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허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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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 허친슨은 1591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종교 개혁가로, 청교도 신앙을 따랐다. 1634년 미국 매사추세츠로 이주하여, 여성들을 위한 성경 토론 모임을 열어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펼쳤다. 그녀는 성령의 내재를 강조하고, 행위보다는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으로 인해 기존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1637년, 앤 허친슨은 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당했고, 이후 로드아일랜드로 이주하여 포츠머스 정착을 도왔다. 1643년 뉴네덜란드에서 가족과 함께 시와노이족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녀는 종교적 자유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한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미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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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허친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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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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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앤 매버리 |
세례일 | 1591년 7월 20일 |
출생지 | 알퍼드, 링컨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643년 8월 |
사망 장소 | 뉴네덜란드, 중부 식민지 |
사망 원인 | 키프트 전쟁 중 시와노이족에 의해 살해됨 |
직업 | 조산사 |
교육 | 홈스쿨 및 독학 |
배우자 | 윌리엄 허친슨(1612년 8월 9일 결혼, 1641년 사망) |
자녀 | 15명 (에드워드, 페이스, 브리짓, 수산나 포함) |
친척 | 필레그 샌퍼드 주지사 토머스 허친슨 주지사의 증조할머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H. W. 부시, 조지 W. 부시의 조상 미국 정치인 미트 롬니, 존 헌츠먼 주니어의 조상 |
주요 활동 | |
알려진 이유 | 앤티노미안 논쟁에서의 역할 |
가족 | |
아버지 | 프랜시스 매버리 |
어머니 | 브리짓 드라이든 |
2. 초기 생애 및 잉글랜드에서의 삶
앤 허친슨은 1591년 7월 20일 잉글랜드 링컨셔 알포드에서 앤 마버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랜시스 마버리는 성공회 성직자였으나, 강한 청교도 성향을 가지고 성직자는 훌륭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이 문제로 상사들과 충돌했다.[1] 허친슨의 아버지는 성공회 당국에 반복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견책을 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1578년, 그는 공개 재판을 받았는데, 가택 연금 기간 동안 기억을 되살려 재판 기록을 작성했다.[2]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마버리는 런던 맞은편 템스 강 남쪽에 있는 마셜시 감옥에서 2년을 보냈다.[2]
1580년, 25세에 풀려난 마버리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약 225.31km 떨어진 링컨셔의 외딴 시장 도시 알포드로 이사했다.[2] 그는 곧 알포드, 세인트 윌프리드 교회의 목사 보좌(curate, 부제)로 임명되었고, 1585년에는 알포드 자유 문법 학교(Free Grammar School)의 교장이 되었다.[2] 이 무렵, 마버리는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무어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지만, 그녀는 사망했다.[2] 첫 번째 부인의 사망 후 1년 이내에 마버리는 그보다 약 10살 어리고 유명한 노샘프턴 가문 출신인 브리지트 드라이든과 결혼했다.[2] 앤은 이 결혼으로 태어난 15명의 자녀 중 셋째였으며, 그 중 12명이 유년기를 무사히 넘겼다.[3]
허친슨은 아버지의 강한 학문적 열정 덕분에 그 시대 대부분의 여자아이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으며,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도 친밀하게 알게 되었다.[1] 당시 교육은 거의 남학생과 남성에게만 제공되었지만, 마버리가 딸들을 가르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처음 일곱 자녀 중 여섯 명이 딸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의 지배층이 6개 외국어를 구사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예를 보면서 여자아이들도 교육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 있다.[2]
1605년, 허친슨이 15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 중심부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세인트 마틴 빈트리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2] 1610년, 그는 세인트 마틴 빈트리에서 짧은 거리에 있는 세인트 마가렛, 뉴 피시 스트리트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2] 그러나 1611년 2월, 앤이 19세였을 때 아버지는 5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
아버지 사망 1년 후, 21세의 앤 마버리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직물 상인이었던 앨포드 출신의 지인 윌리엄 허친슨과 결혼했다.[2] 부부는 1612년 8월 9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 울노스 교회에서 결혼했고, 곧 고향인 앨포드로 이사했다.[4]
허친슨 부부는 존 코튼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1633년 코튼이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탄압을 피해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자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5] 허친슨은 성령이 자신에게 코튼을 따라 미국으로 가라고 지시했다고 믿었고, "신의 섭리의 증거에 감명을 받았다".[6]
2. 1. 존 코튼을 따르다
