생존한 잉글랜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려진 고문의 모습.


양국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정부는 1619년 런던에서 방위조약(Treaty of Defence)을 체결하고 다음 사항에 합의했다.

  • 향신료 무역은 양국이 공동으로 진행하며, 이익은 네덜란드의 기존 권리를 인정하여 네덜란드가 3분의 2, 잉글랜드가 3분의 1을 갖는다.
  • 조약 체결 시점까지 각국이 점령한 지역의 영유권은 그대로 유지하되, 앞으로 새롭게 정복하는 지역은 양국이 절반씩 나눈다.


그러나 현지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당국은 이 조약을 무시하고 독점적인 무역을 강행했으며, 이에 분노한 잉글랜드 상인들은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서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는 등 양측의 대립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 2. 1619년 방위 조약과 갈등 심화



암보이나섬말루쿠 제도 남쪽 세람 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클로브 등 향료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럽에서 고가에 거래되던 이 향료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유럽 국가들이 이 섬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1512년 포르투갈인 안토니오 다브리우가 처음으로 진출한 이후, 암보이나섬의 향료 무역은 포르투갈이 독점했다. 그러나 1599년 네덜란드인 판 바르바이크가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1605년 2월에는 스티븐 반 데르 하겐이 이끄는 네덜란드 세력이 무혈로 뉴 빅토리아 요새를 점령하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한편, 잉글랜드1615년에 암보이나섬에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시작하면서 네덜란드와 치열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양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영국네덜란드 정부는 1619년 런던에서 방위 조약(Treaty of Defenceeng)을 체결하고 다음 사항들을 합의했다.

  • 향료 무역은 앞으로 양국이 공동으로 수행한다.
  • 이익 분배에 있어서는 네덜란드의 기존 권리를 존중하여, 네덜란드가 3분의 2를, 잉글랜드가 나머지 3분의 1을 얻는다.
  • 그때까지 양국이 점령한 지역의 영유권은 그대로 유지하되, 앞으로 새롭게 정복하는 땅은 양국이 절반씩 나눈다.


그러나 현지에 파견된 네덜란드 당국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거래를 계속했다. 이에 격분한 잉글랜드인들은 바타비아에서 네덜란드인들을 내쫓는 등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방위 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3. 사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19년 체결된 방위 조약에도 불구하고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보이나 섬을 비롯한 동인도 제도에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를 불신하며 조약 의무 불이행, 현지 통치자와의 관계에서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시도 등 수많은 불만을 제기했다.[9][36] 특히 암보이나 지역의 네덜란드 총독 헤르만 판 스펠트는 1622년 말, 테르나테의 술탄이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끊고 스페인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인들이 비밀리에 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9][36]

이러한 배경 속에서 1623년 2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일본인 용병(로닌 또는 주인을 잃은 사무라이)[10][37] 중 한 명이 빅토리아 요새의 방어 시설을 염탐했다는 혐의로 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었다.[11][38] 네덜란드 측은 이 용병을 고문하여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일본인 용병들과 공모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이 용병은 음모의 공모자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암보이나 상관 책임자인 가브리엘 타워슨을 지목했다.[11][38]

이 자백을 근거로 네덜란드 당국은 타워슨을 비롯하여 암보이나와 인근 섬에 있던 다른 영국인 직원들, 그리고 관련 혐의가 있는 일본인 용병 등을 체포하여 심문했다.[11][38] 심문 과정에서는 고문이 사용되었으며,[13][40] 네덜란드 재판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의 용의자들이 혐의를 인정하는 자백을 했다. 당시 로마-네덜란드 법에서는 유죄 판결을 위해 피고인의 자백이 필수적이었으므로,[16][40] 자백한 이들은 반역 혐의로 암보이나의 네덜란드 총독과 평의회로 구성된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영국인 4명과 일본인 2명은 사면되었다.[16]

