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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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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 1723–1816)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사회학자, 역사가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자연철학, 정신철학 및 윤리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1767)와 '로마 공화국의 진보와 종식에 관한 역사'(1783) 등의 저서를 통해 시민 사회, 진보, 윤리, 사회 사상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퍼거슨은 시민 공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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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퍼거슨
기본 정보
1782년 조슈아 레이놀즈가 그린 애덤 퍼거슨 초상화
이름애덤 퍼거슨
출생일1723년 6월 20일
출생지스코틀랜드 퍼스셔 로기레이트
사망일1816년 2월 22일
사망지스코틀랜드 파이프 세인트앤드루스
국적영국
로마자 표기Adam Ferguson
학문적 배경
시대18세기 철학
분야서양 철학
학파스코틀랜드 상식 철학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주요 관심사사회학
정치철학
윤리학
역사
모교에든버러 대학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소속 기관에든버러 대학교
주요 사상시민 사회론
기타 정보
작위왕립학회 회원 (FRSE)
참고자료
참고 웹사이트애덤 퍼거슨 - 철학자이자 역사가, 제임스 보즈웰
참고 문헌스코틀랜드인들이 어떻게 현대 세계를 창조했는가
해리 E. 반스, "콩트 이전의 사회학: 교리 요약 및 문헌 소개"
윌리엄 브래드포드 윌콕스, 월터 L. 안스타인, "귀족의 시대, 1688년부터 1830년까지"
추가 정보
참고 백과사전일본대백과사전(니폰다이햐카젠쇼) - 애덤 퍼거슨 항목

2. 생애

애덤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퍼스셔 주 로지레잇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학교와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게일어 지식을 바탕으로 군대에 들어가 폰테누아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5] 1754년 군 생활을 마친 후, 에든버러에서 데이비드 흄의 뒤를 이어 사서로 일하다가 부트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7]

1759년 에든버러 대학교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고, 1764년에는 윤리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767년 출판한 ''시민사회 역사에 관한 에세이''는 큰 호평을 받았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에 대한 팸플릿을 출판, 영국 의회 견해에 공감하며 칼라일 평화 위원회 서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7]

1783년 ''로마 공화국의 진보와 종식에 관한 역사''를 출판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8] 1785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1792년 ''도덕 및 정치 과학 원리''를 출판했다. 70세 이후 이탈리아 등 유럽을 여행하고, 1795년부터 피블스 근처 네이드패스 성 등에서 거주하다 1816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사망했다.[15]

1767년 캐서린 버넷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채식주의를 실천하며 건강하게 살았다.[13][14][15][17][18]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애덤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퍼스셔 주 애솔의 로지레잇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5] 그는 로지레잇 교구 학교, 퍼스 문법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MA 1742)에서 교육을 받았다.[5] 게일어에 대한 지식 덕분에, 1745년 그는 43연대(후에 42연대)인 블랙 워치의 부목사로 임명되었다. 6년간의 필수 신학 연구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특별 허가를 받아 설교 허가증을 받았다.[6]

1745년 폰테누아 전투에서 퍼거슨이 하루 종일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대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떠나기를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746년에 주임 목사가 되었다. 그는 1754년까지 연대에 계속 소속되어 있었다.[6]

2. 2. 군목 시절과 폰테누아 전투

스코틀랜드 퍼스셔 주 애솔의 로지레잇 출신 애덤 퍼거슨 목사의 아들인 그는 로지레잇 교구 학교, 퍼스 문법학교, 에든버러 대학교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MA 1742)에서 교육받았다.[5] 1745년, 게일어 지식 덕분에 블랙 워치 43연대(후에 42연대) 부목사로 임명되었는데, 6년간의 필수 신학 연구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특별 허가를 받아 설교 허가증을 받았다.[6]

1745년 폰테누아 전투에서 퍼거슨이 하루 종일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대령의 명령에도 전장을 떠나기를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1746년에 주임 목사가 되었다. 1754년까지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생계를 얻지 못해 성직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2. 3. 학문적 활동과 시민 사회론