허친슨 부부는 보스턴 항구 도시의 세인트 보돌프 교회에서 설교하는 존 코튼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12] 코튼은 허친슨 부부가 결혼한 해에 케임브리지의 에매뉴얼 칼리지에서 튜터로 일한 후 보스턴의 목사로 임명되었다.[12] 그는 27세였지만, 잉글랜드의 주요 청교도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다.[12] 허친슨 부부는 코튼의 설교를 들은 후 날씨와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말을 타고 보스턴으로 자주 여행했다.[12]코튼의 영적인 메시지는 동료 청교도들과 달랐는데,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보다는 "필멸의 인간에게 신성한 은총이 주입되는" 종교적 개종의 순간을 더 강조했다.[12] 앤 허친슨은 "절대적인 은총"에 대한 코튼의 신학에 매료되었고, 이로 인해 "행위"의 가치에 의문을 품고 성령을 "선택된 성도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12] 이는 그녀가 "전능자의 초월적인 권능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는 자"로 인식하도록 했으며, 이브 라플란트에 따르면,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던 여성들에게 이러한 신학은 힘을 실어주었다.[12]

허친슨에게 또 다른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그녀의 집에서 가까운 빌스비 마을에 살고 있던 매형, 젊은 목사 존 휠라이트였다.[12] 코튼과 휠라이트는 개혁가로서 그들의 교구 신자들 사이에서 종교적 부활의 감각을 장려했지만, 그들의 주간 설교는 일부 청교도 신자들의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는 설교를 반복하여 듣고, 성경을 논의하고 토론하며, 기도하기 위해 "은총을 발견한 사람들"의 모임인 비밀 집회의 부상으로 이어졌다.[12] 이러한 모임은 특히 여성들에게 중요했는데, 남성이 지배하는 교회 계층에서 그렇지 않았다면 거부되었을 종교적 지도자 역할을 여성이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12] 허친슨은 코튼과 비밀 집회를 운영하는 다른 여성들에게 영감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하여 청취자들과 최근 설교를 검토하고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제공했다.[12]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의식을 폐지하고 교구민들의 합의를 기반으로 교회를 통치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군주가 임명한 주교를 없애고, 자체 교회 장로(또는 통치자)를 선택하며, 평신도 지도자와 두 명의 목사(한 명은 교리를 담당하는 교사, 다른 한 명은 사람들의 영혼을 담당하는 목사)를 제공하는 것을 선호했다.[11] 1633년까지, 이러한 청교도적 관행에 대한 코튼의 성향은 윌리엄 로드 대주교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국교회의 관행에 따르지 않는 설교와 관행을 억압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11] 그 해에 코튼은 목사직에서 해임되었고 숨어 지냈다.[11] 투옥 위협을 받은 그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배 그리핀 호를 타고 서둘러 뉴잉글랜드로 떠났다. 식민지로 가는 항해 중에 아내는 아이를 낳았고,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시본이라고 지었다.[11]
3. 보스턴 이주와 종교 활동
1634년, 앤 허친슨은 남편 윌리엄 허친슨 및 10명의 자녀들과 함께 그리핀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다.[13] 허친슨 가족은 보스턴에 정착하여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윌리엄 허친슨은 직물 사업으로 성공했고, 앤 허친슨은 산파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도왔다.[13]
존 코튼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허친슨은 뉴잉글랜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코튼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설교로 유명했으며, 허친슨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3]
허친슨은 보스턴에서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을 열었고, 이 모임은 큰 인기를 얻어 남성들도 참여하게 되었으며, 헨리 베인 총독도 참석했다. 허친슨은 이 모임에서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나누었는데, 이는 당시 청교도 사회의 주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3. 1. 청교도 사회와 여성의 역할
앤 허친슨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청교도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충돌했다.[14] 허친슨은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며 청교도 사회의 통념에 도전했다.[14]허친슨은 성별 때문에 억압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가 청교도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당시의 도덕적 관념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허친슨은 발언하는 여성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발언했다. 다시 말해, 그녀는 기성 교회와 정부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인해 박해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3]
허친슨은 "신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하는 열렬한 학자였다. 일반적으로 청교도 정통성의 원칙을 고수했지만, 여성의 평등과 권리에 대해 매우 진보적이고 시대를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청교도와 당시 일반적인 문화의 태도와 상반되었다.[14]
허친슨은 자신의 집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성경 연구와 토론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는 청교도 지식층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5]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종교적 신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미국 인디언의 노예화 등 인종적 편견을 비난했다. 허친슨은 성직자들처럼 성경을 잘 연구했다. 성경에 대해 청교도의 전통적 해석을 가르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했다. 종종 그 영적인 해석은 청교도 주일 설교에서 배운 것과 율법적인 해석을 제외하고는 훨씬 달랐다. 특히 허친슨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대해 표준적인 해석에 항상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청교도에게 중요한 주제였으며 원죄 교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특히 여성에게 비난을 쏟는 방식으로 인용되었고, 청교도 사회의 극단적인 가부장적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14]
