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자키 이에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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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자키 이에하루는 분로쿠 3년(1594년)에 태어나, 아버지를 이어 와카사 번주를 거쳐 비추, 아마쿠사, 마루가메 번주를 역임한 인물이다.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하고, 축성에도 능하여 오사카 성, 에도 성 등의 축성에 참여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아마쿠사에서 부흥을 이끌었으며, 마루가메 번에서는 성을 축조하고 성하 마을을 정비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648년 마루가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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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이에하루 | |
---|---|
기본 정보 | |
씨명 | 야마자키 이에하루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분로쿠 3년 (1594년) |
사망 | 게이안 원년 3월 17일 (1648년5월 9일) |
이명 | 사콘 (통칭) |
계명 | 게이암인덴 쇼케이유가쿠다이고지 |
묘소 | 가가와현마루가메시 남조정의 주가쿠인 교토부교토시기타구 무라사키노다이토쿠지정의 다이토쿠지고바이인 |
관위 | 종5위 하가이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에미쓰 |
번 | 이나바와카사 번 번주, 빗추나리와 번 번주, 히고도미오카 번 번주, 사누키마루가메 번 번주 |
씨족 | 오미 야마자키 씨 |
부모 | 아버지: 야마자키 이에모리 어머니: 측실 |
형제자매 | 이에하루 야마자키 히사이 아카다 이에나가 이에마사 곤베에 여자 (한나이 고안 정실) |
배우자 | 이케다 나가요시 양녀 기노시타 가쓰토시 딸 지코인 |
자녀 | 도시이에 여자 (고리키 마사후사 정실 후 이혼) 도요하루 여자 (야부 쓰구타카 정실) 히로이에 여자 (한나이 우안 정실) 여자 (야마자키 쓰네이에 정실) 가쓰마사 |
관직 계승 정보 | |
와카사 번 번주 (오미 야마자키가) | 전임: 야마자키 이에모리 후임: 돗토리 번에 병합 (이케다 기요사다) 대수: 2 임기: 1614년 ~ 1617년 |
나리와 번 번주 (오미 야마자키가) | 후임: 미즈노야 가쓰타카 임기: 1617년 ~ 1638년 |
도미오카 번 (아마쿠사 번) 번주 (오미 야마자키가) | 후임: 막부령 (도다 다다마사) 임기: 1638년 ~ 1641년 |
마루가메 번 번주 (오미 야마자키가) | 후임: 야마자키 도시이에 임기: 1641년 ~ 1648년 대수: 1 |
2. 출신
분로쿠 3년(1594년), 당시 셋쓰 국 산다성 성주였던 '''야마자키 이에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케다 쓰네오키의 딸이자 덴큐인'''의 친자가 아닌 측실 소생이다. 정실은 인바 국 돗토리번 초대 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양녀'''(사실은 나가요시의 동생이자 비젠 국 오카야마번 가로인 카타기리 이케다가 초대 당주 이케다 나가마사의 딸)이다. 계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의 조카 '''기노시타 가쓰토시의 딸・지코인'''이다.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아버지 이에모리가 사망하자 이나바 국(因幡国) 와카사 번 2만 2,900석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해 말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자 나카노시마에 진을 쳤으며, 이 전투에서 친동생 히사이에가 전사했다.[1]
3. 생애
다음 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정실의 사촌 형인 하리마 히메지 번주 이케다 도시타카 부대에 속해 싸워 수급 6개를 얻는 공을 세웠다.[1]
겐나 3년(1617년), 이케다 도시타카의 적자 이케다 미쓰마사가 어린 나이를 이유로 이나바 국(因幡国) 돗토리 번 32만 5,000석에서 감봉 전봉되자, 오사카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비추 국(備中国) 나리와 번 3만 5,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이때 의형인 이나바 국(因幡国) 돗토리 번주 이케다 나가유키도 나리와 인접한 비추 국(備中国) 마쓰야마 번 6만 5,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1]
