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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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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세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평안북도 지역에서 활약했으며, 1929년 조선혁명군에 참여하여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1934년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에게 암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북한에서도 애국렬사릉에 유해가 안장되는 등 남북한 모두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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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양세봉 장군
이름양세봉
본명양서봉
이명양윤봉
희근
벽해
출생일1896년 7월 15일
출생지조선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동
사망일1934년 9월 20일
사망지만주국 요녕성 환인현 대랍자구 (현재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
사망 원인총격 암살
국적한국
배우자임재순 (윤재순)
자녀양귀녀, 양의숙, 양의준
부모양효은(부), 김아개(모)
본관남원 양씨
정당조선혁명당
군사 경력
복무만주 조선인 항일군
복무 기간1922년 ~ 1934년
최종 계급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지휘만주 조선인 항일부대
근무천마산대,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국민부, 조선혁명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노구대 전투, 쾌대모자 전투 등)
기타 이력만주지역 한중 항일 연합군 결성
훈장
서훈 내역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Yang Se-bong
호 로마자 표기Byeokhae

2. 생애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1917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하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22년 천마산대라는 유격 부대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등 여러 독립군 부대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국내 평안북도 지역으로 진공 작전을 펼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29년에는 국민부를 지지하는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하였다.

1931년 12월, 신빈현에서 열린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 간부 회의에 참석했다가 밀정의 정보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으나, 양세봉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1932년 2월, 양기하 전사 이후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내분을 수습하고,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한중 연합군을 편성, 융링제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하였다.

1933년 5월부터 일본군과 만주군은 양세봉이 이끄는 연합군의 근거지를 차례로 공격하였고, 연합군은 거듭 패배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다. 같은 해 7월 7일, 일본군이 조선혁명군 사령부가 있는 영릉가를 공격해 오자, 양세봉은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등 무기 90여 점을 회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연합군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일본군의 밀정 공작으로 1934년 8월 12일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 박창해가 사주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몇 차례 개편이 있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유골 없는 묘지가 마련되었다. 북한에서는 양세봉의 유해가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어 있으며, 김일성이 특별히 양세봉의 유족들을 평양시에 불러 살게 하는 등 높이 평가하고 있다.[16][17]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한 뒤 오동진, 손정도, 장철호, 현묵관, 그리고 양세봉에게서 학비를 후원받았다고 기록하였다.[18]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투신 (1896~1922)

양세봉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연산리에서 아버지 양효은과 어머니 김아개 사이의 5남매(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는 양원봉, 양시봉, 양봉녀, 양정봉이 있었다. 양세봉 장군의 친손자 양철수는 북한 평양시에 거주하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2021년 기준).[16][17]

1912년 16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장이 되었고, 1916년 윤재순과 결혼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1917년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寬甸), 환인(桓仁)을 거쳐 영릉(永陵)에 정착하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19년 봄, 신빈현 홍묘자(紅廟子)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3·1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모아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1922년 천마산대라는 유격부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2. 2. 무장 독립운동 전개 (1922~1934)

양세봉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후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등에서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했다.[3]

1923년 5월경, 장성군, 평안북도 판면, 초산군, 고령 영산, 의주군 지역의 일본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공격하며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였다. 1923년 8월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열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참모본부를 군사조직으로 인정하였고, 참모본부는 국내 진입 작전 등을 통해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3] 그는 소대장으로 국내 침투 작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중대장으로 승진하였다.[3][2]

1924년 5월 16일, 참모본부 제3중대 소대장으로 성남동(경북 청산군), 고산천(강계군)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여 적들을 사살하였다. 같은 달 19일,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 참모본부 제2중대 한웅권 소대장이 이끄는 제1소대와 합세하여 사이토 총독 저격 작전을 펼쳤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실패하였다.[3]