결과적으로 1623년 3월 9일, 영국인 10명,[17] 일본인 9명,[18][19][20][21][22]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이던 포르투갈인 1명[23]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영국인 책임자 가브리엘 타워슨의 머리는 공개적으로 기둥에 내걸렸다. 이 사건은 영국과 네덜란드 양국 정부가 수년간 추구해 온 동인도 제도에서의 협력 관계 구축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이후 이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1. 일본인 용병 체포와 고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와 영국 동인도 회사는 방위 조약에도 불구하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불신하며 조약 의무 불이행, 현지 통치자와의 관계에서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시도 등 수많은 불만을 제기했다. 암보이나 지역의 네덜란드 총독 헤르만 판 스펠트는 1622년 말, 테르나테 술탄이 스페인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인들이 배후에서 이를 조종한다고 의심했다.[9][36]

이러한 의심은 1623년 2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일본인 용병 (로닌 또는 주인을 잃은 사무라이)[10][37] 중 한 명이 빅토리아 요새의 방어 시설을 염탐하다 발각되면서[38]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 히라도 출신 시치조가 네덜란드 위병에게 요새 정보에 대해 묻다가 체포되었다고도 한다) 구체화되었다. 네덜란드 당국은 이 용병을 고문하여 심문했고, 그는 다른 일본인 용병들과 공모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이 음모에 영국 상관의 책임자인 가브리엘 타워슨이 연루되었다고 진술했다.[11][38]

이 자백을 근거로 타워슨을 비롯하여 암보이나와 인근 섬에 있던 다른 영국인 직원들, 그리고 관련 일본인 용병 등 약 30여 명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11][38] 모든 피의자가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12][39] 대부분은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겪었다.[13][40] 네덜란드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수사 방식인 물고문(머리 위에 천을 덮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는 방식, 오늘날의 워터보딩)이 행해졌다.[14][40] 그러나 영국 측은 고문대에 묶어 불로 지지거나 칼로 찌르고, 심지어 화약으로 사지를 절단하는 등 훨씬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후에 네덜란드 측에 의해 반박되었다.[15]

네덜란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고문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용의자는 혐의를 인정하는 자백을 했다. 당시 로마-네덜란드 법에서는 유죄 판결을 위해 자백이 필수적이었는데,[40] 이들의 혐의는 반역이었으므로 자백한 이들은 암보이나의 네덜란드 총독과 평의회로 구성된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영국인 4명과 일본인 2명은 사면되었다.[16]

결과적으로 1623년 3월 9일, 영국인 10명,[17] 일본인 9명[18][19][20][21][22](*주: 이 중 한 명인 Thome Corea는 한국계라는 주장이 있다[36]*),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이던 포르투갈인 1명[23]이 참수형을 당했다. 영국인 책임자 가브리엘 타워슨의 머리는 기둥에 꽂혀 공개되었다.

당시 일본은 전국 시대가 끝나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이묘 개역으로 인해 수많은 로닌이 발생하여 생계 문제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암보이나 섬에도 일본인 용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의 신빙성은 낮게 평가되며, 영국 측의 습격 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이었던 얀 피터르손 쿤이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을 확립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쿤은 본국 정부의 대처가 미온적이라고 비판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인물이다.

3. 2. 잉글랜드인 등 체포 및 처형

조약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와 영국 동인도 회사 사이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양측은 서로 불신하며 조약 위반과 상대방의 평판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특히 암보이나 지역의 네덜란드 총독 헤르만 판 스펠트는 1622년 말, 테르나테 술탄이 스페인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인들이 배후에서 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의심했다.[9][36]

이러한 의심은 1623년 2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고용한 일본인 용병 중 한 명(VOC 소속의 로닌 또는 주인을 잃은 사무라이[10][37])이 빅토리아 요새의 방어 시설을 염탐하다 발각되면서 구체화되었다.[11] 당시 에도 시대 일본은 전국 시대 종결 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치며 다이묘 개역으로 대량의 로닌이 발생했고, 이들 중 일부는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된 이 일본인 용병(히라도 출신 시치조라는 설도 있음)은 고문을 동반한 심문 과정에서 다른 일본인 용병들과 공모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그는 영국 상관의 책임자인 가브리엘 타워슨을 이 음모의 공모자로 지목했다.[11][38]