나리와 번주 시대에 이에하루는 막부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겐나 5년(1619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개역될 때 이케다 나가유키와 함께 빈고 국(備後国) 미하라 성을 수비했다. "축성의 명수"로 불린 이에하루는 겐나 6년(1620년) 오사카 성 축성 공사에서 천수각·혼마루·니노마루의 석축 구축에 종사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오사카 성 천수각 석축에는 야마자키 가문의 각인이 새겨진 석축이 있으며, 축성 공사에서 나온 폐석은 나카노시마의 기초로 재이용되었다. 이 때문에 나카노시마에는 에도 시대 동안 야마자키 가문의 오사카 저택이 있었다.[1]
간에이 11년(1634년), 이요 국(伊予国) 마쓰야마 번주 가모 다다토모가 사망하여 개역되자 마쓰야마 성의 재번을 맡았다. 간에이 13년(1636년)에는 에도 성 외호 보수(마루노우치 1초메 가짓바시 부근)에서 친척인 이케다 미쓰마사를 조두로 하는 석축 방 4조에 속해 보수를 담당했다. 그 후 이 석축은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으로 옮겨져 야마자키 가문의 각인이 새겨진 석축을 볼 수 있다.[1]
이에하루는 비령의 아사쿠치 군 렌지마의 신전 개발을 적극 추진하여 막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렌지마는 차남 야마자키 도요하루가 다이묘 하타모토(후 교대 기합 표면 어례중)로서 나리와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야마자키 가문의 영지가 되었고, 에도 시대 동안 신전 개발이 성공하여 나리와령이 막말에 유신 입번하는 계기가 되었다.[1]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를 비롯한 막부 중신들의 신임을 얻은 이에하루는 시마바라의 난 직후인 간에이 15년(1638년), 히고 국 아마쿠사(도미오카) 4만 2,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난 이후 황폐해진 아마쿠사에서 도미오카 성 재건, 영민 복귀, 신전 개발 등 부흥을 지휘했다.[1]
간에이 18년(1641년) 9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사누키 국 마루가메 번 5만 3,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입국 당시 사찰을 숙소로 사용했으나, 간에이 20년(1642년) 폐성된 마루가메 성의 신성 조영을 계획하여 허가받았다. 막부는 세토 내해의 요충지로서 축성의 필요성을 느껴 이에하루에게 백은 300관을 주고 산킨코타이를 면제했다. 이에하루는 축성 경험을 살려 마루가메 성 축성을 시작하고 성하 마을을 정비하여 오늘날 마루가메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게이안 원년(1648년) 3월 17일, 마루가메 성 완성을 보지 못하고 55세로 사망했다. 마루가메 성 축성 공사는 야마자키 가문이 마루가메를 떠난 후 교고쿠 다카카즈까지 이어져 만지 3년(1660년)에 완성되었다.[2]
3. 1. 가독 상속과 오사카 전투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아버지 이에모리가 사망하자 이나바 국(因幡国) 와카사 번 2만 2,900석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해 말 오사카 겨울 전투가 발발하자 나카노시마에 진을 쳤다. 이 전투에서 친동생 히사이에가 전사했다.[1]
다음 해인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정실의 사촌 형인 하리마 히메지 번주 이케다 도시타카 부대에 속해 싸워 수급 6개를 얻는 공을 세웠다.[1]
3. 2. 나리와 번주 시대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아버지 이에모리의 사망으로 이나바 국(因幡国) 와카사 번 2만 2,900석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말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나카노시마에 진을 쳤으며, 이 전투에서 친동생 히사이에가 전사했다. 다음 해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정실의 사촌 형인 하리마 히메지 번주 이케다 도시타카 부대에 속해 싸워 수급 6개를 얻는 활약을 했다.[1]
겐나 3년(1617년), 이케다 도시타카의 적자 이케다 미쓰마사가 어린 나이를 이유로 이나바 국(因幡国) 돗토리 번 32만 5,000석에서 감봉 전봉되자, 오사카 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비추 국(備中国) 나리와 번 3만 5,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이때 의형인 이나바 국(因幡国) 돗토리 번주 이케다 나가유키도 나리와 인접한 비추 국(備中国) 마쓰야마 번 6만 5,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1]
