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알토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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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밀 알토넨은 핀란드의 기업가이자 자선가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구두 수선공으로 시작하여, 신발 산업을 북유럽 최대 규모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알토넨은 신발 제조 외에도 증기 기관차, 플라스틱 제품, 섬유 회사에 투자하며 사업을 확장했으며, 농업에도 관심을 가져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다. 그는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여, 에밀 알토넨 재단을 설립하여 과학 연구를 지원하고, 탐페레 시립 도서관 설립 기금 기부, 교육 및 종교 시설 지원 등 다양한 자선 활동을 펼쳤다. 알토넨은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칭호를 받았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공원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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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알토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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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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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밀 비델 |
직업 | 기업가, 자선가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69년 8월 29일 |
출생지 | 색스매키, 핀란드 대공국 |
사망일 | 1949년 12월 16일 |
사망지 | 탐페레, 핀란드 |
배우자 | 올가 말리넨 (1896년 결혼) |
2. 초기 생애
에밀 알토넨은 7남매 중 셋째로, 발케아코스키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1866-68년 핀란드 대기근 이후 농장을 잃었고, 에밀의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아버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1] 결과적으로 어린 에밀 역시 가계에 기여해야 했고, 13세에 구두 수선공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 19세가 되자 그는 장인 자격을 취득했고, 하툴라 마을에 자신의 작업장을 차렸다.[1]
에밀 알토넨은 1896년 올가 말리넨과 결혼 후 아내의 제안으로 신발 사업 외 다른 가죽 제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02년 미국식 생산 라인을 도입하여 첫 산업 공장인 'Hattulan Jalintehdas'를 설립했다.[1] 1905년 화재로 공장이 소실되고 아내가 사망하자 사업을 포기하려 했으나, 탐페레에 'Tampereen Kenkätehdas'를 설립하며 재기했다. 1년 만에 1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2만 켤레의 신발을 생산하는 규모로 성장했다.[1]
1890년에 그는 원래 스웨덴식 성인 비델을 핀란드식 알토넨으로 바꾸었다.[1] 이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흔히 일어났던 이름의 핀란드화 과정의 일부였다.[3][4]
3. 사업 경력
1917년, 'Aaltosen Kenkätehdas Osakeyhtiö'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유한 회사로 재편했다. 당시 핀란드 신발 제조 직원의 3분의 1을 고용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경쟁사 인수 및 가죽 생산, 신발 염색 등 공급망을 구축하며 사업을 확장했다.[1]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고, 1930년대 말에는 1,3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며 북유럽 최대 신발 제조 사업체로 성장했다.[1][10] 알토넨은 1947년 은퇴했다.[1]
알토넨은 신발 산업 외에도 1915년 증기 기관차 제조 회사 로코모에 투자하여 1920년대 중반까지 거의 전체 지분을 소유했다.[1] 1921년에는 핀란드 최초의 플라스틱(갈라리스) 제품 제조사인 사르비스(Sarvis)에 투자하여 회사를 성공적으로 성장시켰다.[1][5] 또한 노키아에 설립된 섬유 회사 '노키안 쿠토모 야 뱌랴이스'(현 난소 그룹)의 주주이기도 했다.[6]
알토넨은 농업을 천직으로 여겨, 1917년 매칠샐래의 2000ha 규모 일리카르타노(Ylikartano) 저택을 매입하여 대규모 낙농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사업 간 시너지를 추구하여, 일리카르타노에서 생산된 우유를 사르비스의 갈라리스 생산 원료로 사용하기도 했다.[1]
3. 1. 신발 산업
1896년 올가(Malinen|말리넨fi)와 결혼한 후, 아내의 제안으로 신발에서 다른 가죽 제품으로 사업 범위를 확장했다.[1]
1902년, 알토넨은 미국에서 사용된 신발 생산 라인을 구매하여 그의 첫 번째 산업 사업인 ''Hattulan Jalintehdas'' 공장을 설립했다.[1]