허친슨은 여성의 권리 부족과 인디언에 대한 인종적 편견에 대해 강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회적 관심에도 성경 원리의 개인적인 해석을 적용했다. 게다가 청교도의 도덕과 법전의 일부, 그리고 목사의 권위에 대해 솔직하게 이의를 제기했다.[13]
성직자들은 허친슨의 집회에 반대하기 시작했고, 겉으로는 그러한 "비공인" 종교 모임이 신실한 사람들을 혼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점차 그 반대는 솔직한 여성 혐오적인 발언으로 이어졌다. 허친슨은 그녀에 대한 비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비판자들이 여성은 교회 안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성경 구절로 인용했을 때, 그녀는 디도서가 "나이든 여성은 젊은 여성에게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한 구절을 인용하여 답했다.[14]
3. 2. 가정 성경 공부 모임
허친슨은 출산 중인 여성들을 방문하면서 잉글랜드의 비밀 집회와 유사한 방식으로 토론을 이끌었다. 그녀는 곧 코튼의 설교에 대해 논의하고, 그녀의 설명과 해석을 듣고 싶어하는 여성들을 위해 매주 집에서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14] 여성들을 위한 그녀의 모임은 매우 인기를 얻어 남성들을 위한 모임도 조직해야 했고, 일주일에 6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했다.[15] 이 모임은 여성들과 그들의 남편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진지하게 찾도록" 이끌었다.[14]모임이 계속되면서 허친슨은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제시하기 시작했고, 오직 "성령의 직관"만이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끌 것이라고 강조했다.[14] 그녀의 신학적 해석은 식민지의 목사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더 율법적인 견해와 달라지기 시작했고, 모임 참석자는 늘어나 곧 총독 베인까지 포함하게 되었다.[14]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반드시 영혼의 상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그녀의 생각은 상인이나 장인과 같이 종교적 상태보다 직업에 더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14] 식민지의 목사들은 허친슨의 모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이러한 "무허가" 종교 모임이 신자들을 혼란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친슨은 이에 대해 디도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나이 많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14]
허친슨은 "신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하는 열렬한 학자였다. 일반적으로 청교도 정통성의 원칙을 고수했지만, 여성의 평등과 권리에 대해 매우 진보적이고 시대를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청교도와 당시 일반적인 문화의 태도와 상반되었다. 허친슨은 이러한 신념을 솔직하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에 책임을 지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뿐만 아니라 다른 청교도, 특히 목사들과 상당한 긴장 관계를 만들었다.[14]
허친슨은 자신의 집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성경 연구와 토론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는 청교도 지식층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5] 처음에는 친구와 이웃을 초대했고 모두 여성이었다.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종교적 신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미국 인디언의 노예화 등 인종적 편견을 비난했다. 허친슨은 성직자들의 방식대로 성전을 잘 연구했다. 성전에 대해 청교도의 전통적 해석을 가르치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성경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했다. 종종 그 영적인 해석은 청교도 주일 설교에서 배운 것과 율법적인 해석을 제외하고는 훨씬 달랐다. 특히 허친슨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대해 표준적인 해석에 항상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청교도에게 중요한 주제였으며 원죄 교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특히 여성에게 비난을 쏟는 방식으로 인용되었고, 청교도 사회의 극단적인 부계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14]
허친슨은 여성의 권리 부족과 인디언에 대한 인종적 편견에 대해 강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회적 관심에도 성경 원리의 개인적인 해석을 적용했다. 게다가 청교도의 도덕과 법전의 일부, 그리고 목사의 권위에 대해 솔직하게 이의를 제기했기에[13], 이는 나중에 큰 부담이 되었다.
허친슨의 가르침이 퍼져나가 많은 남성을 포함한 새로운 추종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들 중에는 1636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이 된 헨리 베인 경과 같은 남성도 있었다. 집에서 하는 연구 모임의 참가자는 80명에 달해, 지역 교회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14]
4. 반율법주의 논쟁
허친슨의 가르침은 식민지 목사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반율법주의 논쟁(Antinomian Controversy)' 또는 '자유 은총 논쟁(Free Grace Controversy)'으로 불렸다. 허친슨은 성령의 내재를 강조하고, 행위 언약이 아닌 은혜 언약을 주장하며 정통파 목사들과 대립했다.
허친슨은 존 코튼 목사의 영향을 받아, 구원을 얻기 위한 행동보다는 "필멸의 인간에게 신성한 은총이 주입되는" 종교적 개종의 순간을 더 강조했다.[2] 그녀는 성령을 "선택된 성도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그녀가 "전능자의 초월적인 권능에 신비적으로 참여하는 자"로 인식하도록 했다.
