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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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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약현성당은 1892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서울 최초의 가톨릭 성당이다. 1891년 한옥 양식의 건물에서 시작된 신자 공동체는 이승훈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1886년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에 의해 새로운 성당이 건립되었다. 십자형 건물로, 1998년 방화로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되었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절충된 건축 양식을 특징으로 하며,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순교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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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현성당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교회 정보
이름약현성당
로마자 표기Yak hyeonseongdang
한자 표기藥峴聖堂
위치서울특별시
교단로마 가톨릭교회
문화재 지정사적
지정 날짜1977년 11월 22일
바닥 면적1309m2
약현성당
면적1,309m2
역사적 배경
건립 년도1892년
중요성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물

2. 역사

약현성당의 신자 공동체는 1891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반석방(반석방|盤石坊한국어)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된 이승훈의 집터에 세워졌다. 신자 수가 늘면서 기존 한옥 건물이 좁아지자 더 큰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2]

새로운 성당 건물은 1886년 한국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결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코스트 신부(Fr. Eugene Jean Georges Coste)에 의해 1892년에 건립되었다.[4]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서양식 건물이었으며, 서울 최초의 가톨릭 성당 건물이었다.[2][5] 건물 형태는 십자형이다.[1] 규모는 12m x 32m이다.[1]

2. 1. 건립 배경

조선 선조·광해군연경(燕京) 사신을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천주교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條約) 체결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천주교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서울 지역 천주교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1887년 순랫골[巡和洞]에 강당을 짓고 일반 서민을 교육하였다. 이 강당의 이름이 약현성당이었는데, 성당이 위치한 언덕의 이름이 서대문 밖 약현(藥峴)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그 후 신자 공동체가 1891년에 설립되었는데, 처음에는 한옥 양식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반석방(반석방|盤石坊한국어)이라 불렸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된 이승훈의 집터였다.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기존 건물이 좁아지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 코스트(E. G. Coste, 한국명 고의선) 신부의 주도로 새로운 성당 건립이 추진되었다.[2][4]

2. 2. 건립 과정

조선교구가 독립하고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서울의 천주교 신자 수가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887년, 서민 교육을 위한 강당을 짓고 약현성당이라 불렀다. 이후 정가밀로 신부가 성당 건물을 짓기 위해 대지를 구입했다.

1891년 10월 27일, 성당 건축의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되었다. 이 장소는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과 인접하고,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천주교 박해 때 44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곳과 가까웠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프랑스 신부인 코스트(E. G. Coste, 한국명: '''고의선''')가 설계를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시공했으며, 당시 주임신부인 두쎄(Doucet) 신부가 감독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약현성당과 명동성당 등 서울 지역 천주교 관련 건축 설계와 감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두쎄 신부는 코스트 신부와 러시아인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등의 자문을 받으며 공사 감독에 힘썼다.[4]

1892년 6월 14일 외부 공사, 7월 28일 바닥 공사, 12월 2일 건축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893년 3월 10일 실내 장식을 마치고, 3월 27일에는 442kg의 종이 도착하여 종각에 설치되었으며, 4월 24일에 첫 타종되었다. 1893년 9월 25일, 모든 선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당 강복식(降福式)이 거행되었다.

건물 평면은 길이 32m, 폭 12m의 긴 장방형으로, 네이브(nave, 중앙 신자석)와 아일(aisle, 양측 통로)의 구분이 뚜렷한 삼랑식(三廊式) 구조이다. 네이브 천장은 뾰족 보올트(pointed vault)이고, 아일 천장은 반원형 보올트(barrel vault)이나, 구조적 개념의 보올트가 아닌 목재를 사용한 장식적 보올트이다. 내부 벽면 창은 단층이며, 트리포리움(triforium)이나 클리어스토리(clearstory)는 없다. 천장 구조는 목구조이며, 지붕 마감재는 함석이다.

약현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절충된 형태이다. 당시 기술과 공사비 문제로 인해 절충형으로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에는 높이 22m의 첨탑을 세워 종을 달았고, 1921년에는 내부 칸막이를 제거하고 벽돌 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등 내장 공사를 하였다. 1976년 외벽 수리와 문짝 교체가 이루어졌으나 원형을 충실히 재현했다. 이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곧 보수되었다.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물이자 소규모 벽돌조 서양식 성당의 표본으로서, 한국 교회 건축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 3. 건립 이후

1998년 방화로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약현성당은 공공의 성소로 여겨져 문을 항상 열어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성당을 방문했다.[2] 약현성당은 서울에서 가톨릭 혼례가 가장 많이 열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2022년 성탄 전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는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2]

3. 건축적 특징

건물의 평면은 연면적 120평의 긴 장방형이며, 길이 32m, 폭 12m의 삼랑식(三廊式)으로 네이브(nave)와 아일(aisle)의 구분이 뚜렷하다. 네이브의 폭은 아일 폭의 2배이다. 네이브 천장은 만곡형(彎曲形) 리브(rib)의 뾰족 보올트(pointed vault)이고, 아일 천장은 반원형 보올트(barrel vault)이나 구조적 개념의 보올트가 아니고 목재의 장식적 보올트이다. 내부 벽면 창은 단층으로 공중회랑(triforium)이나 고측창(clearstory)이 없다. 천장 구조는 목구조이며, 지붕 마감재는 함석이다.