이 자백을 근거로 타워슨을 비롯하여 암보이나와 인근 섬에 있던 다른 영국인 직원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11][38] 심문 과정에서는 대부분 고문이 사용되었는데,[13][40] 확인된 방식은 머리에 천을 덮고 물을 부어 질식시키는 물고문(워터보딩)이었다.[14] 이는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수사 방식이었다.[14] 영국 측은 이후 화형, 칼 사용, 화약을 이용한 사지 절단 등 더욱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네덜란드 측은 이를 부인했다.[15]

네덜란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고문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용의자는 혐의를 자백했다. 당시 로마-네덜란드 법에서는 유죄 판결을 위해 자백이 필수적이었으므로, 반역 혐의로 기소된 이들 중 자백한 사람들은 암보이나 총독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평의회로 구성된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영국인 4명과 일본인 2명은 사면되었다.[16]

결과적으로 1623년 3월 9일, 영국인 10명,[17] 일본인 9명,[18][19][20][21][22]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이던 포르투갈인 1명[23]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영국인 책임자 가브리엘 타워슨의 머리는 기둥에 꽂혀 공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협력 관계 구축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동인도 제도에서 네덜란드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처형된 일본인 중 'Thome Corea'라는 이름의 인물은 한국계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인들이 실제로 습격을 계획했다는 자백의 신빙성은 낮게 평가되며, 사건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이었던 얀 피터르손 쿤이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을 강하게 주장하며 본국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던 점을 들어, 이 사건이 그의 주도하에 조작된 음모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3. 3. 사건의 진위 논란

사건 직후 영국에서는 네덜란드 측이 가혹한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고 주장하며 사건의 진위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논란의 시작점이 되었다.[11][15]

네덜란드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용의자 심문 과정에서 워터보딩(물고문) 방식의 고문이 사용되었다고 인정한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수사 기법이었다.[14][40] 로마-네덜란드 법 체계에서는 유죄 판결을 위해 피고인의 자백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16],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국 측은 물고문 외에도 고문대에 묶어 불로 지지거나 칼로 찌르고, 심지어 화약을 이용해 사지를 절단하는 등 훨씬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측은 이러한 영국 측 주장을 부인했다.[15] 고문의 강도와 방식에 대한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네덜란드 측도 인정하고 있어, 이를 통해 얻어진 자백의 신빙성은 낮다고 평가된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측의 의도적인 조작극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총독이었던 얀 피터르손 쿤은 동인도 제도에서의 자국 무역 독점을 강력히 추구했으며,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 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쿤은 네덜란드 본국 정부가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는데[36],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인들에게 반역 혐의를 씌워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인들이 요새를 습격하려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나 정황은 부족하다는 점도 이러한 음모설을 뒷받침한다.

결론적으로 암보이나 사건은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의 신뢰성 문제와 경쟁 세력 제거를 위한 네덜란드 측의 의도적인 조작 가능성 때문에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처형된 일본인 용병 9명[18][19][20][21][22] 중 'Thome Corea'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계 인물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Lucio De Sousa, (2018) : "The Portuguese Slave Trade in Early Modern Japan : Merchants, Jesuits and Korean Slaves", p. 131).

4. 결과

암보이나 사건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양국 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양국 동인도 회사 간의 합병 협상은 결렬되었고,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24] 단기적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축소되고 네덜란드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때 과 같은 가치를 지녔던 향료 가격이 하락하면서 네덜란드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동남아시아에서 밀려난 잉글랜드는 인도이란(사파비 왕조) 등지에서 제품 생산에 주력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사건 발생 31년 후인 1654년,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마무리 짓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북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훗날 맨해튼)을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올리버 크롬웰 정부 하에 체결된 이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총 8.5만파운드(당시 )의 배상금을 지급했으며,[28]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별도의 배상금(3615GBP)이 전달되었다.[2]

이 사건은 후대에도 기억되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도 언급되었다.