나리와 번주 시대에 이에하루는 막부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겐나 5년(1619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개역될 때 이케다 나가유키와 함께 빈고 국(備後国) 미하라 성을 수비했다. "축성의 명수"로 불린 이에하루는 겐나 6년(1620년) 오사카 성 축성 공사에서 천수각·혼마루·니노마루의 석축 구축에 종사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오사카 성 천수각 석축에는 야마자키 가문의 각인이 새겨진 석축이 있으며, 축성 공사에서 나온 폐석은 나카노시마의 기초로 재이용되었다. 이 때문에 나카노시마에는 에도 시대 동안 야마자키 가문의 오사카 저택이 있었다.[1]
간에이 11년(1634년), 이요 국(伊予国) 마쓰야마 번주 가모 다다토모가 사망하여 개역되자 마쓰야마 성의 재번을 맡았다. 간에이 13년(1636년)에는 에도 성 외호 보수(마루노우치 1초메 가짓바시 부근)에서 친척인 이케다 미쓰마사를 조두로 하는 석축 방 4조에 속해 보수를 담당했다. 그 후 이 석축은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으로 옮겨져 야마자키 가문의 각인이 새겨진 석축을 볼 수 있다.[1]
이에하루는 비령의 아사쿠치 군 렌지마의 신전 개발을 적극 추진하여 막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렌지마는 차남 야마자키 도요하루가 다이묘 하타모토(후 교대 기합 표면 어례중)로서 나리와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야마자키 가문의 영지가 되었고, 에도 시대 동안 신전 개발이 성공하여 나리와령이 막말에 유신 입번하는 계기가 되었다.[1]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를 비롯한 막부 중신들의 신임을 얻은 이에하루는 시마바라의 난 직후인 간에이 15년(1638년), 히고 아마쿠사(도미오카) 4만 2,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난 이후 황폐해진 아마쿠사에서 도미오카 성 재건, 영민 복귀, 신전 개발 등 부흥을 지휘했다.[1]
간에이 18년(1641년) 9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사누키 국 마루가메 번 5만 3,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입국 당시 사찰을 숙소로 사용했으나, 간에이 20년(1642년) 폐성된 마루가메 성의 신성 조영을 계획하여 허가받았다. 막부는 세토 내해의 요충지로서 축성의 필요성을 느껴 이에하루에게 백은 300관을 주고 산킨코타이를 면제했다. 이에하루는 축성 경험을 살려 마루가메 성 축성을 시작하고 성하 마을을 정비하여 오늘날 마루가메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게이안 원년(1648년) 3월 17일, 마루가메 성 완성을 보지 못하고 55세로 사망했다. 마루가메 성 축성 공사는 야마자키 가문이 마루가메를 떠난 후 교고쿠 다카카즈까지 이어져 만지 3년(1660년)에 완성되었다.[2]
3. 3. 아마쿠사 번주 시대
1638년(간에이 15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히고 국 아마쿠사(도미오카) 4만 2,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당시 아마쿠사는 난 직후라 영내의 20~30%가 황무지일 정도로 황폐했다.[1] 이에하루는 도미오카 성 재건, 흩어진 영민 복귀, 신전 개발 등을 지휘하며 부흥에 힘썼다.[1]
3. 4. 마루가메 번주 시대와 죽음
게이초 19년(1614년) 10월, 아버지 이에모리가 사망하여 이나바 국(因幡国) 와카사 번 2만 2,900석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나카노시마에 진을 쳤고, 이 전투에서 친동생 히사이에가 전사했다. 다음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이케다 도시타카 부대에 속해 싸워 공을 세웠다.[1]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히고 국 아마쿠사(도미오카) 4만 2,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당시 아마쿠사는 황폐했지만, 이에하루는 도미오카 성 재건, 영민 복귀, 신전 개발 등 부흥을 이끌었다.[1]
간에이 18년(1641년) 9월, 사누키 국 마루가메 번 5만 3,000석으로 가증 전봉되었다. 이듬해 폐성이었던 마루가메 성 재건을 계획하고 허가받았다. 막부는 세토 내해 요충지로서 축성 필요성을 느껴 이에하루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산킨코타이를 면제했다. 이에하루는 마루가메 성 축성을 시작하고 성하 마을을 정비하여 현재 마루가메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게이안 원년(1648년) 3월 17일, 성 완성을 보지 못하고 55세로 사망했다. 마루가메 성 축성은 교고쿠 다카카즈 때인 만지 3년(1660년)에 완성되었다.[2]
4. 혼인 관계와 계보
분로쿠 3년(1594년), 셋쓰 국 산다성 성주였던 '''야마자키 이에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실 '''덴큐인'''(미노 국 오가키성 성주 이케다 쓰네오키의 딸)의 친자가 아닌 측실의 소생이다.