이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고딕 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고도의 기술과 많은 공사비가 요구되는 고딕 양식으로 이 건물을 건축하기에는 그 당시 어려움이 있어, 절충형으로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905년 높이 22m의 첨탑을 세워 종을 달았고, 1921년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내부 칸막이를 제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등 내장공사를 하였다. 1976년에는 외벽을 수리하고 문짝 등을 교체하였으나 원형을 충실히 모방했다.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곧 보수공사하였다.

이 건물은 성당 건축의 기본적인 공간과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번잡스러운 장식이 없고 매우 아담하며 장중하다. 이 성당은 한국 최초의 양식 성당 건물이고, 소규모 벽돌조 서양식 성당의 표본이 되는 건물로 교회의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4. 역사적 의의

약현성당은 1892년에 건립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서양식 건물이자 서울 최초의 가톨릭 성당 건물이다.[2][5] 건물 형태는 십자형이며,[1] 크기는 가로 12m, 세로 32m이다.[1] 1998년 방화로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되었다. 약현성당은 공공의 성소로 여겨져 문을 항상 열어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에 약현성당을 방문했다.[2] 약현성당은 서울에서 가톨릭 혼례가 가장 많이 열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2022년 성탄 전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2]

4. 1. 한국 천주교의 상징

약현성당의 신자 공동체는 1891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전통적인 ''한옥'' 양식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반석방(반석방|盤石坊한국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된 이승훈의 집터에 세워졌다.[2]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기존 건물이 좁아지자, 더 큰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2]

새로운 성당 건물은 1886년 한국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결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코스트 신부(Fr. Eugene Jean Georges Coste)에 의해 1892년에 건립되었다.[4]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서양식 건물이었으며, 서울 최초의 가톨릭 성당 건물이였다.[2][5]

4. 2. 순교 성지

약현성당은 한국인 최초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집터와 인접해 있으며,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 박해 때 44명의 신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장소와 가깝기 때문에 순교 성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2] 약현성당의 신자 공동체는 1891년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반석방(반석방|盤石坊|Banseokbang한국어)이라는 이름으로 한옥 양식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된 이승훈의 집터에 세워졌다.[2]

4. 3. 근대 건축의 도입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 건물이자 소규모 벽돌조 서양식 성당의 표본으로서, 한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건물 평면은 연면적 120m2, 길이 32m, 폭 12m의 삼랑식(三廊式) 구조로, 네이브(중앙 신자석)와 아일(양측 통로)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네이브 폭은 아일 폭의 두 배이다. 네이브 천장은 만곡형(彎曲形) 리브(rib)를 가진 뾰족 보올트(pointed vault)이고, 아일 천장은 반원형 보올트(barrel vault)이지만, 구조적인 보올트가 아닌 목재를 사용한 장식적인 보올트이다. 내부 벽면에는 단층 창이 있고, 공중회랑(triforium)이나 고측창(clearstory)은 없다. 천장은 목구조이며 지붕 마감재는 함석이다.[2]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고딕 양식이 절충된 형태이다. 당시 고도의 기술과 많은 공사비가 요구되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절충형으로 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1905년에는 높이 22m의 첨탑을 세우고 종을 달았으며, 1921년에는 남녀 구분 칸막이를 없애고 벽돌 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는 등 내부 공사를 진행했다. 1976년 외벽 수리 및 문짝 교체 시에는 원형을 충실히 따랐다. 199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2]

약현성당은 성당 건축의 기본적인 공간과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장식이 번잡하지 않고 아담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코스트 신부(Fr. Eugene Jean Georges Coste)가 1892년에 건립하였으며, 이는 1886년 한국이 종교의 자유를 얻은 결과였다.[4]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현대식 서양식 건물이자 서울 최초의 가톨릭 성당 건물이었다.[2][5] 건물 형태는 십자형이다.[1]

5. 현대의 약현성당

약현성당은 현재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찾는 기도와 미사의 장소이다.[2]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이기도 하다.[2]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에 약현성당을 방문했다.[2] 약현성당은 서울에서 가톨릭 혼례가 가장 많이 열리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2] 2022년 성탄 전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2]

참조

[1] 웹사이트 Yakhyeon Catholic Church, Seoul https://english.cha.[...] 2024-10-31
[2] 웹사이트 "[천자칼럼] 약현성당" https://www.hankyung[...] 2022-12-25
[3] 웹사이트 중림동 약현성당 http://www.yakhyeon.[...] 2024-10-31
[4] 웹사이트 약현성당 — OPENHOUSE SEOUL https://www.ohseoul.[...] 2024-10-31
[5] 웹사이트 Yakhyeon Catholic Church, Korea’s First Western-Style Church : Knowing Korea https://www.knowingk[...] 202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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