1905년, 공장이 불에 타고 올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때, 알토넨은 사업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다. 결국, 그는 두 어린 딸과 함께 산업 도시인 탐페레로 이사하여 새로운 제조 사업인 ''Tampereen Kenkätehdas''를 설립했다. 사업 시작 1년 만에, 공장은 1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20,000켤레의 신발을 생산했다.[1]
1917년, 사업은 유한 회사로 재편되었고, ''Aaltosen Kenkätehdas Osakeyhtiö''로 개명되었다. 당시 이 회사는 전국 신발 제조 직원의 3분의 1을 고용했다.[1] 이 사업은 계속 성장하여 경쟁업체를 인수하고 가죽 생산 및 신발 염색 제조 분야에서 공급망 운영을 구축했다. 회사는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1930년대 말까지 4,500개의 모델을 갖춘 제품군을 갖추고 1,3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했다.[1] 이는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큰 신발 제조 사업이었다.[10]
알토넨은 1947년 78세의 나이로 사업의 일상적인 운영에서 은퇴했다.[1]
3. 2. 기타 제조 산업
1915년, 알토넨은 증기 기관차 제조 회사인 로코모에 투자했으며, 1920년대 중반까지 거의 전체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핀란드의 산업화와 군수 조달에 힘입어 사업은 성장하여 새로운 제품 라인으로 확장되었고, 결국 1,300명의 직원을 고용했다.[1]
1921년, 알토넨은 핀란드 최초의 플라스틱(갈라리스) 제품 제조업체인 사르비스(Sarvis)에 투자했으며, 하탄패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회사는 수익성이 좋지 않았고, 몇 년 후 다른 주주들이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알토넨은 거의 모든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사업을 회생시켜 성공적이고 수익성 있는 제조업체로 성장시켰으며, 새로운 재료와 제품 라인으로 다각화했다.[1][5]
알토넨은 또한 1921년 노키아에 설립된 섬유 회사인 ''노키안 쿠토모 야 뱌랴이스''(Nokian Kutomo ja Värjäys)의 주주였다. 오늘날 이 회사는 ''난소 그룹''(Nanso Group)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토넨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6]
3. 3. 농업
알토넨은 제조업보다 농업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다. 여가 시간에는 농장을 소유하고 성장시켜 번영시키는 계획을 세웠다.[1] 1917년 매칠샐래에 있는 2000ha 규모의 일리카르타노(Ylikartano) 저택을 매입하여, 대규모 낙농 사업으로 발전시켰다.[1] 그는 자신의 사업 간 시너지를 추구했는데, 일례로 일리카르타노에서 생산된 우유를 사르비스의 갈라리스 생산 원료로 사용했다.[1]
4. 자선 활동
알토넨은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고, 자신의 재산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대출을 제공하는 등 초기부터 박애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1]
그는 경제적 성공이 높은 수준의 문화와 복지를 갖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의 일부를 핀란드 문화 사업 발전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1]
1937년 알토넨은 과학 연구 지원을 위한 에밀 알토넨 재단(''Emil Aaltosen Säätiö'')을 설립했다.[1] 이 재단은 매년 600만유로 이상을 지원하며, 현재까지 총 지원금은 1.2억유로를 넘어섰고,[7] 핀란드 과학 자금 지원 분야의 주요 주체로 평가받는다.[2]
오늘날 재단은 탐페레의 퓌니킨린나(Pyynikinlinna, Pyynikki|퓌니키영어 성) 저택에 있는 에밀 알토넨 박물관을 소유 및 운영하고 있다. 이 저택은 알토넨이 1932년에 가족의 집으로 구입한 곳이다.[1] 알토넨은 191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초기 핀란드 회화에 관심을 갖고 250여 점의 작품을 모았다. 퓌니킨린나 구매 또한 그의 컬렉션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중 일부는 현재 그곳에서 공개 전시되고 있다.[1]
그는 탐페레 시립 도서관의 설립 자본을 기부했고, 투르쿠 대학교에 상당한 기부를 했다. 또한 여러 교회의 건설 및 개조 자금도 지원했다.[1]
5. 박물관 운영
오늘날 에밀 알토넨 재단은 알토넨이 1932년 가족의 집으로 구입한 탐페레의 퓌니킨린나(Pyynikki castle|퓌니키 성영어) 저택에 있는 에밀 알토넨 박물관을 소유 및 운영하고 있다.[1] 알토넨은 191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초기 핀란드 회화에 관심을 갖고 약 250점의 작품을 소장했다.[1] 퓌니킨린나 구매는 그의 미술품 컬렉션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현재 박물관에 공개 전시되고 있다.[1]
6. 서훈
1921년, 알토넨은 핀란드의 초대 대통령 K.J. 스톨베리로부터 명예 칭호인 ''카우파네우보스''(Kauppaneuvos)를 받았다.[1]