4. 1. 양국 관계 악화 및 외교 문제

암보이나 사건 소식은 곧 잉글랜드 본국에 전달되었고, 이로 인해 양국 동인도 회사 간에 진행되던 합병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24]

1623년 여름, 사면되어 풀려난 영국인들은 바타비아로 이동하여 네덜란드 총독 피터르 데 카르펜티어와 방위 평의회에 암보이나 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들은 사건 자체가 상상에 기반한 허위 혐의이며, 관련자들의 자백은 혹독한 고문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타비아에서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하자, 그들은 현지 영국인 상사 직원들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의 증언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영국 동인도 회사(EIC) 이사회는 영국 정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대한 배상 요구와 암보이나 재판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네덜란드 정부에 강력히 촉구하도록 요청했다.[24]

당시 네덜란드 주재 영국 대사였던 더들리 칼턴 경에 따르면, 그가 네덜란드 정부에 전달한 사건 내용은 네덜란드 내부에서도 자국 동인도 회사(VOC)에 대한 상당한 비판 여론을 일으켰다. 그러나 VOC 측은 곧바로 사건에 대한 자체적인 해명을 내놓았는데, 이는 영국 측의 주장과 본질적인 부분에서 상충되었다.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영국-네덜란드 합동 조사 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으나, 영국 측은 조사가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네덜란드 측은 영국이 요구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즉결 처형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고, 대신 네덜란드 공화국 최고 법원의 '위임 판사'를 통한 조사를 의뢰했다. 이에 따라 암보이나 사건의 재판관들은 동인도에서 소환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24]

재판은 네덜란드 조사 법원이 영국인 증인들에 대한 반대 심문을 시도하면서 더디게 진행되었다. 영국 정부는 자국민 증인들을 네덜란드로 강제 송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 측은 방위 조약에 대한 자국의 해석을 근거로 네덜란드 법원이 영국 동인도 회사 직원을 재판할 관할권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처형은 명백한 불법 행위이자 사법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영국 측은 이 문제가 증인 심문 없이도 결정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네덜란드 측은 암보이나 법원의 재판 관할권이 유효했다고 주장하며, 조사의 초점을 재판관들의 직무상 비위 가능성에 맞추었다.[25]

1630년, 헨리 베인 경과 함께 영국인 증인들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갔으나, 매우 제한적인 조건 하에서만 법정에 출두했다.[26] 1632년, 네덜란드 법원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내용의 초안 판결을 내렸고, 이는 양국 정부 간 사전 합의에 따라 당시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승인을 받기 위해 제출되었다. 찰스 1세는 이를 거부했지만, 네덜란드 당국은 결국 해당 재판관들을 석방했다.[27]

이 사건은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긴장을 야기했고, 결국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1654)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쟁 종결 후 1654년 체결된 웨스트민스터 조약(1654년)의 일부로 다국적 국제 중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암보이나 사건의 영국인 희생자 유족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2] 이에 따라 가브리엘 타워슨 등 희생자들의 상속인에게는 총 3615GBP가 지급되었고, 영국 동인도 회사(EIC)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로부터 85000GBP(당시 30만 길더)를 받았다.[28]

암보이나 사건을 계기로 동남아시아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는 이 지역에서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한때 같은 무게의 과 교환될 정도로 귀했던 향료의 가치가 점차 하락하면서 네덜란드의 국제적 지위도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새로운 해외 거점을 인도이란(당시 사파비 왕조) 등지에서 모색하게 된 잉글랜드는 양질의 제품 대량 생산을 통해 국력을 키워나갔다.

이 사건은 후대에도 기억되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유명한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1735년 판)에서도 언급되었다.

4. 2. 잉글랜드의 세력 약화와 네덜란드의 지배력 강화

암보이나 사건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양국 관계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세력 구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의 여파로 양국 간에 진행 중이던 동인도 회사 합병 협상이 결렬되었다.[24] 결과적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네덜란드는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비록 사건 발생 31년 후인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가 8.5만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지만[28], 동남아시아에서의 세력 변화는 되돌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네덜란드의 우위는 지속되지 못했다. 한때 같은 무게의 과 교환될 정도로 귀했던 향료의 가치가 점차 하락하면서, 향료 무역에 크게 의존하던 네덜란드의 세계적 지위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잃은 잉글랜드는 새로운 해외 거점을 인도이란 (사파비 왕조) 등지에서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잉글랜드는 이들 지역에서 양질의 제품 대량 생산을 통해 국력을 증가시켰다.

