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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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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억불 정책은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어 여러 왕조를 거치며 불교를 억압한 정책을 의미한다. 태종은 사찰을 정리하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으며, 세종은 종단을 통폐합하고 사찰 수를 줄였다. 성종은 승려에 대한 공양을 금지했고, 연산군은 사찰을 폐지하고 승려를 강제로 환속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학문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승려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조선 시대에도 불교 교학 연구와 불서 간행이 이루어졌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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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 정책
억불 정책
배경
경제적 요인불교 사찰의 토지 소유와 면세 혜택으로 인한 국가 세수 감소. 사찰 운영 및 승려 유지를 위한 국가 재정 부담 증가.
정치적 요인왕권 강화 및 중앙집권 체제 확립을 위한 불교 세력 약화 필요. 유교적 통치 이념 확립을 통한 사회 질서 유지.
사상적 요인성리학을 비롯한 새로운 유교 사상의 등장과 불교의 영향력 감소.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사회 개혁 요구 증대.
주요 내용
사찰 토지 몰수사찰 소유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 재정 확충.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여 민생 안정 도모.
승려 수 제한승려 수를 제한하고, 도첩제를 시행하여 승려 자격 관리 강화. 자격 없는 승려를 색출하여 환속시키고, 불교 교단 정화.
사찰 폐쇄 및 불상 파괴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는 사찰을 폐쇄하고, 불상 및 불교 용품 몰수. 폐쇄된 사찰 부지를 학교나 관청으로 활용.
불교 행사 금지불교 관련 행사를 금지하고, 사찰 건축 및 불상 제작 제한. 불교 의례 및 행사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
승과 폐지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를 폐지하여 승려의 사회적 지위 약화. 승려의 관직 진출을 막고, 사회적 영향력 감소.
한국의 억불 정책
고려 말권문세족의 비호 아래 불교 세력이 비대해지면서 사회적 폐단 발생.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불교 개혁 운동 전개.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 과정에서 억불 정책 시행.
조선 시대태조 이성계: 건국 초기부터 억불 정책 추진. 사찰 토지 몰수, 승려 수 제한, 도첩제 시행.
태종사찰 정리 작업 실시. 전국 사찰 수를 대폭 축소하고, 사찰 소유 노비 해방.
세종7종의 종파를 선교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폐합. 승과를 폐지하고, 승려의 사회 활동 제한.
연산군사찰을 유흥 장소로 활용하고, 승려를 천대하는 정책 시행. 불교 탄압 정책 강화.
중종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척불 정책 시행. 불교 행사를 금지하고, 사찰 철폐 주장.
명종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불교 중흥 정책 추진. 보우를 등용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 재개.
선조다시 억불 정책으로 전환. 보우를 처형하고, 불교 세력 약화.
영향
긍정적 영향국가 재정 확충 및 민생 안정. 유교적 사회 질서 확립 및 왕권 강화. 불교 교단 정화 및 자정 노력 촉진.
부정적 영향불교 문화 유산 파괴 및 불교계 위축. 사회 통합 저해 및 종교 갈등 심화. 불교계의 저항 및 반발 초래.

2. 조선 초기 억불 정책의 배경

조선 건국 이념인 성리학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배척했다. 고려 말 사찰의 경제적, 사회적 폐단은 억불 정책의 명분이 되었다.[6]

3. 조선 초기 억불 정책의 전개 과정

태종은 즉위 초부터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하여 억불 정책을 완화하기도 하였으나, 불교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사찰 수를 36개로 줄였다.[14] 문종 또한 승려의 도성 출입과 일반인의 출가를 금지했다.[14]

성종은 불교 의례를 금지했고, 연산군은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등 강력한 억불 정책을 시행했다. 중종은 승과를 폐지하고 불상을 녹여 군수품을 만들었다.[14]

3. 1. 태종의 사원 정리

태종서운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1402년에 경성과 지방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지와 조세를 군자(軍資)로 귀속시키고, 노비는 여러 관청에 분배하였다.[14] 1405년에는 의정부의 건의로 개성과 신경(서울)에 각 종파의 사찰 1개씩, 목(牧)과 부(府)에는 선종 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 군현에는 선종과 교종 중 1개씩만 남기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앴다. 또한, 노비의 수를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14] 그러나 연경사, 화장사, 석왕사, 낙산사, 성등사, 진관사, 견암사, 관음굴, 회암사, 반야사, 만의사, 감로사 등은 노비와 토지를 줄이지 않았다.[14]

1406년에는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정하였다.[14] 조계종과 총지종을 합쳐 70사,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을 합쳐 43사, 화엄종과 자은종, 중도종, 신인종을 합쳐 30사, 남산종 10사, 시흥종 10사를 정하고 이외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였다.[14]

그리고 신 '''·''' 구 양경(교종)의 각 1사(寺)에 200결(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 선 '''·''' 교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14]

이러한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4]

3. 2. 세종의 종단 통폐합

세종은 불교 종단을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태종 때 전국 242개였던 사찰을 36개로 줄였다.[14] 또한 성 밖 승려의 성 안 출입을 금지했다.[14]