1929년에는 국민부를 지지하는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2년 2월 양기하 전사 이후 양세봉은 총사령관이 되어 조선혁명군의 지휘를 맡게 되어 내분을 수습하고, 남만에서 활동하던 중국의용군과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14] 융링제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1933년 5월 일본군과 만주군은 양세봉이 이끄는 연합군의 근거지를 공격하였고, 양세봉의 연합군은 거듭 패배했다. 7월 7일 일본군은 조선혁명군 사령부가 있는 영릉가를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 양세봉은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등 무기 90여 점을 회수했다.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맹활약했다.[15]

2. 2. 1. 천마산대 및 대한통의부 활동 (1922~1924)

1919년 3·1 운동 직후, 양세봉은 평안북도 삭주군 천마산(천마산)을 근거지로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천마산대에 합류하여 일본 통치 기구 파괴와 친일파 색출 활동을 했다.[3] 192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사령부에서 활동했다.[3][2]

1922년 양세봉은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 김명봉(金明奉)과 정창하(鄭昌夏)와 연계하여 항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독립운동 단체 현지책임자가 되어 식량 공급 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최시흥(崔時興)이 조직한 천마산대(天麻山隊)에 합류했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최시흥, 최지풍, 박응백 등이 조직한 약 500명의 청년 및 중년 남성으로 구성된 무장 독립군이었다. 소총 등 보통 무기와 적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사용하여 평안북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적의 파출소,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일본 간첩과 경찰을 처형했다.[3] 의주, 삭주, 귀성 등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며 유동 경찰서, 금광 지서, 창성군 영림창 등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군수품과 금괴를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했다.[5][3]

1922년 8월, 서간도 군정부와 대한독립군, 한국광복군 군영, 한국광복군 사령부, 평안북도 독판부 등 8개 부대와 9개 회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에서 만주 남부 한족 통일을 위한 회의를 열고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총재(金東三)와 부총재(蔡相德) 아래 민정, 교섭, 군무, 사법, 재정, 학무, 상무, 권업, 교통, 참모 등 10개 부서를 두었고, 각 부서 아래에는 과를 설치하고, 서무과와 사법부를 설치하였다. 만주 남부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통합한 독립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때 양세봉은 대한통의부 의군 제3중대(중대장: 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하였다.[3]

1923년 초, 일본 제국의 소위 천마산대 토벌 계획으로 인해 지역 주민 공격과 방화 등 온갖 만행이 자행되었고, 독립군 기지 또한 공격받았다. 결과적으로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최시흥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했다. 이후 천마산대는 그곳에서 무장 활동을 벌이던 독립군 총사령부와 합류하여 확대 개편되어 독립군 철마별영이 되었다. 이때 최시흥은 동경(東境)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문제 병사들을 지도하여 군 기강을 확립하고, 자원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훈련을 강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총사령관 오동진 장군의 큰 신임을 얻었다. 독립군 총사령부는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현에서 창설된 무장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였으며 북한 지역을 관할했다.[3] 이후 천마산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양세봉은 임시정부를 발판 삼아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2][5]

2. 2. 2. 정의부, 국민부, 조선혁명군 활동 (1924~1934)

1922년 천마산대라는 유격부대에 가입하면서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독립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평안북도 지역으로 진공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3]

1924년 6월, 참모본부 소대를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 지역에 진입하여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다. 같은 해 말에는 참의부 제3대장으로 승진하여 만주 남부 화전현 지역에서 항일 무장 활동과 부일배들을 색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3]

1924년 7월, 통의부 사령관이자 군사위원회 의장인 신팔균 장군이 왕청현 이도구 밀림리에서 군관학교 장교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본인들이 사주한 도적떼의 습격을 받고 위기에 처했다. 신 장군과 그의 부대는 신속히 구출 작전을 펼치고 지원 사격을 가했으나, 신팔균 장군을 포함한 수십 명의 독립투사가 전사했다. 통의부는 큰 위기를 겪었고, 같은 해 7월 길림에서 전만족통일회의 총회가 열려 대동단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1월 25일, 통의부, 대한국정서, 길림거류민회, 의성단 등 약 10개 단체가 모여 김동삼을 의장으로 추대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대한독립정부(의정부)가 수립되었다.[3]

1929년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삼부통합을 위한 노력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부를 지지하는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했다. 1931년 12월 혁명군과 조선혁명당 간부 30여 명이 신빈현에서 회의를 열 때 참석하였으나, 밀정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회의 현장에 들이닥쳐 10여 명의 간부를 체포했다. 양세봉 등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조직을 정비했다.

