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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로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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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야노 상점을 설립하여 트럭 판매를 시작으로 다이소 산업을 창업한 기업가이다. 1977년 모든 상품을 100엔에 판매하는 정책을 도입하여 일본에서 단일 가격 모델을 채택한 최초의 소매업체 중 하나가 되었고, 석유 파동 이후 일본 소비 문화 변화와 맞물려 성공을 거두었다. 1987년 100엔 다이소를 설립하고 1991년에는 첫 직영 매장을 열었으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25개국에 진출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2024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1달러 숍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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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로타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 이름고로 구리하라
출생일1943년 4월 19일
출생지베이핑, 중국
사망일2024년 2월 12일
사망지히가시히로시마, 일본
국적일본
직업사업가
참고 자료

2. 창업자 야노 히로타케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29세에 야노 상점을 설립하여 트럭을 이용해 상품을 판매했다.[2] 1977년 회사명을 다이소산업으로 변경하고 모든 상품 가격을 100엔으로 통일했다. 여러 상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1]

이는 일본에서 단일 가격 모델을 채택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중반 석유 위기와 경기 침체 이후 일본 소비 문화 변화와 맞물려 다이소는 성공을 거두었다.[5]

1987년 야노는 100엔 다이소 회사를 설립했고, 1991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첫 직영 매장을 열었다.[1][5][2]

야노는 20대에 인수한 장인의 어업 사업 파산 등 여러 실패를 경험했지만,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했습니다."라고 말하며 현재를 즐기는 태도를 보였다.[1] 그는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재능도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6]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야노 히로타케는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구리하라 코로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2] 형 다섯 명과 누이 세 명이 있는 집안의 다섯째 아들이었다.[1] 아버지와 두 형제는 의사였다.[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야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히가시히로시마로 돌아왔다.[2] 야노는 히로시마에 있는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권투를 시작하여 히로시마 현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64년 도쿄 올림픽 선수 선발 캠프에 참가했는데,[2] 그곳에서 그의 상대 중 한 명은 아마추어 페더급 챔피언이자 올림픽 출전 후보였던 가와이 테쓰로였다.[3]

야노의 아버지는 그가 과학이나 공학 관련 과목을 공부하여 좋은 직업을 얻지 않으면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스포츠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3] 16개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진 후 주오 대학교 야간부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3] 1967년 주오 대학교 이공학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3][2]

2. 2. 9번의 이직과 사업 실패

주오 대학교 이공학부를 졸업했지만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3][2] 졸업 후, 아내와 함께 장인이 운영하던 부시리 양식 사업을 인수했으나, 3년 만에 파산했다.[1][2] 야노와 그의 아내, 어린 아들은 히로시마현을 떠나 도쿄야반도주하였다.[1][2]

이후, 야노는 여러 가지 잡일을 했다.[2] 백과사전 판매원으로 3개월 동안 일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1] 빚을 갚기 위해 볼링장과 폐지 및 종이 재활용 회사에서 일했다.[1][2] 가족은 히로시마로 돌아왔고, 야노는 이동식 판매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 그는 형의 전속 운전사, 매형이 경영하는 볼링장, 도로 표지판 설치, 일용직 육체 노동 등 총 9번의 이직을 거듭했다.

2. 3. 다이소 창업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29세에 '야노 상점'을 창업하여 트럭을 이용한 이동식 잡화 판매를 시작했다.[20] 1977년 회사명을 '다이소산업'으로 변경하고 모든 상품을 100엔에 판매하는 균일가 정책을 도입했다.[20] 이는 야노 히로타케와 그의 아내가 다양한 상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작업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20]

100엔 균일가 정책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경기 침체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100엔 균일가 상품에 크게 호응했다.[20] 1987년 야노 히로타케는 '100엔숍 다이소'를 설립했고,[20] 1991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첫 직영 매장을 열었다.[20]

2. 4. 경영 철학

야노 히로타케는 성공한 기업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독특하고 겸손한 경영 철학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을 "재능도 운도 없는 인간"이라고 표현하며, "운도 실력도 없는 나에게는 계속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끈기와 노력을 강조했다.[1]

"1엔이라도 이익이 나면 된다. 100개 팔면 100엔이 된다"는 말처럼, 그는 이익을 내는 것에 대한 절박함을 가지고 사업에 임했다. "매입은 격투기다", "손님은 잘 모르겠다"와 같은 발언에서 그의 사업에 대한 진지함과 끊임없는 고민을 엿볼 수 있다.[17]

야노 히로타케는 자신을 "머리가 나쁘고, 얼굴도 못생겼다"고 표현하며,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는 나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다.

경쟁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세리아에는 점포에서도 상품에서도 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 5. 별세

2024년 2월 12일, 심부전으로 별세하였다.[4] 향년 80세. 부고는 같은 달 19일에 알려졌다. 사후 정오위 훈장 및 욱일중수장이 추서되었다.[13]

3. 다이소의 성장과 발전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29세에 야노 상점(矢野商店)을 설립하여 트럭으로 물건을 팔고 이동식 진열대에 전시했다.[2] 1977년 회사명을 다이소 산업(大創産業)으로 변경하고 모든 상품 가격을 100엔으로 통일했다.[1] 이는 가격표 부착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석유 위기 이후 일본 소비자 문화 변화와 맞물려 성공으로 이어졌다.[5]

1987년 야노는 100엔 다이소 회사를 설립했고,[1][5][2] 1991년 가가와현(香川県) 다카마쓰시(高松市)에 첫 직영점을 열었다.