스코틀랜드 퍼스셔주 애솔의 로지레잇에서 목사 아담 퍼거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로지레잇 교구 학교, 퍼스 문법학교, 에든버러 대학교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MA 1742)에서 교육을 받았다.[5] 1745년, 게일어에 대한 지식 덕분에 그는 43연대(후에 42연대)인 블랙 워치의 부목사로 임명되었는데, 6년간의 필수 신학 연구를 마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특별 허가를 받아 설교 허가증을 받았다.[6]

1745년 폰테누아 전투에서 퍼거슨이 하루 종일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대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떠나기를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잘 해냈고, 1746년에는 주임 목사가 되었다. 그는 1754년까지 연대에 계속 소속되어 있었는데, 생계를 얻지 못하자 성직을 그만두고 문학적 추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잠시 라이프치히에 머문 후 그는 에든버러로 돌아왔고, 1757년 1월 데이비드 흄의 뒤를 이어 법정 변호사 협회의 사서가 되었지만( 변호사 도서관 참조), 곧 부트 백작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면서 이 직책을 그만두었다.[7] 1759년 퍼거슨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고, 1764년에는 "기체역학"( 정신철학)과 윤리철학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1767년 그는 그의 저서 ''시민사회 역사에 관한 에세이''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호평을 받았고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1770년대 중반 그는 다시 유럽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 볼테르를 만났다. 그의 포커 클럽 회원 자격은 1776년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776년,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 관한 익명의 팸플릿을 출판했는데, 이는 리처드 프라이스 박사의 ''시민 자유의 본질에 관한 관찰''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그는 영국 의회의 견해에 공감했다. 1778년 퍼거슨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칼라일 평화 위원회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

1780년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2판에 "역사" 항목을 기고했다.[8] 이 항목은 40페이지에 달하며, 단 한 단락에 불과했던 초판의 항목을 대체했다.

1783년 그의 저서 ''로마 공화국의 진보와 종식에 관한 역사''가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매우 인기를 얻어 여러 판본을 거쳤다. 퍼거슨은 그들의 위대했던 시대 동안 로마 공화국의 역사가 그가 특히 연구했던 윤리적, 정치적 교리들의 실질적인 예시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이 역사서는 잘 읽히고 공정하며, 자료를 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자의 군 경험의 영향은 서술의 특정 부분에서 나타난다. 가르치는 일에 지쳐 그는 1785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강의 내용을 수정하여 ''도덕 및 정치 과학 원리''라는 제목으로 (1792년) 출판했다.

70세가 된 퍼거슨은 역사의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학회들로부터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다.

2. 4. 미국 독립 전쟁과 칼라일 평화 위원회

1776년, 퍼거슨은 미국 독립 전쟁에 관한 익명의 팸플릿을 출판했는데, 이는 리처드 프라이스 박사의 ''시민 자유의 본질에 관한 관찰''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영국 의회의 견해에 공감했다.[7] 1778년 퍼거슨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칼라일 평화 위원회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8]

2. 5. 로마 공화국 흥망사

1783년 퍼거슨은 ''로마 공화국의 진보와 종식에 관한 역사''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매우 인기를 얻어 여러 판본을 거쳤다.[8] 그는 위대했던 시대 동안 로마 공화국의 역사가 자신이 특히 연구했던 윤리적, 정치적 교리들의 실질적인 예시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이 역사서는 잘 읽히고 공정하며, 자료를 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자의 군 경험의 영향은 서술의 특정 부분에서 나타난다.[8]

2. 6. 말년

1783년 그의 저서 ''로마 공화국의 진보와 종식에 관한 역사''가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매우 인기를 얻어 여러 판본을 거쳤다. 퍼거슨은 그들이 위대했던 시대 동안 로마 공화국의 역사가 그가 특히 연구했던 윤리적, 정치적 교리들의 실질적인 예시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이 역사서는 잘 읽히고 공정하며, 자료를 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자의 군 경험의 영향은 서술의 특정 부분에서 나타난다.[8] 가르치는 일에 지쳐 그는 1785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강의 내용을 수정하여 ''도덕 및 정치 과학 원리''라는 제목으로 (1792년) 출판했다.