3. 3. 성종 ~ 연산군의 불교 탄압

성종(재위 1469-1494)은 백성이 상을 당했을 때 불교 승려에게 공양하는 풍습을 엄격히 금지하고, 국왕의 생일에 신하가 사찰에 가서 재를 올리는 것을 금지하였다.[14] 이러한 도승법의 폐지와 승려의 환속으로 승려의 수가 감소하였다.[14]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선종의 본사인 흥천사와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 대원각사를 폐쇄하고 공해(公廨)로 삼았다.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들을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성 안의 비구니 사찰을 헐어 비구니들은 궁방의 종으로 삼았다.[14] 또 승려들을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강제로 혼인하게 하였으며, 사찰의 토지를 모두 관청에서 몰수하였다. 이때 승과(僧科)도 중지되고 양종 본사도 없애버렸다.[14]

중종(재위 1506-1544)은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부수어 군사 물자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를 헐어 그 목재를 연산군 때 헐린 민가의 재건축 자재로 나누어 주었다.[14] 이로 인해 불교는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14]

4. 억불 정책의 폐단과 반론

조선에서 유교화가 진행되면서 이부승구족계를 온전하게 시행하는 것은 정치, 사상, 재정적으로 어려웠다.[6] 반불교 정서가 널리 퍼지고 사원 경제가 피폐해진 시대에 복잡한 수계 과정을 모두 시행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6]

조선 후기에는 승려의 질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6]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은 19세기 말 조선에서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에게 “승려들은 매우 무식하고 미신적이어서, 불교의 역사나 교의, 불교 의식에 대해 무지하며, 대부분 ‘몇 마디 음절’만 반복한다”라고 설명했다.[7]

고려 왕조에서 사찰승려에게 주어졌던 혜택은 철폐되었고, 사찰도 정리되어 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었고,[8]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믿었다.[9][10][11]경국대전》에는 유생이나 부녀자에 가면 곤장 100대라는 조항이 있었다.[12]

억불 정책은 숭유정책과 더불어 '''숭유억불 정책'''으로 진행되어 조선 사회의 학문적 다원성을 저해하고, 독단과 독선의 그릇된 예를 남겼다. 이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둔감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동국대 김용태 HK교수는 불서 간행과 교학 연구가 활발했으므로, 조선 시대 불교가 퇴보했다는 통념은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한국고전번역원 손성필 연구원은 조선 시대에 승려가 천시받았다는 사실은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아, 일본 식민통치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허구적 관심으로 보았다.[15]

4. 1. 폐단

숭유억불 정책은 학문의 다양성을 해치고,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려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선 후기 승려의 질적 저하와 불교의 기복신앙화는 억불 정책의 부정적인 결과로 지적된다.[6]

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불교 의례인 이부승구족계를 온전하게 시행하기가 정치적, 사상적, 재정적으로 어려워졌다.[6] 반불교적 정서가 널리 퍼지고, 사원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복잡한 수계 과정을 모두 시행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6]

조선 후기에는 승려의 질이 전반적으로 낮아졌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6] 19세기 말, 조선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는 승려들이 매우 무식하고 미신적이어서 불교의 역사나 교리, 의식의 의미를 모른 채 대부분 "몇 마디 음절들"만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기록했다.[7]

고려 시대에 사찰승려에게 주어졌던 혜택은 모두 사라졌고, 사찰도 정리되어 남은 사찰은 모두 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계속 믿었고,[8]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계속 믿었다.[9][10][11]경국대전》에는 유생이나 부녀자들이 에 가면 곤장 100대를 때린다는 조항이 있었다.[12]

4. 2. 반론

동국대 불교학술원 김용태 HK교수는 조선 시대에 불서 간행과 교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므로, 조선 시대에 불교가 퇴보되었다는 통념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5] 한국고전번역원 손성필 연구원은 조선 시대에 승려가 천시받던 하층 계급이었다는 사실은 조선 시대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일본 식민통치와 일본 불교의 관심으로 형성된 허구적 관념으로 보았다.[15]

참조

[1] 저널 對明使行과 對日使行에 보이는 異端 論爭의 樣相 https://www.gnu.ac.k[...]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4
[2] 웹인용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선바위 (禪岩) https://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8-05
[3] 웹인용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과 훼불 https://dongmingoh.w[...] 2014-12-10
[4] 웹사이트 https://wordsimilari[...]
[5] 웹인용 목 잘린 불상들 무슨 사연있을까? https://boramirang.t[...] 2011-06-05
[6] 저널 감로도에 나타난 조선의 비구니승가 http://s-space.snu.a[...]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0-03
[7] 뉴스 2. 19세기 말 금강산의 사찰들 https://www.beopbo.c[...] 법보신문 2017-01-10
[8] 뉴스 조선 4대문 안에 유일한 사찰 숭유억불 속에도 선종맥 이어 https://www.beopbo.c[...] 법보신문 2017-05-22
[9] 웹인용 조선시대의 집의 역사 https://www.reportwo[...] 2020-03-24
[10] 웹인용 억불 정책 https://campaigns.fa[...] 2020-03-24
[11] 웹인용 5월 26일 박영제 교수님 강의 http://blog.daum.net[...] 2009-05-27
[12] 웹인용 불교 감싼 두 대비의 ‘시위’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8-05-04
[13] 뉴스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http://www.budreview[...] 불교평론 2008-06-07
[14] 문서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배불정책
[15] 뉴스 “조선시대 승려, 천민 신분 아니었다” http://www.beopbo.co[...] 법보신문 201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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