허친슨과 그녀의 지지자들은 반율법주의와 파밀리즘 혐의를 받았으나, 이는 그들의 신학과 상반되는 비난이었다. "반율법주의"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법에 반대하거나 반대하는"을 의미하며, 신학적 맥락에서는 "도덕법은 은혜의 법 아래 있는 기독교인에게 구속력이 없다"를 의미한다.[3] 파밀리즘은 16세기의 사랑의 가족이라는 종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성령 아래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했다.[22]
4. 1. 긴장의 고조
1636년, 앤 허친슨은 존 윌슨 목사의 가르침에 반대하며 그의 설교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존 휠라이트 목사와 헨리 베인 총독은 허친슨을 지지하며 정통파 목사들과 갈등을 빚었다. 허친슨의 지지자들은 페쿼트 전쟁 참전을 거부하며 식민지 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14][23]4. 2. 목회자들과의 대립
1636년 10월 25일, 존 코튼을 비롯한 일곱 명의 목사들이 모여 심화되는 불화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들은 허친슨과 보스턴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불러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6]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코튼은 "다른 목사들에게 만족을 주어, 성화의 문제에서 그들 모두와 동의했고, 존 휠라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성화가 칭의를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6]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허친슨이 비밀 집회에서 자신들이 행위 언약을 설교하고 신약의 적절한 목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허친슨은 질문을 받자 한두 명의 목사에게만 대답했을 뿐이며, 강요에 의해 나온 자신의 답변은 사적이고 기밀이라고 믿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 발언은 1년 후 그녀가 식민지에서 추방되는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4. 3. 1637년의 사건들
1637년, 식민지 청교도 성직자들은 앤 허친슨에게 여성의 존엄과 권리에 대한 사악하고 "불쾌한" 생각을 불어넣는 현대의 이제벨(음탕한 여자)이라는 낙인을 찍었다.[14]。그해 헨리 베인 경은 존 윈스럽에게 주지사 자리를 넘겨주었다. 윈스럽은 베인과 달리 허친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녀를 "언덕 위의 도시"(청교도의 특징인 교리)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그는 허친슨의 모임을 "신의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고 매력도 없으며, 여성에게는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23]。 윈스럽 주지사와 종교계는 허친슨의 토론 모임에서의 발언, 특히 "비공인 정보를 바탕으로 성직자에 대한 근거 없는 비판"을 이단으로 규정했다.3월, 정치적 흐름은 자유 은총 옹호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존 휠라이트는 금식일 설교로 모욕과 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근소한 표차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형이 선고되지는 않았다. 5월 선거에서 헨리 베인은 존 윈스럽으로 교체되었고, 허친슨과 휠라이트를 지지하는 다른 보스턴 치안 판사들도 해임되었다. 그해 여름, 베인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정통파는 경쟁자들을 처리할 준비를 마쳤다.
1637년 가을 법정은 11월 2일에 열렸고, 휠라이트에게 추방을 선고하여 14일 이내에 식민지를 떠나도록 명령했다. 허친슨과 휠라이트를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도 재판을 받고 다양한 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앤 허친슨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4. 4. 시민 재판
1637년 11월, 앤 허친슨은 성직자 비방, 사회 분열, 불법 모임 개최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14] 당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는 반율법주의 논쟁으로 인해 종교적,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허친슨은 존 코튼 목사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청교도 주류 신학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허친슨은 자신의 집에서 여성들을 위한 모임을 열고,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적인 토론을 이끌었다. 이러한 모임은 점차 인기를 얻었으나, 식민지 내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결국 재판에 회부되었다.[23]
재판은 존 윈스럽 총독이 주재했으며, 정부 관리와 청교도 목사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허친슨은 당시 46세였고, 15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허친슨은 며칠 동안 법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17]
허친슨의 시민 재판은 종교적 자유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허친슨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에 도전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4. 4. 1. 1일차
존 윈스럽 총독이 재판을 주재했으며, 허친슨은 "성직자들을 비방[중상모략]한" 혐의를 받았다. 윈스럽은 허친슨에게 지역 사회를 분열시킨 의견을 홍보하고 유포하여 "공동체와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혔다"는 혐의와, 시노드에서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계속 개최한 혐의도 제기했다.[14]그러나 법정은 허친슨이 존 휠라이트나 재판을 받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어떤 진술에도 서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소하기가 어려웠다. 윈스럽은 처음 두 가지 기소 내용을 통해 그녀를 식민지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다른 사람들의 공모자로 묘사하려 했고, 다음으로 그녀가 비밀 모임을 개최한 것을 비난했다. 허친슨은 질문 하나하나에 효과적으로 답변을 거부했고, 윈스럽은 그녀가 반역적인 파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기소 가능한 범죄로 전환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토머스 더들리 부총독은 법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기소를 돕기 위해 나섰다. 더들리는 허친슨에게 그녀의 비밀 모임과 다른 공모자들과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했다. 허친슨이 답변하지 않자, 그는 그녀가 성직자들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넘어갔다.[23]

재판의 나머지 부분은 이 마지막 혐의에 할애되었다. 기소 측은 허친슨이 식민지 성직자들에 대해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10월 회의를 증거로 사용하려 했다.[17] 여섯 명의 성직자가 10월 회의에 대한 자신들의 서면 버전을 법정에 제출했고, 허친슨은 그들의 진술의 내용에 동의했다. 그녀의 변론은 자신이 마지못해 사적으로 발언했고, 그 회의의 성직자적인 맥락에서 "거짓이나 진실을 말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18] 그 사적인 모임에서 그녀는 잠언 29장 25절("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을 인용했다.[18] 법정은 그녀가 공개적 진술과 사적 진술을 구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17]
재판 첫날이 끝날 무렵, 윈스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허친슨 부인, 보시다시피 법정은 당신을 당신의 길의 오류를 인정하도록 노력하여 당신을 회개시키려 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어 그것을 숙고하도록 할 것이며, 따라서 당신이 아침에 다시 법정에 출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14] 첫날은 허친슨에게 비교적 잘 진행되었는데, 그녀는 치안 판사들과의 지혜 대결에서 꿋꿋이 버텼다.[23] 전기 작가 이브 라플란테는 "법정에서의 그녀의 성공은 그녀의 판사들을 놀라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지적 도구에 대해 확신을 가졌는데, 이는 주로 그녀가 하나님과 느꼈던 친밀감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14]
4. 4. 2. 2일차
허친슨은 전날 저녁 법률 자문을 받은 듯, 재판 둘째 날 오전에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녀는 장관들이 기밀 유지 의무를 어겼다고 비판하며, 그들이 선서 하에 증언할 것을 요구했다.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허친슨이 장관들을 죄짓게 할 것이라 했지만, 그녀는 "만약 그들이 저를 고발하려 한다면, 저는 그것이 선서 하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했다.[17]보스턴 교회에서 온 증인은 집사 존 코그셸, 평신도 지도자 토머스 레버렛, 그리고 장관 존 코튼이었다. 처음 두 증인은 짧게 증언했지만, 코튼은 광범위하게 질문을 받았다. 코튼은 10월 회의의 많은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했고, 허친슨이 비난받는 발언의 의미를 완화하려 했다. 그는 장관들이 회의에서 허친슨의 발언에 대해 나중에 보였던 것만큼 화를 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더들리는 허친슨이 장관들에게 그들이 신약의 유능한 장관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반복했지만, 코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코튼과 법정 사이에 더 많은 공방이 있었지만, 기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허친슨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판단을 법정에 말했다.