4. 3. 배상금 지급

사건 소식은 곧 잉글랜드 본국에 전달되었고, 양국 동인도 회사 간의 합병 협상은 결렬되었으며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623년 여름, 사면받고 풀려난 영국인 생존자들은 바타비아로 가서 네덜란드 총독 피터르 데 카르펜티어와 방위 평의회에 사건의 부당함을 항의했다. 이들은 혐의가 조작되었고 자백은 고문으로 얻어졌다고 주장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자, 영국으로 돌아가 사건을 알렸다. 이 이야기는 영국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영국 동인도 회사(EIC)는 영국 정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에 대한 배상 요구와 책임자 처벌을 네덜란드 정부에 요청하도록 촉구했다.[24]

영국 대사 더들리 칼턴 경이 네덜란드 정부에 사건 내용을 전달하자, 네덜란드 내부에서도 VOC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VOC는 자체 조사 결과를 내놓으며 영국 측 주장을 반박했다.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영국-네덜란드 합동 조사 위원회를 제안했으나, 영국 측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거부했다. 네덜란드 측은 영국이 요구한 즉결 처형 대신, 네덜란드 공화국 최고 법원의 '위임 판사'를 통한 조사를 결정하고 암보이나 사건 관련 재판관들을 동인도에서 소환하여 가택 연금시켰다.[24]

재판은 네덜란드 조사 법원이 영국인 증인들에 대한 반대 심문을 원하면서 지연되었다. 영국 정부는 증인들의 네덜란드행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또한 방위 조약 해석에 따라 암보이나 법원이 EIC 직원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처형 자체가 사법 살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증인 심문 없이도 결정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영국 측 입장이었다. 반면 네덜란드 측은 암보이나 법원의 재판 관할권을 인정하며 재판관들의 직무상 비위 여부에 초점을 맞춰 조사를 진행했다.[25]

1630년, 영국 증인들은 헨리 베인 경과 함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가서 제한적인 조건 하에 법정에 출두했다.[26] 1632년, 법원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초안 판결을 내렸고, 사전 합의에 따라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승인을 요청했다. 찰스 1세는 이를 거부했지만, 네덜란드 당국은 결국 재판관들을 석방했다.[27]

이 문제는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1654) 이후에야 해결되었다. 전쟁을 종결시킨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의 일부로 다국적 국제 중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가 학살된 영국인 희생자들의 상속인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다.[2] 올리버 크롬웰 호국경 정부 하에 체결된 이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총 (당시 8.5만파운드)의 배상금과 북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훗날의 맨해튼)을 잉글랜드에 넘겨주었다. 구체적으로 희생자 대표였던 가브리엘 타워슨(Gabriel Towerson)의 상속인을 포함한 유족들에게 3615GBP가 지급되었고,[2] 영국 동인도 회사(EIC)는 VOC로부터 8.5만파운드를 받았다.[28] 이는 사건 발생 31년 만의 일이었다.

5. 역사적 영향 및 평가

thumb

암보이나 사건은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사건 결과에 불만을 품고 1632년, 네덜란드 측 주장에 대한 반박과 영국인들이 겪은 고문의 세부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발행하여 여론전에 나섰다.[29] 네덜란드 역시 1624년 빌렘 보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팸플릿을 통해 자국 입장을 방어하려 했으나, 영국 측에서는 이를 명예훼손으로 간주했다.[30]

이 사건과 영국 동인도 회사가 발행한 소책자는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으며, 전쟁 중에는 "네덜란드를 위한 기념물"(1652)이라는 제목으로 재인쇄되어 반(反)네덜란드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31] 전쟁에서 패배한 네덜란드는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통해 살아남은 가해자들을 처벌하고, 영국인 희생자 유족에게 총 3615GBP의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다.[32][33]