70세가 된 퍼거슨은 역사의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학회들로부터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다. 1795년부터 그는 피블스 근처의 네이드패스 성, 매너 워터의 핼리어드, 그리고 세인트앤드루스에 차례로 거주했고, 1816년 2월 22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성당 교회의 동쪽 벽에 묻혀 있다. 그의 큰 벽화 기념비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측면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15]

그는 1767년 캐서린 버넷과 결혼했다.[13] 퍼거슨은 조셉 블랙(Joseph Black M.D.) 박사의 사촌이자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으며, 케이티 버넷은 블랙의 조카였다.[14] 그들은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월터 스콧 경과 절친했던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 (British Army officer))이었고, 그 뒤를 이어 제임스, 조셉, 존, 이사벨라, 메리, 마가렛이 있었다.[15] 존(John MacPherson Ferguson)은 왕립 해군(Royal Navy)의 소장이었다.[16]

퍼거슨은 1780년에 마비 증세를 겪었지만 완전히 회복되었고, 남은 생애 동안 채식주의자가 되었다.[17][18] 퍼거슨은 또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사촌이자 절친한 친구인 조셉 블랙과 함께하지 않는 한 외식을 하지 않았다.[19]

3. 사상

퍼거슨은 자신의 윤리 체계에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다루며, 정치적 예시를 통해 자신의 교리를 설명한다. 인류의 진보를 믿는 그는 도덕적 칭찬의 원리를 완벽의 달성에 두었다. 이 원리를 통해 퍼거슨은 모든 도덕 체계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토마스 홉스데이비드 흄과 함께 그는 자기 이익이나 실용성의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 보존의 법칙으로서 도덕에 포함시켰다. 프랜시스 허치슨의 보편적 박애 이론과 애덤 스미스의 상호 동정심(현재 공감)의 개념을 그는 사회의 법칙 아래에서 결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들은 인간 운명의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최고 목표에 종속되며, 최고 목표는 완벽이다.

자신의 체계의 정치적 부분에서 퍼거슨은 몽테스키외를 따르며, 잘 통제된 자유와 자유로운 정부의 대의를 옹호한다. 흄을 제외한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저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퍼거슨은 제국 확장이 국가의 자유를 훼손할 것이라는 공화주의 동시대 사람들의 두려움을 공유했지만, 대표 기관을 확장되는 국가가 제기하는 위험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았다.[9] 그는 영국 제국을 옹호했지만, 정치적 대표성이 그것이 폭정이 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9]

1767년 저서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에서 퍼거슨은 고전 작가와 당대 여행 문헌을 바탕으로, 시민적·공동체적 미덕을 저버린 현대 상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시민권 이론의 중심 주제로 갈등, 놀이, 정치 참여, 군사적 용기를 강조했다. 또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인 "동정심"이 "인간 본성의 부속물"이자 "종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험과 같은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처럼, 그는 자발적 질서, 즉 많은 개인의 조율되지 않은 행동에서 일관되고 효과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퍼거슨은 역사를 모든 인간이 속하는 자연사와 사회사의 2단계 종합으로 보았다. 자연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며, 인간 또한 진보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사회사는 이러한 자연적 진보에 따라 인간이 만들지만, 때로는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사에서 진보할 힘을 받는다. 그는 중세 기사도의 측면을 이상적인 남성적 특징으로 강조하며, 영국 신사와 젊은이들이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예의범절 대신 내면의 덕목과 '공정한 성(性)'에 대한 예의를 받아들이도록 조언했다.[10][11]

진보 사상의 주요 옹호자였던 퍼거슨은 개인적 이기심 추구를 통한 상업 사회의 성장이 자립적인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상업적 성장이 덕의 쇠퇴를 조장하여 결국 로마와 같은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실한 장로교도였던 그는 진보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명령하는 신성한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했다. 그에게 있어 인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얻는 지식, 심지어 일시적인 퇴보로 이어지는 행동조차도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완전성을 향한 점진적인 운동의 본질적인 부분이다.[12]