역사가들은 이 발언에 대해 "환희에 찬 충동", "히스테리", "심문의 압박으로 인한 균열", "성령에 사로잡힌"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했다. 허친슨은 법정을 가르치려 했고, 이는 그녀의 성격과 일치했다.
허친슨의 폭로는 법정 모독이자 반역으로 여겨졌다. 코튼은 허친슨의 폭로를 지지하는지 압박받았고, 신학적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존 윈throp은 허친슨의 주장을 이용해 법정을 이끌었고, 많은 청교도는 식민지의 어려움 뒤에 허친슨이라는 파괴적인 인물이 있다고 확신했다. 윈throp은 "우리 모든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그녀를 보고 법정에서 그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려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코딩턴은 "어떤 사람도 판사이자 고발자가 될 수 없다"며, 허친슨이 어긴 법이 없으니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판결을 원했지만, 목사들의 발언을 들어야 했다. 세 명의 목사가 선서를 하고 허친슨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윈throp은 추방을 제안했고, 보스턴 대표들만 반대했다. 허친슨은 "제가 왜 추방되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했지만, 윈throp은 "법정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며 만족합니다."라고 답했다.
4. 4. 3. 평결
허친슨의 발언은 법정 모독과 반역으로 간주되었다.[14] 법정은 허친슨에게 "우리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여자"라는 이유로 추방을 선고했다.[17] 윈스럽은 허친슨을 식민지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그녀의 추방을 정당화했다.재판 과정에서 윈스럽은 허친슨이 "성직자들을 비방[중상모략]한" 혐의 외에도, 지역 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계속 개최하여 "공동체와 교회의 평화를 어지럽혔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허친슨은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소가 어려웠지만, 토머스 더들리 부총독의 도움으로 혐의를 추가하여 기소를 진행하였다.
허친슨은 자신이 사적인 자리에서 마지못해 발언한 것이라고 변론했지만, 법정은 그녀가 공개적 진술과 사적 진술을 구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17] 결국, 허친슨은 이단자이자 악마의 도구라고 불렸고, 법정은 그녀에게 추방을 선고했다.
윈스럽은 이 사건을 "주님께서 고통받는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교회의 지혜롭고 충실한 목사들의 보살핌과 노력을 통해, 시민 권력의 도움을 받아, 이 늙은 뱀의 걸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이요, 우리 눈에 놀랍습니다."라고 요약했다.
4. 5. 구금
허친슨은 시민 재판 이후 가택 연금되었고, 록스버리에 있는 조셉 웰드의 집에 구금되었다.[1] 이곳은 보스턴 자택에서 약 2마일 떨어진 곳이었는데, 겨울 날씨가 혹독했기 때문에 허친슨은 아이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2] 윈throp은 허친슨을 "죄수"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려 했다.[2]허친슨은 여러 목사들의 잦은 방문을 받았다. 이들의 목적은 허친슨의 생각을 바꾸고 그녀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었다.[2] 토머스 셰퍼드는 그녀의 "오류를 수집"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고, 그녀가 위험한 여성이라고 결론 내렸다.[3] 셰퍼드와 다른 목사들은 허친슨의 신학적 오류 목록을 작성하여 보스턴 교회에 제출했고, 교회는 허친슨이 이러한 견해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4]
4. 6. 교회 재판

1638년 3월, 앤 허친슨은 교회 재판에 소환되어 신학적 오류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재판은 장로 토마스 레버렛이 관리했으며, 허친슨에게 제기된 여러 오류들을 읽어주고 9시간 동안 심문했다.[1] 심리 끝에 코튼은 허친슨의 잘못된 믿음이 공동체의 영적 복지를 위협한다고 결론지었다.[2]
코튼은 허친슨의 신학적 사상과 반율법주의자 및 가족주의자들이 연루되었다고 비난받은 행동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허친슨에게 훈계했다.[3] 허친슨은 다음 강연일인 일주일 후에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4]
코튼의 허락으로 허친슨은 존 데이븐포트 목사와 함께 일주일 동안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공식적인 철회를 작성했다.[5] 3월 22일, 허친슨은 회중에게 자신의 철회를 읽고, 영혼과 정신, 육체의 부활, 식민지의 파멸 예언, 목사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했다.[6]