3. 1. 일본 내 성장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29세에 야노 상점을 설립하여 트럭으로 상품을 판매하고 이동식 진열대에 전시했다.[2] 1977년 회사명을 다이소 산업으로 변경하고 모든 상품 가격을 100엔으로 통일했다.[1] 이는 가격표 부착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석유 위기 이후 일본 소비자 문화 변화와 맞물려 성공으로 이어졌다.[5]

1987년 야노는 100엔 다이소 회사를 설립했고,[1][5][2] 1991년 가가와현(香川県) 다카마쓰시(高松市)에 첫 직영점을 열며 체인점 전개를 시작했다. 저렴한 임대 건물에 점포를 내고, 상품 수로 점포 크기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100엔숍은 버블 경제 붕괴 후 장기 불황 시기에 급성장하여 일본의 새로운 유통 형태로 자리 잡았다. 다이소는 "100엔의 고급품"을 판매하며 소비자를 사로잡았고, 대형 할인점의 부진한 매장을 대체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이소는 폭발적인 점포 확장을 했다. 1995년 연매출 233억 엔, 1998년 818억 엔을 기록했고, 1994년 300개였던 점포는 1998년 1000개를 돌파했다. 1999년 연매출 1000억 엔, 2000년 2000억 엔을 돌파하며 "'99 벤처 오브 더 이어(주식 미상장 부문)"를 수상했다.

다이소의 성장은 100엔 균일 가격이라는 명확한 회계와 생활 잡화 중심의 상품 구성이 소비자에게 지지를 얻은 결과였다. "백엔(百均)"이라는 디플레이션 경제를 상징하는 소매업(小売業) 업태를 구축하며 일본에 100엔숍을 정착시켰다.

3. 2. 한국 진출과 성공

야노 히로타케는 2001년 '아성다이소'라는 이름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6] 1970년대 중반 석유 위기 이후, '가성비'를 중시하는 한국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빠르게 성장했다.[5] 다이소는 현재 한국 내 대표적인 균일가 매장으로 자리 잡았다.

3. 3. 글로벌 확장

야노 히로타케일본어는 2001년 대만에 진출하면서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6] 이후 전 세계 25개국에 진출하여 글로벌 균일가 유통 기업으로 성장했다.[6]

4. 다이소의 사회문화적 영향

야노 히로타케는 1972년 29세에 '야노 상점'을 설립하여 트럭으로 상품을 판매하고 이동식 나무 스탠드에 진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20]

1977년에는 회사명을 '다이소공업'으로 변경하고 모든 상품의 가격을 100엔으로 통일했다. 이는 상품마다 가격표를 붙이는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야노 히로타케는 일본에서 균일가 모델을 처음 도입한 소매업체 중 하나로, 석유 위기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한 일본 소비 문화 변화와 맞물려 회사의 성공을 이끌었다.[20]

1987년 야노는 '100엔 다이소'를 설립했고, 1991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첫 직영 매장을 개점했다.

5. 수상


  • 2000년, 기업가 네트워크・기업가 클럽 주최 연간 우수 기업가상 수상.[10]
  • 2019년, EY 올해의 젊은 기업가 일본 국가상 수상.[10]

참조

[1] 웹사이트 Daiso – The Story Behind the ¥100 Phenomenon {{!}} Business https://www.tokyowee[...] 2022-01-08
[2] 웹사이트 The Founder of Daiso: Hirotake Yano - 矢野 博丈 https://www.gpc-gr.c[...] 2022-01-08
[3] 웹사이트 100 Yen Shop King: Chuo University's Ashita-no Joe? : People : Chuo Online : YOMIURI ONLINE https://yab.yomiuri.[...] 2022-01-08
[4] 뉴스 100円ショップ「ダイソー」大創産業の創業者、矢野博丈さん死去 https://www.chugoku-[...]
[5] 뉴스 100 yen at a time... Vancouver Sun 2017-07-07
[6] 논문 King of the mall https://www.proquest[...] 2001-08-30
[7] 뉴스 A yen for cheapness; Discount retailing 2016-10-08
[8] 웹사이트 夜逃げ、火事、脳梗塞。ダイソー矢野博丈の人生と成功 https://forbesjapan.[...] 2022-01-09
[9] 웹사이트 ダイソー創業者・矢野博丈が前言撤回して息子を社長にした理由 https://diamond.jp/a[...] 2023-07-07
[10] 웹사이트 Country winner Japan https://www.ey.com/e[...] 2022-01-09
[11] 뉴스 生きて 大創産業創業者 矢野博丈さん(1943年~) <13> 異色の経営 売り上げは客が決める https://www.chugoku-[...] 中国新聞社 2024-02-21
[12] 뉴스 生きて 大創産業創業者 矢野博丈さん(1943年~) <15> 会長を退任 困っている人を手助け https://www.chugoku-[...] 中国新聞社 2024-02-21
[13] 간행물 『官報』第1187号10頁 2024-03-25
[14] 웹사이트 Hirotake Yano, Japanese billionaire founder of 100-yen chain Daiso, dies at 80 https://www.cnn.com/[...] 2024-02-21
[15] 뉴스 Daiso: Billionaire founder of Japanese discount store dies https://www.bbc.com/[...] 2024-02-21
[16] 웹사이트 「値札をつけるのが面倒だから100円で売ろう」 ダイソー創業者・矢野博丈さん死去 80歳 https://www.chosunon[...] 2024-02-21
[17] 웹사이트 早川さや香のプロフェッショナルの唯言 矢野博丈氏(株式会社大創産業 代表取締役) https://c.filesend.t[...] 2009-11-09
[18] 웹사이트 大創産業、創業来初の社長交代 次男の矢野靖二副社長が昇格  :日本経済新聞 https://www.nikkei.c[...]
[19] 웹사이트 安くても高品質!100均の王者が登場 唯一無二の薄利多売ビジネス https://www.tv-tokyo[...] 2018-01-18
[20] 뉴스 100 yen at a time... Vancouver Sun 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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