퍼거슨은 고전 인본주의와 타키투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와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험과 애덤 스미스를 포함한 에든버러 선출 사회 회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문명이 주로 개인의 독립성을 제한하지만 안전과 정의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제공하는 법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적 혼란이 일반적으로 전제 정치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은 야만인들이 가진 자유-자율성을 포기하고 자유-안전 또는 시민적 자유를 얻는다. 몽테스키외도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10]

스미스가 자본 축적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강조한 반면, 퍼거슨은 혁신과 기술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제안하여 현대적 사고방식과 더 일치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상업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퍼거슨은 이 주제를 자유롭게 차용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그의 비판은 스미스를 훨씬 넘어섰고,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10][11]

조지 워싱턴이 아담 퍼거슨 박사에게 보낸 편지. 헨리 클린턴 경의 여권 요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778년 6월 9일


『에세이』는 현대 영국에서 시민 공화주의 시민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신적인 시도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갖고 있던 공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10]

3. 1. 윤리 철학

퍼거슨은 자신의 윤리 체계에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다루며, 정치적 예시를 통해 자신의 교리를 설명한다. 인류의 진보를 믿는 그는 도덕적 칭찬의 원리를 완벽의 달성에 두었다. 빅토르 쿠쟁은 퍼거슨의 추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24]

그의 방법에는 스코틀랜드 학파의 지혜와 신중함이 담겨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좀 더 남성적이고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 완벽의 원리는 새로운 것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퍼거슨을 그의 모든 선배들보다 뛰어난 도덕가로 만드는 동정심과 박애보다 더 합리적이고 포괄적이다.


이 원리를 통해 퍼거슨은 모든 도덕 체계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토마스 홉스데이비드 흄과 함께 그는 자기 이익이나 실용성의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기 보존의 법칙으로서 도덕에 포함시켰다. 프랜시스 허치슨의 보편적 박애 이론과 애덤 스미스의 상호 동정심(현재 공감)의 개념을 그는 사회의 법칙 아래에서 결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들은 인간 운명의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최고 목표에 종속되며, 최고 목표는 완벽이다.

자신의 체계의 정치적 부분에서 퍼거슨은 몽테스키외를 따르며, 잘 통제된 자유와 자유로운 정부의 대의를 옹호한다. 흄을 제외한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의 저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퍼거슨은 제국 확장이 국가의 자유를 훼손할 것이라는 공화주의 동시대 사람들의 두려움을 공유했지만, 대표 기관을 확장되는 국가가 제기하는 위험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았다.[9] 그는 영국 제국을 옹호했지만, 정치적 대표성이 그것이 폭정이 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9]

3. 2. 사회 사상

퍼거슨은 1767년에 출간한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에서 고전 작가와 당대 여행 문헌을 바탕으로, 시민적·공동체적 미덕을 저버린 현대 상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24] 그는 시민권 이론의 중심 주제로 갈등, 놀이, 정치 참여, 군사적 용기를 강조했다. 또한,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인 "동정심"이 "인간 본성의 부속물"이자 "종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험과 같은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처럼, 그는 자발적 질서, 즉 많은 개인의 조율되지 않은 행동에서 일관되고 효과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퍼거슨은 역사를 모든 인간이 속하는 자연사와 사회사의 2단계 종합으로 보았다. 자연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며, 인간 또한 진보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사회사는 이러한 자연적 진보에 따라 인간이 만들지만, 때로는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사에서 진보할 힘을 받는다. 그는 중세 기사도의 측면을 이상적인 남성적 특징으로 강조하며, 영국 신사와 젊은이들이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예의범절 대신 내면의 덕목과 '공정한 성(性)'에 대한 예의를 받아들이도록 조언했다.[10][11]