그러나 윌슨은 허친슨이 4개월의 투옥 전에 특정한 신학적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했다.[7] 셰퍼드는 허친슨을 "악명 높은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며 심리를 흔들었고,[8] 코튼은 그녀를 포기했으며, 윌슨은 허친슨을 파문하고 사탄에게 넘겨주며, 이교도이자 세리로 간주한다고 선고했다.[9]
5. 로드아일랜드 이주와 포츠머스 정착
허친슨은 투옥된 후 추방되었고, 지지자들은 식민지를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할 준비를 했다. 1638년 3월 7일, 남편 윌리엄 허친슨을 포함한 일군의 남성들이 윌리엄 코딩턴의 집에 모여 포츠머스 협약을 체결하고 코딩턴을 지도자로 선출했다.[19]
이들은 로저 윌리엄스의 설득으로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근처 아퀴드넥 섬(후에 로드아일랜드로 이름 변경)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코딩턴은 섬을 내러갠셋 족에게서 구입했고, 포카셋 정착지(곧 포츠머스로 개칭)가 설립되었다. 허친슨은 교회 재판 후 4월에 남편을 따라 로드아일랜드로 이주했다.[19]
허친슨 가족은 4월, 눈 속에서 6일 이상 걸어 보스턴에서 로저 윌리엄스의 프로비던스 정착지로 이동한 후, 배를 타고 아퀴드넥 섬으로 갔다. 허친슨은 그곳에서 প্রায় 6개월 만에 남편과 재회했다.[19]
포츠머스 정착 후, 허친슨은 종교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발전시켜, 남편이 치안 판사직에서 사임하도록 설득했다.[19] 1641년, 윌리엄 허친슨은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포츠머스에 묻혔다.[19]
5. 1. 마지막 임신
허친슨은 재판의 스트레스, 겨울 내내의 투옥, 그리고 아퀴드넥 섬으로의 힘든 여정 끝에 1638년 5월에 출산했다. 그녀는 의사 존 클라크가 투명한 포도 한 줌이라고 묘사한 것을 낳았다. 이것은 현재 포도송이 임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45세 이상의 여성에게 가장 자주 발생하는 질환으로, 하나 또는 두 개의 정자가 잘못된 난자를 수정하여 발생한다.[18] 허친슨은 겨울 대부분 동안 비정상적인 쇠약, 욱신거리는 두통, 구토 발작으로 고생했다.[18] 이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녀가 재판 중에 임신했다고 동의한다. 역사가 에머리 배티스는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여 그녀가 그 당시에 전혀 임신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폐경의 심각한 증상을 보였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18] 남편과 재회한 다음 해 4월, 그녀는 임신했지만 포도송이 임신으로 유산했다.[18] 25년 동안 지속적인 임신, 출산, 수유를 겪고, 대가족을 키우는 부담을 안고, 재판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여성은 심각한 폐경기 증상을 겪었을 수 있다.[18]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허친슨의 고통과 심하게 기형된 유아의 조산 및 사산을 겪은 추종자인 메리 다이어의 고통을 비웃었다. 지도자들은 여성들의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분류했다.[19] 윈스럽은 "그녀는 하나가 아니라 30개 정도의 기형적인 출산을 했다"고 썼고, 이어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그녀의 죄에 맞춰 이 심판을 모든 면에서 맞추었는지 보라. 그녀가 기형적인 의견을 내뱉었으니, 그녀는 기형적인 괴물을 낳아야 한다"고 썼다.[20]
5. 2. 정부 내 분열
포츠머스 정착촌은 윌리엄 코딩턴의 독단적인 통치 방식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앤 허친슨은 새뮤얼 고튼과 함께 코딩턴을 비판하는 세력을 지지했다. 1639년 4월, 고튼과 다른 이들이 코딩턴을 몰아내고 윌리엄 허친슨을 새 주지사로 선출했다.코딩턴과 그의 지지자들은 섬 남쪽 끝으로 이동하여 뉴포트 정착촌을 건설했다. 포츠머스는 배심원 재판과 정교 분리를 보장하는 새로운 정부를 채택했다. 1640년 3월 12일, 포츠머스와 뉴포트는 재결합에 합의했고, 코딩턴이 주지사가, 윌리엄 허친슨이 그의 보좌관이 되었다.[19]
6. 뉴네덜란드로의 이주와 죽음
1642년 남편 윌리엄 허친슨이 사망하자, 앤 허친슨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위협을 피해 뉴네덜란드로 이주했다. 허친슨 가족은 로드아일랜드의 스로크모턴, 코넬 가족과 함께 펠햄 만 근처에 정착했다. 이들은 스플릿 록이라는 고대 랜드마크 근처, 현재 뉴욕시의 허친슨 강이 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빌럼 키프트 총독과 원주민 간의 갈등(키프트 전쟁)으로 긴장이 고조된 곳이었다. 허친슨 가족은 내러갠셋 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뉴네덜란드의 시와노이족 사이에서도 안전할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을 수 있다.
