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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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소는 조위의 정치가이자 책사로, 원소와 조조를 섬기며 활약했다. 그는 원소 휘하에서 거록군을 평정하고, 조조에게 헌제를 허창으로 옮기도록 건의하여 조조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관도대전에서는 순유를 도와 안량을 백마진으로 유인하는 계책을 세웠으며, 오환 정벌 시 군량 수송을 위한 수로 건설을 건의했다. 조조의 위공 추대를 건의하고, 손권의 야욕을 견제하는 등 위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조비와 조예 치세 동안에도 국가에 헌신하며 위위, 사도를 역임했다. 진수는 동소를 모략에 뛰어난 책사로 평가했지만, 덕업은 없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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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6년 사망 -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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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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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둥자오 (董昭) |
출생 | 156년 |
출생지 | 딩타오 구, 허쩌, 산둥 |
사망 | 236년 7월 4일 (80세) |
자 | 공런(公仁) |
시호 | 정후(定侯) |
작위 | 러핑후(樂平侯) |
친척 | 사마지의 아내 (조카) |
직업 | 관리 |
관직 경력 | |
사도 (司徒) | 230년 ~ 236년 7월 4일 (230년 ~ 232년 8월 대행) |
위위 (衛尉) | 226년 ~ 232년 8월 |
태복 (太僕) | 226년 |
태상 (太常) | 226년 이전 |
대홍려 (大鴻臚) | 220년 이후 |
주군 | 원소 → 헌제 → 조조 → 조비 → 조예 |
기타 | |
자녀 | 둥저우(董周) |
사망일 | 236년 7월 4일 |
2. 생애
동소는 자가 공인(公仁)이며, 제음군 정(定) 사람이다. 젊은 시절부터 꾀가 많고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초기에는 효렴으로 추천받아 관직에 나아가 임조와 백인의 현령을 지냈으며, 이후 원소의 휘하에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다. 원소 밑에서 거록과 위군 태수를 맡아 반란을 진압하고 지역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참언으로 인해 원소의 의심을 사게 되자 그를 떠났다. 이후 하내의 장양에게 의탁하여 그의 막료가 되었고, 장양에게 조조와의 협력을 조언했다.
196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조정에 나아가 의랑이 되었으며, 혼란한 정세 속에서 조조에게 허도 천도를 건의하여 실행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조조의 핵심 참모가 되어 관도대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계책을 내어 공을 세웠다. 특히 원소 세력 및 오환 정벌 당시에는 운하 건설을 제안하여 군량 수송 문제를 해결했으며,[1][3] 번성 전투에서는 손권의 의도를 간파하고 관우를 고립시키는 계책을 내어 위나라가 형주 공방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했다.[3][1] 또한 유비의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조조에게 경고하기도 했다.[1]
동소는 조조가 위공, 위왕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으며,[3][1][2] 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장작대장, 대홍려, 시중, 위위, 태상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비와 조예 시대에 걸쳐 황제의 측근에서 국정에 참여하며 중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군사 전략 면에서 뛰어난 식견을 보여주었다. 232년에는 사도에 임명되었으며,[3] 23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정후(定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원소와 장양 휘하에서의 활동
효렴으로 추천받아 임조현령과 백인 현령을 지냈으며, 이후 원소의 참모가 되었다.191년 무렵, 원소가 한복의 기주를 차지한 후, 계교 전투를 전후하여 거록 태수와 관리들이 공손찬에게 기울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동소는 원소의 명으로 거록 태수를 겸임하여 계략을 써서 거록군을 안정시켰고, 이 공으로 원소의 칭찬을 받았다. 193년 3월에는 위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태수 율반이 살해되자, 다시 원소의 명으로 위군 태수를 맡았다. 동소는 위군에 있던 수만 명의 도적들을 이간계로 와해시켜 평정했다.
한편, 동소의 동생 동방(董訪)은 진류 태수 장막 휘하에 있었다. 원소가 장막과 사이가 나빠지자, 주변의 참언을 받아들여 동소를 의심하고 처벌하려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동소는 원소 진영을 떠나 헌제가 있는 조정으로 가려 했으나, 하내를 지나던 중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군벌 장양에게 붙잡혔다. 동소는 자신의 관직을 모두 버리고 장양에게 투항했고, 장양은 그를 받아들여 막료로 삼았다.
동소는 장양에게 조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조언했다. 당시 연주를 다스리던 조조가 장안으로 가기 위해 장양에게 영토 통과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상태였다. 동소는 조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장양에게 조조와의 협력이 유리함을 설득했고, 장양은 이를 받아들여 조조를 조정에 천거하는 등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6년, 이각과 곽사의 내분으로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피신했을 때, 조조는 헌제를 보호하려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의 군대가 하내를 통과해야 했는데, 장양은 동소의 조언에 따라 길을 열어주었다. 동소는 "난세에 가까운 제후들과 적대 관계를 맺어 좋을 것이 없으며, 헌제를 구출하러 가는 조조가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으니 길을 내주는 것이 이롭다"고 설득했다. 이 결정 덕분에 조조는 순조롭게 헌제를 맞이할 수 있었고, 장양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발전했다.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온 후, 동소는 조정에 나아가 의랑에 임명되었다. 당시 낙양에서는 한섬, 양봉, 장양, 동승 등 장수들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동소는 양봉에게 조조에게 의지하도록 권유했고, 양봉은 조조의 도움으로 진동장군과 비정후의 벼슬을 받았다. 동소 자신도 이때 부절령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낙양에 도착하자, 동소는 조조에게 양봉을 견제하고 헌제를 허(허도)로 옮길 것을 은밀히 제안했다. 조조는 이 계책을 받아들여 신속하게 헌제를 허도로 옮겼고, 이로써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게 되었다. 이후 동소는 조조를 섬기게 된다.