암보이나 사건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이 사건을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네덜란드를 공격하고 합병하는 명분 중 하나로 삼았다.[34] 전쟁을 종결시킨 브레다 조약 (1667년)으로 암보이나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시기에는 존 드라이든의 희곡 등을 통해 선전 도구로 다시 활용되기도 했다.[35] 이처럼 암보이나 사건은 단순한 식민지에서의 충돌을 넘어, 이후 수십 년간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5. 1.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암보이나 사건은 이후 영국 문학 작품에서 네덜란드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 존 드라이든은 "암보이나 또는 영국 상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잔혹 행위"라는 희곡을 썼다. 이 작품은 당시 잉글랜드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 도버 비밀 조약의 주요 협상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후원자 요청에 따라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희곡은 실제 사건을 극적으로 각색하여, 네덜란드 총독 반 스페율트가 영국 상관 대표 가브리엘 타워슨에게 적대감을 품은 이유를 개인적인 원한으로 설정한다. 즉, 총독의 아들(가상의 인물)과 타워슨이 원주민 공주를 두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아들이 공주를 강간하고, 타워슨이 결투 끝에 아들을 살해하자 총독이 학살의 형태로 복수한다는 내용이다.[35]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1726) 제3권 11장에서도 암보이나 사건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주인공 레뮤얼 걸리버는 일본을 떠나면서 자신을 "네덜란드인"이라고 속이고 '암보이나'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배에 탑승한다. 그는 일본 관리들이 요구한 "십자가 짓밟기" 의식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동승한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숨기는데, 그 이유를 "만약 그 비밀이 내 동포인 네덜란드인들에게 발각된다면, 그들은 항해 중에 내 목을 베었을 것"이라고 독백한다. 이는 당시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참조

[1] 문서 Amboina/Ambon의 구식 표기법 사용 이유
[2] 논문 역사적 불의에 대한 배상의 역사 재고찰: 근대 초기 관점 https://www.journals[...] 2024-00-00
[3] 서적 동인도 회사의 역사 https://amzn.in/3fuC[...]
[4] 문서 Shorto, p. 72.; State Papers, No. 499I
[5] 문서 암본 섬의 영어 이름 구식 표기
[6] 문서 영국이 룬 섬에 무역 기지를 설립
[7] 문서 1619년 서 토마스 데일의 원정
[8] 웹사이트 회사의 "별도 항해" http://www.ibiblio.o[...] 2016-09-16
[9] 문서 State Papers, No. 537I
[10] 문서 포르투갈과 시암 왕의 고용된 일본 용병들
[11] 문서 State Papers, No. 499I
[12] 문서 인근 섬의 요인들
[13] 문서 로마-네덜란드 법과 고문
[14] 문서 주지사 Frederick de Houtman에 따르면
[15] 문서 State Papers, No. 499I
[16] 문서 Collins, Beaumont, Webber 및 Sherrocke; Soysimo en Sacoute; State Papers, No. 499I
[17] 문서 암보이나에서 체포된 영국인들
[18] 문서 피란도, 난가사키 출신 용병들
[19] 웹사이트 무역 장소: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http://www.eablanche[...] 2021-07-22
[20] 서적 식민지 시리즈 주 문서 달력 ...: 공공 기록 사무소에 보존 ... https://books.google[...]
[21] 서적 식민지 시리즈 주 문서 달력 ...: 동인도, 중국 및 일본, 1513 https://books.google[...] Longman
[22] 논문 영국-네덜란드 연결과 해외 기업: 라이온 가디너의 세계에 대한 세계적 관점 https://muse.jhu.edu[...] 2011-00-00
[23] 문서 Augustine Perez; State Papers, No. 499I
[24] 문서 State Papers, Nos. 535, 567II, 661I, 695
[25] 문서 State Papers, Nos. 537I, 567II, 591, 661I
[26] 문서 Resolutiën, 30 April 1630, 19
[27] 문서 암보이나 학살 이후 영국의 동인도 제도에 대한 관심 감소
[28] 서적 존경받는 동인도 회사 연대기 https://archive.org/[...] Black, Parry, and Kingsbury
[29] 문서 답변
[30] 문서 State Papers, Nos. 537I, 548, 551, 555
[31] 문서 Schmidt, p. 297
[32] 문서 조약 제27조
[33] 문서 Hunter and Roberts, p. 427
[34] 문서 암보이나 비극 제2부
[35] 문서 Zwicker, p. 141; Schmidt, p. 296
[36] 간행물 State Papers, No. 537I
[37] 문서 일본인 용병들은 포르투갈과 태국 왕들도 고용하고 있었다.
[38] 간행물 State Papers, No. 499I
[39] 간행물 State Papers, No. 499I
[40] 문서 고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