허친슨 가족은 제임스 샌즈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었는데, 원주민들은 샌즈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떠나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는 원주민들이 정착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신호였다. 결국 1643년 8월, 시와노이족은 허친슨 가족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앤 허친슨을 포함한 가족 대부분을 살해했다.
6. 1. 죽음

1642년 남편 윌리엄 허친슨이 사망한 후, 앤 허친슨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위협을 피해 뉴네덜란드로 이주했다. 1643년 여름, 허친슨 가족은 7명의 자녀, 사위 1명, 하인 몇 명 등 총 16명과 함께 뉴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스플릿 록이라는 고대 랜드마크 근처, 현재 뉴욕시의 허친슨 강이 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키프트 전쟁으로 인해 원주민과 네덜란드 식민지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곳이었다. 허친슨 가족은 나라간셋 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시와노이족에게도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1643년 8월, 시와노이 전사들이 허친슨 가족의 정착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프랜시스 허친슨, 윌리엄 콜린스, 하인 몇 명, 앤 허친슨과 그녀의 자녀 윌리엄, 캐서린, 메리, 주리엘을 포함한 가족 대부분을 살해하고 머리 가죽을 벗겼다. 집은 불태워졌다. 당시 9살이었던 막내딸 수산나 콜은 블루베리를 따러 나갔다가 스플릿 록의 갈라진 틈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수산나는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몇 년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허친슨의 죽음에 대해 매사추세츠의 반응은 냉혹했다. 토마스 웰드 목사는 "하나님의 손이 이 불행한 여인을 골라내기 위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피터 벌클리 목사는 "그녀의 저주받은 이단과 그녀를 멸망시킨 하나님의 정당한 복수가 그녀의 유혹을 받은 추종자들이 더 이상 그녀의 누룩과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했다.
7. 역사적 영향
앤 허친슨은 종교적 자유와 진보적 사고, 기독교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여러 작가들이 그녀를 숭배, 신화화, 또는 악마화하기도 하는 등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한다.[1] 역사가들은 허친슨의 삶을 여성의 지위, 교회 내 권력 투쟁, 세속 정치 구조 내의 갈등과 같은 틀에서 해석하고 재해석해왔다. 허친슨의 재판과 그에 따른 비난은 그녀를 식민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하거나 악명 높은 영국 여성으로 만들었다.[1]
현대 역사가 마이클 윈쉽에 따르면, 허친슨은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실제로 한 말이나 행동보다는, 존 윈스럽이 자신의 저널과 논쟁 기록에서 그녀를 묘사한 방식 때문에 유명해졌다.[4] 윈스럽은 허친슨을 "지옥에서 태어난 파괴적인 무정부주의의 대리인"으로 묘사하며, 식민지가 겪은 모든 어려움의 원인으로 여겼다.[4] 이는 허친슨에게 전설적인 지위를 부여했지만, 그녀가 상징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19세기 미국에서 허친슨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사로 여겨졌고, 20세기에는 페미니스트 리더로 재평가되었다.[4] 페미니스트 학자 에이미 랭은 허친슨의 진정한 죄는 청교도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주장한다.[2]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의 주 의사당 앞에는 사이러스 댈린이 조각한 앤 허친슨과 어린 수잔나의 동상이 있다. 1922년에 헌정된 이 동상에는 "시민 자유와 종교적 관용의 용감한 옹호자"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3] 이 기념비는 보스턴 여성 유산 트레일에도 소개되어 있다.[3]
허친슨을 기리는 또 다른 기념비는 보스턴 남쪽 매사추세츠 주 퀸시에 있으며, 허친슨 가족이 농장을 소유했던 곳 근처에 세워졌다.[3] 로드아일랜드 주 포츠머스에는 파운더스 브룩 공원에 앤 허친슨 기념비가 있으며, 허친슨의 재판에서 인용된 문구가 새겨진 대리석이 있다.
앤 허친슨은 1994년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
8. 기념 및 유산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의 주 의사당 앞에는 사이러스 에드윈 댈린이 제작한 어린 수잔나와 함께 있는 앤 허친슨의 동상이 있다. 1922년에 헌정된 이 동상의 대리석 페디먼트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3]
이 기념비는 보스턴 여성 유산 트레일에 소개되어 있으며, 댈린은 이 이미지를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에 있는 메이플라워 서약 조인 부조에도 사용했다.
허친슨을 기리는 또 다른 기념비는 보스턴 남쪽 매사추세츠 주 퀸시 빌 스트리트와 그랜드뷰 애비뉴 교차로에 있으며, 허친슨 가족이 농장을 소유했던 곳 근처이다.
로드아일랜드 주 포츠머스 파운더스 브룩 공원에도 앤 허친슨 기념비가 있으며, 공원에는 허친슨 재판에서 인용된 문구가 새겨진 대리석이 있다.
앤 허친슨은 1994년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
뉴욕 남부에서 허친슨의 가장 유명한 이름은 허친슨 강으로, 여성의 이름을 딴 몇 안 되는 강 중 하나이다. 허친슨 강 파크웨이는 이 강을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펠햄과 이스체스터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있다.