199년, 장양이 부하 양추에게 살해당하자, 동소는 혼란에 빠진 하내군을 수습하여 조조에게 귀순했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196년, 헌제가 이각과 곽사의 내분을 피해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할 때, 동소는 조정에 나아가 의랑(議郎)에 임명되었다.[1] 당시 장양, 한섬, 양봉, 동승 등 여러 장수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동소는 양봉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의지하도록 권유했고, 이로 인해 양봉은 조조로부터 진동장군(鎮東將軍)·비정후(費亭侯)의 벼슬을 받았다.[1] 동소 자신도 부절령(符節令)에 임명되었다.[1]조조가 낙양에 도착하자, 동소는 조조에게 양봉을 속이고 허로 수도를 옮기도록 진언했다.[1] 그는 헌제를 허도로 옮기는 구체적인 계책을 제안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1] 조조는 양봉이 미처 대응하기 전에 신속하게 헌제를 허도로 옮겼다.[1] 이로써 헌제는 조조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동소는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조조를 섬기기 시작했다.[1][2] 198년에는 하남윤(河南尹)에 임명되었다.[1]
199년, 동소의 옛 주군이었던 장양이 부하 양추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 장양의 장사(長史) 설홍(薛洪)과 하내태수(河内太守) 무상(繆尚)은 원소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동소는 조조의 명을 받고 단신으로 하내로 가 이들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순시켰다.[1] 이로써 하내군은 조조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조조가 유비로부터 서주를 탈환한 후, 동소는 서주자사(徐州刺史)에 임명되었다.[2]
정욱, 곽가와 마찬가지로 동소 역시 유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조조에게 경고했으나, 조조는 그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 결국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1] 조조가 유비를 격파한 후 동소는 서주목(徐州牧)으로 전임되었다.[1]
200년 관도대전 시기에는 위군태수(魏郡太守)로 있었다.[1] 원소 군의 안량이 동군(東郡)을 침공하자, 동소는 순유의 계책에 따라 안량을 백마진(白馬津)으로 유인하는 작전에 참여했다.[3] 이때 동소의 부대가 안량의 진영을 돌파하여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벨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3]
조조가 원소의 잔당과 오환을 정벌하기 위해 북진했을 때( 백랑산 전투 ), 군량 수송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3][1] 동소는 평로(平虜)와 천주(泉州) 두 운하를 파서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수송하는 계책을 제안하여 실행했다.[1] 이 계책은 성공하여 군량 수송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손실을 줄였으며,[3] 오환족을 격파하고 원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1] 이 공으로 동소는 천추정후(千秋亭侯)에 봉해졌고, 곽가의 뒤를 이어 군사제주(軍師祭酒)로 임명되었다.[1]
이후 동소는 오등작 제도의 부활을 진언하기도 했다.[1] 211년, 동소는 조조에게 위공(魏公)의 작위에 오르고 구석을 받을 것을 처음으로 권유했다.[3][1] 그러나 구석 수여는 순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3] 213년, 동소는 다시 한번 위공 추대를 청하여 조조를 위공으로 올리는 데 기여했다.[3] 216년에는 헌제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위왕(魏王)의 칭호를 내리도록 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2]
219년, 관우가 번성의 조인을 공격하는 번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손권은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 관우를 협공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이 사실을 관우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3] 대부분의 신료들은 비밀 유지에 동의했지만, 동소는 반대하며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이는 비밀로 할 사안이 아닙니다. 손권이 이 계략을 비밀로 해 관우를 사로잡게 되면 그 모든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 어부지리로 형주를 독차지하겠다는 야심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실을 관우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관우는 오나라 또한 막아야 하기 때문에 군사를 분산시켜야 할 것이며, 손권의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더는 뒷장난을 칠 수 없을 것입니다.[3]
조조는 동소의 의견이 옳다고 판단하여 이를 따랐다.[3] 손권의 신하로서의 복종 약속과 관우 협공 의사를 담은 서신 내용을 화살에 묶어 번성 안팎의 관우군과 조인군 양측에 알렸다.[1][2] 이로 인해 손권의 의도가 드러나고 관우는 오나라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3] 성 안의 조인 군대는 손권의 지원 소식에 사기가 올랐다.[2] 동소는 관우가 형주로 후퇴할 것을 예측하고 서황을 보내 관우의 퇴로를 공격하게 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3] 이 계책은 결과적으로 관우의 패배와 위나라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데 기여했다.[3][1]
2. 3. 위나라 건국 이후의 활동
220년, 조비가 헌제로부터 왕위를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자, 동소는 장작대장(將作大匠)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우향후(右郷侯)에 봉해지고 대홍려(大鴻臚)가 되었다. 이듬해인 221년에는 시중(侍中)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함께 시중이 된 소칙은 한나라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위나라 건국에 공을 세운 동소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222년, 하후상이 오나라의 강릉을 공격할 때, 조비는 동소를 대동하고 전장에 나섰다. 당시 하후상은 강가의 삼각주(三角洲)에 진을 쳤는데, 동소는 장마철 강물이 불어날 위험을 간파하고 조비에게 즉시 철군할 것을 건의했다.
