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관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양평관 전투는 215년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조는 한중으로 진격하기 위해 양평관을 공격했고, 장로의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조조군은 초기에는 고전했으나, 하후연과 장합의 기습, 유엽의 기지 등을 통해 양평관을 함락했다. 이후 조조는 남정, 파중을 차례로 함락하며 한중을 장악했다. 조조는 장로를 후대하고 한중을 안정시킨 후 철수했다. 이 전투는 삼국지연의와 게임 등 대중문화에도 등장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15년 중국 - 합비 전투
합비 전투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요충지인 합비성을 놓고 오나라 손권이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인 전투로, 특히 215년 장료가 적은 병력으로 손권의 대군을 기습하여 큰 혼란을 야기한 중요한 전투이며, 여러 창작물에도 등장한다. - 조조 - 원술 토벌전
원술 토벌전은 190년대 후반 원술이 황제를 칭하며 자립하려 하자 조조, 손책 등 군벌들이 연합하여 원술을 공격한 전투로, 손책의 강동 정복을 배경으로 원술의 제위 찬탈 시도가 발단이 되어 여포의 배신과 패배, 원술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후한 말 군벌들의 복잡한 관계와 세력 다툼을 보여준다. - 조조 - 장판 전투
208년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조조군에게 패퇴한 장판 전투는 유비가 장판에서 기습을 받아 도주했으나 장비와 조운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재기를 도모하여, 이후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후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도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전투 - 양주의 난
양주의 난은 184년 부패한 한나라에 저항하여 강족 세력이 양주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한나라의 통치력 약화와 삼국 시대 도래의 계기가 되었다.
양평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교전 | 양평관 전투 |
일부 | 후한 말의 전쟁 |
시기 | 215년 4월 – 216년 1월 |
장소 | 한중, 중국 |
원인 | 미상 |
결과 | 조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조조 |
교전 2 | 장로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조조 |
지휘관 2 | 장로 (항복) |
2. 배경
215년 4월 17일부터 5월 15일 사이에 조조는 한중군의 장로를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조조의 군대가 진창(현재의 바오지시 진창구)에 도착하여 무도군(현재의 간쑤성 룽난시 일대)을 지나가려 하자, 이 지역의 적 부족들이 길을 막아섰다. 이에 조조는 장합, 주령 등을 보내 적들을 공격하여 길을 뚫게 했다. 조조군은 산관을 지나 허츠에 도착했고, 두무가 이끄는 부족들의 저항을 격파하고 적 백성을 학살했다. 서평군과 금성군의 장수였던 취연, 장석 등은 한수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조조에게 바쳤다.[1]
215년 8월 13일에서 9월 10일 사이, 조조의 군대는 산악 지형을 따라 길고 고된 여정을 거쳐 양평관(현재의 산시성 닝창현)에 도착했다. 병사들이 불평하기 시작하자, 조조는 그들의 공헌을 기억하겠다고 선언하여 계속 나아가도록 격려했다.[2]
2. 1. 역사적 배경
211년, 조조는 동관 전투에서 크게 이겨 서쪽 변경 지역의 위협을 제거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했다. 이 승리로 조조는 다음 목표로 한중을 노리게 되었고, 한중을 점령하면 촉 지역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2]한편, 214년 5월 유비는 성도에 큰 전투 없이 입성하여 촉 지역을 차지했다. 같은 해 7월, 손권은 형주를 요구하며 유비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유비는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유비와 손권 사이에 형주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고, 조조는 이 틈을 타 한중 공격을 감행했다.[2]
2. 2. 삼국지연의에서의 배경
三國志演義중국어에서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211년, 조조는 동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 위세를 회복했다. 서쪽의 위협을 덜게 된 조조는 한중을 다음 목표로 삼았고, 한중을 함락하면 촉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214년 5월, 성도에 무혈 입성한 유비는 촉을 기반으로 삼았다. 같은 해 7월, 손권은 형주를 요구하며 유비에게 사자를 보냈지만, 유비는 이를 거절했다. 유비와 손권 사이에 형주 쟁탈전이 벌어졌고, 조조는 이 틈을 타 한중으로 침공했다.