진보 사상의 주요 옹호자였던 퍼거슨은 개인적 이기심 추구를 통한 상업 사회의 성장이 자립적인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상업적 성장이 덕의 쇠퇴를 조장하여 결국 로마와 같은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실한 장로교도였던 그는 진보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명령하는 신성한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했다. 그에게 있어 인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얻는 지식, 심지어 일시적인 퇴보로 이어지는 행동조차도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완전성을 향한 점진적인 운동의 본질적인 부분이다.[12]

퍼거슨은 고전 인본주의와 타키투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와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험과 애덤 스미스를 포함한 에든버러 선출 사회 회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문명이 주로 개인의 독립성을 제한하지만 안전과 정의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제공하는 법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적 혼란이 일반적으로 전제 정치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은 야만인들이 가진 자유-자율성을 포기하고 자유-안전 또는 시민적 자유를 얻는다. 몽테스키외도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10]

스미스가 자본 축적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강조한 반면, 퍼거슨은 혁신과 기술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제안하여 현대적 사고방식과 더 일치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상업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퍼거슨은 이 주제를 자유롭게 차용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했는데, 그의 비판은 스미스를 훨씬 넘어섰고,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10][11]

『에세이』는 현대 영국에서 시민 공화주의 시민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신적인 시도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갖고 있던 공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10]

3. 3. 진보 사상

퍼거슨은 1767년 저서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에서 고전 작가들과 당대 여행 문헌을 바탕으로, 시민적·공동체적 미덕을 저버린 현대 상업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시민권 이론의 중심 주제로 갈등, 놀이, 정치 참여, 군사적 용기를 제시하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인 "동정심"을 강조했다.[10]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험과 같이 자발적 질서를 중시했다.

퍼거슨은 역사를 자연사와 사회사의 종합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며, 인간 또한 진보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고 보았다. 사회사는 이러한 자연적 진보에 따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며, 때로는 좌절을 겪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사에서 진보할 힘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세 기사도의 이상적인 남성적 특징을 강조하며, 영국 신사와 젊은이들에게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예의범절 대신 내면의 덕목과 '공정한 성(性)'에 대한 예의를 받아들이도록 조언했다.[10][11]

퍼거슨은 진보 사상의 주요 옹호자로서,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통한 상업 사회의 성장이 자립적인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업적 성장은 덕의 쇠퇴를 조장하여 궁극적으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진보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명령하는 신성한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했다. 즉, 인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얻는 지식은 일시적인 퇴보로 이어지는 행동조차도 궁극적으로 완전성을 향한 진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보았다.[12]

그는 고전 인본주의와 타키투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데이비드 험, 애덤 스미스를 포함한 에든버러 선출 사회 회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다. 퍼거슨은 문명이 주로 개인의 독립성을 제한하지만 안전과 정의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제공하는 법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사회적 혼란이 전제 정치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그는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이 야만인들이 가진 자유-자율성을 포기하고 자유-안전 또는 시민적 자유를 얻는다고 보았다. 몽테스키외도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10]

애덤 스미스자본 축적을 강조한 반면, 퍼거슨은 혁신과 기술 발전을 더 중요하게 보았으며, 상업이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자본주의 비판에 활용했다. 퍼거슨의 상업 사회 비판은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10][11]

『에세이』는 현대 영국에서 시민 공화주의 시민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신적인 시도로 평가되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공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10]

3. 4. 영향

퍼거슨의 『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영어(1767)는 고전 작가들과 당대 여행 문헌을 바탕으로, 시민적·공동체적 미덕을 저버린 현대 상업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시한다. 퍼거슨의 시민권 이론의 중심 주제는 갈등, 놀이, 정치 참여, 그리고 군사적 용기이다. 그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을 강조하며, "동정심"이 "인간 본성의 부속물"일 뿐만 아니라 "종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의 친구인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험을 비롯한 다른 스코틀랜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발적 질서, 즉 많은 개인의 조율되지 않은 행동에서 일관되고 효과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10][11]