「지금 당장에는 강릉을 치는 진영이 유리할지 모르나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밀물이 들어와 잠겨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고 맙니다. 차라리 철군을 시키심이 낫습니다.」
조비는 동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하후상을 철수시켰고, 처음에는 이를 원망하는 분위기였으나 열흘 뒤 실제로 강물이 범람하여 삼각주가 물에 잠기자 모두 동소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조비는 동소의 군략을 장량과 진평에 비견된다고 칭찬했으며, 이 공로로 동소는 위위(衛尉)로 임명되었다.
224년에는 도향후(都郷侯)로 봉해지고 태상(太常)이 되었으며, 이후 광록대부(光祿大夫) 겸 급사중(給事中)으로 전임되었다. 조비와 그의 뒤를 이은 조예 시대에 걸쳐 동소는 황제에게 여러 건의와 조언을 하며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적의 움직임이나 전략을 정확히 예측하여 위나라 군대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적의 매복 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한 사례가 있다.
226년, 조비의 오나라 원정에 수행했으며, 귀환 후 태복(太僕)이 되었다. 같은 해 조예가 즉위하자 낙정후(樂亭侯)로 진봉되고 다시 위위(衛尉)가 되었으며, 식읍(食邑)으로 1,000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역시 식읍 중 100호를 받아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
230년에는 사도(司徒)의 직무를 대행했고, 232년에 정식으로 사도에 임명되었다. 사도가 된 후에는 가볍고 경박한(輕佻浮薄) 인물들이 조정에 넘쳐난다며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조예에게 상주하여 많은 관료들이 쫓겨나기도 했다.[3]
236년, 동소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정후(定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동주(董冑)가 작위를 계승하여 태수와 구경(九卿)을 역임했다.
'''주요 관직 변화'''
연도 | 관직 | 비고 |
---|---|---|
220년 | 장작대장(將作大匠) | 조비 위왕 즉위 후 |
220년 | 대홍려(大鴻臚) | 조비 황제 즉위 후, 우향후(右郷侯) 봉작 |
221년 | 시중(侍中) | |
222년 | 위위(衛尉) | 강릉 전투 철수 건의 공로 |
224년 | 태상(太常) | 도향후(都郷侯) 봉작 |
224년 | 광록대부(光祿大夫), 급사중(給事中) | |
226년 | 태복(太僕) | |
226년 | 위위(衛尉) | 조예 즉위 후, 낙정후(樂亭侯) 봉작, 식읍 1,000호 |
230년 | 사도(司徒) 대행 | |
232년 | 사도(司徒) | 정식 임명 |
조조가 낙양에서 헌제를 모시던 인사들과 만났을 때, 다른 이들은 모두 굶주림으로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야윈 모습이었다. 그러나 유독 동소만은 얼굴에 기름기가 돌고 혈색이 좋았다. 조조가 신기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동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동소를 정욱, 곽가, 유엽, 장제와 함께 언급하며, 순유처럼 모략(謀略)에 뛰어난 책사로 평가했다. 그러나 순유와는 달리 덕업(德業)은 부족했다고 평했다.[3]
(작성할 내용 없음)
[1]
서적
Sanguozhi vol. 3
3. 일화
“30년간 채식만 하다 보니 장과 피부가 좋아졌고,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올 때 동소가 등장하는데, 채식주의자로 묘사되며 기근 속에서도 안색이 좋은 이유가 채식 덕분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4. 평가
조비는 222년 하후상 등이 강릉을 공격할 때 동소가 깊이 들어가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철수를 진언한 것이 적절했다고 판단하여, 그의 군략(軍略)을 장량과 진평에 비견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3]
하지만 동시대 인물 중 한나라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소칙은 위나라 건국에 기여한 동소를 혐오했다는 기록이 있다(소칙전).[3] 또한 조예에게 경조부박(輕佻浮薄)한 무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상주하여 많은 이들이 관직에서 추방되기도 했다.[3] 이는 진수가 지적한 '덕업 부족'과 관련하여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동소의 비중이 크게 줄어들어, 조조가 위공(魏公)과 구석(九錫)을 받을 때 잠시 등장하는 정도로 묘사된다. 연의에서는 헌제의 낙양 귀환 때 등장하며, 채식주의자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기근 속에서도 안색이 좋은 이유로 설명되기도 한다.[3]
5. 가계
참조
[2]
서적
Sanguozhi vol. 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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