3. 전투 과정
장로는 동생 장위와 장수 양앙에게 군대를 이끌고 양평관 방어를 명했다. 장위와 양앙은 산악 지대에 10여 리에 걸쳐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조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조조는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군대를 물렸다. 조조가 후퇴하는 것을 본 장로의 군대는 방어 태세를 늦추었다.[2] 조조는 몰래 사(謝𢢼)와 고조에게 야간 기습을 명했고, 성공하여 양앙은 전사하고 장위는 도주했다.[2]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한중은 유방과 인연이 깊은 한의 국명에서 유래한 땅으로, 전략적으로 관중과 촉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양평관을 돌파하지 못해 조조군은 발이 묶였다. 한편, 장로는 출병 시 희생이 클 것을 우려해 소극적이었으나, 군권을 맡은 동생 장위의 강경한 판단으로 출병했다. 장위군은 조조군을 열세에 몰아넣었고, 조조는 불리하다고 판단해 철수를 시작했다. 유엽의 제안으로 조조는 다시 양평관을 공격, 방심한 장위군을 야습과 활 공격으로 크게 격파하고 양평관을 점령했다.
동소 등의 상주문에 따르면 조조군의 야습은 우연이었다. 조조는 철수를 결정하고 하후돈과 허저에게 산 위 선봉인 고조 군의 철수를 명했다. 장위는 조조군 철수 소식에 경계를 풀었지만, 밤중에 수천 마리의 사슴이 진영으로 뛰어들어 장위군은 경악했다. 철수 중이던 고조군은 밤이라 길을 잃고 장위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조군은 북을 쳐 아군을 불렀지만, 장위군은 조조군의 야습으로 오인해 혼란에 빠졌다. 유엽은 공격 기회라 판단, 조조에게 재공격을 건의했다. 조조는 재공격을 결심하고 쇠뇌를 대량 사용하여 장위를 격파했다.
3. 1. 양평관 전투
215년, 조조는 한중을 공격하면서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선봉은 하후연과 장합이 맡았고, 조조는 여러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중군을 지휘했으며, 후군은 조인과 하후돈이 군량과 마초 운송을 담당했다.한중의 관문인 양평관을 공격 목표로 삼자, 장로는 동생 장위와 장수 양앙, 양임을 보내 양평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조조군의 선봉 하후연과 장합은 적진에서 15리 떨어진 곳에 진지를 세웠으나, 그날 밤 양앙과 양임의 기습으로 크게 패했다.
이에 조조는 하후연과 장합을 처형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고 직접 선봉에 서서 부하 허저, 서황과 함께 장위의 진지를 정찰했다. 양앙과 양임이 두 갈래로 공격해 오자, 허저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격퇴했다.
곧 하후돈과 장합이 조조를 구원하여 조조는 무사히 진지로 돌아왔고, 양측 군대는 50일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조조는 하후연과 장합에게 기병 6000명을 주어 양평관 뒤쪽으로 이동하게 했고, 양앙이 조조군을 추격하자 하후연이 기습하여 그를 제거했다. 양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뒤에서 장합이 기습하여 양임은 겨우 남정 땅으로 달아났다.
양앙은 포위를 뚫고 나가려다 장합에게 죽고, 장위도 결국 진지를 버리고 양평관에서 후퇴하면서 조조군은 쉽게 양평관을 함락했다. 양임과 부장 창기가 2만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서 조조군과 싸웠으나, 창기는 3합도 되지 않아 하후연에게 죽고, 양임도 30합을 싸우다 결국 하후연에게 죽었다.[1]
215년 8월 13일에서 9월 10일 사이, 조조군은 산악 지형을 따라 길고 힘든 여정을 거쳐 양평관 (현재의 산시성 닝창현)에 도착했다. 병사들이 불평하기 시작하자, 조조는 그들의 공헌을 기억하겠다고 선언하여 계속 진군하도록 격려했다.[2]
장로는 동생 장위와 장수 양앙에게 군대를 이끌고 관문을 방어하게 했다. 장위와 양앙은 산악 지대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10여 리에 걸쳐 조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조조는 공격을 시도했지만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군대를 물렸다. 장로의 군대는 조조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 방어 태세를 늦추었다. 조조는 몰래 사(謝𢢼)와 고조(高祚)에게 야간 기습을 명령했고, 그들은 성공했다. 양앙은 전투에서 전사했고 장위는 밤을 틈타 도주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가 된 한중은 유방과 인연이 깊은 한의 국명에서 유래한 땅으로, 전략적으로도 관중과 촉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양평관을 돌파하지 못해 조조군은 발이 묶였다. 한편, 이를 맞아 싸우는 장로는 출병하면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을 두려워해 전투에 소극적이었으나, 군권을 맡고 있던 동생 장위의 강경한 판단으로 출병이 단행되었다. 처음에는 장위군이 조조군을 열세에 몰아넣었고, 조조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보고 철수를 시작했다. 조조는 유엽의 제안에 따라 다시 양평관을 공격했고, 조조가 철수했다고 생각해 방심하고 있던 장위군을 야습과 대규모 활 공격으로 크게 격파했다. 장위는 도주했고, 조조는 양평관을 점령했다.