1935년, 퀴외스티 칼리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칭호인 ''부오리네우보스''를 받았다.[1]
7. 기념
탐페레 중심부에 있는 공원은 그의 이름을 따서 '에밀 알토넨 푸이스토'(Emil Aaltonen Park)로 명명되었다.[9] 이 공원에는 라이모 우트리아이넨이 디자인하고 로코모 공장에서 제작한 4.5m 높이의 분수 조각상인 에밀 알토넨 기념비(''Emil Aaltosen muistomerkki'')가 있다.[10] 이 기념비는 알토넨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 8월에 공개되었다.[10] 공원 한쪽에는 원래의 ''Aaltosen Kenkätehdas'' 건물이 위치해 있다.[9]
8. 개인 생활
알토넨은 예술 및 농업 분야 외에도 열렬한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다.[1]
그의 상당한 재산은 현재 공익을 위한 트러스트와 재단에 보관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그의 가족 구성원에 의해 관리된다.[11]
9. 한국의 관점: 자수성가한 기업가 정신과 사회 환원
에밀 알토넨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하여 핀란드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뛰어난 기업가 정신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특히, 알토넨이 과학, 교육, 문화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점은 한국 사회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1]
그는 경제적 성공이 높은 수준의 문화와 복지를 갖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의 일부를 핀란드 문화 발전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1] 1937년, 알토넨은 과학 연구 지원을 위한 에밀 알토넨 재단(''Emil Aaltosen Säätiö'')을 설립했다.[1] 이 재단은 현재까지 핀란드 과학 자금 지원 분야의 주요 주체로 여겨지며,[2] 매년 600만유로 이상을 지원하고, 총 지원금은 1.2억유로를 넘어섰다.[7]
알토넨은 탐페레의 ''Pyynikinlinna''( 'Pyynikki 성') 저택을 구입하여 에밀 알토넨 박물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하였다.[1] 그는 191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했으며, 특히 초기 핀란드 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약 250점의 작품을 모았다. [1]
그는 자신이 많은 도움을 받았던 탐페레 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립 도서관 설립 자금을 기부했다. 또한 투르쿠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회 건립 및 개보수에도 자금을 지원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Emil Aaltosen elämä
https://emilaaltonen[...]
Emil Aaltonen Foundation
2020-12-29
[2]
웹사이트
Aaltonen, Emil (1869 - 1949)
https://kansallisbio[...]
Finnish Literature Society
2020-12-29
[3]
웹사이트
Snellmanin 100-vuotispäivä ja sukunimien suomalaistaminen
https://www.kotus.fi[...]
Institute for the Languages of Finland
2020-12-31
[4]
뉴스
Fennomaanit suomalaistivat urakalla sukunimiään - mistä he keksivät uudet nimet?
https://www.helsinki[...]
University of Helsinki
2020-12-31
[5]
뉴스
Tiesitkö, että nostalgisten Sarvis-tuotteiden alkuperä löytyy lehmän maidosta?
https://www.maaseudu[...]
Maaseudun Tulevaisuus
2020-12-29
[6]
뉴스
Muistoja talteen pian satavuotiaasta Nansosta – kerro oma tarinasi
https://www.nokianuu[...]
Nokian Uutiset
2020-12-29
[7]
웹사이트
Säätiön toiminta
https://emilaaltonen[...]
Emil Aaltosen Säätiö
2020-12-29
[8]
뉴스
Kultakauden helmet yhdessä viimeistä kertaa
https://yle.fi/uutis[...]
Yle
2020-12-29
[9]
웹사이트
Emil Aaltosen puisto
https://www.tampere.[...]
City of Tampere
2020-12-29
[10]
웹사이트
Utriainen, Raimo
https://www.tampere.[...]
City of Tampere
2020-12-29
[11]
뉴스
Tamperelainen teollisuushistoria vaurastuttaa yhä suomalaismiljonäärejä
https://www.aamuleht[...]
Aamulehti
2020-12-29
[12]
문서
Aaltonen, Emil (1869 - 1949)
https://kansallisbio[...]
Suomalaisen Kirjallisuuden Seura
201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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