1932년 2월 양기하의 전사 이후 양세봉은 총사령관이 되어 조선혁명군의 지휘를 맡게 되어 내분을 수습하고, 남만에서 활동하던 중국의용군과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14] 신빈현 융링제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1933년 5월 일본군과 만주군은 양세봉이 이끄는 연합군의 근거지인 임강, 환인, 신빈, 유하, 통화 등을 차례로 공격하였다. 양세봉의 연합군은 거듭 패배했고 많은 희생자를 내야만 했다. 7월 7일 일본군은 조선혁명군 사령부가 있는 영릉가를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 양세봉은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등 무기 90여 점을 회수했다.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맹활약했다.[15] 그 뒤 일본군은 비행기를 동원해 연합군 진지를 폭격했다.

일본군은 연합군에 밀정을 보냈다. 일본군의 밀정은 중국군 사령관이 협의할 군사 문제가 있으니 대갑자구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 양세봉을 유인하였다. 양세봉은 조선인 밀정과 함께 부하대원 4명을 거느리고 수수밭을 지날때 숨어 있던 일본군 수십여 명이 나타나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양세봉은 저항하였고,[15] 1934년 8월 12일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 박창해가 사주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조선혁명군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몇 차례의 개편이 있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2. 2. 3. 최후 (1934)

1934년 8월 12일,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 박창해가 사주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15] 일본군의 밀정은 중국군 사령관이 협의할 군사 문제가 있으니 대갑자구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 양세봉을 유인하였다. 양세봉은 조선인 밀정과 함께 부하대원 4명을 거느리고 수수밭을 지날 때 숨어 있던 일본군 수십여 명이 나타나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양세봉은 저항하였다.[15] 王明奔|왕명번중국어은 "나는 예전의 왕 씨가 아니다. 총알을 맞고 싶지 않다면 일본군에 항복하라."라고 말하며 양세봉을 배신했다.[3][1] 결국 양세봉은 박창해를 비롯한 일본 비밀요원들과 王明奔|왕명번중국어 등의 공모로 암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3][1]

동지들은 일본의 눈을 피해 산자락에 양세봉을 조용히 매장했으나,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알아차리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머리를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3]

그의 사후 조선혁명군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몇 차례의 개편이 있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김호석(金浩石)이 사령관직을 이어받았으나, 한국혁명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독립군은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3]

3. 암살 배후 및 진상 규명 논란

이 무렵 일본 비밀요원 박창해(朴昌海)는 혁명군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던 중국인 왕명번(王明奔)에게 뇌물을 주고, 중국 항일군과의 연합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양세봉을 환인현(歡仁縣)으로 유인했다. 1934년 8월 12일, 양세봉은 부관 김광욱(金光旭), 김성해(金成海), 김추상(金秋祥)과 함께 왕 씨를 따라 다라자구(打拉子溝)로 향하던 중 좌우 조수밭에서 수십 명의 총잡이들에게 포위당했다. 그 순간 왕 씨는 양세봉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며 "나는 예전의 왕 씨가 아니다. 총알을 맞고 싶지 않다면 일본군에 항복하라."라고 말했다.

양세봉은 눈을 크게 뜨고 엄숙하게 그를 꾸짖었지만, 결국 박창해(朴昌海)를 비롯한 일본 비밀요원들과 중국인 왕 씨 등의 공모로 암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3][1]

동지들은 일본의 눈을 피해 산자락에 양세봉을 조용히 매장했으나,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알아차리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머리를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양세봉 사후 김호석(金浩石)이 사령관직을 이어받았으나, 한국혁명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독립군은 소규모 게릴라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3]