퍼거슨은 역사를 모든 인간이 속하는 자연사와 사회사의 2단계 종합으로 보았다. 자연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며, 인간 또한 진보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사회사는 이러한 자연적 진보에 따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때문에 때때로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사에서 진보를 추구할 힘을 받는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을 위해 산다. 그는 중세 기사도의 측면을 이상적인 남성적 특징으로 강조했다. 영국 신사와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남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과 같이 너무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예의범절의 측면을 버리고, 내면의 덕목과 '공정한 성(性)'에 대한 예의를 시사하는 덜 피상적인 자질을 받아들이도록 조언했다.[10][11]

퍼거슨은 진보 사상의 주요 옹호자였다. 그는 개인적 이기심 추구를 통한 상업 사회의 성장이 자립적인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퍼거슨은 그러한 상업적 성장이 덕의 쇠퇴를 조장하여 궁극적으로 로마와 같은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믿었다. 독실한 장로교도였던 퍼거슨은 진보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명령하는 신성한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되는 주장을 해결했다. 퍼거슨에게 있어 인류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얻는 지식, 심지어 일시적인 퇴보로 이어지는 행동조차도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완전성을 향한 진보적이고 점근적인 운동의 본질적인 부분을 형성한다.[12]

퍼거슨은 고전 인본주의와 타키투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와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데이비드 험과 애덤 스미스를 포함한 에든버러의 선출 사회 회원들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퍼거슨은 문명이 주로 개인의 독립성을 제한하지만 안전과 정의라는 의미에서 자유를 제공하는 법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적 혼란이 일반적으로 전제 정치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은 야만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자율성을 포기하고 자유-안전 또는 시민적 자유를 대신 얻는다. 몽테스키외는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10]

스미스는 성장의 원동력으로 자본 축적을 강조했지만, 퍼거슨은 혁신과 기술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제안했으며,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현대적 사고방식과 더 일치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상업은 사람들을 '겁쟁이'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퍼거슨이 스미스로부터 자유롭게 차용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사용한 주제를 예시한다. 퍼거슨의 상업 사회에 대한 비판은 스미스의 비판을 훨씬 넘어섰고,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10][11]

『에세이』는 현대 영국에서 시민 공화주의 시민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신적인 시도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갖고 있던 공화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10]

4. 저작

참조

[1] 서적 Selections from the Scottish Philosophy of Common Sense http://oll.libertyfu[...]
[2] 웹사이트 Adam Ferguson - Philosopher and Historian {{!}} James Boswell https://www.jamesbos[...] 2024-08-25
[3] 논문 Sociology Before Comte: A Summary of Doctrines and an Introduction to the Literature 1917-09-00
[4] 서적 The Age of Aristocracy, 1688 to 1830
[5] 서적 Former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783–2002: Biographical Index https://web.archive.[...]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10-09-29
[6] 서적 The Scots Imagination and Modern Memo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7] 서적 An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Adam Ferguson | Scottish philosopher http://www.britannic[...] 2023-06-16
[9] 논문 Empire and Liberty in Adam Ferguson's Republicanism 2022-00-00
[10] 서적 The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of Adam Ferguson
[11] 서적 The Scottish Enlightenment Harper Perennial
[12] 서적
[13] 서적 Biographical Index of Former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The Edinburgh 1783–2002 https://web.archive.[...]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16-04-29
[14] 서적 Records of the Clan and Name Ferguson
[15] 서적 Records of the clan and name of Fergusson
[16] 서적 Burkes peerage
[17] 서적 The Ferguson Family: In Scotland and America The Times Presses
[18] 서적 Ferguson: An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
[19] 서적 Sir Walter Scott: 1771–1821 Hamish Hamilton
[20] 서적 An Essay on the History of Civil Society https://books.google[...] A. Millar and T. Cadell, A. Kincaid and J. Bell
[21] 서적 Scottish Thought and the American Revolution: Adam Ferguson's Response to Richard Price http://oll.libertyfu[...] Liberty Fund 2011-09-14
[22] 백과사전 2023-11-06
[23] 서적 How the Scots invented the Modern World : the true story of how western Europe's poorest nation created our world & everything in it https://www.worldcat[...]
[24] 서적 Church and university in the Scottish Enlightenment : the moderate literati of Edinburgh 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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