동소 등의 상주문에서는 조조군의 야습이 우연이었다고 한다. 조조는 진심으로 철수를 결정하고 하후돈과 허저에게 산 위에 진을 치고 있던 선봉인 고조 군을 철수시켰다. 조조군이 철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장위는 경계를 풀었지만, 밤중에 수천 마리의 사슴이 진영으로 뛰어들어 장위군은 경악했다. 게다가 철수 중이던 고조군은 밤중이라 길을 잃고, 자신도 모르게 장위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수의 고조군은 아군을 부르기 위해 북을 쳤지만, 장위군은 이를 조조군의 야습으로 오인하여 대혼란에 빠졌다. 후속 군의 감독을 맡고 있던 유엽은 여기서 공격하면 장위를 격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빠른 말로 조조에게 재공격을 건의했다. 여기서 조조는 재공격을 결심하고, 대량의 쇠뇌를 사용하여 적진을 공격하여 장위를 격파했다고 한다.
3. 2. 남정성 전투
양평관을 함락한 조조군은 곧바로 남정성으로 진군했고, 장로는 마초의 부하였던 방덕을 보내 맞서게 했다.[1]방덕은 조조의 장수 하후연, 서황, 허저 등을 무찌르는 용맹함을 보였고, 조조는 방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했다.[1] 이에 조조의 모사 가후가 계책을 냈고, 다음 날 조조군의 영채를 습격한 방덕은 가후의 계략에 빠져 장합, 하후연, 서황, 허저 등에게 크게 패해 성 안으로 후퇴했다. 가후는 장로의 모사 양송에게 많은 재물을 보냈다.[1]
뇌물을 받은 양송은 장로에게 방덕을 모함했고, 방덕은 조조와 맞서 싸우다가 조조에게 투항했다.[1] 결국 장로와 장위, 양송 등은 군사를 이끌고 다른 성으로 후퇴하고 식량 창고는 불태우지 않아 조조가 장로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알게 했다.[1]
3. 3. 파중성 전투
조조는 방덕을 얻고 다시 장로를 공격했다. 뇌물을 받은 양송은 조조에게 성 안에서 지원한다는 밀서를 보냈고, 성 앞에 나온 장로와 장위 형제는 조조군의 공격을 받았다.[1]장위는 허저에게 목이 베였고, 동생 장위가 죽자 염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 밖으로 나온 장로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양송이 성문을 막아 결국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장로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진남장군에 봉하고, 염포를 비롯한 수하 문무관원들도 모두 열후에 봉했으며, 태수와 도위를 두고 사졸들에게도 큰 상을 내렸다.[1]
항복한 양송은 주인을 배신한 대가로 처형되었고, 이로써 한중은 조조에게 평정되었다.[1]
4. 결과 및 영향
조조는 한중을 점령하고 백성들의 항복을 받았다.[3][4] 한녕군을 한중군으로 개명하고 행정 구역을 정비했다.[4] 항복한 장로와 그 일족은 후한 대우를 받았고,[8] 지역 유지들에게도 작위가 수여되었다.[6][7]
조조는 한중을 발판으로 촉을 공격할 기회를 얻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후 유비가 파중을 점령하면서 조조와 유비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8]
양송은 주인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조조 진영에서는 "승리한 김에 촉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조조는 한중 제압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5. 평가
양평관 전투는 조조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전략적 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조조는 이 전투를 통해 관중과 촉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을 확보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동소 등의 상주문에 따르면, 조조군의 야습은 우연이었다. 조조는 철수를 결정하고 하후돈과 허저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밤중에 수천 마리의 사슴이 장위의 진영으로 뛰어들었고, 길을 잃은 고조 군이 장위의 진영으로 들어가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유엽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조에게 재공격을 건의했고, 조조는 대량의 쇠뇌를 사용하여 장위군을 격파했다.[1]
한편, 양평관 전투는 삼국 간의 대립 구도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조는 한중을 점령한 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촉으로 쇄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당시의 전략적 상황과 자신의 역량을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였다.[1]
6. 대중문화
코에이의 게임 ''진 삼국무쌍 5: 맹장전'', ''진 삼국무쌍 7'', ''무쌍 오로치 3''에서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
[2]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3]
서적
Sanguozhi vol. 1
[4]
서적
Sanguozhi vol. 1
[5]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6]
서적
Sanguozhi vol. 1
[7]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8]
서적
Sanguozhi vol. 1
[9]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10]
서적
Sanguozhi vol. 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