4. 사후

1934년 8월 12일 양세봉이 일본군에 매수된 밀정 박창해가 사주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당한 후,[15] 조선혁명군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몇 차례 개편이 있었지만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유골이 없는 묘역이 마련되었다. 북한에는 양세봉 유해가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어 있다.[16][17]

4. 1. 남북한의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유골이 없는 묘역이 마련되었다.[16]

북한에서는 양세봉의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매장하고, 김일성이 특별히 유족들을 평양시에 불러 살게 하는 등 높이 평가하고 있다.[16][17] 김일성은 독립하여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형성하기 이전에는 양세봉 부대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세봉은 김일성이 아버지 김형직을 일찍 여의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오동진 등과 함께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일제에 맞서는 반일연합전선 형성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아버지 김형직이 일찍 사망한 뒤 오동진, 손정도, 장철호, 현묵관, 그리고 양세봉에게서 학비를 후원받았다고 기록하였다.[18]

4. 2.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양효은(梁孝恩)18XX년 월 일1912년 월 일
어머니김아개(金兒開)18XX년 월 일19XX년 월 일
부인윤재순(尹在順)189X년 X월 XX일19XX년 월 일
양귀녀(梁貴女)1920년 X월 XX일1931년 6월 20일
양의숙(梁義淑)1928년 5월 XX일19XX년 월 일
아들양의준(梁義準)1932년 5월 XX일1957년 3월 15일정치부 대대장
친손자양철수(梁哲水)1956년 2월 10일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아동문학작가
증손자양ㅇㅇ(梁ㅇㅇ)1982년
증손녀양ㅇㅇ(梁ㅇㅇ)1994년
동생양원봉(梁元奉)1899년 월 일19XX년 월 일
동생양시봉1900년 12월 22일1979년 9월 9일독립군
동생의 부인김화순(金花順)1910년 월 일1998년 월 일
조카양의국(梁義國)19XX년 월 일19XX년 월 일
조카양의순(梁義順)1937년 월 일
조카양의관(梁義官)1939년 월 일
조카양의복(梁義福)1948년 월 일
조카손녀김춘련(金春蓮)1966년 월 일중국 선양 대학교수
여동생양봉녀(梁奉女)1907년 월 일19XX년 월 일
동생양정봉(梁政奉)1911년 월 일19XX년 월 일이명: 양윤창


참조

[1] 웹사이트 양세봉 (梁世奉) https://encykorea.ak[...]
[2] 뉴스 [아! 만주⑦] 양세봉 흉상: 조선혁명군의 위대한 사령관, "軍神"으로 숭앙받다 https://www.worldkor[...]
[3] 웹사이트 양세봉 https://e-gonghun.mp[...]
[4] 웹사이트 양세봉 http://www.okpedia.k[...]
[5] 뉴스 조선 총독 사이토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양세봉 장군 https://www.ohmynews[...]
[6] 웹사이트 今月の独立運動家-1994年8月の独立運動家 梁世奉 https://e-gonghun.mp[...] 功勲電子資料館 2024-09-24
[7] 웹사이트 조선혁명군 (朝鮮革命軍) https://encykorea.ak[...] 2024-09-24
[8] 서적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 (그 날이 오면) 도서출판 한길사 2004
[9] 웹사이트 흥경성전투 (興京城戰鬪) https://encykorea.ak[...] 2024-09-24
[10] 서적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 (그 날이 오면) 도서출판 한길사 2004
[11] 뉴스 満州将校が「光復闘争」?顕忠院の中に詰まった身分洗濯 https://m.ohmynews.c[...] 2021-03-21
[12] 뉴스 다시쓰는 독립운동列伝 - 남북 국립묘지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 http://www.khan.co.k[...] 2005-06-20
[13]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4] 서적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 (그 날이 오면) 도서출판 한길사 2004
[15] 서적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 (그 날이 오면) 도서출판 한길사 2004
[16] 뉴스 다시 쓰는 독립운동列傳 - 남북 국립묘지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 http://www.khan.co.k[...] 2005-06-20
[17] 뉴스 남과 북 국립묘지에 동시 안장된 최초의 독립운동가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8-15
[18]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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