- 아버지: '''야마자키 이에모리''' (1567-1614)
- 어머니: 측실
- 정실: 이즈모 국 돗토리번 초대 번주 '''이케다 나가요시'''의 양녀 (사실은 나가요시의 동생이며 비젠 국 오카야마번 가로인 카타기리 이케다 가문 초대 당주 이케다 나가마사의 딸)
- 계실: 가인 (전 빗추 국 아시모리번 주군) '''기노시타 가쓰토시'''의 딸・지코인
이러한 혼인 관계를 통해, 빗추 국 마쓰야마번 번주 이케다 나가유키, 다케베 이케다가(모리데라 이케다가) 4대 당주 이케다 나가마사, 하타모토(지행 3,000석) 이케다 나가요리, 하타모토 요리아이세키(지행 6,000석) 이케다 나가카타, 오카야마번의 가로(카타기리 이케다가 제2대 당주) 이케다 나가아키, 히타치 국 미토번 번주 다케다 노부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남), 공가 아노 기미요시 등과 의형제 관계가 되었다. 종제(사촌)로는 탄바 국 기요토미번 번주 미야기 도요쓰구가 있었다. 또한, 사위로는 공가 다이나곤 야부 쓰구타카, 히젠 국 시마바라번 번주 고리키 다다후사의 삼남이자 하타모토인 고리키 마사후사(후에 이혼)가 있었다.
고리키 다다후사는 이에하루와 마찬가지로 시마바라의 난 부흥을 명령받아 히젠 국 시마바라번으로 이봉된 인물로, 같은 시기에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부흥에 관여한 인연으로 혼인하였다. 고리키 다다후사의 손녀는 이에하루의 의조카에 해당하는 곤다이나곤 아노 사네후지의 정실이 되었으며, 차남 도요하루 종제의 정실에 해당한다.
4. 1. 자녀
- 장남: 야마자키 토시이에(1617년 ~ 1651년)
- 장녀: 타카라키 마사후사(시마바라번 주군 타카라키 타다후사의 삼남)의 정실[3] (이후 이혼)
- 차남: 야마자키 토요하루(1619년 ~ 1701년) - 1657년에 마루가메번 야마자키 가문이 후사가 끊어진 후, 나리와령 5,000석의 다이신 하타모토(이후 코다이요리아이 오모테무키 고레이슈)로서 명적을 상속.
- 차녀: 다이나곤 야부 츠구타카 정실
- 삼남: 야마자키 히로이에
- 삼녀: 나카이 우안 정실
- 사녀: 야마자키 오쿠라 츠네이에 (오카야마번 이케다가 가신) 정실[4]
- 사남: 야마자키 카츠마사 (1648년, 아버지 이에하루의 유령 중 1,000석을 분지받았으나 다음 해 사망. 1,000석은 형 토시이에에게 환부됨.)[5]
참조
[1]
웹사이트
おかやまゆかりの江戸城外堀石垣のある小石川後楽園 - 岡山県ホームページ(東京事務所)
https://www.pref.oka[...]
2021-03-28
[2]
웹사이트
山崎家文書
https://www.city.tak[...]
2021-03-21
[3]
웹사이트
画像表示 - SHIPS Image Viewer
https://clioimg.hi.u[...]
2020-08-19
[4]
웹사이트
画像表示 - SHIPS Image Viewer
https://clioimg.hi.u[...]
2020-08-19
[5]
웹사이트
画像表示 - SHIPS Image Viewer
https://clioimg.hi.u[...]
20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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