로드아일랜드 주 포츠머스에서는 앤 허친슨과 메리 다이어를 파운더스 브룩 공원에서 앤 허친슨/메리 다이어 기념 허브 가든으로 기념하고 있다. 이곳은 경치 좋은 폭포와 포츠머스 초기 정착촌을 기리는 역사적인 표지판이 있는 약초 식물원이다. 이 정원은 두 여성의 후손인 예술가이자 허벌리스트인 마이클 스티븐 포드가 만들었다. 기념관은 뉴포트 지역 단체인 앤 허친슨 기념 위원회(회장: 뉴포트 예술가 발레리 드브룰)의 풀뿌리 노력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단체는 앤 허친슨의 친구들로 불린다. 앤의 세례일인 7월 20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마다 포츠머스 기념관에서 그녀의 삶과 아퀴드넥 섬 여성들의 지역 식민지 역사를 기념한다. 로드아일랜드 대학교의 저학년 기숙사인 허친슨 홀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9]
8. 1. 문학 작품
허친슨은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 글씨》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5] 역사학자 에이미 랭은 헤스터 프린이 초기 청교도 연대기 작가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앤 허친슨의 화신이라고 썼다.[7] 랭은 헤스터가 현실에서든 적어도 영적으로든, 정통 청교도들이 허친슨에 대해 말한 내용과 같다고 지적한다.[7] 허친슨은 비유적으로 청교도 공동체를 유혹한 이단자였던 반면, 호손의 소설에서 헤스터 프린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공동체 목사를 유혹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이 나타난다.[7][8]윌리엄 깁슨(극작가)의 1980년 연극 《선량한 피조물》은 앤 허친슨과 존 윈스럽 주지사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 연극에는 존 코튼 목사, 헨리 베인 2세 주지사, 그리고 훗날 퀘이커교도 순교자가 되는 메리 다이어와 같은 역사적 인물도 등장한다.[6]
8. 2. 사면
198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는 앤 허친슨에게 사면을 발급하여, 350년 전 윈throp 주지사가 내린 추방 명령을 철회했다.8. 3. 가족
Anne영어과 William Hutchinson영어 부부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보스턴에서 성장했다.[9] 허친슨의 후손 중에는 미국의 대통령, 정치인, 예술가 등 저명한 인물들이 많다.[10]
허친슨 부부의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세례일 | 사망일/기타 |
---|---|---|
에드워드 | 1613년 5월 28일 | 필립 왕의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 |
수산나 | 1614년 9월 4일 | 1630년 앨퍼드에서 페스트로 사망 |
리처드 | 1615년 12월 8일 | 1634년 보스턴 교회에 입교했지만 영국으로 돌아감 |
페이스 | 1617년 8월 14일 | 1651년경 사망, 토마스 새비지와 결혼 |
브리짓 | 1618/9년 1월 15일 | 1698년까지 사망, 존 샌포드와 결혼 후 윌리엄 필립스와 재혼 |
프랜시스 | 1620년 12월 24일 | 뉴네덜란드 학살에서 사망 |
엘리자베스 | 1621/2년 2월 17일 | 1630년 앨퍼드에서 페스트로 사망 |
윌리엄 | 1623년 6월 22일 | 유아기에 사망 |
사무엘 | 1624년 12월 17일 | 보스턴에서 거주, 결혼하여 자녀를 둠 |
앤 | 1626년 5월 5일 | 윌리엄 콜린스와 결혼, 뉴네덜란드에서 어머니와 함께 학살됨 |
메리, 캐서린, 윌리엄, 주리엘 | (각각) 1627/8년 2월 22일, 1629/30년 2월 7일, 1631년 9월 28일, 1635/6년 3월 13일 | 1643년 늦여름 인디언 학살에서 사망 |
수산나 | 1633년 11월 15일 | 1643년 인디언의 공격에서 생존, 존 콜과 결혼 |
허친슨의 형제자매 중에서는 막내 여동생인 캐서린만이 리처드 스콧의 아내로서 뉴잉글랜드로 왔다. 캐서린은 남편과 함께 청교도, 침례교, 퀘이커교도였으며, 퀘이커교 선교 활동으로 귀가 잘린 크리스토퍼 홀더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보스턴에서 채찍질을 당했다.[3]
앤 허친슨의 후손 중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H. W. 부시, 조지 W. 부시 대통령[4]과 스티븐 A. 더글러스, 조지 W. 로니, 밋 롬니 대통령 후보[5], 로드아일랜드 및 프로비던스 플랜테이션 식민지 지사 펠레그 샌포드[6], 대법원장 멜빌 웨스턴 풀러와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영국 대법관 존 싱글턴 코플리 주니어(초대 로트 린드허스트), 하버드 대학교 총장 찰스 윌리엄 엘리엇, 배우 테드 댄슨, 음악가 케이트린 니 도노반, 오페라 가수이자 사교계 명사 마담 릴리 페이 몰턴 드 헤게르만-린덴크론 등이 있다. 그녀의 증손자 토머스 허친슨은 보스턴 차 사건 당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왕당파 지사였다.[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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