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이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이허는 황해도 수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만주로 망명하여 김진호, 변창근 등과 함께 회덕농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정의부에 가입하여 삼성학교 교사로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1929년 삼부 통합 운동에 참여하여 국민부 청년 조직을 담당하고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결성했으며, 양세봉 사후 중앙집행위원장 대리로 활동했다. 1936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이듬해 봉천에서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일성과의 대립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황해북도 출신 - 곡산 한씨
    곡산 한씨는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곡산군에 봉해진 한예를 시조로 하며, 그의 후손들이 곡산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경주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조선시대에 문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성씨이다.
  • 조선혁명군정부 - 조선혁명당 (1929년)
    조선혁명당은 1929년 만주에서 결성된 민족유일당으로,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이끌며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여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며 해산했다.
  • 조선혁명군정부 - 양기하
    양기하는 대한제국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만주 망명 후 대한독립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만주 지역 무장 단체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 관전현에서 전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조선혁명당 (1929년) - 현익철
    현익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 조선혁명당 (1929년) - 양세봉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양세봉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며 대한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조선혁명군 등에서 활약한 독립군 지휘관으로서,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여 융링제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나 일본군 밀정의 계략으로 암살당했고 남북한 모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이허

2. 생애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경성부배재고보에 진학하여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 졸업 후 만주로 망명, 지린에서 김진호와 변창근을 만나 화이더농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5년 정의부에 가입하여 삼성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 삼부통합운동에 참여, 국민부에서 청년 조직을 담당했으며,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도 결성했다.

2. 1. 독립운동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뒤 곧바로 만주로 망명하였다. 지린에서 계몽 운동과 농촌 개발 운동을 벌이던 김진호와 변창근을 만나 화이더농우회에 가담해 활동했다. 이때 화이더농우회에는 화이더 현 우자쯔의 삼성학교 교사 최일천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정의부에서 일하던 김진호의 소개로 1925년 정의부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삼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1]

1929년 참의부, 신민부와 정의부의 3부 통합 운동에 적극 나서 삼부가 함께 조직한 국민부에 참가하여 청년 조직을 담당했고, 지도 조직인 조선혁명당, 무장 투쟁을 위한 조선혁명군도 결성했다. 조선혁명군은 1932년 사령관 김관웅, 부사령관 장세용 등이 한꺼번에 체포되었으나, 그는 양세봉 등 살아남은 인사들과 함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재정비했다.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이던 양세봉이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중앙집행위원장 대리로 고군분투했다.[1] 1936년 12월경 남만주의 관전현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이듬해 2월 현 봉천에서 총살당했다.[1]

2. 2. 최후

1936년 12월 경 남만주의 콴뎬 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체포되었고, 이듬해 2월 펑톈(현 선양)에서 총살당했다.[1]

3. 사후

대한민국 정부1968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이허는 김일성의 초기 활동 공간과 겹치는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이론가였으나, 1929년 몽치단 사건 이후 국민부 우파로 분류되면서 김일성과 대립했던 인물이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2]

4. 평가

고이허는 김일성의 초기 활동 무대와 겹치는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성향의 이론가였다. 그러나 1929년 몽치단 사건 이후 국민부 우파로 분류되면서 김일성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2]

4. 1.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2. 북한

고이허는 김일성의 초기 활동 공간과 겹치는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이론가였으나 1929년 몽치단 사건 이후 국민부 우파로 분류되면서 김일성과 대립했던 인물이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2]

참조

[1]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